블루스 인코퍼레이티드. 영국의 젊은이들은 로큰롤과 함께 백인의 블루스를 개발했다(그런데 사진은 별로 젊어 보이지가...)


비틀즈가 영국산 로큰롤이었다면, 영국산 블루스를 연주하는 다른 이들이 존재했다.

여기서 잠깐, 비틀즈가 영국을 넘어 세계를 정복하는 모습을 살펴보기 전에, 영국의 다른 밴드들 - 특히 영국판 블루스의 모습들을 볼 필요가 있는데, 적어도, 비틀즈이건 이들이건 미국에서는 로큰롤의 황금기 이전에는 그런 폭발적인 음악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할 것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소위 브리티쉬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최전선에 있었던 밴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하의 뮤지션들의 본격적인 등장보다는, 단순 시대상으로는 비틀즈의 미국 진출이 먼저일 수 있기 때문이다)비틀즈가 최전선에 있었지만, 영국의 로큰롤에는 그와는 구별되는 블루스의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비틀즈가 블루스와 무관한 밴드는 아니지만.

앞에서 60년대 초반의 미국에서의 흑인 음악의 움직임을 얘기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인종 차별의 존재는 분명했다. 물론 앵글로색슨이 지배한다는 점에서는 사실 영국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지만, 영국의 경우는 미국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쨌든, 로큰롤의 몰락 이후 미국에서 ‘폭발력 있던’ 블루스도 천대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뒤에 나올 얘기지만, 지미 헨드릭스의 몬테레이 페스티벌 이전의 주 활동 무대는 영국이었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블루스를 하기에는 영국이 더 적합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흑인 뮤지션들이 보여주던, 컨트리 앤 웨스턴과 뒤섞인 ‘춤추기 좋은’ 블루스가 아닌, 소위 ‘진짜배기 블루스’ 를 더 즐기던 이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즉, 백인들이 연주하는 ‘화이트 보이 블루스’ 가 빛을 본 것은, 블루스의 본고장인 미국이 아닌 영국이었던 것이다.

굳이 거슬러 올라가자면 적어도 크리스 바버(Chris Barber)가 50년대에 연주하던 블루스부터 얘기를 시작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굵직한 이름에는 먼저 알렉시스 코너(Alexis Korner)가 먼저 나와야 할 것이다. 1949년에 21살의 나이로 음악을 시작했다는 그는 50년대부터 이미 시카고 지역의 음악인들과 교류를 가지다가 1955년 블루스 인코퍼레이티드(Blues Incorporated)를 결성하면서 이후의 영국 블루스에 명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실 대부분에게는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와 믹 재거(Mick Jagger)가 활동했던 밴드로 더 알려져 있을 것이다.

알렉시스 코너의 영향력 하에서는, 아마 잭 브루스(Jack Bruce)와 진저 베이커(Ginger Baker)를 배출했던 그레험 본드 오거니제이션(Graham Bond Organisation)와 존 메이올(John Mayall)이 가장 주요한 인물일 것이다. 특히나 존 메이올은, 영국 화이트 블루스의 전형을 얘기할 경우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미국은 얘기가 좀 틀린데, 폴 버터필드 같은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존 메이올의 블루스브레이커스(Bluesbreakers)는 그들 자신의 음악의 영향력 외에도, 뒤에 영국 록 음악을 주름잡을 많은 뮤지션들을 배출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이를 테면,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플릿우드 맥(Fleetwood Mac)의 피터 그린(Peter Green), 롤링 스톤즈의 믹 테일러(Mick Taylor) 등이 대표적이다.

야드버즈(Yardbirds)는 사실 밴드의 유명세에 비해서 오늘날 알려진 곡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밴드는 초기에 밴드를 주도했던 에릭 클랩튼은 물론, 그 뒤를 이은 제프 벡(Jeff Beck)과, 레드 제플린(Led Zeppeline)의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모두 거쳐간 밴드로서 이름이 높다. 말하자면 계속 생기는 빈 자리를 계속 괴물들로만 채웠던 셈이다. - 역시 되는 놈들은 계속 된다는 교훈이... - 정통적인 블루스 사운드로 시작했으나 뒤에는 약간은 실험적인 사운드로 경도된 바도 있었지만, 야드버즈가 기타리스트가 밴드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 재정립한 역할에 대해서는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에릭 클랩튼은 이후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와 함께 슈퍼 밴드였던 크림(Cream)을 결성하게 된다. 특히나 클랩튼은, 당시 런던 빌딩의 벽에 ‘클랩튼은 신이다’ 는 낙서가 나올 정도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크림은 가장 주목받는 밴드이기도 했다. 크림은 아마도 비틀즈 이후에 60년대 그룹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밴드들 중 하나일 것이다. 크림은 3인조라는 구성에 있어서도 다른 밴드들과 달랐고, 당대 최고의 실력파들이었던 멤버들의 대단한 연주력에 기반한 파워풀한 연주 및, 비교적 긴 솔로잉 등을 중시하여 사이키델릭 사운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크림은 1966년부터 데뷔에서, 68년 고별 공연까지 3년도 채 활동하지 않았지만, 이들의 강력한 사운드는 블루스와 하드 록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Sunshine of Your Love’ 같은 곡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헤비했던 것이다.

Cream - Sunshine of Your Love

에릭 버든(Eric Burdon)과 애니멀스(Animals)는 짧았던 활동 기간 때문에 많이 주목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어떤 흑인 보컬리스트에 못지 않게 열정적인 - 레이 찰스의 영향이 다분한 - 목소리를 가졌던 에릭 버든은 당시 자신만의 사운드를 가진 뮤지션 중 하나였다. 버든 외에도, 앨런 프라이스(Alan Price)의 오르간 연주가 애니멀즈를 특징짓는 부분이었으며, 67년 해산하기까지 ‘House of the Rising Sun’ - 이 곡 때문에 밥 딜런(Bod Dylan)이 전기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기도 - , ‘Don't Let Me Be Understood’ 등의 곡들을 남겼다. 에릭 버든은 이후에도 사이키델릭 밴드였던 워(War)나, 애니멀즈의 간헐적인 재결성 등을 통해 활동을 이어 나가게 된다. 베이시스트였던 채스 챈들러(Chas Chandler)는 뒤에 매니저로서 지미 헨드릭스를 발굴하여 영국에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Animals - House of the Rising Sun. 많은 뮤지션들이 연주했던 트래디셔널 송이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밴 모리슨(Van Morrison)과 그의 밴드 뎀(Them)은 전형적인 록 뮤지션이라기보다는 소울(‘블루아이 소울’ 의 전형이라 불리는 사람이니) 뮤지션이지만, 소울만이 아니라 재즈, 블루스, 로큰롤, 리듬 앤 블루스, 켈틱 포크 등 많은 영역을 탐구하였고, 동시대의 다른 어느 밴드보다도 탐미적인 편이었다. 그리 자극적이지도, 멜로디가 명확하지도 않았던 그의 음악은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나 모리슨의 “Astral Weeks” 는 최고의 명작으로 회자되며(물론 상업적으로는 대실패였다. 현재까지도 25만장이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뎀도 ‘Gloria’ 등의 히트곡을 남기며 흔적을 남겼다.

Van Morrison - Madame George. "Astral Weeks" 가 놀라운 점의 하나는, 이틀만에 녹음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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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번 클럽(Cavern Club). 비틀즈가 주로 공연하던 클럽이었던 곳으로 로큰롤의 '성지' 중 하나일 것이다


로니 도네건의 추종자였던 존 레넌(John Lennon)이 처음 밴드를 결성했던 것은 1957년이었다.

도네건이 스키플 사운드를 알린 이후(물론 스키플이 처음 나타났던 것은 미 대공황기라고 해야겠지만 - 즉, 영국에서의 스키플 열풍은 그러므로 ‘리바이벌’ 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영국에는 엄청난 수의 스키플 밴드가 존재했다. 56년과 57년 사이, 영국에는 거의 5천 개 가량의 스키플 밴드가 존재했다고 하니 매우 열광적이었던 셈이다. 
하긴 스키플은 거의 ‘Do It Yourself(DIY)’ 의 전형에 가까웠다. 기타 코드 세 개 정도와 리듬 섹션만 어떻게 한다면(즉, 꼭 드럼을 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빨래판을 긁더라도 리듬만 만든다면) 되는 것이었으니 아무나 밴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밴드 이름은 처음에는 블랙 잭스(Black Jacks)였으나, 곧 쿼리멘(Qurreymen)으로 바뀌었고, 동네 밴드가 보통 그렇듯 멤버의 변동이 심하다가 - 꼭 금방 싫증내는 친구들이 있는 법이다 -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를 영입한다. 
무려 ‘기타 조율’ 을 할 줄 알았던 폴의 기타에 놀란 레넌이 - 즉, 이 당시 레넌은 기타 조율도 할 줄 모를 정도의 ‘허접한’ 수준이었던 셈이다. 전설적인 밴드도 처음엔 다를 게 없다 - 쿼리멘의 가입을 제안했다고 한다. 58년에는 멤버들이 상급 학교에 진학하거나 직장을 구하게 되면서 생긴 공석에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들어오게 된다.

비틀즈라는 이름은 60년 8월부터 사용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도 쓰던 이름이 있었다. 쿼리멘은 베이스에 스튜어트 서트클리프(Stuart Sutcliffe)와 드러머에 피트 베스트(Pete Best)가 들어오면서 조니 앤 문독스(Johnny & Moondogs), 다시 조니 앤 실버 비틀즈(Johnny & Silver Beatles) 등으로 바뀌었고, 다시 비틀즈(Beatles)가 되었다. 이전의 긴 이름들은 확실히 버디 홀리를 기념하는 작명이었고, 비트(beat)의 말장난이었던 비틀즈 또한 일종의 버디 홀리에 대한 찬사였다.

(우측 사진 : 피트 - 조지 - 존 - 폴 - 스튜어트의 순서, 함부르크에서)

주로 리버풀의 클럽들(특히, 음주가 금지되어 사고가 적었던 캐번 클럽)과 함부르크에서 공연했던 비틀즈도 무명 시절은 배고팠다. 60년 겨울의 함부르크 투어는 아직 18세가 되지 않았던 조지가 클럽에서 일하는 것이 독일에서는 불법이었던 덕에, 멤버 세 명이 강제 추방당하면서 끝나버린다. 하지만 이 시절의 활동은 비틀즈에게 점차 명성을 가져다 주기 시작했다. 
오늘날 기억되는 비틀즈의 모습에 비해서는 좀 더 거칠고 다른 모습(밴드는 기타리스트가 세 명이었고 - 클리프 리처드 앤 더 섀도스를 연상시키는 - , 가죽옷을 입고 다니는 ‘로커’ 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위 사진 참고)이었지만, 스튜어트의 애인이었던 아스트리드 키르허의 제안으로 길고 빗어내린 ‘비틀커트’ 의 모습을 취하게 된다.

리버풀 다운타운의 음반점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bstein)이 61년 말에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고, 다음 해 스튜어트의 사망 및 드러머 피트가 밴드에서 퇴출되면서 새로 리처드 스타키, 즉 링고 스타(Ringo Starr)가 드러머가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사실 당시 밴드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멤버가 피트였다는 것인데, 꽤 잘 알려진 조지 해리슨과의 불화 및, 다른 멤버와는 달리 내성적이었던 피트의 성격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너무나 유명한 4인조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Beatles - Love Me Do



EMI의 조지 마틴(George Martin)은 비틀즈를 대번에 마음에 들어했고, 곧 첫 싱글 ‘Love Me Do’ 가 발매되었다.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사실, 이 곡 자체가 그렇게까지 훌륭하다거나, 독창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오래 된 칼 퍼킨스(Carl Perkins)의 컨트리 히트곡 ‘Sure to Fall’ 이 이 곡의 자양분이 되었고, 패턴은 단조로운 편이며, 이들과 유사한 수많은 밴드들이 리버풀의 클럽들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비틀즈도 'Sure to Fall' 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Beatles - Sure to Fall(In Love with You)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비틀즈가 음악 제작에서 유지되고 있던 전문가적 전형을 분명히 파괴했다는 것이었다. 


조율도 할 줄 모르던 젊은이들이 투어를 돌면서 실력이 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전문 연주자들의 수준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책상에서 작곡가들에 의해 빈틈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처음의 원형은 있었겠지만, 이들의 곡은 클럽들에서 공연하면서 청중들의 반응을 통해 조금씩 변해 나가 왔던 것이었다. 
연습량의 부족과 신선함을 오히려 강조해서 강렬함을 이끌어낸 연주 방식도 기존의 개념과는 매우 틀린 것이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기민함은 이와 같은 음악을 처음으로 시장의 주도적 회사와 계약하도록 한 것이다. 
조지 마틴은 비틀즈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이전에 브라이언이 찾아갔던 데카(Decca) 레코드는 퇴짜를 놓았음 - 뭐 역사에 남을 ‘삽질’ 이었던 셈이다 - 을 생각해 보자.

또한 그들의 음악은, 밴드는 스키플에서 시작했지만 분명히 미국식 로큰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보통의 스키플 밴드와는 달리 다양하면서도 텐션이 강하게 걸린 코드들을 사용했고, 거친 로큰롤의 면모 외에도 티니밥의 면모도 동시에 가짐으로써 (노홍철식 표현으로는)‘소녀떼’를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물론 밴드는 ‘미국식 로큰롤’ 은 물론 가스펠 등의 흑인 음악에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가스펠/두왑 그룹들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밴드의 풍요로운 코러스는 당대의 많은 밴드들과는 분명히 차별되는 것이었다.

‘Love Me Do’ 에 이어 63년 1월에 나온 ‘Please Please Me’ 는 밴드를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2월 22일에는 드디어 곡은 차트 1위에 올랐고, 이후의 싱글들도 마찬가지였다. 새 싱글이 나올 때가 됐지만 이전 싱글들의 판매가 전혀 떨어지지 않아 발매를 미룰 정도였다. 
비틀즈만이 아니라 리버풀의 다른 밴드들도 차트의 톱 텐을 휩쓸어 버리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잘 팔리는 가게이긴 했지만 어쨌든 ‘음반점 매니저’(그러니까 그냥 '아저씨') 정도였던 엡스타인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계 인사의 하나가 되었다. 지배적인 보수주의적 여론은 당연히 이런 모습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비틀즈의 폭발력을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었다. 




Beatles - Please Pleas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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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브릴 빌딩. 60년대 중반까지의 틴 팬 앨리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많은 스타일이 나타난 이 시대에 좀 더 혁신적인 음악이 존재했다.

모타운, 스택스 등과 비교하여, 흑인 음악의 전통과는 좀 더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물론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로큰롤의 전통을 버리지는 않고, 동시대 브릴 빌딩의 틴 팬 앨리 팝을 일신시켜 대중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인물은 필 스펙터(Phil Spector)였다. 틴 팬 앨리(Tin Pan Alley)는 본래 뉴욕 맨하탄 28번가와 브로드웨이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대중 음악계의 의미는 물론 백인 중산층의 음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로큰롤의 등장 이후에는 전통적인 재즈 팝과 로큰롤이 접목된 형태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즉, 유럽의 그것과는 다른 미국만의 ‘스탠더드 팝’ 이 틴 팬 앨리였던 셈이다.

그리 뛰어나지 않은 외모에 심지어 유태인이었던 스펙터는 뮤지션으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빛을 본 부분은 이후 그의 프로듀서로서의 활동이었고, 1961년 필리스(Philles) 레코드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린 사운드 메이킹의 실험을 시작한다. 멜로디 중심의 당대의 음악의 일반적 모습과는 달리 그는 리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프로듀서로서 그는 곡을 ‘완만하게’ 다듬으면서도 로큰롤의 강렬함을 유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캐롤 킹(Carole King)과 제리 고핀, 엘리 그리니치와 제프 베리 등의 당대 최고의 송라이터들을 끌어들인 뒤,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 라는 새로운 레코딩 기술을 통해 동시대의 어떤 음악보다도 강렬하고 혁신적인 음악을 만들어냈다.

월 오브 사운드는 원래 제트기가 음속을 처음 돌파했을 때 현대 문명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었다. 많은 연주자와 가수들을 같은 공간에 몰아 넣고, 장시간의 녹음 및 멀티트래킹(multitracking)과 에코 등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두터운 벽과 같은 사운드는, 단순한 구조를 가졌던 스탠더드 팝에 격정을 주입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비평가 로버트 파머(Robert Palmer)가 이를 ‘바그너풍의 로큰롤’ 이라 칭한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또한 그가 - 뮤지션이기도 했었지만 - ‘프로듀서’ 라는 것이 중요하다.

스펙터는 곡의 녹음만이 아니라 창작의 영역에 개입하기 시작한 프로듀서였다. 스튜디오에서 구현되는 완벽한 형태의 사운드는 무대에서 승부하는 다른 가수들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배출했던 그룹들이 몰개성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크리스털스(Crystals)나, 스펙터의 아내가 되기도 하는 베로니카 베넷(Veronica Benette)가 있었던 로네츠(Ronettes)는 당시의 걸 그룹들이 ‘수줍게 노래하는’ 모양새였다면, 허스키한 목소리로 활달하게 노래하는 이들은 남자들만큼 도발적이지는 못했지만(그런 거 가만 놔둘 시대가 아님을 생각해 보자) 충분히 개성적이었다. 그렇지만 그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음악적 ‘언어’ 를 만든 것은 분명 필 스펙터였으며, 비틀즈가 등장하여 좀 더 원초적인 에너지를 중요시하는 상황이 도래하기까지(66년에 이르러서는 필 스펙터 본인도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음악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Ronettes - Be My Baby. 아마도 영화 '더티 댄싱' 의 사운드트랙으로 유명할 것이다. 특히 너무나 유명한 드럼 인트로에 주목.
 
 
스펙터는 이후 이전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지만, 조지 해리슨이나 존 레넌, 라몬스(Ramones) 등의 레코딩에 참여해 오다가, 작년에 여배우 라나 클락슨의 살인 혐의로 2급 살인죄를 인정받아 복역 중이다.

필 스펙터가 내놓은 그룹들 외에도, 인기를 끌었던 그룹에는 뉴욕의 조지 ‘섀도’ 모턴이 레드 버드(Red Bird) 레코드를 통해서 내놓은 샹그리라스(Shangri-Las)가 있었다. 사실 당대에 가장 빠르게 성공했던 걸 그룹이라면 단연 샹그리라스일 것이다. 두 쌍의 백인 자매로 구성된 이 그룹은 ‘Leader of the Pack’ 을 통해 차트의 정상을 정복함은 물론이고, 사생활에 있어서도 로큰롤의 반항적인 ‘남성들’ 에 못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뮤지션들의 분투에도, 로큰롤과 리듬 앤 블루스가 음악의 중심 무대에서 밀려난 이후, 미국의 음악계의 활력이 잦아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50년대 말부터 등장해 온 십대들을 위한 백인 우상들이나, 플래터스 등의 보컬 그룹 등은 음악의 제작은 이제 음반 제작자들의 업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예였고, 젊은이들이 50년대에 그랬던 것과 같이 ‘자신들의 음악’ 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을 발견하기에는 더 시간이 필요했다.

로큰롤은 미국이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이후 그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의 대중 음악을 50년대 당시 지배하고 있던 것은 사실상 BBC였고, BBC는 보수주의가 지배적이었다. 문화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던 BBC의 음악/오락 방송은 무비판적인 청중의 모습을 전제하고 있었고, 대중음악의 미학에 대해서 50년대 이전의 스윙 기악곡에 가까운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50년대 중반까지 영국의 팝 음악이 거의 스윙 스타일의 댄스곡들로 점철되어 있었음은 의미심장하다.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빅터 실베스터(Victor Sylvester) 오케스트라 밴드일 것이다. 물론 주요 음반사들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BBC의 지침을 수용해야 한다. ‘Rock Around the Clock’ 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영국의 언론은 이런 자신들의 대중문화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보수화되었으나(주로는 ‘상업주의적인 미국 문화에 우리의 아이들을 더럽힐 수 없다!’ 식의 형태를 띠었다) 로큰롤은 곧 영국의 노동계급 십대들에게 자신들의 이미지를 전달해 주었고, 미국과는 달리 2차대전 이후 식민지들의 통치권을 상실하면서 자본주의의 위기에 빠졌던 영국에서 로큰롤은 미국에서의 그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로니 도네건(Lonnie Donegan) - 1966년 월드컵 주제가를 부른 것으로도 유명한 - 으로 대표되는 스키플(skiffle)은 한계에 이른 기성의 통제와 로큰롤에 대한 요구의 절충적인 모습이었을 것이고, 곧 그 토양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 비틀즈(Beatles)였다.

Lonnie Donegan - Rock Island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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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팬터스. 60년대 흑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것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큰롤은 몰락했지만, 그것이 흑인 음악의 몰락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흑인 음악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엘비스는 로큰롤의 폭발을 이끌었지만, 전술했듯이 그것은 엘비스와 같은 ‘백인’ 이 흑인 음악을 연주했다는 점에서도 힘을 얻은 바 컸다. 즉, 로큰롤은 흑인 음악에서 시작했을지언정, 순수 흑인 음악은 아닌 셈이다. 물론, 1940년대 이후 흑인 음악의 ‘수퍼 장르’ 는 누가 뭐래도 리듬 앤 블루스일 것이다(또는 그로 ‘통칭된다’). 하지만 흑인 음악을 리듬 앤 블루스가 모두 아우르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로큰롤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새로운 스타일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블루스에서 시작했던 로큰롤이 주목받았다는 사실은 곧 흑인 음악의 주목을 의미했다. 흑인 음악이 양지로 올라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큰롤이 청년 반문화 운동을 대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흑인 민권 운동을 대변하는 모습으로 소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소울도 폭넓은 용어이지만, 통상적으로는 리듬 앤 블루스와 가스펠의 결합에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된다. 어떤 시각에서는 1950년대 이전에 이미 로큰롤을 구사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는, ‘샤우터(shouter)’ 이기도 했던 레이 찰스(Ray Charles)나 샘 쿡(Sam Cooke)을 그 선구라고 할 수 있을 소울은 흑인 음악 전문 레이블이었던(흑인 음악의 ‘저항 음악’ 으로서의 입지를 생각하면, 일종의 백인 사회에서의 돌파구라고도 할 수 있을) 디트로이트의 모타운(Motown)과 멤피스의 스택스(Stax), 뉴욕의 아틀랜틱(Atlantic) 등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리 웩슬러가 발굴했던 레이 찰스가 아틀랜틱을 대표하는 뮤지션이었고, 그는 가스펠과 블루스는 물론 재즈, 소울의 특성을 혼합시켜 ‘What I'd Say’, ‘I Got a Woman’ 과 같은 많은 히트곡을 양산해 냈다.

Ray Charles - I Got a Woman

흑인 프로듀서 배리 고디(Barry Gordy)가 제너럴 모터스의 공장에서 일하다가 모타운을 세운 것은 1959년이었다.

모타운이라는 말은 모터 타운, 즉 디트로이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스모키 로빈슨 앤 더 미라클즈(Smokey Robinson and the Miracles), 수프림스(Supremes - 아
마도 영화 ‘드림걸스’ 로 현재는 더 친숙할), 템테이션스(Temptations) 등은 곧 모타운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고, 에디 홀랜드-브라이언 홀랜드-라몬트 도지어라는(H-D-H, 즉 홀랜드-도지어-홀랜드라고 불렸다) 작곡 트리오는 모타운을 최고의 흑인 음악 레이블로 이끌었다. 10년 만에 100곡이 넘는 넘버 원 히트곡을 차트에 등장시킨 모타운은 또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마빈 게이(Marvin Gaye)를 등장시킨 곳이며, 잭슨 파이브(Jackson 5) - 마이클 잭슨과 자넷 잭슨이 있었던 바로 그 그룹 - 까지 많은 스타들이 데뷔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배리 고디가 순수한 흑인 음악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배리가 의도했던 것은 백인에게 장사가 되는 리듬 앤 블루스였고, 흑인만이 아닌 최대한 넓은 수용자층을 만들기 위한 음악이었다. 물론 이런 면이 록 음악에 분명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라디오에서 모타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백인’ 젊은이들도 모타운의 음악을 자신들의 음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좀 더 ‘순수한’ 흑인 음악에 가까웠던 것은 모타운보다는 스택스였다.

짐 스튜어트(Jim Stuart)와 에스텔 액스튼(Estelle Axton)이 1960년에 세웠던 스택스는 좀 더 정통적인 블루스와 가스펠 형태의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배리 고디에 비해 별로 돈 벌 생각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H-D-H에 의해 양산되는 히트곡을 내세웠던 모타운에 비해 스택스의 곡들은 좀 더 즉흥적 성향이 강했고, 사실 스택스가 모타운보다 어렵게 성장해 나갔던 점에는 이런 부분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스펠과 리듬 앤 블루스를 훵키한 리듬에 담아냈던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이 스택스를 지탱해 주었고, 그 외에도 앨버트 킹(Albert King), 뒤에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 함께 강력한 훵크 사운드를 들려주었던 자니 테일러(Johnnie Taylor)등이 스택스를 대표하는 뮤지션이었다. 스택스는 1975년에 해체되지만, 리듬 앤 블루스가 훵크(Funk, 펑크Punk와 구별하기 위해 앞으로 ‘훵크’ 라고 표기한다) 음악으로 진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곳이 스택스라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Otis Redding -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소울의 선구자임은 물론이고, 훵크의 출현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뮤지션에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의 이름이
처음으로 꼽혀야 할 것이다.


리틀 리처드보다도 먼저 음악 활동을 했던 브라운은 1956년 ‘Please Please Please’ 로 데뷔하여, 특유의 타이트한 사운드로 훵크의 모습을 제시하였고, (사실 ‘America is my Home’ 같은 곡과는 매우 이질적이지만)1968년의 역사적인 싱글 ‘(Say It Loud)I'm Black and I'm Proud’(제목만 보아도 너무나 블랙 파워를 고무시킬) 을 통해 흑인 공민권 운동의 전위에 서기도 했으며, 부치 콜린스(Bootsy Collins)라는 걸출한 훵크 베이시스트를 포함한 백 밴드 JB's 와 함께 발표한 ‘Sex Machine’ 는 훵크의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브라운은 “The Payback” 앨범 이후에는 상업적으로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으나, 영화 ‘록키 4’ 에 삽입된 ‘Living in America’ 의 빅 히트와 80년대부터의 흑인 랩 가수들의 샘플링을 통해서 그의 음악의 여전한 생명력을 확인하였다. (물론 브라운은 자신의 음악의 샘플링을 - 특히나 과격한 가사의 힙합 음악에서 - 좋아하지 않았지만)

조지 클린턴은 팔러먼츠(Parliaments)와 훵카델릭(Funkadelic) 등에서의 활동으로 훵크의 신이라는 칭호까지 듣는 뮤지션이다. 팔러먼츠의 래리 그레이엄(Larry Graham)은 그야말로 ‘스트리트 훵크’ 의 효시로서, 베이스가 배경에 깔린 리듬 악기만이 아니라 곡 전체를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알려 주었고, 훵카델릭은 “Maggot Brain” 이나 “Funkadelic” 같은 앨범에서 클린턴이 확립한 훵크와 사이키델릭이 조합된 개성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James Brown -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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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08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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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Mirror지에 실린 에디 코크란의 사망 소식


50년대 말엽, 로큰롤은 본래의 생동감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로큰롤의 창시자들이 계속하여 음악 활동에 종지부를 찍기 시작하면서 로큰롤은 위기를 맞았다.


아마 가장 황당한 것은 리틀 리처드일 것이다. 한창 활동 잘 하고 있던 1957년, 호주 투어 중에 갑자기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목사가 되기로 하면서, 1962년 다시 복귀할 때까지 복음 가수의 삶을 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복음 가수로 살면서도 그의 무대 매너나 복장은 여전히 단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리틀 리처드는 원래부터 성실한 청년의 인상도 아니었고 - 사실 좀 지저분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 오히려 인생이 파격으로 점철된 사람이었으니, 이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사건이었다.

1958년에는 ‘제왕’ 엘비스가 군에 입대하면서 활동을 중단했고, 제리 리 루이스가 영국 투어 중 57년에 했던 혼인이 알려지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물론 혼인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지만(거기다 루이스는 이미 두 번의 혼인 경력이 있었다) 그 상대가 문제였다.
그의 사촌 형제이자 밴드의 베이시스트였던 J.W.브라운의 딸이었던 마이라가 상대였고, 그녀는 혼인했던 57년 말 당시, 13살의 소녀였다. 그리고 문제는, 루이스가 전처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비난의 목소리가 영국과 미국에서 물밀 듯이 몰려왔다. ‘검둥이 음악이나 하는 놈들’ 에 대한 백인 사회의 반감이 이 사건을 계기로 불이 당겨진 것이었다. 60년대에는 활동 무대를 유럽으로 옮기는 및 컨트리 음악으로 진출해 활동하기도 했으나, 로큰롤 스타로서의 생활은 그렇게 단숨에 끝나버린 것이었다.


1959년은 더 심각했다. 버디 홀리와 리치 발렌스가 모두 비행기 사고로(그리고 같은 사고로) 사망했고, 척 베리가 ‘청교도 백인’ 들의 손에 사실상 활동이 끝장나고 만다.

사건의 골자는 척 베리가 백인 미성년자 소녀를 데리고 자신의 투어에 동행시켜 연방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척 베리를 주시하고 있던(‘요새 것들이 좋아하는 검둥이 음악의 마왕’ 이 아니겠는가) 차에 이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척은 아무 일도 없었으며, 여자가 나이를 속였고, (가장 중요하게는) 재판이 인종주의적 이유로 날조되고 있음을 주장했으나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만다. 뒤에 3년으로 감형되기는 하나 록의 고전들을 계속 쏟아내고 있던 척 베리는 그렇게 ‘콩밥 먹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60년에는 정말 로큰롤 반항아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던 에디 코크란과 진 빈센트가 타고 있던 택시가 화물 트럭과 충돌하면서 코크란은 즉사하고, 진 빈센트는 여생을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뮤지션은 아니었지만, 로큰롤의 보급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로큰롤의 아버지’(그래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린) DJ 앨런 프리드(Alan Freed)는 페이올라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끝장나 버렸다.
페이올라(payola)는 무명가수라도 방송국에 돈을 건네면 노래가 전파를 탈 수 있다는 세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레코드 판매를 위해 레코드사는 사운드를 대중이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했고, DJ가 당시 가장 중요한 록 ‘게이트키퍼’ 라는 것은 분명한 상황에서, 페이올라는 홍보의 가장 효과적이면서 저렴한 형태로서 성행하고 있었다.

팝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꼽히는 이 사건(페이올라가 옹호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페이올라에 대한 수사는 로큰롤이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는 문제가 있다)으로 페이올라가 불법화되면서 프리드의 커리어는 끝장나 버렸다.


그나마 엘비스나 제리 리 루이스, 로이 오비슨 정도가 60년대에도 살아 남아 활동할 수 있었지만, 이미 로큰롤의 ‘왕’ 이 된 엘비스에게서 예전과 같은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엘비스가 입대하기 전이었지만, 1956년에 발표한 ‘Love Me Tender' 같은 곡이 얼마나 기존에 로큰롤이 거부했던 모습들(데이비드 피처스키(David Pichaske)에 따르면 말쑥함, 세련됨 및 아카데믹한 악기 편성, 서정적인 부드러움, 신비로움 등)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보면 이는 이미 예고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중산층은 ‘예전의 가치’ 를 내세우면서 로큰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 있던 로큰롤 가수들도 이제는 방송국에 발붙이기가 어려워졌다. 물론 그래도 사람들은 음악은 필요했다. 다만, 로큰롤은 이제 아니었을 뿐이다. 50년대에는 로큰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나 빙 크로스비, 패티 페이지, 냇 킹 콜 등은 로큰롤의 시대에 스탠더드 팝의 사운드로 인기를 끌고 있었고, ‘Smoke Gets in Your Eyes’ 등의 곡을 남긴 플래터스(Platters)나 문글로우즈(Moonglows) 등의 흑인 그룹들의 발라드가 역시 인기를 끌고 있었다.

Platters - Smoke Gets in Your Eyes
 
그렇지만 로큰롤의 빈 자리를 채울 필요는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50년대의 세대들은 로큰롤의 활력을 맛본 상황이니 이전의 음악들만으로는 어려웠다.
곧 거친 활력은 유지하되, 제도권의 ‘입맛’ 에 맞추어 소독되고 제어된 스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큰롤 스타들의 부재는 이를 부채질했고, 페이올라 스캔들 이후 라디오의 엄격화와 음악 형태의 표준화가 시도되면서, 아마도 (프랭크 시나트라나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를 제외한다면) 오늘날 아이돌 스타의 단초가 되었을 틴 아이돌 스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프랭키 아발론(Frankie Avalon)이나 바비 라이들(Bobby Rydell), 처비 체커(Chubby Checker) 등이 앨런 프리드와는 달리 페이올라 스캔들에서 살아남은 딕 클락(Dick Clack)과 아메리칸 밴드스탠드(American Bandstand)를 통해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이 로큰롤의 외피를 뒤집어 쓴 예쁘장한 백인 아이돌 스타들에게서 이전의 생기를 찾아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비틀즈가 등장하기 이전에 모타운/스택스 등에서 나오는 리듬 앤 블루스나,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로 대표되는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좀 더 혁신적이었던 새로운 팝 음악 정도가 60년대 초반의 미국의 대중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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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필립스(Sam Phillips)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발견한 것은 1954년 7월이었다.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레코드를 녹음하려는 트럭 운전사 청년은, 가스펠은 물론 힐빌리 스타일의 다양한 컨트리 음악이 공존하는 동네였고, 하울린 울프(Howlin' Wolf)와 같은 유명 블루스 뮤지션이 자신들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던 동네였던 멤피스 출신이었으니, 로큰롤 스타로서는 딱 들어맞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의 데뷔작은 이런 멤피스의 전통 하에서 선정된 곡들로 구성된 앨범이었다. 다만 원곡의 스타일과는 맞지도 않는 엘비스의 목소리(어머니 생일 선물로 앨범 녹음하는 청년이 프로일 리는 없다), 컨트리풍의 리듬 기타 등 많은 부분은 원곡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자유로운 느낌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리듬 앤 블루스의 반항성을 알아 버린 컨트리 음악은 통상 로커빌리(rockabilly)라고 불리게 된다.


성공은 순식간이었다. 앞서 말한 반항아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지금에야 보면 느끼하게도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그것도 그윽하게 보였을 것이다.

엘비스는 곧 대형 레이블인 RCA와 계약하고, 별명이 ‘대령’ 이었던 톰 파커를 매니저로 받아들이면서 ‘Heartbreak Hotel’, ‘Hound Dog’, ‘I Forgot to Remember to Forget’ 같은 히트곡을 쏟아 내면서 당대의 최고(이자 현재까지도 ‘이 동방의 나라’ 에도 기념관이 있을 정도로 기억되는) 스타가 되었다.
또한 엘비스는 배우로서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물론 흥행을 위해 졸속으로 기획된 영화에도 얼 빠진 모습으로 다수 출연했지만,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그의 인기몰이에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Elvis Presley - Hound Dog

그러나 로큰롤의 광기는 엘비스에서 끝이 아니었다.

샘 필립스의 선(Sun) 레코드는 곧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를 발굴했다. 억지로 검은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을 하던 엘비스와는 달리 곱슬거리는 금발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루이스는, 특유의 자유분방한 보컬과 부기우기 스타일의 연주는 엘비스의 그것과도 구분되는 다른 매력의 로큰롤을 들려주었다.
또한, 엘비스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다니는 청년이었지만 그는 엘비스와는 달리 방탕을 즐기기로 유명했다. 아마 당대 로큰롤의 난봉꾼 중에서도 최고였을 것이다.
공연 중에 자신의 악기에 불을 지른 최초의 아티스트였을 것인 루이스는 ‘Whole Lotta Shakin' Goin' On’ 등의 히트곡을 계속해서 발표, 뒤에 소개할 희대의 결혼 사건으로 끝장나기 전까지 엘비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며, 엘비스를 RCA에 뺏긴 이후 스타를 찾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선 레코드를 반석에 세우는 역할을 한다.


루이스만 난폭한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는 충분히 난폭하긴 했지만, 엘비스는 반항아 이미지만 있었지 그렇게 난폭한 스타는 아니었다. 유명한 마마보이였고, 1957년에는 게다가 군대에 가야 했다.

로큰롤의 ‘제왕’ 이 군대에 간 이상 새로운 스타가 끼어들 빈틈은 충분했다. 뒤에 더 후(The Who)도 커버하게 되는 ‘Summertime Blues’ 로 유명한 에디 코크란(Eddie Cochran)과, 역시 ‘Be-Bop-a-Lula’ 로 유명한 진 빈센트(Gene Vincent) 등은 반항아를 넘어서 말론 브란도의 폭주족의 이미지를 이어받아 로큰롤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문제였다면 표리부동하지 않게, 이미지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와 비슷한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겠지만.


물론 세상이 반항아들로 가득 찼다면 그건 너무 피곤할 것이다. 코크란이나 빈센트와는 달리 확실히 ‘착해 보이는’ 로큰롤 스타들이 있었다.

엘비스의 팬이었던 버디 홀리(Buddy Holly)는 그런 경우였다. 포마드를 발라 넘긴 머리에 반항아처럼 차려 입고 다니던 다른 로큰롤 스타와는 달리, 버디 홀리는 로큰롤을 연주하기는 했지만 뿔테 안경에 프레피 룩,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불러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반항아들 사이에 모범생 한 명이 끼어 든 모양새였던 것이다.

하지만 버디 홀리가 로큰롤에 남긴 업적은 지대한 것이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한 최초의 록 보컬리스트였고, 더블 트랙킹(Double-Tracking)과 같은 발전된 방식의 스튜디오 레코딩 기술을 개발하는 한편, 오늘날 일반적인 두 명의 기타리스트, 한 명의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라는 밴드 편성을 확립시키기도 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로커빌리의 상투형을 벗어나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입하기도 하며, 로큰롤에 녹아든 백인 음악과 흑인 음악의 요소들을 단순한 악곡 구성 속에서 일신시켰다.

 

Buddy Holly & The Crickets - That'll be the Day

이 모든 것은 버디 홀리가 단 16개월의 활동만으로 이뤄낸 성과이다. 안타깝게도 겨우 22세의 나이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버디 홀리는 비틀즈를 위시한 일련의 영국 밴드는 물론,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와 같은 뮤지션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착해 보이기로는 버디 홀리에 못지 않았던(물론, 듬직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 정도의 이미지이지만) 10대 아이돌 스타의 원조격인 폴 앵카(Paul Anka)나, 역시 10대들의 우상이었던 리키 넬슨(Ricky Nelson), 뒤에 비틀즈나 홀리즈, 사이먼 앤 가펑클에게도 영향을 미친 풍부한 하모니를 들려준 에벌리 브라더스(The Everly Brothers) 등도 50년대 말에 엘비스, 루이스 등을 이어서 나타난 새 시대의 로큰롤 스타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문제는 이 ‘악마 같은 검둥이 음악들’ 을 듣는 10대들을 바라보는 청교도적인 미국인의 시선들은
그리 곱지 않았던 것이다.

요란한 비트에 낯뜨거운 가사, 엉덩이를 살랑거리는 백인(엘비스 프레슬리)에 오리걸음을 걸으며 기타를 치는 흑인(척 베리)까지 다양한 ‘악의 무리’ 들이 있었다. ‘엉클 샘’ 은 이 악의 무리를 응징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로큰롤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10대들이 ‘자신들의 음악’ 으로 삼을 만했던 그 개성도, 적어도 50년대 말, 로큰롤이 대중음악으로 성장한 이상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 로큰롤은 새로운 음악이었지만, 그렇다고 대중 음악의 관습적 견해가 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비스 등과 마찬가지로 10대들의 스타였지만 상대적으로 몰개성적이었던 앵카나 리키 넬슨 등은 로큰롤의 몰락을 예기하는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곧 로큰롤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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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팝 칼럼니스트)







록은 어떤 음악인가라는 질문은 대답하기 쉬운가?

근래 차트에 오르는 곡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곡들을 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실, 현실적으로 접하기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록 음악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일부는 기타, 드럼 등의 연주자들과 보컬리스트가 있고, 공중파에서 쉽게 듣기 어려운 강렬한 음악을 하는 경우를 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록은 이미 전 지구적인 예술 형식의 하나이고, 세계화는 이러한 ‘외국 태생의’ 문화를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최초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록 음악은 음악 자체로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양상의 문화적 맥락의 한 요소의 의미를 가져 왔다고 생각된다. 음악에 산업의 산물이라는 점 외의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록 음악은 그 다양한 하위 장르로 인해 악명이 높다. 그런 장르 구분이 일관되고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 록을 좋아한다던 몇몇 친구들이 줄줄 외고 다니던 계보는, 록을 좋아한다던 그 친구들마저 위의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워했을 것임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

물론 앞으로의 글들도 위 질문에 명확히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록을 정확히 음악적으로 정의내린다는 시도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글들의 목적은, 록 음악이 전개되어 온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다.

록은 그 동안 역동적이면서도 다양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 왔고, 그렇다면 그 자화상은 그 많은 스타일과 형식들을 모두 다루지는 못하더라도 그 궤적을 어렵게나마 쫓아 가는 것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런 록 음악의 궤적의 출발점이 될 지점은 로큰롤일 것이다. 사실, 로큰롤이 컨트리 앤 웨스턴과 리듬 앤 블루스의 결합을 통해 나타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그렇다면 로큰롤이 나타난 것은 대체 언제인가?
물론 이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로큰롤에 대한 일반의 경험은 1950년대에 이르러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냉전의 시대에서 비로소 시작되었을 것이다. 미국은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여 강대국의 지위에 올랐지만, 냉전은 미국 사회의 경직성, 보수주의적 성향을 가져오게 되었다. 미국 사회의 사회적 모순은 침묵되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는 10대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적 가치’ 에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었고, 급격한 현대화를 이룩한 미국의 자본주의는 학교를 졸업한 경우이더라도, 밝은 직업 전망을 내놓을 수 없었다. 사회는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기술직 근로자 정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흑인의 삶은 더 심각했다. 흑인은 이미 50년대 이전에, 남북 전쟁 이후에도 평탄치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흑인의 문화는 백인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고, 흑인들은 그러한 삶 속에서 블루스(‘blues‘ 는 문자 그대로 슬픈 음악이다)를 만들어 내었고, 남부의 농촌 지방에서 발전한 델타 블루스는 그 형식 자체는 비교적 정형적이었지만, 백인 음악보다 감정의 표현이 풍부했고, 특히나 균등하지 않은 비트의 세분에서 나오는 그루브와, 블루스 특유의 블루 노트는 블루스를 백인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델타 블루스는 1930~40년대 대공황 시기의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거치면서 도시의 빠른 생활 리듬을 반영한, 더 빠르고 격렬한 음악이 되었다. 텍사스나 시카고, 뉴올리언스 등에서는 이미 티본 워커(T-Bone Walker)나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비.비. 킹(B.B. King), 패츠 도미노(Fats Domino) 등이 로큰롤 이전에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로큰롤이 언제 나타났는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미 로큰롤은 흑인 사회에서, 백인 문화와는 구별되는 흑인 문화로서 존재해 왔던 것이다.
로큰롤이 그 탄생시부터 리듬 앤 블루스 자체와 명확하게 구별되어 나타난 것도 아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는, 리듬 앤 블루스는 흑인 청중을, 로큰롤은 백인 청중을 의식한 용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아마도 전자의 경우로서 가장 로큰롤에 근접한 흑인 뮤지션은 척 베리(Chuck Berry/위 사진)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등일 것이다.
척 베리는 힘 있는 리듬을 바탕으로 해서 시카고 블루스를 로큰롤로 변화시켰고, ‘Maybellene’ 등의 히트곡에서 청소년들의 생활을 다루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리틀 리처드는 광적인 피아노 연주와 당대의 ‘샤우터’ 다운 거친 창법, 인상적인 무대 매너로 이후의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Chuck Berry - Johnny B. Goode. 뒤에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등도 커버하게 되는 명곡이다


이와 같은, 라디오에서 들려지는 흑인 음악은 프랭크 시나트라 등의 일반적인 곡들보다 활력이 있었고, 뮤직 비즈니스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백인 중산층 10대들은 당대의 호황에 힘입어 상당한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열풍’ 을 일으켜 부모 세대 이상의 영향력을 보일 수도 있었다. 레코드 시장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구매력을 발견했고, 이젠 이들을 고객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 상품이 필요했다. 앨런 긴즈버그나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등이 이미 이 시대의 반항의 상징이 되어 있었고, 로큰롤의 폭발에도 그런 인물이 필요했다.


빌 헤일리(Bill Haley)의 성공은 바로 그러한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빌 헤일리는 반항아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50년대 초반부터 리듬 앤 블루스를 컨트리 앤 웨스턴과 융합시키기 시작했고, 1955년 ‘Rock Around the Clock’ 이 영화 ‘Blackboard Jungle(폭력교실)’ 의 사운드트랙에 실리면서 로큰롤 탄생의 주역이 되었고, 이미 30이 되었던 백인 컨트리 가수는 갑자기 반항적인 10대들의 대변인이 되었다. 음악만으로도 그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면, 정말 반항적인 이미지를 가진 로큰롤 ‘백인’ 가수가 등장한다면 성공은 확실하다고 보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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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인수 2010.11.01 0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꺅 이상훈님 멋진 글솜씨 완전 쩔어여 오늘부터 팬할래요 ㅋ 오늘 처음 들어왔는데 올리신 글 한번에 다 읽고 갑니다. :)

    • Grimloch 2010.11.01 0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거 내가 아는 이인수씨 같은데... 맞다면, 말투 정말 안어울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