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수 생활을 했던 미국 미주리주 컬럼비아는, 서울에서 평생 살아온 내 기준에서 보자면 ‘시골 동네’와 다를 바 없는 도시였다. 고층 건물도 없고, 4D나 아이맥스 영화를 보려면 차를 타고 1시간 넘게 달려서 다른 도시로 가야 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시내를 구경하다 “여기서 가장 번화한 곳이 어딘가요?”라고 물었더니, 안내해주던 분이 “바로 여긴데요”라며 멋쩍어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런 ‘시골 도시’에서 놀랍게도 다큐멘터리 영화제와 각종 시사회가 정말 많이 열렸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True/False 필름 페스티벌’. 매해 3월에 열리는데, 그때는 한적한 도시 전체에 활기가 넘친다. 몇 안되는 시내의 극장과 대학 강당까지 총동원돼 수십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상영된다. 일부러 휴가를 내고 다른 도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4월에는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이 주최하는 ‘Third Goal’ 영화제가 열린다. 영화제가 아니더라도, 컬럼비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극장인 ‘미주리 극장’에서는 수시로 각종 다큐멘터리 시사회를 볼 수 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 포스터.

 

그때 처음 실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국제 이슈의 현장에는 반드시 ‘그 순간’ ‘그 현장’의 최전선을 지키며 다큐멘터리 영상을 찍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예를 들어 나는 2014년 국제부에서 근무할 때 16명의 셰르파가 눈사태로 떼죽음을 당한, ‘에베레스트 최악의 날’을 기사로 쓴 적이 있다. 죽은 동료들을 기리기 위해 시즌을 접고 돌아가겠다고 하는 셰르파들, 등정에 투자한 돈이 아까워 셰르파의 하산 선언에 반발하는 서구 산악인들. ‘True/False 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셰르파>는 내가 외신 기사들을 활자로 접하면서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그 날의 베이스캠프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줬다.

 

2014년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참수된 첫 미국인 기자, 제임스 폴리의 이야기를 다룬 <Jim>이란 영화도 있었다. 그와 함께 IS 감옥에 수감됐던 동료 종군기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재구성된 제임스 폴리의 마지막 순간이 상영되는 내내 극장은 울음바다가 됐다. 그런가 하면 불과 5개월 전 벌어진 미주리대의 학내 인종차별 사건도 스파이크 리 감독에 의해 발 빠르게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됐고, 시사회가 열린 날 미주리 극장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만원사례를 빚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나면 언제나 뿌듯하다. 내가 머리로만 알던 이슈들, 한 두 컷의 정지된 이미지로만 머릿속에 박혀있던 사연들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보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TV나 신문 뉴스를 통해 다뤄지는 이슈를 보다 생생하게, 서사적으로 이해시켜주는, 매우 효과적이고도 보완적인 뉴스 전달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이야말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웬만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사회다. 실제 <택시운전사>처럼 최근 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중 상당수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그런데 이런 한국에서 정작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일은 ‘고도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가능하다. 어떤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정보를 접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알게 됐다 하더라도 이미 ‘찰나’의 상영기간이 끝난 후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박종필 다큐멘터리 감독의 별세 소식을 접한 후 나는 당혹감을 넘어 적잖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평생 동안 장애인, 세월호 유가족, 빈민의 옆을 묵묵히 지키며 여러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 낸 그의 죽음 앞에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 준 친구를 잃었다”며 애끊는 슬픔을 호소하는데, 나는 그의 작품을 한편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나의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치열하게 현장의 최전선을 기록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우리의 접점이 그만큼 작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컬럼비아에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많이 상영될 수 있는 것은 미주리대학이 ‘미주리 극장’을 아예 사들여서 다큐 영화 시사회 등에 종종 장소를 제공해 주는 덕분이기도 했다. 극장만이 아니다. 미드 <하우스오브카드>나 <옥자>로 잘 알려진 넷플릭스는 상업영화뿐 아니라 양질의 다큐멘터리 영화 콘텐츠로도 유명하다. 내가 컬럼비아의 극장에서 봤던 영화 <Jim>도 후에 이 영화의 판권을 사들인 넷플릭스에서 언제든 시청이 가능하다.

 

다행히 최근 <노무현입니다>가 관객수 180만명을 돌파했고, <공범자들>도 호조를 보이며 장기 흥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더 많은, 더 다양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 영화 상영 공간이 더 많이 늘어나야 한다. 미드 보려고 넷플릭스에 들어갔다가 다큐멘터리에 빠졌다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접점을 늘려나가야 더 많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정유진 토요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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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1000만 영화’가 된 <택시운전사>의 마지막 장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관객이 많을 것 같다. 택시운전사 만섭은 독일기자 힌츠페터를 손님으로 태우고 1980년 광주의 참상을 목격했다. 세월이 흘러 머리가 조금 희끗해진 만섭은 여전히 사람 좋은 표정으로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다. 손님이 두고 내린 신문에서 힌츠페터가 제2회 송건호언론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본 만섭은 “자네도 많이 늙었네”라고 혼잣말한다. 그때 한 손님이 택시에 오른다. 만섭이 목적지를 묻자 손님은 답한다. “광화문으로 갑시다.”

 

서울의 그 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광화문인가. 지난겨울의 탄핵 정국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광화문이라는 장소의 상징성을 충분히 의식할 만하다. 1980년 광주와 2016년 광화문의 연관성을 해석하는 평론도 나올 수 있다.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킨 주권자의 의지, 직접민주주의의 힘은 1980년 광주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은 그럴듯하다.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시절이던 지난해 초 나온 <택시운전사> 최종 시나리오에서도 손님의 목적지는 광화문이었다. 촬영 역시 여름에 시작됐다. 장훈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에게 초능력이 있지 않는 한, 수십만 인파가 부패한 정치지도자의 사퇴를 요구하며 매주말 광화문을 채우는 풍경을 상상했을 리 없다.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장면은 이번 여름의 또 다른 대작 <군함도>에도 나왔다. 영화 종반부, 하시마섬에 징용된 조선인들은 탈출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인다. 다리를 잃은 장애인, 여성, 청소년들이 먼저 탈출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광복군 박무영을 중심에 두고 하나둘씩 촛불을 든다. ‘민중의 힘에 대한 메타포’로 해석될 만한 장면이다.

 

김새는 말이지만, 이 장면 역시 우연이다. 영화 전개상 군함도의 전기 시설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된 상태였다. 손전등을 가졌을 리 만무한 조선인들이 불을 밝힐 수단은 촛불밖에 없었다. 일찌감치 나온 <군함도> 시나리오에도 이 장면에선 촛불이 사용됐다. 다만 촛불 장면은 지난겨울 탄핵 정국 당시 촬영됐다. 류승완 감독은 “촬영이 끝나고 숙소로 가면 뉴스에서 광화문 촛불집회 소식이 나왔다. 나중에 연관성 얘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고 말했다. 

 

23일 개봉하는 <브이아이피> 속 등장인물들의 역학구도를 보면 현재 한반도와 주변국의 정세가 연상된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연쇄살인범을 둘러싼 스릴러, 누아르 장르에 속한다. 연쇄살인범이 기획탈북한 북한 고위층 자제 김광일이라는 점이 독특할 뿐이다. 김광일은 북한 고위층의 비밀계좌를 알고 있는 귀빈인 동시, 연쇄살인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다. 경찰은 그를 잡으려 하지만, 고급 정보를 알고 있는 북한 고위급 인사를 살인범으로 만들 수 없는 국정원 직원은 난처해하면서도 수사를 방해한다. 이 역학관계를 파악한 김광일의 범죄 행각은 갈수록 극악해진다. 김광일을 국제사회의 외교적 빈틈을 노려 제멋대로 행동하는 김정은, 국정원 직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국 정부로 이해하면 영화가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물론 이번에도 우연이다. 국정원 직원 역의 배우 장동건은 “공교롭게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이 영화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작품이 창작자를 떠나 수용자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은 빈번하다. 국어교사로 일한 어느 시인이 인근 학교의 수업을 참관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마침 그 시간엔 해당 시인의 시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시인은 속으로 당황하면서도 감탄했다. ‘내 시가 저런 뜻이었나?’

 

시인은 기분이 나빴을까. 그랬을 리 없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고집하는 예술가는 ‘상급’이라 하기 어렵다. 창작자는 해석 과정에서 발생한 ‘오해’를 견뎌낼 줄 알아야 한다. 오해는 때로 작품을 풍요롭게 한다. 예술은 숨은그림찾기나 스도쿠 퍼즐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다른 해석이 나오듯이, 하나의 작품에는 수많은 인상이 따른다.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 다수의 대중과 접속하는 영화 같은 매체는 말할 것도 없다. 1000만명의 관객은 1000만개의 인상을 가진다. <군함도>를 두고 한쪽에선 ‘친일 영화’라고, 다른 쪽에선 ‘국뽕 영화’라고 받아들인 현상도 드물지만 가능한 사례다.

 

이 모든 현상을 ‘창조적 오해’라고 명명하면 어떨까. 견강부회하거나 억지를 쓰자는 말이 아니다. 남들의 생각을 의식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지식과 감정과 삶을 걸고 작품을 대하자는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 부박한 해석은 바람결에 날아가고, 몸으로 체득해낸 감상만이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그때 창조적 오해는 창조가 된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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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극장가에 선보이는 <택시운전사>에는 있고, <덩케르크>에는 없는 것이 무엇일까.

 

<택시운전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한국영화다. 독일 기자를 태우고 광주에 간 서울의 택시운전사 김만섭의 이야기를 그렸다. 생각지도 못한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택시운전사는 시민으로서의 상식, 택시기사로서의 소임을 다해 독일 기자와 광주 시민을 돕는다.

 

배우 송강호가 출연하는 영화 '택시운전사 포스터. (주)쇼박스 제공

 

<덩케르크>는 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40여만명 연합군의 철수 작전을 그린 영화다. 나치 독일군의 포성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연합군은 민간 선박까지 동원해 필사의 퇴각 작전을 벌인다.

 

<택시운전사> 속 군인들은 광주의 상황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도록 갖은 방법을 쓴다. 광주에 들고 나는 모든 차량을 검문하고, 언론을 철저히 단속한다. 기백 있는 지역 기자들이 윤전기를 돌려보려 하지만, 타협적인 동료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군인들은 광주로 잠입한 외신기자와 그를 안내하는 서울 택시기사의 존재를 금세 알아챈다. 특히 ‘사복조장’(최귀화)이란 배역명으로 등장하는 한 군인은 이 모든 악행의 중심 인물이다. 군인이 아닌 척 사복 차림으로 광주 거리를 활보하는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독일 기자와 택시기사 앞에 나타나 그들을 체포하려든다. 그는 마치 터미네이터처럼 지치지 않고 독일 기자와 택시운전사의 뒤를 쫓는다.

 

반면 <덩케르크>에는 사복조장 같은 배역이 없다. 명색이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영화지만, <덩케르크>에는 독일군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독일군은 오직 멀리서 다가오는 총알, 포탄, 어뢰, 공중전을 치르는 전투기의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즉 <덩케르크>는 적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전쟁영화다.

 

<덩케르크>의 시도는 여름 성수기에 개봉하는 블록버스터로서는 상당히 대담하고 실험적이다. ‘악의 얼굴’을 지목하고, 그에게 손가락질하려는 것은 많은 관객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도사린 악은 많은 경우 가시화되지 않지만, 영화는 언제나 추상적 악을 특정한 캐릭터로 형상화한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거나 인육을 탐하는 좀비거나 그도 아니면 월스트리트의 악덕 펀드매니저거나, 영화에는 배우가 연기하는 악당이 나와야 한다. <택시운전사> 속의 악당인 사복조장은 단선적이고 기능적이라 캐릭터로는 매력적이지 않지만, 적어도 관객의 이해를 돕고 그들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장치가 된다.

 

영화 <덩케르크>.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끔찍한 범죄 용의자가 체포돼 경찰서의 취재진 앞에 나타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용의자는 챙이 있는 모자를 눌러쓰거나, 얇은 점퍼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리곤 한다. 중계를 보는 시청자들은 “저 놈 얼굴 좀 보자”며 화를 낸다.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피해가 심할수록, 범인의 얼굴을 보려는 욕망도 커진다. 피의자나 그 가족의 인권 침해를 우려해 얼굴 공개에 소극적이던 수사기관도 최근에는 국민의 알권리, 범죄 예방 등의 이유를 들어 방침을 바꾸는 추세다.

 

뉴스 시청자들은 세상에 만연한 악의 기운이 응축된 얼굴을 보면서 그를 비난한다. 그리고 그가 사형이나 그에 못지않은 중형을 받기를 기대한다. 마치 흉악범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악도 사라지리라고 여기듯이 말이다.

 

세상은 그리 돌아가지 않는다. 악당을 잡아넣으면 또 다른 악당이 나타난다. <택시운전사>에서 누군가 사복조장을 때려눕히거나 일말의 양심에 호소해 개심시켰다고 해도 광주의 비극은 여전할 것이다. ‘사복조장’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악은 개인에 의해 실행되지만, 실행을 강요하는 것은 시스템이다. 전무후무한 악당인 아돌프 히틀러조차 초자연적 권세가 아니라 민주적 선거제도에 의해 선출됐다. 히틀러의 악행 뒤에는 그에게 표를 던진 독일 국민, 권력자의 악의를 실천에 옮길 강력한 국가기구가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유권자의 선택에 의해 당선됐다.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청와대를 압박한 뒤에야 권력의 폭주를 멈출 수 있었다. 지난 정권의 실패는 개인의 잘못을 넘어, 국가의 시스템이 특정인의 전횡을 사전에 막거나 견딜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튼튼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악의 얼굴’을 단죄하는 것은 통쾌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악당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떤 악당이 나타나더라도 마음대로 악을 행할 수 없도록 제어장치를 갖춘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이다. 물론 그건 악당을 지목하고 단죄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흥행을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여름 극장가의 쉬운 흥행 공식을 넘어서는, <덩케르크>처럼 도전적인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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