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대중문화와 영상의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일련의 스토리텔링을 탐구하는 학자로서 탐사고발 프로그램이나 사극에 관한 분석을 주기적으로 수행한 바 있지만, 흔히 ‘막장 드라마’로 분류되는 장르에 관해서는 충분한 관심을 둔 적이 드물다. 아마도 각자도생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가족제도 내부에 존재하는 숨겨진 비밀이나 이로 인한 첨예한 갈등이 서사를 이끌어가고, 파괴적인 감정의 충돌과 캐릭터들의 모진 대화들이 문양처럼 배어든 이런 유형의 텍스트를 감당할 자신감이나 선호도가 별로 크지 않았던 데 기인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두 달이 넘게 온 나라를 마구 뒤흔들면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권력의 황당하고 무성찰적인 이면, 그것의 원색적이고 드라마틱한 속살들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라는 역대급 막장 드라마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미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의 공적 시스템의 붕괴와 난맥상을 발현하는 구체적인 증거와 의혹들이 쏟아져 나온 바 있는 이 미증유의 정치 막장 드라마 속에서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실로 그로테스크하게 욕망하는 주체들의 몰상식한 탐욕이자 바닥을 헤아리기 어렵게 추락한 권력의 무능과 적나라한 민낯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국정 책임자의 미스터리한 행적에서 그가 대독했거나 던졌던 유체이탈과 불통이 선연한 발화들까지, 또한 비선이라는 비정상적인 네트워크의 관행화에서 국정농단이라는 생경한 단어의 실체를 실감하게 해주는 관련 인물들의 구태에 이르기까지, 이 드라마는 숱한 공분과 허탈감을 매개하는 데 너무나 압도적으로 성공적이다.

 

국회 정문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를 하던 시민들이 탄핵안이 가결되자 일제히 환호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아마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 사건을 가족멜로와 코미디, 미스터리, 패러디, 공포, 음모, 반동, 폭력, 부조리 등이 고루 섞인 다양한 장르적인 문법으로 풀어내는 텍스트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부모의 후광으로 권력의 최고 정점까지 올라간 한 문제적 인물의 부상과 스펙터클한 추락과 같은 강렬한 멜로드라마적인 설정에 초점을 맞추어, 이 사건의 서사화를 시도할지 모른다. 동시에 그런 과정에서 대중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주요 캐릭터들이 어떻게 재현되고, 누가 배역을 맡을지도 잠시 궁금해진다. 말을 타는 자신의 딸에 대해 집요하리만치 강한 특권의식으로 그리고 고삐 풀린 탐욕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한 오만한 여인, 실세로 군림했던 문고리 3인방, 선택적인 기억력으로 강한 인상을 준 ‘왕실장님’과 목이 뻣뻣한 민정수석, 교수 출신으로 거간꾼 역할을 수행했던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군상들의 퍼레이드와 처세술의 적나라한 단면들이 재구성될 것이다. 또한 혹자는 보다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냉소적인 감정과 사회적 환기효과가 체화되는 치밀한 역사물이나 반멜로적인 영화로, 진정한 의미의 국민 통합을 이루어낸 이 소동극의 교훈과 심대한 함의를 대안적으로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을 파고드는 의문점이 있다. 상당수의 대중은 애초에 박근혜라는 인물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던 것일까. 또한 그를 둘러싼 한때 공고했던 이미지와 신화를 고안하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 그를 권좌로 올려준 이들의, ‘기술자’와 ‘부역자’라는 말이 매우 걸맞은 주체들의 행적은 어떻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작금의 사건을 다루는 대하드라마나 선이 굵은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그 속에는 세밀한 다큐적인 복기 및 주요 팩트의 재구성과 함께 오늘의 독선적이고 부조리한 행태를 노출한 권력을 그 자리에 있게 한 조직적인 기획의 해부, 그리고 대중의 판타지에 대한 자성어린 냉정한 탐구도 마땅히 필요해 보인다. 상상과 풍문의 영역에서 공적 공간으로 확장돼, 수많은 이들의 각성과 문제의식을 점화하면서 광장을 수놓는 거대한 촛불로 진화하게 된 이 사건은, 미래 세대에게 반면교사의 핵심적인 자료이자 비판적 역사교육의 생생한 자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미래에 제시될 스토리텔링의 시작은 매우 불운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결말’이 이뤄지기 위해선 주권자인 시민 다수가 광장과 일상 속에서 끈질기게 작가적인 상상력과 의지를 결집해낼 많은 이유들 또한 명백하게 존재한다. 훗날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교훈과 통찰, 그리고 대안과 성찰을 줄지에 관해서도 이 막장 드라마는 준엄하게 질문한다. ‘이게 나라냐’를 넘어, 들불처럼 타오르는 촛불과 탄핵, 그리고 통감의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이 사건 ‘이후’의 이야기들을 숙고하고, 새로운 체제를 진중하게 준비할 시간이다.

 

 이기형 |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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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실종됐다. 모두가 알다시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이다. ‘그래도 설마 그랬을 리가’라는 의심은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는 뉴스에 의해 상상 그 이상의 현실을 보여준다.

 

매주 한 차례씩 세 번이나 카메라 앞에 서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은 사태를 진정하기는커녕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프로판 가스통을 투척하는 꼴이다. 촛불은 꺼지기는커녕 주말마다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청와대와 헌법을 참호와 방패 삼아 버티겠다고 선언했다. 이러다간 정말 가족, 친구들 송년모임을 광장에서 하게 생겼다. 아니, 신년모임까지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회사원들이 빠져나간 주말의 광화문 식당가는 보통 영업을 하지 않지만, 요즘은 토요일 저녁 한 시간씩 기다려야 식사를 할 수 있는 게 예사다. 대한민국의 중심이라는 광화문에 온 국민이 몰려 따뜻한 밥 한술을 먹으며 상권 활성화에 불을 지피니 이것이야말로 국민화합이요, 창조경제를 이루는 ‘일타쌍피’의 심모원려라는 실없는 생각도 들곤 한다.

 

실종된 건 연말만이 아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대형 백화점 등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 문구와 함께 성탄 소품들을 매년 그렇듯 설치했지만 이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게다가 한창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기 시작할 때임에도 우리의 귀엔 ‘아침이슬’ ‘상록수’ 같은 광장의 노래들이 연말의 주제가가 되지 않았나 싶다. 계속되는 경기 침체로 캐럴이 들리지 않은지 오래됐지만 올해는 유독 심하다. 시국이 이 모양이다보니 머지않아 대한민국 상공을 찾아 올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이해해주시겠지만.

 

경향신문과 씨채널방송, 아가페문화재단, 백석예술대학교가 공동 주최하고 서울시와 한국관광공사가 후원하는 ‘2016 서울 크리스마스 페스티벌(SCF)’이 개막한 12일 시민들이 청계천에 설치된 화려한 조명을 구경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그래도 캐럴이 없어 아쉽다.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틀 수가 없어져서다. 얼마 전 3년 가까이 운영에 참여하던 공간의 문을 닫았다. 술은 팔지만 회원제 공간이다보니 일반 술집이나 카페에 비해 훨씬 커뮤니티적인 분위기였다. 모든 커뮤니티는 처음엔 대부분 남으로 시작해서 친구가 된다. 딱히 약속을 정하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늘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런 관계가 누적되다 보면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명절 때 차례나 세배 같은 요식 행위를 마치고 모여 함께 만두를 빚어 국을 끓여 먹는다든지, 자체적인 벼룩시장을 연다든지, 잘 알지 못하는 밴드의 공연도 ‘우리 공간’에서 열리니 티켓을 사서 열광적으로 관람한다든지 하는 모습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닭살 돋는다’는 생각과 함께 한 가지 문구를 떠올리곤 했다. 가족 같다고. 가족이란 때때로 피곤하다. 마음에 없는 대소사를 챙겨야 하고, 익숙해지지 않는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개인의 욕망과 최소 사회 단위의 의무 사이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겪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스트레스를 감수하는 이유는 단순히 의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공간에서 부대낀다는 유대감, 어쨌든 내 편을 들어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들은 단순히 혈연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미덕이다. 그 미덕에서 의무만 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3년 남짓, 그 안에서 때때로 그런 작은 바람이 이뤄졌던 것 같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면 더욱 그랬다.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을 마다하고 모두 모여 왁자하게 놀 때면 특별한 정찬이나 이벤트가 필요 없었다. 이제는 드라마에서조차 잘 다루지 않는 대가족의 이상향, 즉 <전원일기>에서 볼 수 있던 정취의 아스라한 냄새를 맡곤 했던 것이다. 그럴 때 트는 캐럴은 호객 행위로 트는 상점의 그것과는 다르게 들렸다. 빙 크로스비의 ‘실버벨’에는 진심어린 온기가, 머라이어 케리의 노래에는 어설프게나마 합창하고 싶은 설렘이 깃들었다. 사회적 지위와 격리된 사생활을 내려 놓은 채 얽히고 얽힌, 관계들이었기 때문이다. 공간의 문을 닫았기에 그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게 아쉬울 뿐이다.

 

올해 크리스마스이브는 토요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때도 광장에 있어야 할지 모른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함께 나눌 수 있는 캐럴 한 곡 합창했으면 한다. 정부도, 재벌도 주지 않는 온기를 그래도 광장의 우리끼리 서로 나누고 있다는 기분은 제법 그럴싸할 것이다. 그 따뜻한 기분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는 잠깐의 연말 및 성탄 선물이 되리라.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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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 지금 공영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은 그런 처지다.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 이후 공영방송에서 민감한 현안과 탐사 보도는 실종된 지 오래다. 최근 금기가 풀리면서 첨예한 이슈에 손을 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시청자들의 불신의 벽은 높다.

 

지난 22일 MBC <PD수첩>은 ‘문화예술계 성추행 파문’편을 방송했다. 일부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만 뜨겁던 이슈가 지상파 시사 프로그램으로 방송된다는 소식에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결국 선정적인 편집, 기존 논의의 반복, 성문제 보도에 대한 안일한 감수성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그럼 그렇지”라는 비난을 받았다. 16일 방송된 KBS <추적 60분> ‘최순실 게이트, 위기의 검찰’편은 조금 달랐다. 탄탄한 취재와 구성으로 ‘검찰을 수사의 주체에서 객체의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러나 역시 “너나 잘하라” ‘죽은 권력 물어뜯기’라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어려웠다. 프로그램 자체가 함량 미달이든 그렇지 않든 공영방송은 이제 외부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SBS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대통령의 시크릿'편

 

공영방송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들이 몰락한 폐허의 벌판에 독야청청 서 있는 것이 SBS <그것이 알고 싶다>다. 애초 <그알>은 주로 범죄·추리·미스터리 사건들을 세밀하게 극화해 풀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정통 시사라기보다 <경찰청 사람들>이나 <궁금한 이야기 Y>와 같은 연성 시사에 가까웠다. 가볍고 선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지난 몇 년 사이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정통 시사의 공백기를 거치는 동안 <그알>은 온갖 사안에 대한 진실 추적의 짐을 떠안게 되었고,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등 현안을 다루며 시청자의 답답함을 풀어주었다.

 

그사이 <그알>의 기조가 크게 변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알>의 팀장을 지낸 장경수 PD는 <그알>의 흥행요소로 ‘미드 같은 재현’ ‘중년 탐정의 역할’ ‘공분과 변화’를 꼽았는데, 소재가 달라질 뿐 프로그램의 초점은 예나 지금이나 재미, 공분, 카타르시스에 있다.

 

그런 <그알>의 경쟁주자로 지난해 등장한 것이 JTBC <스포트라이트>다. 같은 방송사의 <뉴스룸>과 손석희가 쌓은 신뢰를 이어받아 최근 ‘추적! 최순실 게이트’ 시리즈로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스포트라이트> 역시 성분과 기조는 <그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양한 소재, 자극적 재연, 들뜬 어조의 내레이션, 선동과 카타르시스.

 

최근 자주 언급되는 ‘시사의 예능화’는 비단 <썰전>과 같은 프로그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아남아 대중의 관심을 유지하는 시사 프로그램들은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예능화해 있다. 예능화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그것만 있다는 것이다. <그알>이 하지 못하는 일, 즉 지금처럼 거대 이슈가 생겼을 때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현재의 정치·사회 권력을 감시하고 현안을 객관적으로 진단·검증해 사전에 새는 구멍을 막는 일, 그런 탐사보도를 뚝심있게 해나갈 시사 프로그램 역시 우리 사회에는 필요하다.

 

<그알>과 <뉴스룸>과 <스포트라이트>를 칭찬하고, 현장에서 공영방송 취재진에게 분노를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무너진 공영방송과 언론의 자유를 되살리려는 노력에도 에너지를 조금만 나누었으면 좋겠다. 영화 <자백> <다이빙벨>은 TV로 보면 좋을 작품 아니었나.

 

이로사 |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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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90분 특집으로 방영된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는 2014년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동안의 ‘의문스러운’ 행적을 다뤘다. 그간 숱한 풍문이나 다양한 추론을 생성한 문제의 그 사안 말이다. 이 프로그램은 예고됐을 때부터 뜨거운 대중적인 관심을 자아냈다. 실제 시청률은 인기 드라마에 버금가는 수준을 기록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 프로그램이 지속해서 그리고 고군분투하면서 세월호 관련 일련의 문제점들을 탐구해왔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날 방영분은 앞서 언급한 사안의 규명과 관련된 새로운 팩트와 추론에 긴요한 연결고리를 제시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을 보여주는 선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 기획은 그날의 상황을 재구성하는데 필수적인 합리적 의심과 추론을 위한 상당한 자료를 제공했다. 나아가 ‘우리’가 돌아보고 긴히 기억해야 할 일련의 사안들과 책무를 매우 또렷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먼저 이 특별편성 방영분이 소환한 매우 중요한 의문점은 참사 당일 7시간의 공백을 보인 대통령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나타나서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긴박하게 전개됐던 실제 상황과 크게 괴리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발화(發話)였다. 안전행정부 차관이 그들이 “갇혀있기 때문에 구명조끼가 의미가 크게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하자, 대통령은 “아, 갇혀있어요?”라는 물음으로 대응한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았지만, 참으로 기이한 장면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추스르기 어렵게 만드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대국민담화를 목전에 두고 국정 책임자가 참모진의 브리핑을 수렴하거나 텔레비전 속보만 확인했어도 나오기가 극히 어려운 성격의 황당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SBS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대통령의 시크릿'편

 

많은 이들이 이미 인지하고 있는 장면이었지만, 이 부분은 지상파 방송의 전파력과 역할이 상당한 공적 기여를 한 것이다. 더 많은 수용자들에게 다시금 세월호 참사와 대통령의 역할이라는 핵심 사안의 함의를 압축적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이 미궁에 빠진 ‘미스터리’를 푸는 데 간과해서는 안되는 새로운 단서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2010년 한나라당 의원 시절 한 바이오 회사의 주선으로 불법인 줄기세포 주사를 수차례 맞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당시 이러한 (불법)시술을 받으면서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고, 줄기세포 관련 규제완화 법안을 발의했다는 의혹도 함께 제기되었다. 여기에 최근 JTBC 등이 밝혀낸 최순실씨 등의 불법적인 주사제 대리수령 사례들을 더하면, 이 사안은 상당한 폭발력을 내포하게 된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을 만난 차움 경영진은 대통령이나 최순실씨 등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그날 병원을 방문한 기록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의료인의 양심을 건다고도 말했다. 반면 이 병원 내부의 제보자들은 병원 측이 대통령의 내방과 관련된 기록을 삭제하면서, 직원들에게 그런 말이 새나가는 것을 방지하려 하고 있다는 요지의 증언을 했다.

 

수많은 제보를 바탕으로 제작진이 기울인 각고의 노력에도 <그것이 알고 싶다>는 ‘마지막 퍼즐’을 맞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사고 당일의 대처와 행적을 밝혀내는 것은 위중한 국가재난 상황에서 국민의 안전 및 생명과 관련된 핵심적 사안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대통령의 7시간을 둘러싼 비밀과 의혹에 대한 해명은 공적 책임의 최상위에 있는 대통령 자신이 해야 한다는 엄중한 요구를 강조했다.

 

제작진은 그간에 실추된 방송의 역할에 대한 성찰적 비판도 제기했다. “언론 역시 정부와 재벌, 사법체계를 감시하는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면서, 권력자와 주변 측근들의 그릇된 행동을 수용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한 점을 언론인으로서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자성을 전했다. 급박했던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이 과연 어디에 있었으며 어떤 연유로 기민하고 조직적인 대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는지에 관한 의혹과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겨져 있다. 이제 이 거대한 국민적 관심 사항을 조밀하게 풀어내는 일은 검찰과 특검의 몫이다. 하지만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 또한 이 조악하고 뻔뻔한 막장 드라마를 끝내기 위해 매우 필요하다. 진실과 정의의 추구는 오만하고 치졸하며 반성이 없는 권력보다 훨씬 더 크고 중대하기 때문이다.

 

이기형 |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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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낮밤을 바꿔 산다. 직장인들이 한창 일하고 있을 오전 11시가 그들에겐 새벽이다. 얼마 전 낮 12시에 결혼한 어떤 음악인은 결혼식 전날 단체 문자를 돌렸다. ‘제발 늦게까지 술 마시지 말고 하루만 일찍 일어나주세요.’ 또 하나의 공통점은 잘 뭉치지 못한다는 거다. 영화나 드라마는 스태프 수십명이 동시에 움직이는 단체 작업인 반면 음악은 개인 또는 소수의 작업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에 생겨난 습성일 거다. 그렇게 개별적인, 밤의 삶을 사는 음악인들이 지난 8일 오전 11시, 광화문 광장에 나타났다. 이 자리에 모인 음악인 50여명은 ‘음악인 시국선언’을 읽어나갔다. 선언에 동참한 이들은 약 2500여명. 현대사의 길목마다 많은 시국선언이 있었지만 ‘음악인’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음악인들의 첫 단체 행동은 지난 2012년 6월 음원 요율 현실화 등을 요구하며 열었던 집회였는데 그때는 ‘음악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였다면, 이번에는 ‘시민으로서의 양심’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실제 SNS상에서 음악인들은 정치·사회적인 면에서는 보통 침묵을 지켜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불꽃이 튀던 무렵부터 평소에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사석에서조차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지 않던 이들마저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절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직업군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로서는 새벽 시간에 나서게 하는 시국. 지금 이 나라가 딱 그 모양이다.

 

8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음악인 2천여명 이상이 동참한 '민주공화국 부활을 위한 음악인 시국선언'에 참여한 음악인들이 공연과 함께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음악인들은 이 선언문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즉시 대통령직을 그만두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실상을 밝히고 관련 세력 전원을 엄중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김기남 기자

 

하지만 나는 두렵다. 이렇게 많은 분노와 행동의 결과가 허무로 끝날까봐서다. 2008년을 기억한다. 그 해 5월26일 새벽 5시 즈음, 광화문 우체국 앞에 있었다. 타오르기 시작한 촛불에 머릿수라도 보태려 집회에 참석했다가 연행당했다. 48시간을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덕분에 신문 1면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풀려난 다음에도 꼬박꼬박 집회에 나갔다. 일상의 모든 에너지가 그쪽에 쏠린 탓에 글쟁이 생활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마감을 펑크내는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평론가라는 직함을 잠시 내려놓고 시민이란 임시직으로 잠시 살았다.

 

출근하다시피 했던 광장에 발을 끊게 된 건 광화문에 ‘명박산성’이 세워진 날이었다. 산성 바깥의 사람들은 스티로폼으로 세운 연단에 올라 성벽을 넘어갈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답이 없는 토론을 벌였다. 말이 좋아 토론이지,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비방하기 바빴다. 그 순간 딱 떠오른 한 단어. “텄네.”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 이후 촛불은 잦아들었다.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순식간 과거가 됐다. 대운하는 4대강으로 이름을 바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명박의 뒤를 박근혜가 이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9년간 지속되는 동안 분노할 일은 수없이 많았지만 광장에 나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때의 그 허무를 똑같이 느낄까봐서였다. 분노의 끝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지침이 두려워서였다.

 

이제 와서 생각한다. 그때 그 분노의 에너지에 즐거움이 더해졌다면 어땠을까. 깃발과 구호에 음악과 언어가 더해졌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나를, 우리를 지치게 했던 건 단지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을 불러내지 못하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상으로부터 한참이나 유리된 언어와 노래들이었던 것 같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낯선 민중가요들을 듣는 것도 한 두 번이다. 1990년대에서 거의 발전하지 못한 어투와 억양도 구태의연하다. 그 노래와 언어들이 절박한 투쟁 현장에서 나올 수밖에 없던 산물임을 감안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해란 지속되기 힘든 법이다. 그래서 시국 선언에 동참한, 광장으로 나선 음악인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앞으로 이어질 집회의 문화를 바꿔 달라고. 민중의 음악도 좋지만 대중의 음악도 광장엔 필요하다. 굳이 대형 음향장비도 필요 없다. 시민들의 곁에서 통기타 한 대 들고, 퍼커션 하나 두드리며 노래해도 좋다. 음악은 영감의 산물이고, 이 ‘혼이 비정상’인 상황은 음악인에게는 절호의 영감거리 아닌가. 그 영감의 소산을 광장의 구석구석에서 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 이미 적지 않은 음악인들이 박근혜 하야를 내걸고 곡을 발표하고 있다. 앞으로의 광장이 그런 노래들의 페스티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보수와 진보가 대동단결하는 초유의 시기, ‘민중’과 ‘대중’도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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