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600만년 전 원숭이 한 마리가 두 마리 돌연변이 새끼를 낳는다. 하나는 원시인류의 조상이 되고, 다른 하나는 침팬지의 조상이 된다. 이후 진화의 스토리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인류는 직립보행, 커다란 뇌, 불의 이용, 도구의 발명, 사회적 협력을 바탕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호모에렉투스-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면서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가 된다. 반면 호모사피엔스와 단지 2%의 유전자 차이만을 갖고 있는 침팬지는 오늘날 자신의 ‘사촌형제’가 만든 동물원에 갇혀서 관람객들이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하찮은 구경거리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여기 이 기구한 진화의 스토리, ‘아벨과 카인’의 비극을 흥미롭게 비트는 영화 시리즈가 있다. <패튼대전차군단>(1970), <빠삐용>(1973) 등을 만든 거장 프랭클린 샤프너는 1968년 원작 영화 <혹성탈출>에서 충격적 반전을 통해 인간이 원숭이의 지배를 받게 되는 지구의 냉혹한 미래를 보여준다. 1975년까지 이어지는 다섯 편의 오리지널 <혹성탈출> 시리즈는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 진화의 역사적 진실을 침팬지의 입장에서 완전히 뒤집는다. 원숭이는 생물 진화의 정점에 오르고, 인간은 원숭이의 노예가 된다.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 스틸 이미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2011년 시작된 <혹성탈출> 프리퀄 시리즈는 호모사피엔스의 몰락과 유인원의 진화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명한다. 호모사피엔스는 ‘시미안 플루’라는 치명적 바이러스 때문에 종의 몰락으로 나아가고, 침팬지는 새롭게 진화한다. 인류는 언어능력을 상실하고, 침팬지는 말을 하면서 자신만의 사회와 문명을 발달시킨다. 영화 속에서 인류의 몰락과 유인원의 진화가 언어능력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의 언어는 추상적 사고와 대규모 사회적 협력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인류와 유인원의 뒤집힌 운명을 거울처럼 보여준다. 오늘날 호모사피엔스는 ‘타자’에 대한 공감과 공존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동물, 인종, 민족, 성별, 사회적 지위에 따른 차별과 배제야말로 인간 멸종의 진정한 원인이다.

 

무엇보다도 영화 <혹성탈출> 시리즈는 지구상에서 우리 인류, 호모사피엔스의 진화적 번영과 미래가 계속될 수 없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제기한다. 그것이 ‘합리적’인 이유는, 과학기술문명이 초래하고 있는 치명적 위험들 때문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에 만들어진 <혹성탈출2-지하도시의 음모>에서는 핵폭탄에 의해 지구가 멸망하는 묵시록적 이야기가 펼쳐진다. 2000년대 <혹성탈출> 시리즈에서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인간 멸종의 치명적 바이러스로 변이된다. 유발 하라리가 <호모데우스>에서 지적했듯이, 오늘날 생명공학과 유전자 조작의 시대에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시도는 역설적으로 인간 종 자체의 몰락을 재촉하는 새로운 형태의 위험으로 바뀔 수 있다.

 

더불어 영화가 경고하는 강력한 메시지는 인류가 동물과의 평화로운 공존에 성공하지 못할 때 결국 지구 생태계 속에서 인류의 멸종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봉준호 감독의 블랙유머 풍자극 <옥자>에서 날카롭게 간파되었듯이, 인간의 배타적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제 대량생산 시스템은 동물과 가축을 철저히 대상화하고 타자화한다. 프리퀄 3부작 마지막 편 <혹성탈출-종의 전쟁>(2017)에서 우디 해럴슨이 연기한 대령은 인류의 생존을 명목으로 바이러스에 걸린 자신의 아들마저 죽인다. 대령은 결국 침팬지와의 전면적인 전쟁을 선택함으로써 인류의 몰락을 재촉한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만은 남겨둔다. 유인원과 공감하고자 하는 소녀 노바는 인류의 미래와 희망을 상징한다. 디지털 퍼포먼스캡처 기술이 현실의 인간 앤디 서키스와 영화 속 침팬지 시저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듯이, 캐나다의 하얀 설원 위에 피어난 노바의 분홍꽃은 마지막 공존의 메시지다. 결국 호모사피엔스의 미래는 노바로 상징되는 ‘여성과 아이’에게 달려있다. 편협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지구 생태계 속에 만물이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나아가야 한다. 개발과 경쟁, 전쟁과 지배의 가치관을 버리고, 공감과 배려, 평화와 공존의 시대로 가는 것만이 인류의 운명을 구원한다.

 

<정헌 | 중부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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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극장에서 영화 <옥자>를 봤다. 강원도 산골에서 할아버지와 사는 소녀 미자는 슈퍼돼지 옥자를 아기돼지 때부터 10년간 길러왔다. 아니 함께 살았다. 부모를 잃고 산속에서 할아버지와 사는 미자에게 옥자는 24시간 같이 먹고, 자고, 뛰노는 자매(?)와 같은 반려동물이었다. 영화 초반 깊은 산속 맑은 못에서 물고기 잡고 그늘에서 함께 낮잠 자는 모습은 자유롭고 평화롭기만 하다.

 

이 영화는 상영방식을 둘러싼 문제로 칸 영화제 진출 당시부터 시끄러웠다. 개봉 때는 영상의 불법 유출 등으로 또 잡음이 일었다. 그래서인지 정작 영화 자체에 집중할 기회가 적었다. 영화는 중·후반으로 넘어갈수록 불편함을 자극한다. 옥자의 출생 비밀과 대량생산, 도축의 적나라한 현실이 드러난다. 영화가 끝날 때쯤 수십년간 먹어온 육식으로 꺼림칙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편함의 근원이 꼭 육식 때문만은 아니다. 집에서 개나 고양이 등을 반려라는 이름으로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이 불편함의 진실에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옥자는 아파트나 원룸, 빌라에서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개와 고양이의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한다.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인간이 동물을 왜 필요로 하는지, 동물은 인간에게 뭘 기대하는지. (…) 같이 사는 것에 있어서 예의가 뭔지, 동물과 관계는 뭔지”를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주위엔 반려동물에게 지극정성을 쏟는 이들이 많다. 혼자 살고 있는 40대 중반의 한 지인은 5년 전부터 웰시 코기와 지낸다. 결혼에 별 뜻이 없는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웰시 코기를 위한 후견인 지정과 재산상속까지 고려하고 있을 정도다. 1인 가구(통계청 2015년 기준 520만 가구, 전체 중 27.7%)가 급증하면서 이제 혼자 살며 개 또는 고양이 한 마리쯤 같이 사는 것이 라이프 스타일의 완성처럼 얘기되는 시대다. 개중에는 명품 백과 승용차를 장만하듯 과시용과 사치품으로 반려동물을 사들이는 이들도 있다. 신문이나 잡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는 반려동물 기사와 칼럼, 사진, 갖가지 미담들이 넘쳐난다. 마트에는 호화로운 반려동물 용품과 홍삼이 들어가 있는 사료까지 즐비하다. 반려동물은 가히 ‘21세기 대유행’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루종일 피곤과 스트레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왔을 때 그들이 따뜻한 위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에서 나만 떨어져 나와 있는 것처럼 혼자 지내고 있을 때 ‘혼자가 아니야’라며 위안을 준다. 인간들 사이에서 받은 상처를 말없이 어루만져주기도 한다. 반려동물은 고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고독의 완충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정작 고독의 몫은 반려동물 자신의 것이다.

 

구의역 참사, 타워크레인 붕괴사고 등 재해사고 현장에는 언제나 ‘위험의 외주화’가 있었다. 위험한 일일수록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 전달된다. 가장 약한 존재들이 떠맡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고독의 외주화’도 별반 다르지 않다. 힘없고 말없는 그들에게 고독을 떠넘기는 시대다. 공장에서 발정유도제로 생겨난 어린 생명은 동종과 떨어져 평생을 일정한 공간에서 다른 종(인간)과 살아가다 목숨을 다한다. 특히나 집에서만 사는 고양이의 대부분은 분양이 된 후 자신과 같은 동종을 만나 털을 부비거나 영역다툼을 할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중성화로 거세돼 멸종되지 않았으나 마치 멸종된 종처럼 ‘고독하게’ 주어진 생의 주기를 마쳐야 한다. 주인이, 집사가 아무리 자신의 반려동물을 사랑한다고 해도 개나 고양이와 같은 종이 될 수는 없다.

 

반려동물 사이트에는 자신의 반려동물이 애정결핍과 분리불안 증세를 앓고 있다며 고민을 나누는 글들이 많다. 하루 온종일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탓에 생겨난 병일 것이다. 주인이 대책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날 때면 꼼짝없이 비좁은 공간에 갇혀 불안에 떨어야 한다. 심지어 여름휴가철이 되면 버려지는 개와 고양이가 더욱 급증한다.

 

맡길 곳이 없어서, 늙고 병들어서, 새끼 때처럼 사랑스럽지 않아서, 돈이 많이 들어서 등등의 이유로 한 해 8만여 마리의 반려동물이 버려진다. 지난해 버려진 후 입양되지 않아 안락사(安樂死)한 개와 고양이는 1만6000마리에 이른다. ‘고통을 덜어주는 편안한 죽음’, 안락사가 과연 옳은 표현일까. ‘인간의 이기’ ‘고독의 외주화’란 전염병에 걸려 살처분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몇 년 후 귀엽고 감정을 표현하며 아프고 늙을 걱정 없고, 털 없이 매끈한 피부를 지닌 반려로봇이 대량생산 된다면 반려동물의 지위는 반려에서 곤두박질치지 않을까. 옥자는 불편한 진실들을 상상케 한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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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가 국내 개봉을 앞두고 영화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거대 기형동물과 산골 소녀의 우정을 다룬 영화의 설정도 파격적이지만, 영화 상영 방식은 더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옥자>의 국내 배급사인 뉴(New)는 이 영화를 극장 스크린과 온라인 스크린에 동시 개봉한다고 발표했다. 스크린의 전통적인 상영 질서가 혼란에 빠졌다. 더욱이 한국을 대표하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기에 그 파장의 강도는 깊고 넓다. <옥자>의 진보적 내러티브는 영화 상영의 진보적 테크놀로지 논란에 압도당해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 플랫폼의 패러다임이 순식간에 바뀔지도 모르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이른바 <옥자> 스캔들은 칸 영화제 때부터 감지되었다. 프랑스 극장협회는 <옥자>의 투자자본과 상영방식이 전통적인 극장의 생태계를 무너뜨릴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칸 영화제 기간에 옥자의 상영에 반대 성명을 내고, 보이콧 운동을 벌였다. <옥자>의 제작비를 전액 부담한 미국의 온라인 스트리밍 업체인 넷플릭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사이트를 통해 전 세계 190개국에 서비스하겠다고 발표했다. <옥자>의 극장 스크린과 온라인 스크린 동시 개봉은 영화의 미래, 스크린의 운명을 가늠하는 중대 사건이 되었다.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스크린의 운명은 미로 속에 길을 잃고 있다. 당장 국내 스크린 점유율 40%에 육박하는 최대 멀티플렉스 CGV가 <옥자>의 극장 상영을 거부했다. 극장 생태계를 교란시킨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작 극장 생태계를 교란시킨 것은 CGV가 아니었던가? 영화 배급과 상영을 겸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려온 CGV가 과연 극장 생태계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한다. CGV의 반발은 스크린 독점을 견지하려는 자사 이기주의로 비치면서, 오히려 관객을 위한 서비스 선택권의 확대라는 넷플릭스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한 꼴이 되었다. 넷플릭스의 <옥자> 동시 개봉 선언은 스크린 민주주의의 시작인가? 아니면 또 다른 스크린 독과점의 시작인가?

 

혹자는 영화가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개봉되면 전통적인 극장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넷플릭스 때문에 극장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은 음원 때문에 음반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과 비슷하다. 극장에서 ‘영화 보기’라는 문화 정서가 기술의 진보에 의해 소멸되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이번 논란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극장이 갖는 문화공간의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 극장은 단지 영화만 보러 가는 곳은 아니다.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행복한 데이트도 즐기는 여가생활의 가장 중요한 플랫폼이 극장이다. 바로 이 점이 극장이 온라인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근거이다. 음원시장 때문에 동네 레코드 가게가 소멸한 것에 비하면 극장은 그나마 복합적인 문화공간의 기능을 잘 살려 버틸 수 있었다.

 

<옥자>의 스크린 논쟁의 핵심은 문화와 테크놀로지, 영화기술의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스크린 독과점에 있다. CGV는 동시 개봉에 따른 극장 관객의 이탈을 차단하고자 초강수를 두었고, 넷플릭스는 관객 선택권을 명분으로 스크린의 새로운 독점권을 행사하고자 한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CGV냐, 넷플릭스냐가 아니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스크린이 얼마나 다원화되고 민주화되는가이다. 어떤 점에서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스크린 개봉의 시대가 지금의 영화 배급과 상영의 수직계열화를 해소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영화 플랫폼의 다원화로 관객의 확대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스크린은 영화 상영의 다양성을 가져올 수 있다. 단 영화 상영과 배급의 수직계열화가 해소될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배급·상영의 겸업이 유지되는 한, 스크린 종 다양성은 온라인 스크린의 시대가 와도 실현이 불가능하다. 극장 스크린은 맞고, 온라인 스크린은 틀렸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은 영화 기술의 진화를 막을 수 없다. 스크린의 운명은 CGV냐, 넷플릭스냐가 아니라 독점이냐, 다양성이냐에 달렸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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