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피스톨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1.13 섹스 피스톨스, 그리고 신화의 형성
  2. 2011.01.13 펑크의 폭발 - 섹스 피스톨스의 등장

The Clash - London Calling 앨범의 커버. 펑크 록에서 가장 유명한 앨범 중 하나이지만,
과연 이 앨범을 일반적인 펑크 록의 이미지와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생각에는 힘들 듯하다.

그럼 생기게 되는 의문점은 바로 이것이다. 이 말썽꾼 딜레탕트들이 연주하는, 기존의 음악과는 판이한 모양새의 음악이 어쩌다 이렇게 큰 인기를 얻게 되었는가?

일반적인 얘기는, 이들의 음악은 기존의 대중 음악의 시각에서 볼때, 거의 반-음악에 가까운 가장 파괴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피스톨스의 앨범은 당시의 스튜디오에서 만들 수 있었던 가장 원초적인 사운드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는, 어떻게 보면 당시의 록 음악이 잊고 있었던 ‘로큰롤의 원초성’ 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었다. 다만 이들이 이전의 로큰롤 하위문화와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들은 자신이 속하고 있었던 청년 문화에도 불만을 표출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스타일의 배격이었던 셈이다. 사실 흔히 얘기되는, Do-It-Yourself라는 모토 자체가 대형 음반사들에 의해 주도되는 뮤직 비즈니스에 대한 거부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이들의 음악이 거의 반-음악이었다고 한다면, 이는 의도되었든 아니든, 최적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펑크 록이 모두에게 그런 저항적인 ‘음악적 표현’ 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는 당시의 불경기에 의해 침체된 음반 시장을 극복하려는 자본주의의 계략, 정도로 이해되었다. 말콤 맥러렌 자체가 섹스 피스톨스를 기획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보기에 충분한 근거일 수도 있을 것이다(맥러렌이 피스톨스는 물론,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의 매니저이기도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물론 맥러렌이 간과한 것은, 피스톨스가 그의 기획을 떼어 놓고 보더라도 충분히 충격적인 밴드였다는 사실이겠지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기획자들의 의도야 어떤 것이었든 간에, 이 펑크 록의 파괴적이고 무정부주의적 개념은 결과적으로 극도로 독점적인 록 음악의 제작 조건들에 저항하는 음악 및, 그에 관련된 하위 문화들의 촉발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피스톨스의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음악이든 스타일이든,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펑크 록’ 에 대한 이미지는 이 시절 이후 거의 변해 오지 않았다. 
 
(사진은 말콤 맥러렌. 고인이 된 지 아주 오래 되진 않았다. 매우 늦었지만 명복을 빈다)

피스톨스가 거리의 딜레탕트들일 뿐이었다면, 좀 더 정치적인 의식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는 클래쉬(The Clash)가 나타난 것은 1976년이었다. 말하자면 피스톨스의 펑크는 로큰롤 자체에 대한 파괴였다면, 클래쉬는 로큰롤의 변형을 의도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피스톨스와는 달리 흑인 음악의 요소를 가져온 바 있었다. 사실 이들의 앨범 중 가장 펑크의 전형에 가까운 데뷔작 “The Clash” 도, 기존의 로커빌리 등의 전통은 물론, ‘White Riot’ 같이 레게를 받아들인 곡도 있었다. 이를 더욱 명백히 보여주는 밴드의 최대 히트작 “London Calling” 에서는 스카까지 등장하고, 좀 더 사회적 메시지와 노골적인 ‘좌파적’ 색채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Sandinista!” 앨범에서는 무려 ‘전자음악’ 까지 등장한다!(‘Ivan Meets G.I. Joe’)


The Clash - White Riot(Live)


The Clash - Wrong'em Boyo. 위의 White Riot을 연주하던 밴드의, 바로 다음 앨범의 수록곡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클래쉬 같은 밴드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펑크 록이 곧 ‘정치적 음악’ 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건 일반적인 선입견과는 조금 다를 얘기일 것 같은데) 이 시절의 불경기, 살기 힘들었던 젊은 실직자들이 즐겼던 음악이었던 펑크 록은 그렇지만 그들의 생활을 형상화한 것도, 대부분의 경우 정치적 형식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도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음악이 이 음악을 만들고 즐겼던 이들의 경험의 직접적 표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이먼 프리스는 그래서 펑크 음악의 구조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 음악은 부당한 상황을 최고의 상황으로 만드는 것이요,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지만, 피스톨스만큼이나 위대한 펑크 밴드로 추앙되는 클래쉬인 만큼, 정치적 메시지를 의도하는 이들도 분명한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펑크가 어쨌든 청년들의 원초적 반항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때, 이를 더욱 발전시켜 관습적이지 않은, 새로운 펑크를 만들어내려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즉, 펑크 인민주의자(populist/proletariat)와 전위주의자, 즉 펑크 뱅가드(punk vanguard)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앞서 얘기한 뉴욕 펑크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펑크의 일반적인 모습과 많이 달랐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먼저 펑크 뱅가드부터 얘기해 보자. 사실 피스톨스 이후 펑크는 일종의 반항의 신화가 되었다. 피스톨스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친 밴드였는지 생각한다면 이는 생각보다는 명확한 것인데, 기존의 아트스쿨 뮤지션들의 이러한 신화성을 깨뜨리려는 시도를 펑크 뱅가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일률적으로 이야기한다고 이 부류에 속하는 밴드들의 스타일이 어느 정도 명확했다는 것은 아니다. ‘펑크 뱅가드’ 는 사이먼 프리스의 용어인데, 사이먼 레이놀스는 이를 ‘포스트펑크 아방가르드’, 척 에디는 ‘아방가르드 (훵크)’(이는 암만 생각해도 갱 오브 포(Gang of Four) 때문이긴 한다) 라고 다른 용어를 사용하였다. 말 나온 김에 갱 오브 포를 먼저 얘기한다면, 클래쉬와 함께 대표적인 좌익 펑크 밴드로 꼽히기도 했던 이들은 펑크와 파워 팝 모두를 얘기할 만한 사운드를 들려주었지만, 훵크에 가까운 리듬의 운용이나 관습적인 록의 형식을 따르기도 하고, ‘Anthrax’ 같은 곡에서는 거의 사이키델릭에 가까운 노이즈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Gang of Four - Not Great Men. (잘 안 들리긴 하지만)가사에 유념하여 들어보시라. 어린 시절 읽어 온 전기문들을 뒤트는 듯한 내용이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그 영향을 술회하여 뒤늦게나마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레인코츠(Raincoats)도 주목할 만하다. 멤버 전원이 아트스쿨 출신의 여성이라는 점부터 비범했던 이들은 주제부터 ‘여성의 영역’ 을 다루고 있었고(일반적인 여성성의 양태를 거부하는 건 아니었다), 갱 오브 포나 팝 그룹(The Pop Group) 등과 같이 일반적인 록 음악의 리듬이 아닌 훵크나 레게, 흑인 음악 등의 요소를 도입하여 독자적인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었다.

(물론 이들 외에, 잠깐 이름만 나온 팝 그룹과 스크리티 폴리티(Scritti Politti)의 얘기도 하는 게 합당하겠지만, 그런 부분은 뒤에 천천히 하도록 하자)


Raincoats - Family 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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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섹스 피스톨스. 2년 남짓한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엄청났다. (사진이 참 얌전해 보이게 나왔다)

곧 이런 뉴욕, 그리고 CBGB's를 중심으로 한 신드롬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크림(Cream), 범프(Bomp), 아쿠아리안(Aquarian) 등의 펑크 성향의 관련 잡지들이 창간되었고(물론 내용은 CBGB's에서 생긴 일, 정도의 가십거리를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데드 보이스 등의 밴드는 물론, 보스턴의 모던 러버스(Modern Lovers, 사실 이들은 1973년에 데뷔한 이들이었다. 앨범도 존 케일이 프로듀스했다), L.A의 X 등 뉴욕을 벗어난 곳에서도 일련의 프로토펑크 밴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흐름과는 좀 구별되는 이도 있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이는 역시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일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고 록 가수가 되기로 했던 스프링스틴은 (사실 그의 가장 유명한 앨범은 84년작인 “Born in the USA” 이겠지만)73년부터 활동해 온 록 뮤지션이었고, “Born to Run” 같은 여러 앨범에서 미국의 노동자들의 생활상 등에 포커스를 맞춘 음악을 하였지만, 그는 60년대의 사운드에 가까웠던 정통적인 록을 연주하던 뮤지션이었고, 여타 펑크 밴드들과 달리 지극히도 미국적이었다. 이런 남성적인, 좀 더 리듬 앤 블루스의 원형에 가까웠던 음악이 분명히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시절, 뉴욕 펑크가 (보편적인 견해에서)펑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음은 분명하다.



Bruce Springsteen - Born in the U.S.A


그렇지만 영국은 75년까지만 해도 별다른 펑크의 움직임을 보여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영국의 록 음악의 주류라면 프로그레시브 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지만, 록 밴드들의 공연은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양적으로 상당히 줄어든 상황이었다. 일단 이미 거물이 되어 버린 엘튼 존이나 핑크 플로이드 등은 세금이나 그 수익 등의 문제로, 영국보다도 오히려 미국에서 더 오래 활동하고, 그 반응도 미국에서 더욱 큰 편이었다. 70년대 초반 그래도 이 시절의 ‘젋은이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던 데이빗 보위나 록시 뮤직 역시 여타 밴드들과 방향적으로 틀리지 않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물론 그 시절 앨범도 훌륭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말하자면, 1964년에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 킹크스 등의 밴드가 폭발적으로 등장하기 직전의 시대, 와도 상당히 비슷한 시대였던 셈이다.

곧 이전의 ‘건강했던’ 리듬 앤 블루스의 복귀를 얘기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은 (프로그레시브 록에서도 많이 나타났던)독립 레이블들의 등장일 것인데, 이미 거대 밴드들을 통해서 너무나도 강한 힘을 갖게 된 대규모 음반사들은 확실히 신인 밴드들에게는 가혹했다. 이를테면, 존 필(John Peel)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첫째, 누구도 쇼 비즈니스의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런던으로 와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똑똑한 흥행주에게 바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둘째, 70년대 중반 계약에 성공한 밴드들은 모두 이전에 성공했던 밴드들의 멤버를 적어도 한 명 이상 포함하고 있는 밴드였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브라이언 페리(록시 뮤직의 보컬)가 1972년 어느 날 우리 사무실에서 자기 밴드의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 월터와 나를 설득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여기 앉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너희 밴드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없잖아!’ 라고 말이다.”

펑크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이미 버진(Virgin) 레코드를 통해 등장했던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가 그랬고, 이미 ‘한물 간’ 로버트 와이엇을 “Rock Bottom” 으로 재기시킨 것도 이 버진 레코드였다. 이보다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고, 영화 ‘노팅 힐’ 의 ‘She’ 로 국내에는 팝 가수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도 이 당시 스티프(Stiff) 레코드를 통해 등장한 경우이다. 화장품 회사의 컴퓨터 기사였던 코스텔로는 배고픈 친구들의 심정을 대변하던 펑크 밴드들이 세상을 호령하던 시절, 뜬금없는 고시생 이미지(뭐, 버디 홀리를 닮은 외모라고 하는 것이 중평이지만, 내 눈에는 고시생이다)로 등장해 통렬한 비판과 확실한 주관을 보여주었던 뮤지션으로써,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의 한 명으로 꼽힌다.

(솔직히 고시생 스타일 아닌가... 참고로 이 분, 27일에 내한공연 오십니다)


Elvis Costello - Less Than Zero(live)


그렇지만 역시 펑크의 폭발은,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를 맨 앞에서 얘기해야 할 것이다.

예술학교 졸업생이자 미국에서 자료수집을 위해 체류 중이었던 말콤 맥러렌이 더 스트랜드(The Strand)라는 무명 밴드에, 자신의 부띠끄의 일을 도와주던(!) 글렌 매트록(Glenn Matlock)과 존 라이든(John Lydon - 이 양반이 그 자니 로튼(Johnny Rotten)이다)을 끌어들여 만든 밴드가 바로 섹스 피스톨스였다. 이건 뭐, 딜레탕트도 이런 딜레탕트들이 없을 지경인데, 덕분에 밴드에 대해 내려오는 에피소드들도 셀 수 없다. 이를테면, 더 스트랜드는 결성 당시 가진 악기도, 악기를 살 돈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악기들을 많이 ‘훔쳤는데’, 이를테면 데이빗 보위의 공연장이나 로드 스튜어트의 맨션 등에서 물건들을 훔쳐냈다. (이들은 대범하게도, 그 악기들로 로드 스튜어트의 커버곡을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1975년 11월 6일 성 마틴 예술학교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섹스 피스톨스는 (물론 기복 없이 말썽을 일으켰지만) 런던의 유명한 100클럽을 포함한 크고 작은 곳에서 공연을 계속해 나갔고, 드디어 EMI와 계약하는 쾌거! 를 이룩한다. 물론 첫 싱글인 “Anarchy in the U.K” 를 발매한 후 머지 않아 ‘짤리기는’ 하지만, 곧 Virgin과 계약하며 그 활동을 이어 나간다. 중간에 A&M과 계약하긴 했지만 6일만에 다시 짤리는 바람에, 그건 넘어가도록 하자.(재미있는 건 이들이 짤린 이유가, 당시 A&M 소속 뮤지션들의 반발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가히 이들이 당시 가져 온 센세이션을 짐작할 수 있다) 77년 10월에는 드디어 이들의 데뷔작(이자 정규 앨범으로는 유일작)인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가 공개되었고, 앨범은 11월 12일, 예전에 우리 어머니들도 스타들에게 열광하셨다는 증거로서 자주 얘기되는, 그 클리프 리차드를 밀어내고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바로 저 오른쪽의, 참 대충 만든 것처럼 생긴 앨범이 말이다.

Sex Pistols - Anarchy in the U.K


Sex Pistols - God Save the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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