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계층의 알레고리를 그린 영화이다. 마치 오래된 우화 같다. 이 영화는 분명 계급 적대를 함축하고 있지만, 그것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분법적인 적대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감각의 알레고리를 통해 그 계급적 적대를 희화화하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는 계급의 적대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영화는 알레고리적 영화라기보다는 상징의 영화이다. <설국열차>는 이동 중인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계급의 적대를 명확하게 구획된 객실의 머리 칸과 꼬리 칸의 공간으로 표현했다. 


배우 송강호, 최우식이 출연한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반면 <기생충>은 고정된 집에서 벌어지는 계층의 욕망을 지상과 지하라는 공간으로 표현했다. 전자가 상징적 표현이라면 후자는 알레고리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은유와 알레고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기차의 칸막이 공간은 계급의 적대를 구획하는 실체적 이미지를 가진다. 열차의 머리 칸과 꼬리 칸은 계급적 적대를 명시하는 상징의 공간이다. 반면 <기생충>에서 집의 지상과 지하는 완벽한 차단 막이라기보다는 스며들고, 삼투하고, 녹아내리는 공간이다. 집의 위와 아래의 공간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으며, 통제가 느슨하고 상황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갈 수 있다. <기생충>의 기택 가족이 살고 있는 반지하도 소독약이 스며들고, 물이 스며들고, 와이파이가 스며든다. 열차의 머리 칸과 꼬리 칸은 전복과 배제를 위한 살벌한 투쟁의 상징적 장소로 풀어냈다면, 특히 동익네 대저택의 지상과 지하는 스며듦과 얽힘의 혹은 불안한 공존의 우울한 상태를 우화적으로 풀어냈다. 그래서 <기생충>은 <설국열차>와 유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살인의 추억>과 유사하다. 


그런데 알레고리로서 <기생충>이 돋보이는 점은 알레고리적 장치를 공간으로만 표현하지 않고, 감각으로도 표현했다는 점이다. 바로 ‘냄새’라는 감각이다. 냄새는 지상과 지하라는 공간적 알레고리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알레고리이다. 동익의 가족들은 지속적으로 기택 가족의 냄새를 말한다. 동익의 아들 다송은 위장 취업한 기택, 기정, 충숙의 옷과 몸에서 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동익은 운전기사인 기택을 평하며 고용된 기사로서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는 기택의 행동을 주시하다가도, 차 뒷자리로 넘어오는 퀴퀴한 냄새를 못마땅해한다. 동익의 아내 연교도 기택의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코를 막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 집의 오래된 가정부 문광의 남편인 근세의 쓰러진 몸 아래 깔린 자동차 열쇠를 빼낼 때에도 냄새는 스멀거리며 올라와 가진 자들에게 혐오의 감각이 된다. 


냄새는 계급, 인종, 지역, 장애의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는 최종심급에서의 감각이다. 다른 것은 지울 수 있어도 냄새만큼은 지울 수 없다. 냄새는 스며들고, 경계를 무디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차별을 결정하는 최후의 감각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감각의 알레고리이다. 발터 베냐민은 독일 바로크 시대의 비애극에서 발견했던 우울함과 무상성을 알레고리의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베냐민에게 있어 알레고리는 “사물들의 무상성에 대한 통찰”이다. 그것은 “건설과 파괴, 희망과 슬픔, 미몽과 각성, 실재와 허구 사이의 긴장을 분절해 낸다”. 베냐민은 19세기 파리에 등장한 아케이드가 화려하지만, 언제든지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울함과 무상함을 알레고리로 표현했다. 


지상과 지하공간의 스며듦의 시간들, 그래서 잠시 저들의 욕망을 대체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졌던 기택 가족의 비극, 그 비극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아들 기우의 허망한 바람, 그리고 냄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구별 짓는 감각 안에서 상상될 것이라는 것은 놀랍게도 우리의 현실이다. 그 현실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 이것이 영화 <기생충>의 감각의 알레고리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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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작품 <기생충>이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가 세계 3대 영화제 가운데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세계적 거장 감독 반열에 오른 봉 감독 개인의 크나큰 영예이면서, 한국 영화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높인 쾌거다. 올해는 한국 영화 역사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영화인들의 피땀 어린 헌신과 열정 하나로 한국 영화는 놀랄 만한 성취와 진전을 이뤄왔다. 봉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 영화 100년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뜻깊은 선물이 됐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25일 프랑스 칸에서 진행된 제72회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기생충>은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을 통해 빈부격차를 다룬 블랙코미디다. ‘반지하 방’으로 상징되는 다분히 한국적 방식으로 빈자와 부자를 드러내지만 다양한 장르 변주를 통해 빈부격차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세계 보편적 현상인 양극화와 빈부격차 문제를 한국적 감수성과 장르적 독창성으로 풀어낸 것이다. 칸 영화제가 중시하는 다양성을 담지하면서 재미와 작품성을 확보했기에 ‘콧대 높은’ 칸의 문이 열린 것이다. 봉 감독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조화하면서 사회성도 겸비하는 ‘장르 영화’의 독보적 자리를 지켜왔다.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이후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옥자> 등 작품마다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보편적 재미를 갖춘 장르 영화의 틀 안에 그만의 독창적 영화문법과 색깔을 입혀온 성과다. 봉 감독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로 ‘장르’를 확장·변주하면서도, 언제나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섬세한 연출 속에 새겨넣어 울림 큰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가 영화 ‘기생충’으로 25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포토콜에서 상패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르 영화에 인색한 칸 영화제가 봉 감독의 <기생충>에 최고상을 수여한 것에 외신들은 주목하고 있다. “장르 영화의 쾌거”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봉준호만의 장르적 독창성과 스토리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한동안 해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는 주변의 특이함이나 색다름, 아니면 예술성만으로 주목받았다. <기생충>은 세계 영화의 주류인 ‘장르 영화’에서 최고로 평가받음으로써 한국 영화의 성취를 각인시켰다. 봉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 영화가 세계적 보편성을 공인받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번 수상이 한국 영화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전기가 되고, ‘또 다른 100년’을 여는 힘찬 북소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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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극장에서 영화 <옥자>를 봤다. 강원도 산골에서 할아버지와 사는 소녀 미자는 슈퍼돼지 옥자를 아기돼지 때부터 10년간 길러왔다. 아니 함께 살았다. 부모를 잃고 산속에서 할아버지와 사는 미자에게 옥자는 24시간 같이 먹고, 자고, 뛰노는 자매(?)와 같은 반려동물이었다. 영화 초반 깊은 산속 맑은 못에서 물고기 잡고 그늘에서 함께 낮잠 자는 모습은 자유롭고 평화롭기만 하다.

 

이 영화는 상영방식을 둘러싼 문제로 칸 영화제 진출 당시부터 시끄러웠다. 개봉 때는 영상의 불법 유출 등으로 또 잡음이 일었다. 그래서인지 정작 영화 자체에 집중할 기회가 적었다. 영화는 중·후반으로 넘어갈수록 불편함을 자극한다. 옥자의 출생 비밀과 대량생산, 도축의 적나라한 현실이 드러난다. 영화가 끝날 때쯤 수십년간 먹어온 육식으로 꺼림칙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편함의 근원이 꼭 육식 때문만은 아니다. 집에서 개나 고양이 등을 반려라는 이름으로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이 불편함의 진실에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옥자는 아파트나 원룸, 빌라에서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개와 고양이의 모습을 자꾸 떠올리게 한다.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인간이 동물을 왜 필요로 하는지, 동물은 인간에게 뭘 기대하는지. (…) 같이 사는 것에 있어서 예의가 뭔지, 동물과 관계는 뭔지”를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주위엔 반려동물에게 지극정성을 쏟는 이들이 많다. 혼자 살고 있는 40대 중반의 한 지인은 5년 전부터 웰시 코기와 지낸다. 결혼에 별 뜻이 없는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웰시 코기를 위한 후견인 지정과 재산상속까지 고려하고 있을 정도다. 1인 가구(통계청 2015년 기준 520만 가구, 전체 중 27.7%)가 급증하면서 이제 혼자 살며 개 또는 고양이 한 마리쯤 같이 사는 것이 라이프 스타일의 완성처럼 얘기되는 시대다. 개중에는 명품 백과 승용차를 장만하듯 과시용과 사치품으로 반려동물을 사들이는 이들도 있다. 신문이나 잡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는 반려동물 기사와 칼럼, 사진, 갖가지 미담들이 넘쳐난다. 마트에는 호화로운 반려동물 용품과 홍삼이 들어가 있는 사료까지 즐비하다. 반려동물은 가히 ‘21세기 대유행’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루종일 피곤과 스트레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왔을 때 그들이 따뜻한 위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에서 나만 떨어져 나와 있는 것처럼 혼자 지내고 있을 때 ‘혼자가 아니야’라며 위안을 준다. 인간들 사이에서 받은 상처를 말없이 어루만져주기도 한다. 반려동물은 고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고독의 완충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정작 고독의 몫은 반려동물 자신의 것이다.

 

구의역 참사, 타워크레인 붕괴사고 등 재해사고 현장에는 언제나 ‘위험의 외주화’가 있었다. 위험한 일일수록 위험은 아래로 아래로 전달된다. 가장 약한 존재들이 떠맡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고독의 외주화’도 별반 다르지 않다. 힘없고 말없는 그들에게 고독을 떠넘기는 시대다. 공장에서 발정유도제로 생겨난 어린 생명은 동종과 떨어져 평생을 일정한 공간에서 다른 종(인간)과 살아가다 목숨을 다한다. 특히나 집에서만 사는 고양이의 대부분은 분양이 된 후 자신과 같은 동종을 만나 털을 부비거나 영역다툼을 할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중성화로 거세돼 멸종되지 않았으나 마치 멸종된 종처럼 ‘고독하게’ 주어진 생의 주기를 마쳐야 한다. 주인이, 집사가 아무리 자신의 반려동물을 사랑한다고 해도 개나 고양이와 같은 종이 될 수는 없다.

 

반려동물 사이트에는 자신의 반려동물이 애정결핍과 분리불안 증세를 앓고 있다며 고민을 나누는 글들이 많다. 하루 온종일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탓에 생겨난 병일 것이다. 주인이 대책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날 때면 꼼짝없이 비좁은 공간에 갇혀 불안에 떨어야 한다. 심지어 여름휴가철이 되면 버려지는 개와 고양이가 더욱 급증한다.

 

맡길 곳이 없어서, 늙고 병들어서, 새끼 때처럼 사랑스럽지 않아서, 돈이 많이 들어서 등등의 이유로 한 해 8만여 마리의 반려동물이 버려진다. 지난해 버려진 후 입양되지 않아 안락사(安樂死)한 개와 고양이는 1만6000마리에 이른다. ‘고통을 덜어주는 편안한 죽음’, 안락사가 과연 옳은 표현일까. ‘인간의 이기’ ‘고독의 외주화’란 전염병에 걸려 살처분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몇 년 후 귀엽고 감정을 표현하며 아프고 늙을 걱정 없고, 털 없이 매끈한 피부를 지닌 반려로봇이 대량생산 된다면 반려동물의 지위는 반려에서 곤두박질치지 않을까. 옥자는 불편한 진실들을 상상케 한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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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가 국내 개봉을 앞두고 영화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거대 기형동물과 산골 소녀의 우정을 다룬 영화의 설정도 파격적이지만, 영화 상영 방식은 더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옥자>의 국내 배급사인 뉴(New)는 이 영화를 극장 스크린과 온라인 스크린에 동시 개봉한다고 발표했다. 스크린의 전통적인 상영 질서가 혼란에 빠졌다. 더욱이 한국을 대표하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기에 그 파장의 강도는 깊고 넓다. <옥자>의 진보적 내러티브는 영화 상영의 진보적 테크놀로지 논란에 압도당해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영화 플랫폼의 패러다임이 순식간에 바뀔지도 모르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이른바 <옥자> 스캔들은 칸 영화제 때부터 감지되었다. 프랑스 극장협회는 <옥자>의 투자자본과 상영방식이 전통적인 극장의 생태계를 무너뜨릴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칸 영화제 기간에 옥자의 상영에 반대 성명을 내고, 보이콧 운동을 벌였다. <옥자>의 제작비를 전액 부담한 미국의 온라인 스트리밍 업체인 넷플릭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사이트를 통해 전 세계 190개국에 서비스하겠다고 발표했다. <옥자>의 극장 스크린과 온라인 스크린 동시 개봉은 영화의 미래, 스크린의 운명을 가늠하는 중대 사건이 되었다.

 

영화 <옥자> 스틸 이미지

스크린의 운명은 미로 속에 길을 잃고 있다. 당장 국내 스크린 점유율 40%에 육박하는 최대 멀티플렉스 CGV가 <옥자>의 극장 상영을 거부했다. 극장 생태계를 교란시킨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작 극장 생태계를 교란시킨 것은 CGV가 아니었던가? 영화 배급과 상영을 겸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려온 CGV가 과연 극장 생태계를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한다. CGV의 반발은 스크린 독점을 견지하려는 자사 이기주의로 비치면서, 오히려 관객을 위한 서비스 선택권의 확대라는 넷플릭스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한 꼴이 되었다. 넷플릭스의 <옥자> 동시 개봉 선언은 스크린 민주주의의 시작인가? 아니면 또 다른 스크린 독과점의 시작인가?

 

혹자는 영화가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개봉되면 전통적인 극장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넷플릭스 때문에 극장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은 음원 때문에 음반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과 비슷하다. 극장에서 ‘영화 보기’라는 문화 정서가 기술의 진보에 의해 소멸되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이번 논란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극장이 갖는 문화공간의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 극장은 단지 영화만 보러 가는 곳은 아니다.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행복한 데이트도 즐기는 여가생활의 가장 중요한 플랫폼이 극장이다. 바로 이 점이 극장이 온라인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는 근거이다. 음원시장 때문에 동네 레코드 가게가 소멸한 것에 비하면 극장은 그나마 복합적인 문화공간의 기능을 잘 살려 버틸 수 있었다.

 

<옥자>의 스크린 논쟁의 핵심은 문화와 테크놀로지, 영화기술의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스크린 독과점에 있다. CGV는 동시 개봉에 따른 극장 관객의 이탈을 차단하고자 초강수를 두었고, 넷플릭스는 관객 선택권을 명분으로 스크린의 새로운 독점권을 행사하고자 한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CGV냐, 넷플릭스냐가 아니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스크린이 얼마나 다원화되고 민주화되는가이다. 어떤 점에서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스크린 개봉의 시대가 지금의 영화 배급과 상영의 수직계열화를 해소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영화 플랫폼의 다원화로 관객의 확대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스크린은 영화 상영의 다양성을 가져올 수 있다. 단 영화 상영과 배급의 수직계열화가 해소될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배급·상영의 겸업이 유지되는 한, 스크린 종 다양성은 온라인 스크린의 시대가 와도 실현이 불가능하다. 극장 스크린은 맞고, 온라인 스크린은 틀렸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생각은 영화 기술의 진화를 막을 수 없다. 스크린의 운명은 CGV냐, 넷플릭스냐가 아니라 독점이냐, 다양성이냐에 달렸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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