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이 곧 내한공연을 갖는다. 8년 전 첫 내한공연 때 그는 정작 관객들이 기다리던 곡을 부르지 않았다. 바로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였다. ‘엄마, 내 총을 내려놓게 해주세요./ 난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어요./ 길고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고 있어요./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같이.’

 

 

수많은 국내외 가수들이 불렀던 이 노래는 1973년 그가 출연한 서부영화 <관계의 종말>을 위해 직접 만들었다. 악역 전문배우 제임스 코번과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주연한 문제적 영화로 보통의 서부영화와 달리 다소 비열하고, 사색적인 보안관과 악당이 등장한다. 노래에서 총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의 총, 혹은 추악한 권력의 상징으로도 해석된다. 1960년대 연인 존 바에즈 등과 반전운동을 함께한 저항가수였던 밥 딜런은 자신의 노래들을 목적성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을 거부했다.시인 딜런 토머스를 좋아해서 짐머맨이란 이름을 버리고 밥 딜런이 된 그는 음유시인이자 자유주의자로 불리길 원했다. 한때 그와 교유했던 존 레넌이 요절한 천재였다면 밥 딜런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 60여년 동안 40장 이상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1억장 이상이 팔렸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듣다보면 1997년 토마스 얀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가 떠오른다. 글로리아 게이너의 ‘아이 윌 서바이브’로 시작하여 ‘노킹 온…’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두 청년이 바다를 보러 떠나는 여정을 그렸다.

 

두 사람이 훔쳐 타고 떠나는 벤츠 자동차의 트렁크에 하필 암흑가 보스의 100만마르크가 실려 있었다. 두 사람과 악당들의 쫓고 쫓기는 여정,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우러져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다. 그러나 정작 영화의 백미는 엔딩 신이다. 마침내 바다에 다다른 두 사람을 배경으로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흐른다. 데킬라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서서히 죽음을 맞는 주인공의 뒷모습과 파도치는 바다가 노래와 어우러질 때 좀체로 영화관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오광수 출판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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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문화예술계의 빅뉴스 가운데 하나는 모던 포크 가수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었다. 수상 소식이 알려진 이후에도 밥 딜런이 과연 이 상의 수상자로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는 가수인가, 시인인가? 분명한 것은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대변되는 시대정신이 ‘읽는 텍스트’에서 ‘듣는 텍스트’로의 문화사적 전환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듣는 텍스트’란 말하듯 쓰여지는, 혹은 실제로 말을 하는 언어 텍스트를 뜻한다. 우리는 온갖 사적인 감정과 뉘앙스가 표현된 카톡 메시지와 페북 메시지를 ‘읽지’ 않고 사실상 ‘듣는다’. 같은 은유적 맥락에서 우리는 신문기사를 읽는 것보다 그 아래 어딘가에 모여서 분노하거나 빈정거리고 있는 댓글의 ‘목소리’를 더 즐겨 ‘듣는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소리가 나는 동영상 속 메시지들을 우리는 실제로 듣는다. 발터 베냐민이나 월터 옹과 같은 이들이 ‘기술복제시대’와 ‘2차적 구술시대’라고 일컬었던 새로운 시대의 본격적 개막은 20세기 말까지도 지체되다가 ‘디지털혁명’을 겪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그 잠재력을 활짝 발휘하고 있다. 그 핵심에는 수평적으로 만나 감성적으로 대화하는 언어가 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0월17일 (출처: 경향신문DB)

 

듣는 텍스트의 시대에 모든 언어는 노래가 된다. 전통적으로 노래의 정치적 힘은 특유의 공유가능성과 전달력에 있었다. 노래 속 언어는 쉽게 기억되는 운율을 통해 의도된 메시지를 더 많은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보다 훨씬 간편하고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 수단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전통적 노래 형식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최근의 촛불 정국에서 새로운 민중가요가 예전처럼 활발하게 만들어지거나 불리지 않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를 수단으로 한 정치적 메시지는 더 이상 노래가 아니라 감성적 언어 그 자체로도 널리 퍼져나갈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 링크된 동영상 속 누군가의 정치적 발언, 재치와 풍자를 담은 시국 관련 편집 영상들은 수천 수만명이 공유하는, 그 자체로 새로운 ‘민중가요’다. 그것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새롭게 불러지고 들려지는 ‘밥 딜런의 노래’인 셈이다.

 

전통적 노래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감성적 언어라고 해서 논리나 과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유튜브로 공개된 ‘자로’의 다큐멘터리 ‘세월엑스’는 이 새로운 감성적 언어의 불온함이 오히려 합리성과 상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 다큐멘터리의 화자는 흔한 내레이션을 쓰지 않고 자막의 텍스트만으로 우리에게 친밀하게 말을 건다. 대화체의 반말을 쓰는 파격과 함께 그는 다음과 같은 다큐 제작의도를 밝힌다. “미리 하나 말해둘게. 나는 세월호 사고 원인을 잠수함 충돌로 단정하는 게 절대 아니야. ‘외력’ 존재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절실함을 느끼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이 다큐를 만든 거야.” 이어서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자막으로 한 단어씩 조심스럽게 ‘들려온다’. “하지만/ 솔직히/ 너무 두려워.” 러닝타임이 무려 8시간49분에 달하는 ‘세월엑스’는 듣는 텍스트 시대의 방대한 연구 논문인 동시에 새로운 양식의 감성적 서사시이자 서정가요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이 새로운 디지털시대의 ‘밥 딜런’들이 내는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들이 요구하는 ‘합리적 공감’의 장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서글픈 일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듣는 힘이 약해진다. 청각이 노화되어 높은 주파수의 음들이 잘 들리지 않는 것이 한 가지다. 하지만 그런 생물학적 차원에서만 못 듣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사회적 청력은 더욱 감소한다. 옛 성현들은 이 사실을 간파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성인(聖人)’이라는 한자에 ‘귀’ 모양을 새겨 넣었을까? 위기 상황에서도 ‘서면보고’를 고집하고 질문과 대답을 회피하던 대통령, 은밀하게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청와대 비서진과 공직자들, 그 구태를 청산하고 한국인들 모두 새해에는 잘 듣고, 터놓고 대화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최유준 전남대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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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의 밥 딜런. 아마 록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하루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딜런이 전자기타를 들고 등장한 것은 1965년의 여름, 최고의 포크 축제였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이었다.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Butterfield blues band) - 알 쿠퍼(Al Cooper)와 마이크 블룸필드(Mike Bloomfield)가 있었던 - 를 백 밴드로 하고 등장한 딜런의 모습은 포크 팬들 - 특히, 소위 ‘포크 순정파’ 들 - 에게는 경악에 다름 아니었다. 딜런은 우디 거스리를 계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뮤지션이었는데 그런 그가 로큰롤이라니, 이런 식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딜런 본인이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많이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가 미국 포크의 전통을 ‘계승’ 하는 리더가 되고 싶었을까? ‘Don't Follow the Leaders’ 같은 곡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딜런의 변신은 사실 생뚱맞은 것은 아니었다. 60년대 중반은 이미 비틀즈가 미국을 휩쓸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건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포크 뮤지션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고, 딜런도 이후 그러한 충격을 술회한 바 있다. 정통 포크는 점차 낡은 것이 되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비틀즈)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있었다...내겐 명확했다. 그들이 지속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난 그들이 음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머리 속에는 비틀즈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로큰롤과 포크의 결합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시도였다. 본격적인 포크 록이 탄생하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Bob Dylan - Like a Rolling Stone. 뉴포트에서의 연주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의 무대는 야유로 가득했었지만, 딜런이 전자기타를 연주한 65년에서 66년까지의 세 장의 앨범은 매우 훌륭한 결과물을 담고 있었고(특히나, 블룸필드의 연주가 돋보인다), ‘Like a Rolling Stone’ 의 빅 히트는 포크 록에 큰 힘을 부여하였다. 6분이 넘어가는 긴 곡이 차트 2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거둔 것이다.(물론 이 때도 팬들은 계속 싸웠다. 66년의 로열 앨버트 홀 공연에서는 딜런의 새로운 스타일을 지지하는 팬들과 그렇지 않은 팬들이 충돌하기도 했다) 딜런은 이후에도 ‘빅 핑크’ 에서의 더 밴드(The Band)와의 세션 및, “Nashville Skyline” 에서는 컨트리는 물론(1969년, 모두가 사이키델릭에 목매고 있던 그 시절에!), 종교적 성향의 음악을 하기도 하면서 현재까지 계속 왕성한 활동을 해 오고 있다.
Bob Dylan & The Band - Gates of Eden

이왕 빅 핑크에서의 세션 얘기를 한 김에, 더 밴드부터 잠깐 얘기해 보자. 사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The Last Waltz”(더 밴드의 고별공연을 담고 있는 콘서트 필름. 수많은 최고의 뮤지션들이 등장해서 명연을 보여준다)으로도 유명할 것이다. 캐나다 출신의 더 밴드는 로니 호킨스(Ronnie Hawkins)의 백 밴드로 시작한 밴드로, 무려 로이 부캐넌에게 기타를 배웠다는 로비 로버트슨(Robbie Robertson)이 밴드의 중심이었다. 딜런이 우드스탁에 정착했던 시절, 같이 우드스탁에 있었던 것이 더 밴드의 멤버들이었고, ‘빅 핑크’ 는 더 밴드의 멤버들이 모여 살던 임대주택의 이름이었다. 거기서 딜런과 함께 했던 세션의 녹음이 "The Basement Tapes" 였고, 밴드의 데뷔작은 그래서 “Music from Big Pink” 가 된 것이다. 사실 더 밴드는 컨트리 리바이벌을 이끌었던 ‘컨트리 록’ 밴드라고 해야겠지만(컨트리라고 다 존 덴버 같은 스타일이 아님), 딜런과의 세션이 대단한 명연이었음은 (밴드에게나, 딜런에게나)부인할 수 없다.

(사진은 빅 핑크 앞에서의 더 밴드)

딜런 외에 포크 록의 영광을 대표했던 것은 버즈(The Byrds)이다. 뭐 사실 데뷔작은 거의 밥 딜런 명곡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이지만(일단 대표곡인 ‘Hey, Mr. Tambouring Man’ 자체가 밥 딜런의 원곡의 리메이크이다)... 버즈는 사실, 국내에서는 - 비교적 짧은 활동 기간 탓인지 - 그리 인기있는 것 같진 않지만(아마도 국내에서는 ‘Turn! Turn! Turn!’ 이 유명할 것이다. 물론 포레스트 검프 때문이다. 참고로 이 노래는 피트 시거의 원곡의 리메이크), 브리티쉬 록의 모습을 미국의 포크에 흡수시킨 전형을 만든 것은 버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딜런화된 비틀즈’ 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특히나 로저 맥귄(Roger McGuinn)의 12현 리켄베커 기타의 ‘쟁글거리는’ 연주는 밴드의 큰 개성이면서 이후의 후배 밴드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부분이기도 하다.
 
The Byrds - Turn! Turn! Turn!

물론 버즈가 그 스타일에 천착했던 것은 아니고, 사실 버즈는 활동 기간 동안 꽤나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해 왔다. “Fifth Dimensions” 앨범에서의 사이키델릭 사운드나, “Sweetheart of the Rodeo” 에서의 컨트리 록, “The Notorious Byrd Brothers” 에서의 스페이스 록의 면모들이 그 대표일 것이다. 버즈의 멤버들이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앤 영이나 버팔로 스프링필드(Buffalo Springfield) 등에도 발을 담그고 있었다는 것은 밴드의 역량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 줄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동네는 좀 달랐지만, 그 외에도 ‘California Dreamin'’ 으로 유명한 마마스 앤 파파스(Mamas & Papas)나 컨트리 존 앤 더 피쉬(Country Joe & the Fish) 등도 적어도 초창기에는 확실한 포크 록을 연주하고 있었다. 물론,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le)도 - 활동하는 동네는 틀렸지만 - 포크 록을 이끈 뮤지션이다.

무려 밥 딜런에게 인생에 보기 드물 정도의 야유를 선사했던 포크 록이 왜 그렇게 ‘대세’ 가 되었는지를 정확히 얘기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포크 록이 기존의 포크와는 분명히 다른 특성을 가졌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것은 프로테스트 포크와 록의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 당시, 포크는 민중 음악이지만 학생이나 지식인들의 음악에 가까웠고, (비틀즈를 위시한)록은 영국에서 청년 문화로써, 특히 노동계급 10대의 음악으로써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포크 록은, 하위 문화에 대한 통찰과 결합된 포크의 시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포크 록이 미국에서의 포크 록 밴드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사실, 딜런이 비틀즈를 보고 영향을 받은 것 만큼이나, 비틀즈도 딜런을 보고 영향을 받은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어쩌면 영국에서도 포크 록의 움직임이 당시에 일어났던 것은 당연할 것이다. 뒤에 적겠지만, 영국과 미국에서 각자 포크 록이 걸어간 길은 조금은 차이가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두 곳에서 모두 포크 록은 명확한 조류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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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ttalgi21.khan.kr 딸기 2010.11.01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훈씨, 글 올라오는 간격이 너무 좁아요.
    이 블로그에 여러 카테고리의 글이 올라오고 있어서요...
    이달부터는 일주일에 하나씩 올려주세요. :)

    • Grimloch 2010.11.02 0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긴 옆의 태그목록을 보니 반 이상이 제 글 관련 태그로군요-_-; 갑자기 급부끄러워지는. 알겠습니다. :)

    • Favicon of http://ttalgi21.khan.kr 딸기 2010.11.02 1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뇨!!! 급부끄러워할 것은 없어요!
      글 잘 보고 음악 잘 듣고 있는데요 ㅎㅎㅎㅎ

  2. Grimloch 2010.11.03 16: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The Band의 대한 내용에서 혼동한 부분이 있어서 수정했습니다.

  3. 이병철 2010.11.04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프로테스트 포크는 당시의 미국이 주목한 대중 음악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사진은 미국의 포크 싱어 줄리 펠릭스(Julie Felix)



당시의 영국의 로큰롤 밴드들 사이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미국 밴드라면 비치 보이스(Beach Boys)를 들 수 있을 것이다.


Beach Boys - Surfing U.S.A.


 
흔히 ‘브리티쉬 인베이전에 대한 미국의 대응’ 식으로 얘기되지만, 사실 비치 보이스의 결성은 1961년이었다.
윌슨 가의 형제들인 브라이언, 칼, 데니스와 그들의 사촌이었던 마이클 러브(Michael Love), 마이크의 친구였던 앨런 자딘(Alan Jardine)이 결성했던 이 밴드는 이른바 ‘서프 뮤직’ 을 통해서 미국의 스타로 떠오른다.

재미있게도 이들 중 실제로 서핑을 할 수 있는 것은 데니스뿐이었지만(뭐 사진에서 보이는 모습도 그리 잘 노시게 생기지는 않았다) 뛰어난 작사가이자 송라이터였던 브라이언은 해변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음악으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L.A 출신이었던 비치 보이스는 주변에 캘리포니아의 해변을 보고 살았을 것이니, 그런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서프 뮤직은 60년대 초반의 틴 팬 앨리 등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고, 즉, 주류 쇼 비즈니스가 좋아하던 그것은 아니었지만, 웨스트코스트의 10대들을 중심으로 반향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비치 보이스는 로큰롤의 활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표절이 인정되기는 했으나, ‘Surfin' U.S.A.’ 같은 곡이 얼마나 척 베리 등 로큰롤의 선구자들에게 많이 빚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물론 비치 보이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벤처스(The Ventures)나 ‘서프 기타의 왕’ 이라고 불리던 딕 데일(Dick Dale) 등도 서프 뮤직으로 인기를 얻었다. 서프 뮤직은 영국식 로큰롤이 가졌던 정도의 폭발력을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 부유해졌지만 건조한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 미국인들이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보여준 또 다른 록 음악의 단초는 포크 음악에서 나오고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60년대 초반 흑인 음악의 발전은 가스펠 등에도 공통되는 것이었고, 그런 음악들이 가져오는 낙관주의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과 같은 종교적 경향은, 역시 60년대 초반에 저항 가요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미 1930~40년대, 공산주의자 등의 미국의 급진적인 인사들의 저항의 과정에서 포크 음악은 민중의 삶을 반영하는 것으로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는 기본적으로 컨트리 음악과 뿌리를 같이 하는 것이었기에, 블루스에 컨트리 대신 포크가 결합되는 것도 사실 그렇게 이질적인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를테면 다음의 곡을 한번 생각해 보자.



우디 거스리의 원곡인 'Pretty Boy Floyd'.
이 곡은 오클라호마의 무법자 플로이드의 이야기를 다룬 곡이다



‘프로테스트 포크’ 의 원조격이었던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피트 시거(Pete Seeger)가 중심이 되었던, 포크 음악의 제도적 불합리에 대한 고발이 194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에 많은 포크 뮤지션들이 활동을 접어야 했으나(대표적으로, 피트 시거가 결성했던 위버스The Weavers), 50년대 말부터는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 밥 딜런의 ‘동지’ 이기도 했던 존 바에즈(Joan Baez) 등이 중심이 된 포크 리바이벌이 시작되었다.


(좌측 사진, 피트 시거와 우디 거스리. 역시 저항하던 분이시라.... 사진에서는 사실 좀 배고프게 생기셨다)


아무래도 주된 조류는 ‘프로테스트 포크’. 즉, 정치적 의식을 가지고 일련의 운동에 결합했던 포크 뮤지션들이었을 것이다. 포크가 전통적인 저항 가요의 형태를 띠어 오기도 했고, 당시는 베트남 전 반대나 흑인의 인권과 같은 많은 이슈들이 만개하던 시대였다.


그 전위에는 물론 (얼마 전에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던) 밥 딜런이 있었다.

딜런은 오늘날 ‘포크의 제왕’ 식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딜런이 포크의 원형을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우디 거스리의 음악을 원형으로 삼아 다양한 영향들을 받아들여 포크를 발전시켜 나간 것 또한 밥 딜런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리틀 리처드와 행크 윌리엄스의 팬이었다고도 한다)



최고의 프로테스트 포크 송의 하나로 꼽히는, Bob Dylan - Masters of War. 1990년


 
더욱이 그는 스스로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다. 우디 거스리는 그 본인이 잭 케루악(Jack Kerouac, 비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적 작가)의 징후를 보여 주는 경우이기도 했고, 앨런 긴즈버그와의 친분 등은 딜런의 그런 이미지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딜런의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짐머맨’ 이었지만, 미국 각지를 돌며 작품을 남기다 1953년, 39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인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에서 밥 딜런이라는 이름을 따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이미지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논의의 여지는 있겠지만) 딜런은 음악에 메시지를 부여할 줄 알았고, 록 음악이 기존의 로큰롤에서 벗어나는 모습의 단초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풍자적이면서도 시적이었고, 운율과 의미를 동시에 잡았던 그의 가사는 그의 음악의 매우 큰 부분의 하나
이기도 했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가 개설될 정도로 딜런의 가사는 뛰어났다)

물론, 비영어권에 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밥 딜런의 가사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니, 가사의 탁월함의 의미가 반감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딜런이 들려주는 사운드도 (후술하다시피)혁신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딜런의 ‘프로테스트 포크’ 또는 ‘토피컬 송(topical song)’ 은 앞서 말한 시적인 가사, 밥 딜런 특유의 보컬 톤과, 곡조 및 박자와는 사뭇 엇나가는 창법 등도 기존의 포크 음악과는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적어도 록 음악에 있어서 밥 딜런이 가져온 혁신은, 1965년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을 얘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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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tvpop.khan.kr mx2.0 2010.10.28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훈씨, 게티 이미지는 절대로!!! 쓰면 안 됩니다.
    게티, 타임(TIME), 뉴욕타임스, 내셔널 지오그래피, 디스커버리 등의 사진은 쓰지 않아야 해요.
    저작권법이 '걸면 걸리는' 것이고 '안 걸면 안 걸리는' 것인데,
    특히 게티는 대략 건다고 생각하심 될 것 같아요. :)

  2. Favicon of http://www.ttalgi21.com 딸기 2010.10.30 1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터폴&메리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직장인이 될 때까지(지금까지라고 하지 않은 것은 최근 음악을 거의 안 들었기 때문에;;) 엄청 들었죠. 얼마 전 메리가 죽었다는 소식 듣고 많이 슬펐습니다. 이름 보니 반갑네요.

    • Grimloch 2010.10.30 17:0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긴 환갑 넘으셨겠네요. 전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좋아했습니다. 아 그래서 내가 생각이 없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