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6.12.12 [문화와 삶]광장의 연말
  2. 2016.12.01 [문화와 삶]아시아문화전당, 그리고 금남로에서

연말이 실종됐다. 모두가 알다시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이다. ‘그래도 설마 그랬을 리가’라는 의심은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는 뉴스에 의해 상상 그 이상의 현실을 보여준다.

 

매주 한 차례씩 세 번이나 카메라 앞에 서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은 사태를 진정하기는커녕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프로판 가스통을 투척하는 꼴이다. 촛불은 꺼지기는커녕 주말마다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청와대와 헌법을 참호와 방패 삼아 버티겠다고 선언했다. 이러다간 정말 가족, 친구들 송년모임을 광장에서 하게 생겼다. 아니, 신년모임까지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회사원들이 빠져나간 주말의 광화문 식당가는 보통 영업을 하지 않지만, 요즘은 토요일 저녁 한 시간씩 기다려야 식사를 할 수 있는 게 예사다. 대한민국의 중심이라는 광화문에 온 국민이 몰려 따뜻한 밥 한술을 먹으며 상권 활성화에 불을 지피니 이것이야말로 국민화합이요, 창조경제를 이루는 ‘일타쌍피’의 심모원려라는 실없는 생각도 들곤 한다.

 

실종된 건 연말만이 아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대형 백화점 등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 문구와 함께 성탄 소품들을 매년 그렇듯 설치했지만 이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게다가 한창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기 시작할 때임에도 우리의 귀엔 ‘아침이슬’ ‘상록수’ 같은 광장의 노래들이 연말의 주제가가 되지 않았나 싶다. 계속되는 경기 침체로 캐럴이 들리지 않은지 오래됐지만 올해는 유독 심하다. 시국이 이 모양이다보니 머지않아 대한민국 상공을 찾아 올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이해해주시겠지만.

 

경향신문과 씨채널방송, 아가페문화재단, 백석예술대학교가 공동 주최하고 서울시와 한국관광공사가 후원하는 ‘2016 서울 크리스마스 페스티벌(SCF)’이 개막한 12일 시민들이 청계천에 설치된 화려한 조명을 구경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그래도 캐럴이 없어 아쉽다.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틀 수가 없어져서다. 얼마 전 3년 가까이 운영에 참여하던 공간의 문을 닫았다. 술은 팔지만 회원제 공간이다보니 일반 술집이나 카페에 비해 훨씬 커뮤니티적인 분위기였다. 모든 커뮤니티는 처음엔 대부분 남으로 시작해서 친구가 된다. 딱히 약속을 정하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늘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런 관계가 누적되다 보면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명절 때 차례나 세배 같은 요식 행위를 마치고 모여 함께 만두를 빚어 국을 끓여 먹는다든지, 자체적인 벼룩시장을 연다든지, 잘 알지 못하는 밴드의 공연도 ‘우리 공간’에서 열리니 티켓을 사서 열광적으로 관람한다든지 하는 모습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닭살 돋는다’는 생각과 함께 한 가지 문구를 떠올리곤 했다. 가족 같다고. 가족이란 때때로 피곤하다. 마음에 없는 대소사를 챙겨야 하고, 익숙해지지 않는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개인의 욕망과 최소 사회 단위의 의무 사이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겪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스트레스를 감수하는 이유는 단순히 의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공간에서 부대낀다는 유대감, 어쨌든 내 편을 들어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들은 단순히 혈연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미덕이다. 그 미덕에서 의무만 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3년 남짓, 그 안에서 때때로 그런 작은 바람이 이뤄졌던 것 같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면 더욱 그랬다.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을 마다하고 모두 모여 왁자하게 놀 때면 특별한 정찬이나 이벤트가 필요 없었다. 이제는 드라마에서조차 잘 다루지 않는 대가족의 이상향, 즉 <전원일기>에서 볼 수 있던 정취의 아스라한 냄새를 맡곤 했던 것이다. 그럴 때 트는 캐럴은 호객 행위로 트는 상점의 그것과는 다르게 들렸다. 빙 크로스비의 ‘실버벨’에는 진심어린 온기가, 머라이어 케리의 노래에는 어설프게나마 합창하고 싶은 설렘이 깃들었다. 사회적 지위와 격리된 사생활을 내려 놓은 채 얽히고 얽힌, 관계들이었기 때문이다. 공간의 문을 닫았기에 그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게 아쉬울 뿐이다.

 

올해 크리스마스이브는 토요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때도 광장에 있어야 할지 모른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함께 나눌 수 있는 캐럴 한 곡 합창했으면 한다. 정부도, 재벌도 주지 않는 온기를 그래도 광장의 우리끼리 서로 나누고 있다는 기분은 제법 그럴싸할 것이다. 그 따뜻한 기분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는 잠깐의 연말 및 성탄 선물이 되리라.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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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문화계를 분탕질한 차은택의 범죄 행각이 드러나는 어수선한 정국에서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아문당)이 개관 1주년을 맞았다. 아문당은 개관 전부터 예산삭감으로 직원 채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개관 직전 예술감독이 교체되는 등 파행 운영을 거듭했는데, 작금의 정국과 관련된 음모가 개입돼 있었다는 일부 언론 보도도 있었다. 다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서 열린 개관 1주년 기념 페스티벌이 아문당의 이런 상황을 반영한 듯했다.

 

그럼에도 준비 기간을 포함, 10여년 동안 총 7162억원의 공사비를 투입한 이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은 광주의 자랑거리다. 지난주 개관 1주년 페스티벌을 관람하기 위해 서울에서 광주를 찾은 어느 미디어 아티스트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그는 아문당과 같은 초일류 문화예술 시설이 수도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활용도가 떨어지는 데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문당이 ‘국립’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활동하는 자신도 이 시설을 활용할 권리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갸우뚱해졌다. 지역문화재단이 별도로 있는 만큼 아문당은 ‘지역성’이 아닌 ‘한국’과 ‘세계(아시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이었다. 과연 그럴까? 그도 흔쾌히 동의해주었지만, 수도권의 예술가나 관객들이 진보적 예술 현장을 찾아서 불편을 감수하고 직접 지역을 방문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화적 전복의 의미를 갖는다. 아문당의 존재 의의는 바로 그 ‘지역성’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아문당의 명칭에는 두 가지 키워드, ‘아시아’와 ‘문화’가 들어 있다. 아문당은 ‘한국 문화’도 ‘세계 문화’도 아닌 ‘아시아 문화’를 표방한다. 여기서 아시아는 단순히 지리적 공간과 경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이라는 단어에 함의된 폭력적 국가주의로부터도, 서양의 문화제국주의가 오염시킨 ‘세계’라는 이름의 허구적 보편성으로부터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제시된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가 자리하는 물리적 공간(지역)을 잊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인간적 가치(보편)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 말하자면 ‘지역적 보편’이라는 21세기적 비전 탐구를 위한 키워드인 것이다. 아문당은 아시아 예술가들이 모이고 소통하는 물리적 장소로서의 기능도 해야 하지만, 그에 앞서 지역적 보편의 가치 공유를 위한 역사·문화적 모델이 설정되어야 한다. ‘광주의 오월’이 그 핵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문당은 또한 ‘예술의 전당’이 아니라 ‘문화의 전당’이다. 음악인의 시각에서 둘의 차이는 쉽게 판별된다. 예술의 전당이라면 ‘예술음악’이 부각되고 ‘콘서트홀’ 중심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융합, 나아가 예술과 삶의 융합이 강조되는 문화의 전당에서 음악은 융합 예술을 위한 한 가지 중요한 매체로 간주될 뿐이다. 음악전문가로서 아쉽게 느껴지는 일이지만 아문당에는 어쿠스틱 음향을 세심하게 고려한 콘서트홀이 사실상 없다. 대신 ‘예술극장1’과 같이 객석과 무대를 창작자의 의도대로 자유롭게 설치 구성할 수 있는 대규모 가변형 극장이 있으며, 그 밖에 사운드아트나 미디어아트의 융합적 상상력을 구현할 수 있는 첨단의 복합 전시관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하드웨어가 그렇다면 그에 맞는 음악공연이 기획되어야 하는데, 아문당의 음악공연 기획자에게는 그 자체로 도전적 과제가 될 것이다. 요컨대 아문당은 20세기식 현대음악 연주회의 관습조차 뛰어넘는 문화적 전복성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토요일 아문당의 페스티벌 공연을 관람한 뒤 아문당과 맞닿은 금남로 거리에서 촛불집회에 참가했다. 거리에 모인 시민들은 어떤 전복의 순간을 예술적으로 꿈꾸고 있을까? 그들은 예술과 삶의 융합이 매번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연출되어야 하는 부조리한 나라의 예술적 국민이다. 내년 아문당 개관 2주년에는 촛불 시민들이 더 이상 추운 거리 위가 아니라 아문당의 예술광장에 모일 수 있으면 좋겠다.

 

최유준 전남대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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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