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대중문화와 영상의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일련의 스토리텔링을 탐구하는 학자로서 탐사고발 프로그램이나 사극에 관한 분석을 주기적으로 수행한 바 있지만, 흔히 ‘막장 드라마’로 분류되는 장르에 관해서는 충분한 관심을 둔 적이 드물다. 아마도 각자도생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가족제도 내부에 존재하는 숨겨진 비밀이나 이로 인한 첨예한 갈등이 서사를 이끌어가고, 파괴적인 감정의 충돌과 캐릭터들의 모진 대화들이 문양처럼 배어든 이런 유형의 텍스트를 감당할 자신감이나 선호도가 별로 크지 않았던 데 기인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두 달이 넘게 온 나라를 마구 뒤흔들면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권력의 황당하고 무성찰적인 이면, 그것의 원색적이고 드라마틱한 속살들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라는 역대급 막장 드라마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미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의 공적 시스템의 붕괴와 난맥상을 발현하는 구체적인 증거와 의혹들이 쏟아져 나온 바 있는 이 미증유의 정치 막장 드라마 속에서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실로 그로테스크하게 욕망하는 주체들의 몰상식한 탐욕이자 바닥을 헤아리기 어렵게 추락한 권력의 무능과 적나라한 민낯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국정 책임자의 미스터리한 행적에서 그가 대독했거나 던졌던 유체이탈과 불통이 선연한 발화들까지, 또한 비선이라는 비정상적인 네트워크의 관행화에서 국정농단이라는 생경한 단어의 실체를 실감하게 해주는 관련 인물들의 구태에 이르기까지, 이 드라마는 숱한 공분과 허탈감을 매개하는 데 너무나 압도적으로 성공적이다.

 

국회 정문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를 하던 시민들이 탄핵안이 가결되자 일제히 환호하고 있다. 이상훈 기자

 

아마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 사건을 가족멜로와 코미디, 미스터리, 패러디, 공포, 음모, 반동, 폭력, 부조리 등이 고루 섞인 다양한 장르적인 문법으로 풀어내는 텍스트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부모의 후광으로 권력의 최고 정점까지 올라간 한 문제적 인물의 부상과 스펙터클한 추락과 같은 강렬한 멜로드라마적인 설정에 초점을 맞추어, 이 사건의 서사화를 시도할지 모른다. 동시에 그런 과정에서 대중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주요 캐릭터들이 어떻게 재현되고, 누가 배역을 맡을지도 잠시 궁금해진다. 말을 타는 자신의 딸에 대해 집요하리만치 강한 특권의식으로 그리고 고삐 풀린 탐욕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한 오만한 여인, 실세로 군림했던 문고리 3인방, 선택적인 기억력으로 강한 인상을 준 ‘왕실장님’과 목이 뻣뻣한 민정수석, 교수 출신으로 거간꾼 역할을 수행했던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군상들의 퍼레이드와 처세술의 적나라한 단면들이 재구성될 것이다. 또한 혹자는 보다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냉소적인 감정과 사회적 환기효과가 체화되는 치밀한 역사물이나 반멜로적인 영화로, 진정한 의미의 국민 통합을 이루어낸 이 소동극의 교훈과 심대한 함의를 대안적으로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을 파고드는 의문점이 있다. 상당수의 대중은 애초에 박근혜라는 인물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던 것일까. 또한 그를 둘러싼 한때 공고했던 이미지와 신화를 고안하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 그를 권좌로 올려준 이들의, ‘기술자’와 ‘부역자’라는 말이 매우 걸맞은 주체들의 행적은 어떻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작금의 사건을 다루는 대하드라마나 선이 굵은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그 속에는 세밀한 다큐적인 복기 및 주요 팩트의 재구성과 함께 오늘의 독선적이고 부조리한 행태를 노출한 권력을 그 자리에 있게 한 조직적인 기획의 해부, 그리고 대중의 판타지에 대한 자성어린 냉정한 탐구도 마땅히 필요해 보인다. 상상과 풍문의 영역에서 공적 공간으로 확장돼, 수많은 이들의 각성과 문제의식을 점화하면서 광장을 수놓는 거대한 촛불로 진화하게 된 이 사건은, 미래 세대에게 반면교사의 핵심적인 자료이자 비판적 역사교육의 생생한 자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미래에 제시될 스토리텔링의 시작은 매우 불운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결말’이 이뤄지기 위해선 주권자인 시민 다수가 광장과 일상 속에서 끈질기게 작가적인 상상력과 의지를 결집해낼 많은 이유들 또한 명백하게 존재한다. 훗날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교훈과 통찰, 그리고 대안과 성찰을 줄지에 관해서도 이 막장 드라마는 준엄하게 질문한다. ‘이게 나라냐’를 넘어, 들불처럼 타오르는 촛불과 탄핵, 그리고 통감의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이 사건 ‘이후’의 이야기들을 숙고하고, 새로운 체제를 진중하게 준비할 시간이다.

 

 이기형 |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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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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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방송 결산에서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히는 드라마 중 하나는 MBC <왔다 장보리>다. 선한 여주인공과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또 다른 여성의 대결을 그린 이 드라마는 진부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악역의 강렬함과 그에 비례하는 대중들의 징벌적 욕망을 부추겨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거뒀다. 그 뒤를 이어 현재 방영 중인 <전설의 마녀> 역시 더 억울한 주인공과 더 힘센 악역을 내세워 약자들의 복수심을 자극하며 화제를 모아 제2의 <왔다 장보리> 신화를 재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주목할 것은 두 주말극의 연이은 흥행이 시사하는 의미다. MBC는 오랫동안 드라마 왕국으로 불려왔다. 그러한 MBC의 호칭이 주말드라마 왕국으로 새롭게 바뀐 현상 자체가 어느덧 나이 들고 고루해진 지상파 드라마의 위기를 말해주고 있다.

<왔다 장보리>와 <전설의 마녀>의 연속 흥행은 그 위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들 성공비결의 핵심은 MBC 드라마의 강점이던 트렌디드라마 흥행공식들을 통속극의 장으로 끌어들여 문어발식 갈등 확장을 꾀한 데 있다. 출생의 비밀, 신데렐라, 상류층의 후계 다툼, 악역의 엽기적 범죄 행각, 복수, 기억상실, 얽히고설킨 인물관계 등 ‘막장드라마’의 필수 조건을 다 갖추고, 여기에 전문직 드라마, 로맨틱코미디, 미스터리 등의 여러 장르적 요소들까지 마구잡이로 뒤섞었다. 최신 트렌디 드라마의 특징인 복합장르를 막장드라마에 적용한 셈이다.

가령 <왔다 장보리>는 한복 장인을 꿈꾸는 디자이너들의 경쟁이라는 전문직 드라마적 요소가 주요 스토리의 한 축을 차지했고, 출생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은 기존 통속극의 단순 장치가 아니라 범죄수사장르물을 보는 듯한 미스터리 구도의 모양새를 취했다. <전설의 마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제빵을 소재로 한 전문직 성공기, 출생의 비밀에 대한 단서를 하나씩 제공해 퍼즐처럼 풀어가는 추리 구조에 영화 <하모니>, <7번방의 선물> 등을 연상시키는 교도소 배경의 휴먼드라마, 집단 주인공을 내세운 앙상블 드라마 형식까지 더했다. 기존의 진부한 흥행공식을 안이하게 재탕하는 막장드라마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는 시도다. 그만큼 제작진의 공이 더 들어가는 작업인 것도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과연 막장드라마의 진화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이들은 통속극의 범주를 넘어 다른 장르로 눈을 돌려 새로운 흥행공식의 조합을 찾았다. 영리한 전략이다. 하지만 그 공식들을 합하는 과정에서 드라마의 기본인 개연성을 무시하고 인간에 대한 얄팍한 묘사로 일관하는 태도는 기존의 막장드라마와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더 많은 갈등 요소를 채워 넣느라 원칙과 인간드라마는 더욱 축소됐다. 실제로 <왔다 장보리>는 여러 장르적 시도를 끌어들였으나 결국엔 연민정(이유리)이라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악녀의 기행에 의존했고, <전설의 마녀>는 장례식과 교도소까지 시트콤의 배경으로 이용하며 인간을 희화화했다.

요컨대 이 둘의 흥행 성공은 막장드라마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오해하거나 잊어왔던 중요한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막장드라마의 핵심은 표면적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이야기든 해도 괜찮다는 정신과 태도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한국드라마의 시청률 만능주의가 낳은 괴물이 바로 막장드라마라는 사실 말이다.


MBC드라마 '전설의 마녀'의 한 장면 (출처 : 경향DB)


지상파 드라마의 침체를 말할 때도 그렇다. 위기론은 늘 시청률 문제로 귀결된다. 수많은 드라마가 한 자릿수 시청률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위기의 증거로 거론되고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최고작으로 치켜세워진다. 시청률 집착이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평가 기준에는 관심이 없다. <왔다 장보리>와 <전설의 마녀>가 다시금 증명한 재미 우선주의는 곧 다른 막장드라마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내년에는 어떤 진화된 괴물을 목격하게 될까. 드라마 생태계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날로 희미해지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기다.


김선영 |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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