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큰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0.04 50년대 말, 엉클 샘이 복수를 시작했다
  2. 2010.10.01 로큰롤의 반항아들
  3. 2010.09.27 로큰롤의 탄생 (2)

Daily Mirror지에 실린 에디 코크란의 사망 소식


50년대 말엽, 로큰롤은 본래의 생동감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로큰롤의 창시자들이 계속하여 음악 활동에 종지부를 찍기 시작하면서 로큰롤은 위기를 맞았다.


아마 가장 황당한 것은 리틀 리처드일 것이다. 한창 활동 잘 하고 있던 1957년, 호주 투어 중에 갑자기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목사가 되기로 하면서, 1962년 다시 복귀할 때까지 복음 가수의 삶을 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복음 가수로 살면서도 그의 무대 매너나 복장은 여전히 단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리틀 리처드는 원래부터 성실한 청년의 인상도 아니었고 - 사실 좀 지저분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 오히려 인생이 파격으로 점철된 사람이었으니, 이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사건이었다.

1958년에는 ‘제왕’ 엘비스가 군에 입대하면서 활동을 중단했고, 제리 리 루이스가 영국 투어 중 57년에 했던 혼인이 알려지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물론 혼인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지만(거기다 루이스는 이미 두 번의 혼인 경력이 있었다) 그 상대가 문제였다.
그의 사촌 형제이자 밴드의 베이시스트였던 J.W.브라운의 딸이었던 마이라가 상대였고, 그녀는 혼인했던 57년 말 당시, 13살의 소녀였다. 그리고 문제는, 루이스가 전처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비난의 목소리가 영국과 미국에서 물밀 듯이 몰려왔다. ‘검둥이 음악이나 하는 놈들’ 에 대한 백인 사회의 반감이 이 사건을 계기로 불이 당겨진 것이었다. 60년대에는 활동 무대를 유럽으로 옮기는 및 컨트리 음악으로 진출해 활동하기도 했으나, 로큰롤 스타로서의 생활은 그렇게 단숨에 끝나버린 것이었다.


1959년은 더 심각했다. 버디 홀리와 리치 발렌스가 모두 비행기 사고로(그리고 같은 사고로) 사망했고, 척 베리가 ‘청교도 백인’ 들의 손에 사실상 활동이 끝장나고 만다.

사건의 골자는 척 베리가 백인 미성년자 소녀를 데리고 자신의 투어에 동행시켜 연방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척 베리를 주시하고 있던(‘요새 것들이 좋아하는 검둥이 음악의 마왕’ 이 아니겠는가) 차에 이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척은 아무 일도 없었으며, 여자가 나이를 속였고, (가장 중요하게는) 재판이 인종주의적 이유로 날조되고 있음을 주장했으나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만다. 뒤에 3년으로 감형되기는 하나 록의 고전들을 계속 쏟아내고 있던 척 베리는 그렇게 ‘콩밥 먹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60년에는 정말 로큰롤 반항아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던 에디 코크란과 진 빈센트가 타고 있던 택시가 화물 트럭과 충돌하면서 코크란은 즉사하고, 진 빈센트는 여생을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뮤지션은 아니었지만, 로큰롤의 보급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로큰롤의 아버지’(그래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린) DJ 앨런 프리드(Alan Freed)는 페이올라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끝장나 버렸다.
페이올라(payola)는 무명가수라도 방송국에 돈을 건네면 노래가 전파를 탈 수 있다는 세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레코드 판매를 위해 레코드사는 사운드를 대중이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했고, DJ가 당시 가장 중요한 록 ‘게이트키퍼’ 라는 것은 분명한 상황에서, 페이올라는 홍보의 가장 효과적이면서 저렴한 형태로서 성행하고 있었다.

팝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꼽히는 이 사건(페이올라가 옹호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페이올라에 대한 수사는 로큰롤이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는 문제가 있다)으로 페이올라가 불법화되면서 프리드의 커리어는 끝장나 버렸다.


그나마 엘비스나 제리 리 루이스, 로이 오비슨 정도가 60년대에도 살아 남아 활동할 수 있었지만, 이미 로큰롤의 ‘왕’ 이 된 엘비스에게서 예전과 같은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엘비스가 입대하기 전이었지만, 1956년에 발표한 ‘Love Me Tender' 같은 곡이 얼마나 기존에 로큰롤이 거부했던 모습들(데이비드 피처스키(David Pichaske)에 따르면 말쑥함, 세련됨 및 아카데믹한 악기 편성, 서정적인 부드러움, 신비로움 등)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보면 이는 이미 예고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중산층은 ‘예전의 가치’ 를 내세우면서 로큰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 있던 로큰롤 가수들도 이제는 방송국에 발붙이기가 어려워졌다. 물론 그래도 사람들은 음악은 필요했다. 다만, 로큰롤은 이제 아니었을 뿐이다. 50년대에는 로큰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나 빙 크로스비, 패티 페이지, 냇 킹 콜 등은 로큰롤의 시대에 스탠더드 팝의 사운드로 인기를 끌고 있었고, ‘Smoke Gets in Your Eyes’ 등의 곡을 남긴 플래터스(Platters)나 문글로우즈(Moonglows) 등의 흑인 그룹들의 발라드가 역시 인기를 끌고 있었다.

Platters - Smoke Gets in Your Eyes
 
그렇지만 로큰롤의 빈 자리를 채울 필요는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50년대의 세대들은 로큰롤의 활력을 맛본 상황이니 이전의 음악들만으로는 어려웠다.
곧 거친 활력은 유지하되, 제도권의 ‘입맛’ 에 맞추어 소독되고 제어된 스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큰롤 스타들의 부재는 이를 부채질했고, 페이올라 스캔들 이후 라디오의 엄격화와 음악 형태의 표준화가 시도되면서, 아마도 (프랭크 시나트라나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를 제외한다면) 오늘날 아이돌 스타의 단초가 되었을 틴 아이돌 스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프랭키 아발론(Frankie Avalon)이나 바비 라이들(Bobby Rydell), 처비 체커(Chubby Checker) 등이 앨런 프리드와는 달리 페이올라 스캔들에서 살아남은 딕 클락(Dick Clack)과 아메리칸 밴드스탠드(American Bandstand)를 통해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이 로큰롤의 외피를 뒤집어 쓴 예쁘장한 백인 아이돌 스타들에게서 이전의 생기를 찾아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비틀즈가 등장하기 이전에 모타운/스택스 등에서 나오는 리듬 앤 블루스나,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로 대표되는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좀 더 혁신적이었던 새로운 팝 음악 정도가 60년대 초반의 미국의 대중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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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필립스(Sam Phillips)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발견한 것은 1954년 7월이었다.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레코드를 녹음하려는 트럭 운전사 청년은, 가스펠은 물론 힐빌리 스타일의 다양한 컨트리 음악이 공존하는 동네였고, 하울린 울프(Howlin' Wolf)와 같은 유명 블루스 뮤지션이 자신들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던 동네였던 멤피스 출신이었으니, 로큰롤 스타로서는 딱 들어맞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의 데뷔작은 이런 멤피스의 전통 하에서 선정된 곡들로 구성된 앨범이었다. 다만 원곡의 스타일과는 맞지도 않는 엘비스의 목소리(어머니 생일 선물로 앨범 녹음하는 청년이 프로일 리는 없다), 컨트리풍의 리듬 기타 등 많은 부분은 원곡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자유로운 느낌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리듬 앤 블루스의 반항성을 알아 버린 컨트리 음악은 통상 로커빌리(rockabilly)라고 불리게 된다.


성공은 순식간이었다. 앞서 말한 반항아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지금에야 보면 느끼하게도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그것도 그윽하게 보였을 것이다.

엘비스는 곧 대형 레이블인 RCA와 계약하고, 별명이 ‘대령’ 이었던 톰 파커를 매니저로 받아들이면서 ‘Heartbreak Hotel’, ‘Hound Dog’, ‘I Forgot to Remember to Forget’ 같은 히트곡을 쏟아 내면서 당대의 최고(이자 현재까지도 ‘이 동방의 나라’ 에도 기념관이 있을 정도로 기억되는) 스타가 되었다.
또한 엘비스는 배우로서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물론 흥행을 위해 졸속으로 기획된 영화에도 얼 빠진 모습으로 다수 출연했지만,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그의 인기몰이에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Elvis Presley - Hound Dog

그러나 로큰롤의 광기는 엘비스에서 끝이 아니었다.

샘 필립스의 선(Sun) 레코드는 곧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를 발굴했다. 억지로 검은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을 하던 엘비스와는 달리 곱슬거리는 금발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루이스는, 특유의 자유분방한 보컬과 부기우기 스타일의 연주는 엘비스의 그것과도 구분되는 다른 매력의 로큰롤을 들려주었다.
또한, 엘비스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다니는 청년이었지만 그는 엘비스와는 달리 방탕을 즐기기로 유명했다. 아마 당대 로큰롤의 난봉꾼 중에서도 최고였을 것이다.
공연 중에 자신의 악기에 불을 지른 최초의 아티스트였을 것인 루이스는 ‘Whole Lotta Shakin' Goin' On’ 등의 히트곡을 계속해서 발표, 뒤에 소개할 희대의 결혼 사건으로 끝장나기 전까지 엘비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며, 엘비스를 RCA에 뺏긴 이후 스타를 찾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선 레코드를 반석에 세우는 역할을 한다.


루이스만 난폭한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는 충분히 난폭하긴 했지만, 엘비스는 반항아 이미지만 있었지 그렇게 난폭한 스타는 아니었다. 유명한 마마보이였고, 1957년에는 게다가 군대에 가야 했다.

로큰롤의 ‘제왕’ 이 군대에 간 이상 새로운 스타가 끼어들 빈틈은 충분했다. 뒤에 더 후(The Who)도 커버하게 되는 ‘Summertime Blues’ 로 유명한 에디 코크란(Eddie Cochran)과, 역시 ‘Be-Bop-a-Lula’ 로 유명한 진 빈센트(Gene Vincent) 등은 반항아를 넘어서 말론 브란도의 폭주족의 이미지를 이어받아 로큰롤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문제였다면 표리부동하지 않게, 이미지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와 비슷한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겠지만.


물론 세상이 반항아들로 가득 찼다면 그건 너무 피곤할 것이다. 코크란이나 빈센트와는 달리 확실히 ‘착해 보이는’ 로큰롤 스타들이 있었다.

엘비스의 팬이었던 버디 홀리(Buddy Holly)는 그런 경우였다. 포마드를 발라 넘긴 머리에 반항아처럼 차려 입고 다니던 다른 로큰롤 스타와는 달리, 버디 홀리는 로큰롤을 연주하기는 했지만 뿔테 안경에 프레피 룩,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불러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반항아들 사이에 모범생 한 명이 끼어 든 모양새였던 것이다.

하지만 버디 홀리가 로큰롤에 남긴 업적은 지대한 것이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한 최초의 록 보컬리스트였고, 더블 트랙킹(Double-Tracking)과 같은 발전된 방식의 스튜디오 레코딩 기술을 개발하는 한편, 오늘날 일반적인 두 명의 기타리스트, 한 명의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라는 밴드 편성을 확립시키기도 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로커빌리의 상투형을 벗어나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입하기도 하며, 로큰롤에 녹아든 백인 음악과 흑인 음악의 요소들을 단순한 악곡 구성 속에서 일신시켰다.

 

Buddy Holly & The Crickets - That'll be the Day

이 모든 것은 버디 홀리가 단 16개월의 활동만으로 이뤄낸 성과이다. 안타깝게도 겨우 22세의 나이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버디 홀리는 비틀즈를 위시한 일련의 영국 밴드는 물론,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와 같은 뮤지션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착해 보이기로는 버디 홀리에 못지 않았던(물론, 듬직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 정도의 이미지이지만) 10대 아이돌 스타의 원조격인 폴 앵카(Paul Anka)나, 역시 10대들의 우상이었던 리키 넬슨(Ricky Nelson), 뒤에 비틀즈나 홀리즈, 사이먼 앤 가펑클에게도 영향을 미친 풍부한 하모니를 들려준 에벌리 브라더스(The Everly Brothers) 등도 50년대 말에 엘비스, 루이스 등을 이어서 나타난 새 시대의 로큰롤 스타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문제는 이 ‘악마 같은 검둥이 음악들’ 을 듣는 10대들을 바라보는 청교도적인 미국인의 시선들은
그리 곱지 않았던 것이다.

요란한 비트에 낯뜨거운 가사, 엉덩이를 살랑거리는 백인(엘비스 프레슬리)에 오리걸음을 걸으며 기타를 치는 흑인(척 베리)까지 다양한 ‘악의 무리’ 들이 있었다. ‘엉클 샘’ 은 이 악의 무리를 응징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로큰롤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10대들이 ‘자신들의 음악’ 으로 삼을 만했던 그 개성도, 적어도 50년대 말, 로큰롤이 대중음악으로 성장한 이상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 로큰롤은 새로운 음악이었지만, 그렇다고 대중 음악의 관습적 견해가 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비스 등과 마찬가지로 10대들의 스타였지만 상대적으로 몰개성적이었던 앵카나 리키 넬슨 등은 로큰롤의 몰락을 예기하는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곧 로큰롤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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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팝 칼럼니스트)







록은 어떤 음악인가라는 질문은 대답하기 쉬운가?

근래 차트에 오르는 곡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곡들을 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실, 현실적으로 접하기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록 음악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일부는 기타, 드럼 등의 연주자들과 보컬리스트가 있고, 공중파에서 쉽게 듣기 어려운 강렬한 음악을 하는 경우를 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록은 이미 전 지구적인 예술 형식의 하나이고, 세계화는 이러한 ‘외국 태생의’ 문화를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최초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록 음악은 음악 자체로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양상의 문화적 맥락의 한 요소의 의미를 가져 왔다고 생각된다. 음악에 산업의 산물이라는 점 외의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록 음악은 그 다양한 하위 장르로 인해 악명이 높다. 그런 장르 구분이 일관되고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 록을 좋아한다던 몇몇 친구들이 줄줄 외고 다니던 계보는, 록을 좋아한다던 그 친구들마저 위의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워했을 것임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

물론 앞으로의 글들도 위 질문에 명확히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록을 정확히 음악적으로 정의내린다는 시도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글들의 목적은, 록 음악이 전개되어 온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다.

록은 그 동안 역동적이면서도 다양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 왔고, 그렇다면 그 자화상은 그 많은 스타일과 형식들을 모두 다루지는 못하더라도 그 궤적을 어렵게나마 쫓아 가는 것이 될 것이다.

아마도 그런 록 음악의 궤적의 출발점이 될 지점은 로큰롤일 것이다. 사실, 로큰롤이 컨트리 앤 웨스턴과 리듬 앤 블루스의 결합을 통해 나타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그렇다면 로큰롤이 나타난 것은 대체 언제인가?
물론 이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로큰롤에 대한 일반의 경험은 1950년대에 이르러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냉전의 시대에서 비로소 시작되었을 것이다. 미국은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여 강대국의 지위에 올랐지만, 냉전은 미국 사회의 경직성, 보수주의적 성향을 가져오게 되었다. 미국 사회의 사회적 모순은 침묵되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는 10대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적 가치’ 에 정면으로 부딪히게 되었고, 급격한 현대화를 이룩한 미국의 자본주의는 학교를 졸업한 경우이더라도, 밝은 직업 전망을 내놓을 수 없었다. 사회는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기술직 근로자 정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흑인의 삶은 더 심각했다. 흑인은 이미 50년대 이전에, 남북 전쟁 이후에도 평탄치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흑인의 문화는 백인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고, 흑인들은 그러한 삶 속에서 블루스(‘blues‘ 는 문자 그대로 슬픈 음악이다)를 만들어 내었고, 남부의 농촌 지방에서 발전한 델타 블루스는 그 형식 자체는 비교적 정형적이었지만, 백인 음악보다 감정의 표현이 풍부했고, 특히나 균등하지 않은 비트의 세분에서 나오는 그루브와, 블루스 특유의 블루 노트는 블루스를 백인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델타 블루스는 1930~40년대 대공황 시기의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거치면서 도시의 빠른 생활 리듬을 반영한, 더 빠르고 격렬한 음악이 되었다. 텍사스나 시카고, 뉴올리언스 등에서는 이미 티본 워커(T-Bone Walker)나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비.비. 킹(B.B. King), 패츠 도미노(Fats Domino) 등이 로큰롤 이전에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로큰롤이 언제 나타났는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미 로큰롤은 흑인 사회에서, 백인 문화와는 구별되는 흑인 문화로서 존재해 왔던 것이다.
로큰롤이 그 탄생시부터 리듬 앤 블루스 자체와 명확하게 구별되어 나타난 것도 아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는, 리듬 앤 블루스는 흑인 청중을, 로큰롤은 백인 청중을 의식한 용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아마도 전자의 경우로서 가장 로큰롤에 근접한 흑인 뮤지션은 척 베리(Chuck Berry/위 사진)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등일 것이다.
척 베리는 힘 있는 리듬을 바탕으로 해서 시카고 블루스를 로큰롤로 변화시켰고, ‘Maybellene’ 등의 히트곡에서 청소년들의 생활을 다루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리틀 리처드는 광적인 피아노 연주와 당대의 ‘샤우터’ 다운 거친 창법, 인상적인 무대 매너로 이후의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Chuck Berry - Johnny B. Goode. 뒤에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등도 커버하게 되는 명곡이다


이와 같은, 라디오에서 들려지는 흑인 음악은 프랭크 시나트라 등의 일반적인 곡들보다 활력이 있었고, 뮤직 비즈니스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백인 중산층 10대들은 당대의 호황에 힘입어 상당한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열풍’ 을 일으켜 부모 세대 이상의 영향력을 보일 수도 있었다. 레코드 시장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구매력을 발견했고, 이젠 이들을 고객으로 유통시킬 수 있는 상품이 필요했다. 앨런 긴즈버그나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등이 이미 이 시대의 반항의 상징이 되어 있었고, 로큰롤의 폭발에도 그런 인물이 필요했다.


빌 헤일리(Bill Haley)의 성공은 바로 그러한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빌 헤일리는 반항아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50년대 초반부터 리듬 앤 블루스를 컨트리 앤 웨스턴과 융합시키기 시작했고, 1955년 ‘Rock Around the Clock’ 이 영화 ‘Blackboard Jungle(폭력교실)’ 의 사운드트랙에 실리면서 로큰롤 탄생의 주역이 되었고, 이미 30이 되었던 백인 컨트리 가수는 갑자기 반항적인 10대들의 대변인이 되었다. 음악만으로도 그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면, 정말 반항적인 이미지를 가진 로큰롤 ‘백인’ 가수가 등장한다면 성공은 확실하다고 보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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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인수 2010.11.01 0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꺅 이상훈님 멋진 글솜씨 완전 쩔어여 오늘부터 팬할래요 ㅋ 오늘 처음 들어왔는데 올리신 글 한번에 다 읽고 갑니다. :)

    • Grimloch 2010.11.01 0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거 내가 아는 이인수씨 같은데... 맞다면, 말투 정말 안어울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