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문득 이 책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지성이 공유해야 할 ‘전환시대의 논리’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리영희가 쓴 그 책을 출판사에서 소개한 글을 찾아보았다. 그 소개글에 나온 특정한 단어를 괄호에 넣고 읽으면 두 책의 기본정신이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  “(  )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을 교정하고, (  ) 등을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함으로써 (  ) 허위의식을 타파하는 현실인식, 편협하고 왜곡된 (  ) 거부하는 넓은 세계적 관점, 냉철한 과학적 정신을 계몽하고 민주적 시민운동에 앞장서는 이론적 역할을 수행했다.” 김종철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이다.


그는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지구 온난화나 기후변화 같은 환경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그가 보기에 근대 자본주의 문명은 “자연을 끊임없이 수탈하고,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가공할 생태위기를 초래”한다. 이 지점에서 근대의 발전이 인류사에 불러온 놀라운 성장을 부정하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서구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의해서만 문명생활도 가능하고, 더 높은 단계로의 인간해방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관점을 ‘근대적 미신’이라 말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972년 로마클럽에서 출간한 <성장의 한계>는 제목 자체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제 더는 성장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환경 오염 문제가 심각한 탓이다. 두 번째는 “근원적으로 타자-동시대의 사회적 약자와 자연 그리고 미래세대-에 대한 무관심 혹은 무책임한 태도”에 바탕을 둔 비윤리성 탓이다. 타자를 변경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 근대 자본주의 문명은 늘 변경을 만들어왔다. 그 변경을 지배하고 수탈한 덕으로 발전하고 성장하고 팽창했다. 하나 변경은 이제 없다. 독립하여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고 있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진보를 추구한다는 것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모순”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40여년 전 리영희는 분단상황과 군사독재의 탄압으로 이성의 눈이 가려지고, 그 결과 사로잡혔던 이데올로기적 편협성을 부숴버리라고 했다. 베트남 전쟁의 실상,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통찰, 일본의 재군사화에 대한 경고,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그 전환의 길을 김종철이 걷는다. 근대, 자본주의, 산업화, 성장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홀로세에서 인류세로 치닫는 오늘, 우리는 어떤 전환적 사고를 해야 여섯 번째 대멸종을 피할 수 있는가, 라고.


그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대안으로 소농을 기반으로 한 생태적 순환사회를 내세운다. 석유에 기초한 문명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닥쳐올 재앙은 식량난이다. 일본의 식량자급률이 40%인데, 석유가 없으면 1%로 곤두박질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25% 수준이니 석유 수급에 이상이 생길 적에 겪을 고초를 짐작할 수 있다. 농사를 살려야 하는 이유다. 이런 사회는 궁극에는 “공동체의 호혜적 관계망을 토대로 다양한 상호부조의 경제”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이 사회가 가난하리라 짐작하면서 공빈(共貧)의 철학을 내세운다. “가난을 견딜 만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가난을 삶의 축복이 되게 하는 사회적 토대, 즉 공생공락의 네트워크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기본소득세이다. 신약성서를 보면 포도원 주인이 일꾼에게 품삯 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 점심 먹고 나서 일한 사람, 해지기 직전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 주인은 똑같이 1데나리온을 주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는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기본소득의 예고였다고 풀이한다. 무릎을 치게 하는 대목이다.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일정한 소득을 정기적으로 주는 ‘기본소득’을 그는 ‘시민배당’이라고 고쳐 말한다. 없는 이를 도와주는 복지의 개념이 아니라, 기업이 주주에게 배당하듯 한 공동체의 이익을 시민에게 나누는 뜻을 돋을새김하기 위해서다. 시민배당은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된다. 경제를 안정시키고, 노동조건이 개선되고, 교육지옥에서 빠져나오고, 관료적 정부형태에서 벗어나게 할 터다.


세 번째는 민주주의다. 인류의 미래가치에 동의하는 정치는 자본의 횡포를 막고 생태친화적 환경을 만들어 낸다. 라파엘 코레아가 에콰도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약속한 대로 외채를 청산하고, 은행세를 신설해 기본소득을 실시했고 야수니국립공원에서 발견한 새 유전의 개발을 잠정포기했다. 정치적 결단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지, 더 많은 경제성장은 아니다”.


성장과 진보의 세계관은 프로메테우스를 섬긴다. 그의 이름이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데다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어서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상식을 깨고 에피메테우스를 더 기려야 한다고 말했단다. 그의 이름은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던가. 인류가 걸어온 성장의 삶을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문명적 성찰의 상징으로 에피메테우스가 적격이라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에피메테우스의 아내인 판도라가 금기를 어기고 항아리 뚜껑을 열자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여기까지만 기억한다. 판도라가 급히 뚜껑을 닫는 바람에 항아리 맨 밑바닥에 놓여 있던 그 무엇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희망이었다.


다시 판도라의 항아리 뚜껑을 열어야 한다. 진보와 성장에 눈이 멀어 오랫동안 잊었던 그 희망을 인간세계에 퍼트려야 한다. 김종철의 사유를 20세기의 리영희를 읽는 심정으로 ‘열독’해야 할 이유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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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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