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지’ 악보.


젊은 고행자 같은 사람이 눈을 작게 뜨고 눈동자는 아래로 향해 있다. 필리핀 어느 산 근방, 나도 모르게 도착한 이상한 카페 같은 곳의 한쪽 벽 전체에 걸린 커다란 그림이다. 주인은 그런 나를 보고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웃고 있다.


나의 머리카락은 길었고, 필리핀 타가이타이에 사는 어린 친구는 “옷을 사러 가자, 머리를 파마하는 곳이 있다, 여기에 저기에 가자”고 했지만 내가 번번이 말을 듣지 않자 포기할 무렵이었다. 한동안은 그쪽 동네 운송수단 중 트라이카(오토바이에 한 사람 정도 탈 수 있는 작은 가마를 붙여놓은 듯한 일종의 자동차)를 타고 산을 끼고 돌다 바다에도 가보며 놀았다. 그때마다 돈을 주고 트라이카를 빌렸는데 하루에 1000페소(약 2만3000원)를 주면 12시간 정도 빌려 탈 수 있었다. 친구 둘 중 한 명이 운전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운전석 바로 옆에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자꾸 속이기 시작했다. 모텔방을 비싸게 소개하고 파인애플값을 속여 먹었다. 또 자기네 동네 아이들이 잘 못 먹는다, 먹을 것을 주면 좋아한다며 돈을 더 가져갔다. 점점 더 심해지길래 화를 내고 앞으로는 절대로 내곁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나마 친구도 없어졌다.


나는 아침에 깨기 싫었다. 어딘가로 또 걸어야 했다. 가만히 쉬어지지 않았다.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만 괴로워졌다. 그렇게 열매 몇 개를 사서 봉투에 담아 배가 고프면 먹으며 계속 걸었는데 어느날 산쪽으로 올라가다 우연히 만난 카페처럼 보이는 허름한 곳, 그래도 나름 베란다도 있고 주변이 산이라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았다. 긴 언덕을 올라가서야 보인 산 아래 수상한 카페였다. 일단 사람이 다니질 않았다. 주변에는 상점이나 음료를 파는 가판대 하나 없었다.


내가 들어가자 주인은 웃으며 아주 친한 사람처럼 맞아주었다. 배가 고프다고 하자 몇 가지 음식이름이 적힌 허름한 메뉴판을 가져왔다. 급하면 다 된다. 기억이 안 나던 영어 단어도 생각 나고 그쪽 사람들이 잘 쓰는 말들도 꽤 많이 알 때였다. 거의 “디스원 따블렛” 같은 말은 뭔가를 시킬 때 쓰는 말이다. 나는 라이스와 수프 같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주인은 웃으며 기다리라고 했고 나를 고행자 그림이 바로 보일 수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나는 그림을 자세히 봤다. 의외로 정교하게 그려진 잘 그린 그림이었다. 고행자의 얼굴은 잘생겼고 눈동자가 아래를 향하여 편안한 표정이다. 나는 더 자세히 봤다. 얼마 되지 않아 그 그림이 내 머릿속에 채워져 갈 때 밥과 카레 냄새가 배어있는 음식이 나왔다. 주인은 그림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행동이 조용한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말랐지만 강하게 생긴 친구다.


나는 음식을 먹다가 멈추고 그림의 내용을 알아갔다. 그림 속 인물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 밑으로 손이 있고 양손은 벌어져 있는데 그 양손 사이로 낙엽색깔의 작은 나뭇잎 스무개 정도가 마치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손 아래에는 연못처럼 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니까 아…, 고행 중인 사람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 카페 주인이 내 어깨를 아주 가볍게 쳤다. 나는 한번 웃어주고 다시 그림을 봤다. 그때부터 주인은 내 곁에서 조용히 그림을 같이 보는 것 같았다.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이 그림을 보고 있으니 서로 신경쓸 일이 없었다.


그림 속 고행자의 눈을 다시 봤다. 고행자는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가는 나뭇잎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아…, 집중을 하는구나 할 때 주인이 또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 그림은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손에서 저 손, 또 저 손에서 이 손으로 나뭇잎이 물에 빠지지 않게 하는 아마 깊은 도(道)의 그림이었다.


나도 흉내를 내봤다. 또 주인이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눈을 아래로 뜨고 손에 나뭇잎이 있는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나뭇잎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집중했다. 그러니까 이 손의 나뭇잎을 아주 천천히 저 손으로 옮기고 또 반대로…. 아….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는 나뭇잎을 열개로 상상하고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게 집중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해도 나뭇잎이 떨어진다. 나뭇잎의 모양도 바뀐다. 나뭇잎이 계속 공중에 떠있게 집중을 하는 거다.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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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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