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봉준호 감독이 남긴 여러 ‘어록’ 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LA비평가협회 감독상을 받은 뒤 말한 수상 소감이었다. 그것은 아카데미 4관왕과 봉준호붐이 가진 여러 역설 중 하나를 선명히 표현해줬다. 그는 자기 예술의 ‘원천’에 대해, 소년 시절 AFKN(미군방송)에서 “야하고, 폭력적인”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몸속에 영화적 세포를 만”들었는데 영어를 몰라 멋대로 이야기를 상상했던 그게 “어른이 돼서 보니” 브라이언 드 팔마, 존 카펜터, 마틴 스코세이지 같은 대가들의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20~30대에겐 낯설 AFKN은 대한민국 안방극장의 황금 채널(2번)을 노골적으로 차지한, 냉전문화와 미국의 신식민지적 지배의 상징이었다. 미군방송을 보며 자란 ‘시네마키드’가 이룬 아카데미 4관왕은 현대 한국(문화)과 미국(문화)의 관계를 압축하고, ‘한국적인 것’의 역설도 유감없이 나타낸다. 


과연 봉준호의 ‘영화 세포’들엔 ‘한국적인 것’의 지층이 축적돼 있다. 그는 식민지 모더니즘의 대표격이었다가 자진 월북한 소설가 박태원의 외손이며, 1980년대 말 학생운동에 참여해 구속된 적이 있다. 그런 청년 봉준호를 1990년대 한국영화아카데미와 충무로가 기린아로 양육했다. 처음부터 그는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을 풍자와 유머로 감쌌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살인의 추억> <괴물>도 엄청난 매력과 규모를 가진 ‘봉준호 리얼리즘’(송강호) 서사였다. 이를 잘(?) 이해한 박근혜 정권은 ‘좌파’ 봉준호를 블랙리스트에 등재해줬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일면 무척 게으르고, 일면 역설적 탄성이 들려오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기실 ‘한국적인 것’은 이미 ‘미국적’이고 또 ‘주변’으로서 세계적이었던 것이다. 이 수상과 붐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은 한국인들이 이토록 기뻐한다는 사실 자체겠다. 물론 이는 제국의 인정에 갈급했던 찢어지게 가난한 식민지 의식과는 결이 좀 다른 듯하다. 이 성취는 한국영화사뿐 아니라 현대문화사에 온 ‘특이점’일까?


이로써 ‘한국문화’는 이전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대단히 역설적으로, 재벌 CJ와 함께, 또 그 힘으로, 미국 중심 문화체제에 더 깊숙이 연루·개입된다. 이 사건은 (월드컵 4강처럼) 한국인의 자기인식 - 문화적 눈높이와 위치 감각을 한번 더 재조정할 것이다. 그리고 한류의 흐름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며 이정동 교수의 책 <축적의 시간>(2015)을 떠올렸다. 각 분야의 서울대 공대 교수들을 인터뷰해 쓴 것으로, 산업계뿐 아니라 대통령도 읽고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영향을 끼쳐 국가-이데올로기-서사 재구성의 중요한 소재가 됐다. 그 서사는,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추격형 발전’은 이제 끝났고, 앞선 미국·일본·유럽의 ‘선진국’과 엄청난 속도로 쫓아오는 중국 사이에 끼여 저성장·저혁신 위기를 맞게 됐다는 줄거리다. ‘개념설계역량’이란 게 있어야 ‘진정한 선진국’인데 추격형 발전국가인 한국엔 그게 없다. 그래서 위기를 돌파하고 ‘혁신’하려면 서구 선진국과 같은 오랜 경험과 암묵지 축적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계속 발전’ 구호를 초조히 외치면서도 한편 ‘오랜 축적’만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는 당착이 책을 감싸고 있다. 그래서 의아하지만, 변해온 세계체제 속에서의 대한민국의 좌표와 위치 감각을 새로 표현해줬기 때문에 책은 인기를 끌 수 있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또한 이 사회가 축적한 또 다른 것의 결과다. <축적의 시간> 식이라면 ‘영미나 일본처럼 앞으로도 더 세계인에게 잘 팔릴 콘텐츠의 원천 기술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식으로 귀결되겠지만 문화예술의 축적과 탁발성은 그와 다를 것이다. 


봉준호 같은 ‘거장’이 또 나올까? 사람을 기생충처럼 만들고 저 깊은 지하로 수직계급화하는 극심한 불평등이 당장 해소될 전망이 없어 보이니 일면 낙관적(?)이다. 높은 예술은 비판정신과 고통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분명 어딘가에 제2, 제3의 청년 봉준호가 자라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회학과를 다니며 학생운동 덕분에 만든 원초적 ‘개념설계역량’ 같은 게 고갈되고, 예술과 문학 같은 데 투신하려는 청년들이 사라지고, 의대와 공무원 지망생만 양산하는 사회라면 비관적이다. 


하여 ‘봉하이브’와 <기생충> 붐엔 감당 안되는 더 큰 아이러니가 있다. 처음 개봉 때 호오·찬반이 엇갈렸던 <기생충>의 충격적이고 ‘불편한’ 계급적대 서사는 어떻게 수용 가능한 풍자·유머, 그리고 ‘한국적인 것’으로 전환됐는가? 부자들은 느낀다는 빈자들의 ‘냄새’와 그런 부자를 도륙하고 싶은 빈자의 살의는 어떻게 할까? 이 세계적인, 세계에 ‘시전’된 불평등과 적대를 해결하러 나설 때가 아닌가.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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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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