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데뷔한 AOA는 정상에 머물지도, 무명으로 남지도 않은 걸그룹이었다. ‘짧은 치마’ ‘단발머리’ ‘심쿵해’ 등 히트곡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따라 부를 만큼 알려지진 않았다. 광고 모델과 배우로도 활동한 멤버 설현이 오히려 AOA보다 더 유명할지도 모른다. 2016년 이후로는 인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고, 일부 멤버들은 차례로 팀을 떠났다. 트와이스, 블랙핑크, 레드벨벳 같은 후발 걸그룹들의 부상 속에 AOA는 많은 아이돌들이 그렇듯 조금씩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지난 12일 Mnet <퀸덤> 무대에서 마마무의 ‘너나 해’를 부른 AOA의 모습. 유튜브 캡처


12일 Mnet에서 방송된 <퀸덤> 무대는 AOA 경력의 전기가 될지도 모른다. 여성 그룹들의 경연 프로그램인 <퀸덤>에서 이날 AOA는 동료 그룹 마마무의 ‘너나 해’를 불렀다. AOA는 노출이 많은 의상과 섹시함을 강조한 무대 퍼포먼스로 잘 알려진 그룹이지만 이날은 달랐다. 멤버들은 남성복을 연상시키는 검은 슈트를 입었다. 하이힐 대신 단화를 신었다. 이날 무대의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알려진 리더 지민은 원곡에는 없는 랩으로 무대를 열었다.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 여성은 ‘꽃’이 아니라 ‘나무’라는 선언이었다. 

곡이 절정에 이를 때쯤 더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여성 의상에 하이힐을 신은 남성 댄서들이 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이들은 남성 의상을 입은 AOA 멤버들과 함께 격렬한 안무를 선보였다. 잘 빚어진 근육을 가진 남성 댄서들이 여성의 옷을 입고 여성의 춤을 출 때, 익숙해서 고루한 통념이 박살나는 쾌감을 줬다. 성역할이 뒤바뀌거나 성구분이 흐려졌다고 할 수 있고, 아니면 모두들 그저 보여주고 싶은 걸 보여준 무대라고 할 수도 있었다. 놀란 표정, 당황한 표정의 관객이 고루 카메라에 잡혔다.

 

방송 이후 반응은 달아올랐다. 유튜브에 올라온 방송분은 닷새 만에 450만뷰, 풀버전은 200만뷰를 넘었다. 국내외 팬들의 댓글도 수만개다. “기념비적인 무대” “편한 복장에서 나오는 편한 표정이 낯설게 다가온 점에 너무 놀랐음” “다리를 훑는다든지 가슴이나 엉덩이를 강조하는 등의 액션이 안 보여서 좋다” 같은 반응이었다. 

AOA가 다음 무대에서 다시 예전의 섹시 콘셉트를 선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AOA는 <퀸덤> 무대에서 자신들에게 다양한 얼굴이 있으며, 8년의 활동 기간 동안 그러한 얼굴을 선보일 기회가 없었음을 알렸다. 이제 AOA는 치마를 입든 바지를 입든 조금 더 자유롭다. 

이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 AOA는 ‘작심’했을 것이다. AOA의 기존 이미지를 기대하는 팬들, 여성 아이돌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작심한 사람들에 의해 쓰인다. 

7월9일에는 마마무의 멤버 화사가 작심했다. 아이돌들이 공항 입·출국 시 선보이는 의상은 ‘공항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유통된다. 이날 화사는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면서 ‘탈브라 패션’을 선보였다. 화사는 이날 의상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7월9일이 ‘세계노브라의날’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성의 가슴에 덧씌워진 음란한 시선을 거둬내고, 건강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하자는 취지다. 화사의 탈브라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이후에도 화사는 승승장구다. 

바다 건너에선 21세기 미국 대중음악의 디바 비욘세가 작심했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홈커밍>은 비욘세의 2018년 코첼라 페스티벌 공연 실황을 담았다. 이 공연을 통해 코첼라 최초의 흑인 여성가수 헤드라이너로 기록된 비욘세는 수백명에 달하는 스태프, 댄서, 연주자를 대부분 유색인종으로 꾸렸다. 공연 실황 막간에는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100㎏ 육박하게 늘어난 체형을 공연에 맞게 다듬는 극도의 노력이 담겼다. 30대 후반의 비욘세는 무대 뒤에서 고통을 호소한다.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이 보고 싶고, 사과를 먹으며 버티는 다이어트에 지치고, 하루 종일 춤춰도 힘이 남던 20대가 그립다. 하지만 오랜 연습을 거친 뒤 무대에 오른 비욘세는 압도적이다. 대중의 시선과 스스로 부과한 압박을 이겨내고 2시간 넘게 무대를 장악한다.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를 보여주는 동시에 블랙 페미니즘과 흑인 교육에 대한 메시지를 잊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AOA의 성역할 전도, 화사의 탈브라, 비욘세의 블랙 페미니즘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변덕스러운 대중의 취향이 거센 역풍을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 변화의 물결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물결에 올라도 넘어지지 않을 균형감각이 있으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의지를 가진 프런티어가 문화를 전진시킨다. 무엇보다 문화의 프런티어는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이들이 파괴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사고, 낡은 풍습, 답답한 고정관념뿐이다. 

<백승찬 사회부 데스크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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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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