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jjinmoo@hanmail.net



1990년대 후반까지 길거리에서 버젓이 음악테이프를 팔았던 리어카상의 매출은 전체 대중음악 매출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지분이 컸다. 정품 아닌 불법 음반을 파는 리어카상을 가리켜 사람들은 ‘길보드’라고 했다. 비록 불법이기는 하나 미국의 빌보드 차트처럼 음악의 인기흐름을 공정히 포착해 테이프를 제작한다고 해서 ‘길가의 빌보드’로 일컬은 것이다. 


빌보드는 어떤 곡과 앨범의 판매량과 방송횟수를 정확하게 집계해서 순위를 매기는 잡지로 당대 음악의 동향을 읽을 수 있는 절대적 바로미터였다.


 가요보다는 팝을 열심히 들었던 시절인 1970~80년대에 우리 음악인구는 빌보드를 마치 신주단지처럼 섬겼다. 음악을 꽤 안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적어도 빌보드 차트 1위부터 10위까지는 달달 외워야 했다. 마니아들의 음악상식 우열을 가리는 배틀은 대부분 빌보드가 기준이었다. 


하지만 빌보드는 우리에게는, 한국 대중음악계에는 멀고도 먼 존재였다. 한국 음악 관계자들의 가장 오래된 푸념은“우리에게는 빌보드와 같은 공신력을 가진 차트 잡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새천년에 들어선 이후 빌보드의 위상은 그저 단순 참고자료로 급락했다. 올해만 해도 무려 8주간 1위를 차지한 여가수 칼리 레 젭슨의 노래 ‘콜 미 메이비(Call Me Maybe)’의 경우, 전 같으면 난리가 났을 테지만 국내에서는 반향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렇게 된 데는 전반적인 미국 팝의 위축, 팝에 대한 감정중독, 흑인음악에 대한 쏠림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우리 대중가요의 급성장이다. 우리 젊은층 대다수는 팝에 목맸던 아버지 세대와 달리 가요에 열광한다. 당연히 미국의 음악 현황에 별 관심이 없다.


또한 최근 한국의 대중가요는 ‘K팝’이라는 조금은 국제적인 어휘로 포장되어 세계 음악팬들과 친밀해지고 있는 승승장구의 상황이다. 멀게만 느껴진 빌보드가 가시권, 사정권에 들어온 것이다. 


미국 LA 시민들이 가수 싸이 앞에서 ‘강남스타일’ 플래시몹을 펼치고 있다. (출처; 경향DB)


게다가 국제 문화생태계에서 과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더 이상 서양은 동양을 타자(他者)로 규정하지 않는다. 아시아 음악은 쳐다보지도 않았던 미국 음악계의 전통적 배타성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간의 열패감은 우리 특유의 광(狂)스피드에 의해 뒤로 물러나고 있고 마침내 이제는 한국 대중음악의 빌보드 차트 상륙을 생생히 목격하고 있다. 


이미 보아와 ‘원더걸스’가 그토록 간망해오던 빌보드 차트에 명함을 내밀었다. 원더걸스의 ‘노바디’는 단 한 주에 그치긴 했지만 2009년 싱글차트 76위에 올랐다. 3년이 지난 지금 빌보드에는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100위까지 순위를 게재하는 ‘핫 100’이라는 이름의 빌보드 싱글차트에 64위로 데뷔하더니 이번주에는 무려 53계단이나 상승해 11위로 점프했다. 지금의 상승세라면 꿈의 톱10은 물론, 나아가 1위 자리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아무리 빌보드의 영향력이 떨어졌다고 해도 그렇게 되면 일대 센세이션, 한국 대중음악사의 신기원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경우, 저 옛날 1963년 사카모토 큐의 ‘스키야키’가 빌보드 1위에 올랐지만 당시 고조된 일본의 반미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일종의 유화책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후 1979년 여성듀오 ‘핑크 레이디’의 ‘키스 인 더 다크(Kiss in the dark)’가 37위에 오른 것을 끝으로 막강 일본도 빌보드와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싸이의 현재 상황만으로도 K팝이 아시아 음악의 선두로 치고나가고 있음은 명백해졌다. 세계시장 진출의 측면에서 일본과 중국에 앞서간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지속적으로 해외시장을 두드린 끝에 따낸 결실이다. 요원하기만 했던 미국 음악시장이 손에 잡히는, 믿지 못할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비틀스의 영국, 아바의 스웨덴을 마냥 부러워할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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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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