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끊임없이 미래가 도래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과학기술이나 문명의 진보에 따라 차츰 가까운 미래가 되었다가 현실로 출현해왔다. 각종 질병은 극복되거나 되고 있고, 이동 수단, 커뮤니케이션 수단 등이 생겨나 과거엔 불가능한 것들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다. 상상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미래는 현실의 적이다. 현실을 지배하는 기득권은 미래의 새로운 권력에게 결국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온갖 미디어들이 복합성을 갖춘 멀티미디어로 진화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올드 미디어의 대표선수라 할 수 있는 책도 절치부심하며 그 대열에 동참해왔다. 사람들은 책의 미래를 불안해했고 종이책은 미래가 어둡다는 말들을 해왔다. 그래서 e북이 나왔고 오디오북이 나왔다. 터치하는 책, 속삭여주는 책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읽는 책, 보는 책, 듣는 책의 삼박자를 갖췄지만 책의 미디어 경쟁력은 여전히 약하다. 주택으로 비유해보자면 월세를 내며 대형 미디어에 기생하는 것과 같다. 유튜브나 텔레비전에 노출될 때만 책은 확장성을 갖고 미디어로서의 존재를 확인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책이 세상과의 접촉점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이제 책은 리좀 형태로 존재한다.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흩어지고 점점이 흩뿌려져서 소수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1인 출판사, 1인 책방이 리좀으로서의 책의 존재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리좀은 들뢰즈가 식물학에서 차용한 용어로 줄기식물을 말한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거나, 땅속 깊이 파고드는 등 높이와 깊이의 강박에서 벗어나, 중심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비록 연약하지만 땅 위를 기어다니며 불규칙하게 그 생명력을 이어간다는 개념이다. 수억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이 운석의 충돌로 멸종한 뒤 손바닥만 한 수많은 새로 진화한 것처럼, 근대 이후 우람한 수목이 되어 그 위용을 자랑했던 책은 이제 지배 미디어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 전혀 다른 생존의 법칙에 따라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질문을 좀 바꿔볼 필요가 있다. 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책의 장래는 무엇인가, 책의 운명의 향방은 어떻게 갈릴 것인가. 이런 식의 질문과 걱정은 책이 우람한 수목이었을 때나 어울리는 것이지, 이미 책이 공룡을 버리고 새의 존재 방식을 택한 마당에 적합한 답을 끌어낼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러니 일단 이 질문들을 머릿속에서 싹 비워버리자.


책의 미래는 이미 도래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건 ‘미래에서 온 책’들이다. 미래의 책이라고 별스러운 모습을 한 건 아니다. 그냥 책이다. 


하지만 뭔가 바뀌었다. 예전과는 다른 저자들이 책을 쓰기 시작했고, 책을 읽는 목적도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에 따라 책의 모양도 좀 물렁물렁해졌고 경계가 흐려졌다. 책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많이 달라졌고 책이 놓이는 공간도 다양해졌다. 


다른 한편에선 ‘괴물’과도 같은 책들이 등장했다. 이른바 가격으로 후려치는 책들이다. 안 팔릴 게 뻔하니 적게 찍고 비싼 가격을 붙여 도서관이나 마니아들에게 모셔지기 위한 책들이다. 그런데 그 사용가치에 비해 교환가치가 월등하게 높다. 나름의 현실에 맞춰 진화한 것이니까 타박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중고차 한 대 값을 호가하는 이런 책들은 공적 자본에 기댈 수밖에 없고, 공적 자본의 지출이 과다해지면 아마 책으로서의 생명을 다할 날이 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에서 반짝이는 ‘미래의 책’들이다. 


여기엔 많은 가능성이 있다. 생각을 주장하고, 가치를 토론하고, 위안을 얻고, 삶을 바꾸는 역할은 미래의 책에 달려 있다. ‘책의 미래’라고 질문하면 우리는 암울한 도식에 맞춰 미궁에 빠져들 수밖에 없지만, ‘미래의 책’이라고 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나의 ‘미래의 책’은 무엇일까 궁리하게 된다. ‘책의 미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공동체의 미래를 묻는 일이지만, ‘미래의 책’은 나의 취향과 관심,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그만 좀 하고 책의 주변으로 상상력이 흘러넘치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책이 개인을 신나게 할 때 결국 책이 그들을 공동체로 묶을 것이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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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