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공원이나 거리에 형형색색으로 채색된 피아노가 나타났다. 지나가던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순간 설치작품처럼 서 있던 물체는 악기가 되고, 귀를 사로잡는 음악이 연주될 때면 일상의 장소는 예술 체험 공간으로 변모한다.

 

2008년 영국 버밍엄의 한 설치미술가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거리 피아노’는 5년 후 국내에서 ‘달려라 피아노’라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가정이나 회사에서 쓰지 않는 피아노를 기증받아 전문가의 수리·조율을 거친 후 아티스트의 디자인을 입혀 누구나 연주하고 즐길 수 있도록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는 이후 광화문과 선유도공원, 서울숲과 경의선숲길 등지에서 페스티벌을 열며 전국 곳곳에 아이디어를 확산시켰다.

 

작년 봄에는 소셜미디어를 타고 ‘반려악기 릴레이 캠페인’이 벌어졌다. 낙원악기상가와 사회복지법인 ‘함께걷는아이들’이 몇년간 진행해오던 악기 나눔 캠페인 ‘올키즈기프트’에 유명인들이 동참해 악기 나눔과 반려악기 문화를 소개한 것이었다. 악기가 없어 음악을 배우지 못하는 문화소외 아동과 아동복지시설에 기증받은 중고 악기, 새 악기를 선물하는 나눔 실천은 악기를 평생 친구로 삼자는 캠페인으로 진화했다.

 

팍팍하고 고단한 현실에서도 삶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 악기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악기 판매가 증가하고, 직장인 밴드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노래교실과 시민합창단이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 성인전문 음악학원도 성업 중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에 악기를 배우고 카피 밴드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음악을 행함으로써 얻는 기쁨은 듣는 즐거움에 비할 수 없다.

 

공공장소에 피아노가 놓이고 반려악기에 대한 관심과 아마추어 음악활동이 늘어난다 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문화예술 향유는 미약하다. 클래식의 경우는 더욱 제한적이다. 전국 각지에 찾아가는 음악회들이 많아졌지만, 그간 해온 관행적인 공연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관객과 교감할 수 있는 주제와 레퍼토리 구성, 전달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훌륭한 고전이니 들을 기회만 주어지면 누구나 좋아하리라는 생각만큼 안일한 태도는 없다. 고전음악이 삶의 희로애락을 품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지금까지 음악가들은 그 음악이 세상과 만나는 다양한 접점을 친절하게 매개하진 못했다. 좋은 연주는 기본이고, 거리감을 좁히는 구체적인 맥락과 스토리, 세심한 해설이 관객에 따라 풍성하게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야말로 음악가의 창의적 기획력이 절실한 시대다.

 

‘달려라 피아노’의 예술감독인 피아니스트 박종화는 2016년 특수 제작된 트레일러에 그랜드피아노를 싣고 제주 해변에서 연천 군부대까지 찾아가는 음악회를 열었다. 그 과정이 방송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는데, 그중 화성의 한 철강공장에서 열린 음악회가 눈길을 끌었다. 사전 답사를 위해 그곳을 찾은 피아니스트는 공장 소리들을 녹음한 후 작곡가에게 편집을 부탁했다. 자신이 연주할 아르보 페르트의 피아노곡에 이 소리들을 함께 넣기 위함이었다.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 공장, 낯선 피아니스트의 음악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이들도 자신들이 매일 듣던 철근이 떨어지고 절단되는 소리가 느린 피아노 음들 사이에서 흘러나오자 금세 알아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때야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그곳 사람들과 공명하기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비록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이런 시도들이 클래식이나 당대에 창작되는 현대음악을 사람들의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새해에는 멋진 음악을 접하고 직접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참신하고 매력적인 음악공연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무대 위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도 사람들과 소통하는 음악가들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고 노회찬 의원이 꿈꾸었던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는 그런 음악가들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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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