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악보.


초등학교 4학년 시절, 화난 작은 형이 그날 따라 무서워서 집에 안 들어갔다. 그날은 내가 많이 슬픈 날이기도 했다. 7월 말경이었다. 


나는 삼청공원 1호 매점의 아들인, 같은 학교 장세준이라는 친구와 매점의 먹을 것들을 함께 먹어가며 한참 놀았다. 점점 길에 다니는 사람들도 없어졌다. 1호 매점 주인인 친구의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나는 그분이 웃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자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그때는 북악산 범바위까지 오르는 요즘 같은 길이 나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북악산(넘어가면 자하문 밖)의 열매나무들을 다 기억한다. 어느 길로 가면 벚꽃열매 버찌나무가 맛있고, 어떤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뽀루수 열매는 보리수나무의 작은 쌀톨보다는 조금 큰데, 보리수 열매보다 훨씬 맛있다. 뽀루수는 북악산에 많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북악산은 참 다르다. 문득문득 조금씩 겁이 났던 나는 통행금지를 피해 범바위(말바위라고도 한다)까지 올라갔다. 움푹한 데 쉴 만한 곳을 알고 있어서 초저녁 아직 해가 떠 있을 때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별이 보였다. 바위 바로 아래는 그야말로 아무도 없었다. 거기까지 올라간 것은 집에는 가기 싫고 공원 길가에서 사람을 만나면 할 말이 없고 곤란한 일뿐이어서다.  


무서웠다. 그래도 버티고 싶었다. 7월 말, 낮에 더웠던 것만 생각하고 새벽추위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깜깜한 밤을 맴도는 벌레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작은 소리들이 재미있어서 가만히 들었다. 왼쪽, 오른쪽 사방에서 소리가 났다. 한 30분쯤 지났을 거다. 벌레소리들이 엄청 커졌다. 점점 더 아주 먼 곳 소리도…. 동서남북 다른 세상, 별과 나무그림자, 바람소리…. 와, 이건 도대체…. 내가 아직 발표하지 않은 노래 중에 “저기엔 저기엔 어떻게 저렇게 왜”라는 가사가 있다. 초능력 세상의 입구? 환상! 언제나 답은 있었다.


가끔 나무그림자가 바람에 쏴아, 하고 움직이면 소름이 쫙 끼친다. 그 후 그 소리를 친구들에게도 들려줬다. 그냥 우리집 근방에서도 대략 10분이 지나면 영락없다. 소리는 점점 엄청 커진다.


어느새 날이 환해지고 있었다. 나는 오전 5시반쯤 내려왔다. 춥고 슬펐다. 그건 누구를 향한 슬픔이 아니다. 범바위에서 내려왔을 때 매점은 아직 닫혀 있었다. 


나는 버스종점의 작은 포장마차 비슷한 매대에서 할아버지가 끓여주시는 라면이 너무 먹고 싶었다. 그러나 외상으로 달라고 하기엔 할아버지가 무섭고 어색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용기를 냈다. 나를 힐끔 보시던 할아버지가 “앉거라. 집에 안 들어갔구나” 하시고는 더 이상 말씀을 안 하셨다. 나는 잠시 후 양은냄비에 끓인 라면을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내일 갚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후에 세준이네 매점에서 점심밥을 얻어먹고 다시 공터로 가서 어느새 모인 친구들과 놀 때였다. 그때 아아, 나는 그렇게 이쁘고 빛나는 엄마를 본 적이 없다. 나를 위해 시장에 가셨다가 오신 거다. 엄마는 빙긋이 웃으셨다. 그리고 말없이 돈을 주셨다. “밥 먹어라. 그리고 일찍 들어가거라. 에이그, 말을 해야지. 엄마는 또 가서 장사를 해야지. 오늘은 토마토 말고 과자 사갈게.”


엄마 친구의 아들에게 묻어서 과외공부를 반값에 했고 잠시 쉬는 시간에 돌아가며 한명씩 사오는 과자타임이 있었다. 작은형은 그때 다리가 부러져 아직 다 낫지 않았다.


“쉽게 가고 쉽게 오고/ 쉽게 가고 쉽게 오고/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저꽃이 어떻게 왔는지/ 나는 알 수 없어 몰라도 돼!/ 그냥 느낄 뿐”


들국화를 할 때 만든 노래다. 그때도 마누라가 내가 ‘행진’(들국화 1집 수록곡)을 만들 때처럼 열린 나의 방문 앞에 있었다. “어머, 자기야. 그 노래 지금 만든 거야?” “응.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가 공연 첫곡인데 그 전 시작곡으로 코드 비슷하게 해서 만들어본 거야. 이 노래를 빠르게 하고 다음곡을 ‘아침이~’로….” “아, 그 노래 좋다. 자기는 음악성 없는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런 걸 만들어? 가사도 정말 좋아.” 


마누라는 문학성과 음악선생님이었던 장인을 닮아 음악성이 좋다. 작가로 등단하거나 대중스타가 될 끼는 없지만 느낌이 빠르다. 나는 그때 들국화를 하면서 콤플렉스가 심했었다.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대중음악 블라블라 > 전인권의 내 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달빛  (0) 2019.09.05
비가 내리네  (0) 2019.08.08
⑭쉽게  (0) 2019.07.11
⑬사랑의 승리  (0) 2019.06.20
⑫너는 그리고 하얀 목소리  (0) 2019.06.07
⑪여기가  (0) 2019.05.23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mx2.0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