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용팔이>가 화제다. 내로라하는 미남미녀 배우가 출연해서 시청률도 20%를 넘겼으니 굳이 ‘화제’라 부르는 것이 겸연쩍다.

그런데 지난주 방영된 <용팔이>가 화제를 모은 이유는 남녀 주인공의 러브라인이나 복수심, 기억상실, 오해와 해소만이 아니었다. “핸드폰 줘봐, 방 알아볼게”라는 대사와 함께 등장한 모바일 앱 ‘직방’의 뚜렷한 로고. 이어지는 앱 기능의 설명. 그리고 얼마 후 생수 ‘몽베스트’를 쥐고 있는 여주인공의 클로즈업된 손. 이어서 아이들 밥 사먹이겠다며 들어간 식당 ‘본죽’. 시청자들은 벌써 이런저런 패러디를 만들며 드라마를 비웃고 있다. 마침 시청률도 17% 선으로 떨어졌다.

극 중 재벌가 ‘사모님’을 미술관장으로 설정하려다가 PPL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포기한 사례는 고전으로 꼽힌다. 돈 많은 남자 주인공이 모는 고급 자동차는 반드시 앞면부터 카메라로 한번쯤 훑어주는 것 역시 한국 드라마의 오래된 미덕(?)이다. 드라마만이 아니다. 2010년 1월부터 간접광고가 부분 허용된 이후 예능 프로그램의 PPL도 확 늘었다. <무한도전> ‘영동고속도로 가요제’ 편은 LG 텔레비전과 코카콜라 상품들을 “전혀 간접적이지 않게” 광고했다. 시골에서 ‘자연식’을 만들어 먹는 <삼시세끼>에서도 출연진은 줄기차게 커피를 마셔댔다. 요즘 잘나가는 요리 프로그램인 <냉장고를 부탁해>와 <수요미식회>는 간접광고가 빌미가 되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달 ‘협찬고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행정예고했다. 이 개정안이 현실화된다면, 관련 신문보도들에서 예시한 대로 <SKT와 함께하는 히든싱어>나 <갤럭시S6로 보는 무한도전>과 같은 제목광고가 가능해진다. 보도·시사·논평·토론 프로그램에도 사실상 협찬을 허용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이미 광고인지 드라마인지 모르는 영상물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이제 광고 틈틈이 예능이나 뉴스를 봐야 할지도 모른다.

혹자는 묻는다. 광고가 좀 있으면 어때? 방송사도 먹고살아야 하잖아? 어떨 때는 PPL이 재미있던데?

하긴 간접광고 확대를 애타게 바라는 방송사나 ‘규제완화’라는 명목으로 개정안을 준비 중인 방통위 모두 방송사의 재원 확보를 주요 논리로 삼는다. 지상파는 모두 수백억원의 적자를 보고 있으니 광고규제를 풀어달라고 보채고, 종편과 지역방송은 우리부터 먼저 열어달라고 떼를 쓴다. 하긴 지방자치단체들조차 시립미술관 예산을 줄인다면서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 식의 제목광고를 스스로 나서서 하는 판이다.

“텔레비전 시청은 노동이다.” 미국 매사추세츠주립대의 섯 잴리(Sut Jhally) 교수가 30년 전 던졌던 고전적 명제다. 시청자들은 (예를 들어) 10분 동안 광고를 보는 대가로 50분 동안 드라마를 공짜로 본다는 것이다. 광고 시청은 노동이고, 드라마 시청은 보수이다. 노동은 가치를 만들어내고, 이 가치들은 쌓여서 광고된 상품의 교환가치를 상승시킨다.



프로듀사 ppl 스타일난다_경향DB



따라서 아무도 보지 않는 광고는 상품의 가치를 올릴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광고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시청자도 있지만, 그것은 일에서 재미를 찾기도 하는 노동자와 유사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일을 적게 하고 보수를 많이 받길 원한다. 자본가는 적은 보수를 주면서 일을 많이 시키길 원한다. 같은 논리이다. 시청자들은 광고가 나오는 동안 화장실에 가거나 다른 채널로 도망가버리고, 광고주들은 시청자들의 눈을 잡아두기 위해, 즉 일을 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축구장 한복판에 가상으로 상품 로고를 띄우는 소위 ‘버추얼 광고’나 드라마 안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PPL은 이 같은 상황에서 등장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잴리 교수의 논리를 빌려오자면, 드라마 PPL은 노동과 그 대가가 섞인 기형물이다. 모처럼 휴가를 받아 놀러갔는데 문자메시지를 통해 급작스러운 업무지시를 받는 꼴이다. 월급 주면서 반쯤 뭉텅 잘라내 회사에 기부금으로 내라는 격이다.

요즘 같은 세상, 통신료 따로 내고 VOD 값 따로 냈으니 노동 없는 드라마를 보고 싶건만, 강제로 앱 광고, 음료 광고, 식당 광고를 봐야 하는 것이 어찌 정상일 수 있는가?

게다가 정부는 나 억울한 것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돈 못 버는 회사들만 불쌍하다고 한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동조합을 통해 항의해야 한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마찬가지다. 시청자들도 멍하니 바라보고 있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한다. 방송 관련 시민단체에 힘을 보태거나, 방송사·방통위에 직접 항의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이라도 가져야 한다. 내가 일하고 월급 받는 회사의 일이란 말이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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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젊은층들이 종종 <마리텔>이라 줄여 부르곤 하는 이 프로그램은 7~8%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선전 중이다. 시청률만 보자면 30%를 무시로 넘곤 했던 10여년 전 <개그콘서트>와 비교하는 것이 가당치 않고, 요즘의 방송환경을 고려하더라도 <마리텔>을 올해 상반기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라 말하기는 좀 쑥스럽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눈에 띄는 이유는 따로 있다. <마리텔>은 지상파 방송사의 더딘 현실 인식과 위기감을 반영한다. ‘거실 텔레비전’의 시대가 저물어감을 보여준다. 더불어,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까지도 슬쩍 보여준다.

텔레비전이 노년층의 미디어가 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조사를 통해 거듭 확인된다. 텔레비전이 생활에 꼭 필요한 미디어라고 답한 세대는 50대 이상에 제한됐고, 젊을수록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꾸준히, 그리고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고 30대 이하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안 보는 것은 아니다. ‘본방 사수’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 텔레비전 수상기 대신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볼 뿐이다. 그런데 왜 텔레비전이 위기라고 말하는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는 경쟁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스마트 기기에는 언제든 접근 가능한 미드, 영드, 일드가 수두룩하고, 취향에 딱 맞는 웹툰, 배꼽을 잡게 하는 소위 ‘짤’들, 스포츠 하이라이트 등이 넘쳐난다.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의 경쟁 상대는 수백만개가 넘는다.

<마리텔>은 드디어 지상파 방송사가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같은 지상파는 물론 tvN, JTBC 등 케이블채널도 아닌, 유튜브와 아프리카TV가 경쟁자임을 인정한 첫 결과물이다. 50대 이상의 확장성 없는 시청자군을 포기하고 30대 이하의 본진으로 쳐들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카메라 한 대 세워놓고 어설프게 진행하는 저질 아마추어 방송으로 매도하던 1인 텔레비전 방송을 진지하게 벤치마킹한 겸손한 기획이다. 게임의 BGM을 그대로 쓰고, ‘별풍선’ ‘방송천재’ ‘노잼’ ‘천상계’ 등의 용어들이 난무한다. 결과도 나쁘지 않다. 시청률도 꾸준히 오르고, 동시간대에서는 계속 시청률 1위를 기록 중이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은 음식사업가이자 셰프인 백종원씨 (출처 : 경향DB)


지상파 3사가 케이블채널의 프로그램들을 슬그머니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이 불과 5~6년 전이다. Mnet의 <슈퍼스타K>가 선풍적 인기를 끌자 MBC는 <위대한 탄생>을 시작했고, OnStyle의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는 SBS의 <아임 슈퍼모델>로 재탄생됐다. tvN이 <꽃보다 할배>로 인기를 모으자 KBS는 <마마도>라는 유사품을 내놓은 적이 있고, JTBC의 <비정상회담> <마녀사냥>은 각각 MBC의 <헬로 이방인>과 KBS의 <나는 남자다>의 기본 콘셉트를 제공했다. 그러다가 이제 지상파는 전통적인 텔레비전 방송의 범위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리텔>은 그 시작이다.

그런데 <마리텔>의 가장 큰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쿡방’의 (부분적) 차용이라는 점은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냉부해)>를 연상시킨다. 여느 요리 프로그램과는 달리 일상적 음식, 특히 자취생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메뉴를 들고 나와 인기를 모으는 것도 비슷하다. 그런데 <냉부해>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생활쿡방’은 1인방송에서 드물지 않게 써먹었던, 그리고 꽤 인기를 모았던 방식이다. 민첩한 케이블 방송사는 다수 시청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기민하게 알아내 상품으로 만들었고, 지상파 방송사는 이제야 비로소 몸을 일으켜 바깥세상을 내다보기 시작한 셈이다.

그렇게 내다본 풍경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육성급 호텔 주방장의 화려한 요리는 재벌가 사랑 얘기 보여주는 드라마처럼 먼 나라의 구경거리로 끝나지만, <마리텔>이나 <냉부해>는 형식도 내용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뻔한 식재료로 짧은 시간 내에 그럴 듯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일은 환상을 욕망하게 만드는 대신 현실을 확인하게 한다. 말풍선이 날아다니고 카메라가 삐뚤거리는 <마리텔>이 장수 프로그램의 요소를 갖췄다고 생각되진 않지만, 지상파의 오만을 버리고 일상으로 내려왔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성공적이다.

사실 유튜브나 아프리카TV가 텔레비전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도 결국 다수가 원하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젊은층의 시청자들이 지상파를 포기하고 케이블채널의 예능 프로그램들을 주목한 것도 ‘작은’ 방송사의 생존본능이 대중의 심리를 더 분명하게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제 ‘공룡’ 방송사가 절박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해법을 ‘오만 버리기’와 ‘소통하기’에서 찾은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가뜩이나 나라의 책임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오만하고 여전히 소통을 거부하는 현실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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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TV에서 방영 중인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방송은 단연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다. 스타와 명사, 특정 분야 전문가 등 선별된 여러 명의 출연자들이 자신만의 콘텐츠를 직접 기획·연출해 인터넷 개인방송 대결을 벌이는 모습을 담은 이 예능 프로그램은 지난 2월 파일럿 방영 당시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가 최근 정규 편성되며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는 TV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다 담겨 있다. 즉 올드미디어가 된 TV가 뉴미디어를 끌어안으며 현재의 침체 상황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프로그램이다. 지금 TV는 위기에 빠져 있다. 우선은 급변하는 매체 환경 탓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매해 발표하는 ‘방송매체 이용행태’에 따르면 TV를 대체하는 매체로 스마트폰이 빠르게 성장 중이다. 이미 10~30대의 젊은층에서는 절반 이상이 스마트폰을 필수적인 매체로 인식하는 반면, 이 연령대의 TV 시청률은 한 자릿수로 떨어진 지 오래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보다 더 큰 원인은 방송국 자체에 있다. 시청률 지상주의에 빠져 소위 막장드라마나 복제 예능과 같은 콘텐츠를 쏟아내면서 TV 바깥의 신선하고 다양한 콘텐츠들과의 경쟁에 뒤처진 탓이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지상파가 내놓은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일단 보수적인 지상파가 기존 시청자뿐만 아니라 뉴미디어의 적극적인 이용층을 끌어들여 소통의 확대를 꾀하고, 출연자에게 연출권을 나눠줌으로써 권위를 다소 내려놓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가령 이 프로그램 안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 중인 ‘슈가보이’ 백종원의 요리 방송은 시청자들과의 쌍방향 소통이 실시간으로 자유롭게 이뤄지는 인터넷 방송 포맷에 힘입은 바 크다. 완벽하게 세팅된 스튜디오에서 제작진의 기획대로 진행되는 기존 지상파 포맷이었다면 지금처럼 큰 화제를 모으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좀 더 들여다보면 오히려 인터넷 방송에 대한 지상파의 자부심이 엿보인다. 개인방송 콘텐츠의 재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큰 재미는 그 모든 콘텐츠를 예능의 포맷으로 정리하고 아우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다양한 각도, 방과 방 사이를 오가는 편집, 적재적소에서 웃음을 극대화하는 자막과 컴퓨터 그래픽의 활용 등은 지상파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역량과 탄탄한 인프라의 힘을 증명한다. 신선한 출연자의 발굴과 섭외에도 지상파의 힘이 작용함은 물론이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은 음식사업가이자 셰프인 백종원씨 (출처 : 경향DB)


그렇기에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한계 또한 지상파의 한계와 닿아 있다. 시청자 수에 따라 순위가 급변하고 탈락이 결정되는 이 프로그램은 결국 지상파의 시청률 지상주의를 더 강화시킨 극한 서바이벌 방송에 다름 아니다. 실시간 시청률은 분단위에서 초단위로 더 잘게 쪼개지고 출연자들은 조금이라도 지루하면 곧바로 퇴장하거나 개인기를 요구하는 시청자들 앞에서 끊임없이 변신하며 최후의 에너지까지 쥐어짜내야 한다.

요컨대 프로그램이 추구한다는 소통은 실은 일방향적인 인스턴트 소통이며, 콘텐츠의 다양성은 말초적인 다양성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진행자인 서유리가 “주인님”이라 부르며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궁극의 시선은 광고주가 아닌가 의심이 간다. 결국 그 안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작고 작은 TV의 세계다.


김선영 |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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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5일 첫 방송을 시작한 KBS 2TV <개그콘서트>의 ‘민상 토론’이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한동안 TV에서 ‘정치 풍자’를 보기 어려웠던 국내 방송 환경을 고려해 본다면 파격적인 시도다. ‘민상 토론’에서는 뉴스 프로그램에서도, 신문 지면에서도 다루기 쉽지 않은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 문제들을 전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들을 정확하게 설명한다는 점은 놀랍기까지 하다.

‘민상 토론’이 들고나오는 주제와 이와 관련된 사안들 그리고 그 사안들에 대한 정책적 대안까지. 마치 진짜 정치토론 프로그램을 보는 듯하다. 우리 모두가 알면서도 외면하고 침묵해 왔던 문제들을 개그 프로그램에서 들고나왔다는 점을 높이 사야 하며, 또 시의적절한 사안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점 역시 우리가 주목하고 칭찬해야 할 점이다. 이렇게 저돌적이고 명확한 정치 풍자가 가능하다는 것을 시청자에게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프로그램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충분하다.

이와 더불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민상 토론’의 패널들로 나오는 출연자들이 만들어 내는 웃음코드의 ‘생경함’일 것이다. 사회자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당황하며 허둥대는 출연자들의 모습은 ‘민상 토론’의 중요한 웃음 유발 요인이다. 또 출연자들이 곤혹스러운 순간을 피하기 위해 내놓는 답변들은 사회자가 모두 정치적 의견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이런 황당한 상황은 오히려 웃음을 유발한다. 즉, 정치의 ‘정’자도 모를 것 같은 출연자에게 전문적 대안을 제시하라는 이 상황, 모든 일상적 말과 행동이 정치적 기준으로 해석되는 기형적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웃음으로 유발되는 포인트다.

그렇다면 이러한 ‘황당함’ ‘생경함’이 유발하는 웃음에 우리는 왜 공감하는가? 아마도 그 이유는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강요’와 ‘정보의 왜곡’ 때문일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민상 토론’ 속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개그맨 유민상이 지난 3월 서울 삼청동 만정에서 열린 코미디TV ‘맛있는 녀석들’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사회자는 출연자에게 느닷없이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해 의견을 말하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사회자가 던지는 주제들은 출연자가 의견을 낼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불안’을 증폭시키는 기제일 뿐이다.

불안감에 위축된 출연자의 의견은 곧바로 사회자의 입맛에 따라 각색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출연자들은 결국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 다른 사람을 웃기는 일에만 온 관심이 있는 개그맨, 즉 비전문가에게 정치적 의견을 묻고, 대안을 제시하라는 방식은 문제 해결의 의지보다는 그들의 당황스러움을 즐기는 ‘선정적 즐거움’만을 생산할 뿐이다.

말 못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의 곤혹스러움을 즐기는 방식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우리 사회를 닮아 있다.

‘민상 토론’의 출연자들처럼 토론이 가능한 ‘장’이 만들어져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가 보장되기 어려운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 코너의 출연자가 겪고 있는 ‘불안감’은 웃음으로 희화되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불안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민상 토론’의 출연자들은 서로에게 말할 기회를 미루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 표명을 두려워한다. 강요된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말하게 되는 출연자의 의견은 사회자의 진행에 필요한 수단,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사회 문제에 대해 ‘사유하고 고민할 시간’은 출연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사회자의 일방적인 판단과 단정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 프로그램 내용을 책임져야 할 PD는 이 문제와 관련 없으며, 지금 출연자가 말한 정치적 의견은, 개인적인 의견임을, 해당 프로그램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사회자는 계속 강조한다.

정치토론 프로그램이라는 ‘장’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논의를 진행했어도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돌려진다.

이렇게 개인에게 모든 사회적 책임을 넘기는 상황은 슬프게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결국 ‘민상 토론’에서 재현되는 발언의 기회 제공 방식, 사회자의 제멋대로 해석, 방청석(여론)을 감시하고 있는 검은 선글라스의 사나이, 책임지지 않는 언론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그들의 토론은 의미 없이 겉돌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토론해야 하는 것은 정치적 문제에 대한 획일화된 책임 공방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민상 토론’의 출연자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개그콘서트>의 ‘침묵 깨기’ 시도를 관망하기보다는 동참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종임 | 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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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올리버 트위스트>의 나라답게 사회계급 문제를 다룬 드라마가 많았다. 고된 현실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북쪽의 우리 친구들>(1964~1995년) 같은 드라마가 그 대표적인 예다. 영국의 작가나 감독들에게 노동자의 삶은 늘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영국 드라마에서 계급적 정체성이 사라졌다는 분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대처리즘의 종말과 ‘제3의 길’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대중은 더 이상 자신들을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았다. 몇년 전 영국에서 실시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답했다. 금융위기 이후 영국의 경제적 불평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준을 기록해오고 있는데 말이다.

반면 한국의 드라마는 예나 지금이나 줄기차게 ‘계급 갈등’을 주요 배경으로 등장시켜왔다. 문제는 이것이 서민 여성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데 있지만 “천한 것!”이라며 물컵을 던지는 재벌가 마님이 등장한들 그게 무슨 대수랴. 서민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꿰뚫어볼 줄 아는 재벌가 황태자 한 명을 알리바이 삼아 모든 갈등은 갑작스러운 해피엔딩 뒤로 숨어버리곤 했다.

그런 면에서 현재 SBS에서 방영 중인 <풍문으로 들었소>는 참신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서 ‘계급 갈등’은 주제 그 자체로서 전면에 다뤄진다. 최고의 법무법인 한송의 대표 한정호(유준상)는 정·재계를 쥐락펴락하는 권력가다. 겉으로는 지성인인 척하지만 속내는 특권의식으로 똘똘 뭉친 그의 이중성이 이 드라마의 볼거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현상은 한정호의 비서, 민주영(장소연)이라는 인물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이다. 민주영은 이 드라마에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그의 오빠는 사측의 불법 대량해고에 맞서다가 몸과 정신이 모두 파괴됐다. 그때 사측의 불법을 합법으로 조작해 준 것이 바로 한송이었다. 오빠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싶은 민주영은 한송 내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이런 민주영이 시청자의 미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인터넷 채팅창에서는 “이길 확률도 없는데 왜 저러냐”, “자신의 목적을 위해 누구든 이용하는 이기적인 인물”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갑보다 을이 미운 드라마는 처음”이라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자기 마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게 주인공의 권력이다. 주인공은 무슨 짓을 해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기 쉽다. 화면에 노출되는 시간의 특혜를 부여받은 주인공은 숨은 매력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행동을 이해시키기에 유리하다. 사랑하는 연인에게는 잘해 주는지 몰라도 툭하면 폭력성 돌발 행동에 경영 능력마저 검증되지 않은 드라마 <비밀>의 재벌2세 조민혁(지성)이 이사회에서 경영권을 뺏기게 될까봐, 그때도 얼마나 마음 졸이며 보곤 했던가. 그래도 다행히 이건 드라마일 뿐이다. 민주영은 주인공 한정호를 결정적 위기에 빠뜨리게 될 인물이니 사람들은 “이래선 안되는 줄 알면서도” 그를 미워하는 것뿐이다.

문제는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드라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인 ‘현실’에 있다. 혹시 ‘중산층의 신화’에 빠져 자신이 노동자임을 잊고 엉뚱한 사람의 편을 들어주고 있지는 않았나. 언제든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해고 동료의 어려움보다 오히려 재벌 총수의 건강만 염려하고 있지는 않았나.

<풍문으로 들었소>의 장소연(민주영역) (출처 : 경향DB)


사실 ‘갑’들은 현실에서도 드라마 주인공과 같은 권력을 누린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과 시시콜콜한 고민은 늘 주류 언론의 지면을 차지한다. 그래도 잊지 말자. 내 삶의 주인공은 나인데, 내가 나에게 가장 유리한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누가 들어주겠는가.


정유진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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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되면 각 방송사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테스트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시청자 반응이 좋으면 곧바로 정규 방송으로 편성되는데, 흥미롭게도 가족과 관련된 예능프로그램들이 명절 기간에 좋은 반응을 얻어 정규 방송으로 편성되고 있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아빠를 부탁해>도 마찬가지다. 연예인들은 평소 바쁜 일정 때문에 가족들과 대화할 시간이 별로 없다. 특히나 연예인 아빠와 딸의 관계는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싶다. <아빠를 부탁해>에 출연한 강석우, 이경규, 조재현, 조민기는 모두 쉰을 훌쩍 넘긴 중년 연예인들이다. 바쁘고 화려한 청춘시절을 지나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출가를 준비시켜야 하는 아빠들이다. 어느덧 성년이 되어 장성한 딸을 보면서 자신의 뒤를 돌아보곤 하지만, 요즘 ‘딸 바보 아빠’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들은 딸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아빠를 부탁해>는 제목만 놓고 보면 딸의 시점에 서 있다. 이 프로그램은 바쁘고 무뚝뚝한, 그리고 아주 유명한 아빠를 향한 딸들의 숨겨진 감정을 보여준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늘 우리 곁에 있던 엄마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대한 가족의 난감한 상황을 그렸다면 <아빠를 부탁해>는 늘 부재해 있던 아빠의 갑작스러운 현존에 대한 딸의 묘한 감정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무뚝뚝한 아빠나 자상한 아빠나 유명 연예인들을 아빠로 둔 딸들에게는 난처하고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특히 아빠와 거의 비슷한 길을 걷고자 하는 딸들에게 유명 아빠는 소박한 공원 벤치보다는 불편한 안락의자와 같을 것이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들은 모르긴 몰라도 딸들이 훨씬 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유명한 아빠들의 아우라에 눌려 있는 딸들은 아빠를 위해 자신들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딸들 출연은 정말 아빠를 위한 것일까? <아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의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이경규와 강석우의 두 딸인 이예림과 강다은은 모두 아빠의 모교인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재학생이다. 조재현의 딸인 조혜정은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조민기의 딸 조윤경은 미국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아빠의 입을 통해 아나운서를 희망하는 걸로 알려졌다. 모두 방송 연예인 지망생들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이 노골적인 딸들을 위한 연예인 입문 프로그램으로 보긴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예계 데뷔가 매우 절실한 시점에 있는 20대 초·중반의 딸들은 이미 <아빠를 부탁해>를 통해 방송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이들은 엄청난 방송 분량으로 노출되고 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아빠를 부탁해’가 아니라 ‘내 딸을 부탁해’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빠가 딸의 마음을, 딸이 아빠의 마음을 알아나가는 진솔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화사한 포장에 불과하다. <아빠를 부탁해>는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는 딸을 위한 ‘아빠의 청탁’, ‘아빠에 의한’ 딸의 일자리 창출에 공모하는 프로그램이다. 겉으로 보면 아빠와 딸의 관계 회복을 위한 보편적 감정을 호소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넉넉한 가정환경을 꾸리고 있는 가족관계의 행복한 재생산, 혹은 아빠의 연예권력을 딸에게 물려주려는 노골적인 인정투쟁 같아 보인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부유한 살림살이들, 소소하고 평범한 듯하나, 왠지 뭔가 잘 누리고 있는 그들만의 일상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SBS '아빠를 부탁해'의 한 장면 (출처 : 경향DB)


‘내 딸을 부탁해’라는 불편한 요청은 프로그램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박범훈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본인이 총장으로 있던 중앙대에 30대 초반인 딸의 교수 채용을 부탁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소위 ‘땅콩 회항’으로 구속된 조현아의 경우도 부친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잘못된 권력의 증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외무부 직원 채용, 대형 로펌 및 대기업 직원 채용 등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른바 ‘내 딸을 부탁해’는 가족관계의 회복을 위한 사랑의 슬로건이 아닌 부모의 권력을 대물림시키는 불평등의 기호가 아닐까?


이동연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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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는 우리 시대 특권층의 속물의식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특히 시민 위에 군림하려는 귀족의식과 특권을 대물림하려는 계급 세습의 욕망을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온 법조가 명문 출신이자 국내 최대 법률회사 ‘한송’의 대표 한정호(유준상)가 자신의 “제왕적 권력”을 다시 아들 한인상(이준)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내용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드라마는 한정호가 대표하는 “대한민국 초일류 상류층”의 속물성을 크게 두 가지 층위에서 풍자한다. 하나는 특권층의 기만적이고 모순적인 언어를 통해서요, 또 하나는 그들의 이중성을 관전하는 일반 시민들의 비평적 언어를 통해서다. 전자가 한정호의 가식적 “워딩”으로 대표된다면, 후자는 그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뒷담화’로 나타난다.

우선 한정호의 언어를 살펴보자.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모순성은 늘 스스로에 의해 폭로된다. 밖에서는 “요즘 세상에 귀족이 어딨습니까, 다 시민이죠”라면서도 집에서는 금세 얼굴을 바꿔 “요즘은 직급이니 재산이니 뭐니 해서 죄다 에스컬레이팅돼서 도무지 변별이 안된다”고 ‘누대의 귀족’으로서 우월감을 드러내는 인물이 한정호다. 그의 아내 최연희(유호정)도 마찬가지다. 유명 역술인 좀 소개해달라는 친구의 말에 “법리를 다루는 집안에서 어떻게 미신을 믿느냐”며 고상한 척하다가 이내 부적주머니를 들키고 만다.

이처럼 본색이 금방 들통 나는 것은 그들이 결코 “기민”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캐릭터 소개를 보면 한정호는 “논리의 제왕이자 의전의 달인”, 최연희는 “재색을 겸비한 최고의 귀부인”으로 설명된다. 그럼에도 쉽게 자기모순을 드러낸다는 것은 속물적 욕망에 비해 내면이 그만큼 얄팍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들 부부는 늘 서로에게 ‘정신 차리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 예측이나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과 마주치면 울음을 터뜨리는 ‘유리 멘털’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토록 ‘남의 시선’에 연연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정호의 탈모와 최연희의 주름 걱정은 그 내면 없는 존재들의 일차원적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풍문으로 들었소>의 풍자는 이 지점에서 더욱 강화된다. 한정호 부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을 통해 남을 의식하는 그들의 얄팍한 내면을 한층 효과적으로 풍자하는 것이다. 그 비평적 시선의 주체는 한정호의 구중궁궐 같은 집에서 소위 ‘가신’의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들이다. 한정호 부부의 가면은 가문의 명예를 이어야 할 장남 인상이 서민 출신 서봄(고아성)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이들이 충돌할 때마다 ‘가신’들의 관전평이 뒤에 따라온다. 특히 한정호 부부가 제일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의 순간에는 반드시 이들의 시선이 개입하여 그들의 치부를 강조하거나 본심을 대신 읽어주며 풍자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예컨대 가정출산 에피소드에서 정호 부부가 “사람의 도리”를 강조하면서도 은밀히 주치의에게 친자 확인을 의뢰하며 “비밀 엄수”해달라 당부하면, 그 뒤에 ‘가신’들이 모여 “친자 확인 검사한다는데요”라며 재차 강조하는 식이다. 봄과 인상 앞에서 관계를 인정하는 척하다가 뒤에서는 봄의 부모에게 수십억원의 ‘포기 각서’를 제시한 사실이 밝혀지자, 그 각서를 다시 한번 훑어보는 ‘뒷담화’로 다시 한번 정호 부부의 이중성을 폭로하기도 한다. 봄의 부모를 집에 초대했을 때 기품 있는 태도로 서울을 떠날 것을 제안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인권침해 수준”이라고 일갈하는 것 또한 이들의 비평적 몫이다.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출처 : 경향DB)


이 시선의 더욱 중요한 풍자적 효과는 그것이 한정호 부부의 이중성을 밝히는 걸 넘어서 ‘명문’이라는 그들의 자부심 자체가 허상임을 밝힌다는 데 있다. 부부가 거주하는 한옥을 중심에 놓고 또 다른 양옥이 둘러싸고 있는 기괴한 저택의 구조부터가 그 자체로 사극의 세트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풍자신은 정호 부부의 불화를 바라보던 독선생 경태(허정두)가 “중전마마 심기가 불편”한 것 같다고 비꼬는 장면이다. 그 연이은 장면에서 정호가 그 말 그대로 연희에게 “당신은 이 집안의 모후, 나의 중전”이라고 부르는 모습은 그들의 “귀족 코스프레”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사회 특권층의 근본 없는 귀족 놀이야말로 “풍문” 그 자체인 듯하다.


김선영 |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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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방영된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신데렐라 로맨스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었다. 그 이전까지의 신데렐라 드라마가 여주인공을 빈곤으로부터 구원하는 재벌 남주인공의 순정을 강조했다면, <시크릿 가든>은 사랑으로도 넘을 수 없는 둘 사이의 계급 장벽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가난한 여주인공에게 결혼은 못하니 “세컨드”라도 되어달라는 재벌 캐릭터는 너무 속물적이어서 오히려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드라마는 결국 남녀의 몸이 뒤바뀌는 판타지 기법을 동원하고 나서야 신데렐라 로맨스를 완성할 수 있었다. 신데렐라 드라마에서조차 더욱 강력한 판타지 형식을 빌리지 않고서는 계급 역전이 불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시크릿 가든> 이후 등장한 대부분의 신데렐라 로맨스는 이러한 현실의 증후를 공유한다. 달리 말하면 계급양극화 시대의 현실과 신데렐라 판타지의 점점 심해지는 괴리가 만들어낸 균열의 증상들이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재벌 남주인공에게 나타나는 정신질환이다.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이 폐소공포증을 앓은 것처럼 <보스를 지켜라>의 차지헌(지성)은 공황장애, <청담동 앨리스>의 차승조(박시후)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주군의 태양> 주중원(소지섭)은 극심한 난독증으로 괴로워한다. 이제는 재벌이 ‘제정신’이 아니어야 신데렐라 로맨스가 가능해진다. 아들과 하층계급 여성의 사랑을 반대하는 재벌 부모들이 뜻을 거스르는 아들에게 ‘미쳤군’ 운운하던 이 장르의 관습적 대사가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그 극단적 사례가 최신 트렌드인 다중인격 로맨스다. 현재 방영 중인 SBS <하이드 지킬, 나>와 MBC <킬미, 힐미>에서는 각각 이중인격, 7중인격 재벌이 등장한다.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재벌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넘어 인격이 분리되는 지경에 이르러야만 그나마 신데렐라 로맨스를 꿈꿀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예컨대 <하이드 지킬, 나>의 구서진(현빈)은 피고용인들을 내키는 대로 해고하는 악덕 고용주다. 재벌의 현실적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한 그는 기존 신데렐라 로맨스의 ‘백마 탄 왕자님’ 캐릭터인 또 다른 인격 로빈으로 변하고 나서야 가난한 장하나(한지민)와 사랑에 빠진다.

 

MBC 수목극 <킬미, 힐미> (출처 : 경향DB)

이 같은 시대의 증후는 신데렐라 여주인공들에게서도 뚜렷하다. 본래 신데렐라 로맨스 장르는 여성이 부유한 남성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얻는 대가로 노동을 제공하고 주체성을 포기하는 이야기다. 양극화 심화의 현실은 이 장르에서 신데렐라들의 노동조건이 한층 악화되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재벌들의 다양한 병명과 같이 여성들의 노동조건도 구체적인 호칭으로 노동의 강도를 표현한다.

 

가령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하지원)이 비정규직 스턴트우먼이었듯이 <보스를 지켜라>의 노은설(최강희)은 ‘88만원 세대’ 계약직 비서, <청담동 앨리스>의 한세경(문근영)은 ‘삼포세대’ 인턴 디자이너, <주군의 태양> 태공실(공효진)은 야간 청소용역 노동자였다. 그녀들의 ‘갑’은 모두 재벌 남주인공이다. 재벌의 정신질환 증상이 심해질수록 신데렐라의 노동강도가 세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로 <하이드 지킬, 나>와 <킬미, 힐미>에 이르면, 신데렐라들은 거의 감정노동자에 가까워진다. 장하나는 구서진이 인격 분리 징후로 고통스러워할 때마다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킬미, 힐미>의 오리진(황정음)은 정신과 의사라는 전문적 능력을 지녔지만 차도현(지성)과의 비밀주치의 계약을 통해 거의 24시간 붙어 지내며 그의 7중인격을 두루 보살피는 고강도 노동을 담당한다. 어느 날 오리진이 밤새 차도현의 다섯 인격과 모두 만나며 피로에 지쳐가는 에피소드는 그러한 감정노동의 극한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양극화 심화 시대의 어두운 증상들이다. 왕자는 아프고 신데렐라는 피곤하다. 신데렐라 판타지에마저 피로와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정도로, 이 시대 계급 장벽의 상처는 깊고도 짙다.

김선영 |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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