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기의 대표적인 학자 에라스무스의 휴식 예찬은 시적이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하다. “친애하는 신이시여, 나는 쉬고 있습니다. 이 휴식은 놀라워 입으로는 아무래도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일해야 살지만 일만 한다고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일손을 놓고 긴장을 푸는 쉼을 가져야 산다. 쉰다는 게 레크리에이션 즉 재창조의 과정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휴식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휴식을 취하는 방법이 사람마다 제각각이라는 사실이다. 생산의 제반 과정이 일정한 목표를 향해 돌아가는 것과 달리 쉬는 것은 일정할 수 없는 것이다. 



쉴 때는 자신만의 취미를 찾고 취향을 받들게 된다. 문화의 기반과 기본이 다양성에 있다는 얘기가 여기서 나온다. 만약 음악이 하나의 스타일밖에 없다면, 그 음악 스타일이 취향이 아닌 사람은 편안히 쉴 수가 없다. 그것은 결국은 위로와 휴식을 위해 존재하는 음악 스스로의 기능을 저버리는 꼴이다. 우리 대중음악은 아주 오랫동안 협소한 장르의 범위 때문에 질타를 받아왔다. 하나의 장르가 대세로 떠오르면 그전에 존재했던 이런저런 스타일은 고사의 비운에 처하곤 했다. 1990년대 초반 댄스음악이 부상하자 이전에 그토록 북적대던 포크의 공연장이 파리를 날렸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 대중가요는 획일화, 쏠림과 거의 동일시되었다. 2000년대의 K팝도 조금의 예외가 되지 못했다.



춤이 파워풀하고 섹시하며 저마다 나름의 개성을 갖추고 있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결국 K팝은 아이돌 댄스 판이다. 솔로 가수 하나 없이 죄다 최소 네 명 이상의 그룹이었고 다들 춤을 주력으로 삼았다. 



해외시장의 혁혁한 성과에 대한 포장이 커질수록 장르 편중이 문제라는 지적의 수위도 따라 올라갔다. 실제로 아이돌 댄스그룹 주도의 K팝에 많은 국내 음악인구가 무신경했다. 그들은 취향이 맞지 않은 그 음악으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2012년 싸이 현상과 올해의 조용필 돌풍은 어쩌면 이런 장르 편중과 획일화에 대한 반성의 징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두 사람은 아이돌 댄스가수의 삼촌, 아버지뻘 세대이며 음악 이미지와 장르도 달랐다. 잘나가던 아이돌 댄스의 K팝이었지만 정작 글로벌 센세이션은 A급 외모와 신체가 아닌 B급 캐릭터의 37세 가수 차지였고 올해는 어이없게도 CD 20만장 판매를 돌파한 64세의 노장이 대세를 쥔 것이다.



(경향DB)



심지어 어떤 음악 관계자는 “일 년의 반밖에 안 지났지만 이미 ‘올해의 가수’는 조용필로 정해졌다. 하반기에 어떤 강력한 흐름이 등장해도 그 이름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승승장구하던 K팝이 2년 연속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솔직히 근래 우리 음악계의 아이돌 스타 생산력은 뚝 떨어졌다. 요즘 나오는 아이돌 그룹들은 5~6년 전에 결성되어 펄펄 날았던 초기 K팝 전사들에 비해 존재감이 상당히 처진다. 이것은 앞으로 한국의 대중음악은 아이돌 댄스 일변도로는 곤란하며 서둘러 콘텐츠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중심을 아이돌 댄스그룹이 잡고 가되 장르와 세대를 더 넓게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제목 가수 싸이가 박근혜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경향DB)



무엇보다 음악은 휴식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이 공존해야 한다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결론은 다시 장르 다양화다. 록, 포크, 재즈 등 여러 음악이 댄스음악 주변에 포진해야 하고 20대 가수만이 아니라 40~50대 가수들도 적당한 시장지분을 가져야 한다. K팝의 미래를 위해서만 그런 게 아니다. 새로운 창조의 의욕을 낳게 하기 위한 음악 본연의 휴식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다양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칸트 말대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기쁨의 하나는 일한 뒤의 휴식’이며 음악을 통한 휴식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한국 대중음악은 이걸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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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과 댄스음악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면서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점이다. 흥분을 유발하는 요소는 두드림에 의한 박(拍), 이른바 비트라는 것이다. 음향학자들은 “사람들은 비트(Beat)를 인식(Perception)하면 행동을 일체화한다(Synchronization)”는 사실을 밝혀냈다. 앞 철자를 따 ‘BPS’라고 하는 이러한 특성은 록과 댄스음악이 펼쳐지는 곳에 가면 대번에 목격할 수 있다.



파워풀한 비트 음악이 들려오면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심지어 옆 사람의 움직임을 ‘커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비슷한 몸짓을 하게 되면서 멀리서 보면 하나가 되는 일체화된 광경을 만들어낸다. 이게 현장음악, 바로 ‘라이브’고, 여러 팀의 라이브를 축제 형식으로 엮는 것이 페스티벌이다.


지산밸리 록 페스티벌 공연 모습 (CJ E&M 제공)


 

근래 라이브와 페스티벌의 성장세는 무섭다. 공연강국으로 통하는 영국은 2011년 총 670차례, 지난해 700차례의 옥외 대형공연이 개최되었다. 라이브 음악의 매출은 해마다 10% 이상의 증가세를 보이면서 매출규모는 15억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덩치 큰 나라답게 미국은 라이브 음악 매출이 10년간 거의 2배 증가해 2011년에 46억달러를 기록했다. 이렇게 라이브 음악 쪽에 돈이 몰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대규모 관객이 참여하는 페스티벌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과거 음악계를 지탱해준 것은 주지하다시피 음반이다. 만약 가수가 100원의 수익을 거두었다면 대략 음반으로 75원, 공연으로 15원, 저작권으로 10원을 벌었다. 1990년대 말까지도 그랬다. 10년이 흐른 근래 음반 매출은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50%나 폭락해 반 토막이 났다. 반면 공연은 폭발적 성장세를 자랑하고 있으니 음반과 라이브의 지분이 완전 역전된 것이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여 몇 년 뒤에는 가수들이 오로지 공연을 위해 신고 차원에서 음원을 만들지도 모른다.



흥겨워 하는 록매니아 (경향DB)


녹음된 음악, 그것이 음반이든 음원이든 음악산업의 중심을 지키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소비자들이 음악을 접하기 위해 음반이나 음원을 듣는 게 아니라 공연장과 페스티벌을 찾기 때문이다. ‘음악시장의 주인’인 젊은이들이 전에는 수개월간 돈을 모아 음반을 샀지만 지금은 페스티벌의 티켓을 구매한다. 전문가들은 “음악팬들은 이제 콘서트와 같은 직접적 체험을 원하고 여기에 비용지출을 집중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한다. 수동적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 가서 직접 가수의 라이브에 빠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특히 무엇보다 인간의 BPS 욕구를 자극하는 페스티벌은 젊은 관객들에게는 거대한 유혹이다. 같이 흔들고 뛰노는 일체감을 즉각 형성할 수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하나의 ‘해방구’다. ‘함께 노는 음악’의 시대가 됐다고 할까. ‘듣는 음악’ 시대는 갔고 지금은 ‘보는 음악’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국내 음악계에서도 페스티벌은 이미 과열 단계로 진입했다. 올해는 여름 4주간에 걸쳐 지산밸리, 펜타포트, 안산밸리, 슈퍼소닉, 슈퍼콘서트 등 무려 5개의 대형 페스티벌이 열려 치열한 집객 경쟁을 벌이고 있다. 출연섭외 경쟁이 불가피해지면서 주요 해외 밴드의 몸값이 올라가고 그게 상당부분 소비자 부담이 된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아직 공고하지 않은 공연시장의 현실로 볼 때 4주간 5개 페스티벌은 과잉이라는 것이다.



걱정되는 게 사실이지만 문제적 관점에 앞서 트렌드의 이동이라는 시점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라이브와 페스티벌이 음악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40년 넘게 활동하면서 한 번도 페스티벌에 출연하지 않았던 조용필이 올해 슈퍼소닉 콘서트에 참여하지 않는가. 음악계는 ‘볼거리’에 만족하지 않고 ‘함께 놀 거리’를 찾아내는 데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아이돌 댄스음악 주도의 K팝도 예외일 수 없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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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을 공식적으로 출시하기 전부터 조용필이 몰고 온 화제는 메카톤급이었다. 신곡 ‘바운스’가 음원차트 1위에 오른 그 순간에 벌써 현상을 예약했다고 할까. 4월 말부터 5월 첫 주까지 음악 관련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그의 것이었다. 신드롬이나 센세이션이란 표현을 적용할 수 있는 가수는 지금까지 한둘이 아니지만 당사자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60대 가수란 점에서 그 현상은 종이 달랐다.



디지털 세대가 주도하는 음원차트를 정복한 것이나 가수가 조금만 나이가 들면 음반판매량은 아예 포기하는 현실에서 10만장이라는 얼핏 이해할 수 없는 판매고를 거둔 것은 노장가수의 영역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베테랑도 추억의 뒤 무대가 아닌 현실의 앞 공간에서 얼마든지 경쟁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조용필 돌풍은 인상적이다.



조용필은 가수로서의 시제가 과거가 아닌 현재임을 시범하기 위해 음반을 제작하면서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스스로의 말에 따르면 ‘내 틀에서 벗어나는 것, 또 다른 나를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렉트로닉 사운드, 모던 록, 랩 등 통상적으로 63세의 나이에 부합하지 않는 젊은 장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주행, 역공이었다. ‘영’한 음악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일반의 예상과 반대로 치고 나간 것이기에 낯설 소지가 다분했다. 사실 ‘바운스’나 앨범과 동명의 곡 ‘헬로’ 등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록이 혼합된 사운드와 선율은 기성세대 팬들이 알고 있는 조용필 음악 스타일은 아니다. 솔직히 처음에 40~50대 연령층에서는 ‘친구여’ ‘그 겨울의 찻집’과 같은 노래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러 번 들어야 친숙해질 곡이었다고 할까. 홍보와 마케팅의 조건이 유리하지 않은 노장가수 입장에서 팬들이 ‘여러 번’ 들을 수 있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조용필은 그럼에도 젊게, 모던하게 가는 리스크 전략을 감행했다. 모험과 도발을 택한 것이다. 흔히 아티스트를 논할 때 우리는 드높은 예술성과 함께 ‘태도’를 강조한다. 음악인이 아무리 대중 다수가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어내 호응을 창출했어도 기존의 성공 공식을 따랐을 경우 역사는 점수를 박하게 매긴다. 조용필은 이전의 패턴과 선입견을 탈피했다는 점에서, 역공을 취했다는 점에서 아티스트의 행보에 충실했고 그 결과 지극히 음악가적인 앨범을 내놓았다. 이게 음악계의 찬사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음악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이후의 전략을 구사하는 데도 주춤할 필요가 없었다. 그 나이의 가수가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쇼 케이스’ 행사에 나선 것부터 파격이었고 젊은 가수처럼 디지털 싱글을 낸 것도 놀라웠다. 특히 ‘바운스’를 월드스타 싸이의 ‘젠틀맨’ 열풍이 휘몰아치고 있는 시점에 꽂아넣은 것은 대담함의 백미였다. 기성세대 팬들은 여기에 감동받아 “가왕답다!”를 연발했다. 어른들은 현재 “조용필이 잘되니까 괜히 내가 잘된 것 같다”고 뿌듯해하고 있다.




조용필은 오랫동안 오로지 노래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TV 출연이 아니라 공연에만 집중했다. 노래하고 연주하는 음악가의 진정성으로 최고 가수의 위상을 지킨 것이다. 아이돌과 예능이 판치는 요즘 음악계에서 진정한 가수의 면모를 원하는 사람은 그를 찾을 수밖에 없다. 대중은 모처럼 새 앨범을 가지고 컴백한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아마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를 동시 포섭한 선풍은 음악역사상 거의 처음이 아닐까 한다. ‘어른 따로, 애들 따로’의 세대차가 음악부문에도 고착된 현실을 전제하면 정말 별일이다. 음악계는 조용필 열풍이 세대공생의 새로운 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다세대가 공존해야 우리 대중음악에 절실히 요구되는 다양성도 가능해진다. 너무 놀라운 일을 겪다보니 갑자기 바라는 것도 많아졌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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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의 신곡에 대한 대대적 관심은 다시금 K팝의 글로벌 상승무드 기대를 높이고 있다. 대중음악은 언제나 젊음이 주인인 ‘지금’의 음악이 끌어가는 것이라면 K팝이 대중적 시선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거대 기획사의 아이돌 댄스음악이 반드시 판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다른 한편에는 정반대 성격에다 그 못지않은 파괴력을 발하는 별도의 흐름이 움트고 있다. 


바로 음악계 전설들의 용트림이다. 과거에는 나이가 들면 시장과 인기차트에서 퇴각해 이름만으로 버티는 노장들이 근래 ‘레전드의 소환 분위기’를 타고 잇달아 전면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젊은 K팝이 힘차게 뻗어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또 한쪽에서 베테랑들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장면은 상쾌한 그림이다. 


 

신구의 등권(等權) 조성 때문만이 아니라 다양성을 꾸려간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또한 그들과 함께 청춘시절을 보낸 기성세대들도 돌아올 것이기에 공연시장의 확대 측면에서도 좋다.


열정무대 펼치는 들국화 (경향DB)



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조용필, 들국화, 이문세가 그 면면들이다. 전인권과 최성원이 다시 합쳐 전성기의 라인업을 갖춘 들국화는 현재 진행 중인 공연에서 ‘다시 행진’의 기염을 토하고 있다. 높은 음을 쩌렁쩌렁 울려대는 전인권의 말끔한 ‘쾌창’을 되돌려 받은 객석도 연일 감격의 ‘떼창’으로 화답 중이다. 


들국화는 서정성의 허울 아래 유약하고 나른해져가는 근래 대중음악의 행태를 꾸짖으며 씩씩한 아우성을 원하는 음악수요자들이 엄존하고 있음을 실증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공연으로만 컴백한 게 아니라 신곡도 내놓았다는 점이다. 전인권·최성원·주찬권이 재결합 신고식으로 이번에 출시한 새 노래 중 하나는 ‘노래여 잠에서 깨라’다. 멤버들은 현재 신곡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가수의 존재감과 활동력은 두말할 것 없이 신곡 발표에 달려 있다면 전설의 귀환에 방점을 찍는 인물은 가왕 조용필이다. 2003년에 18집을 낸 그는 10년 만에 정규 앨범을 들고 가수로서 현재 시제의 회복에 나섰다. 조용필 측은 “사람들이 신보를 냈다는 것만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자세를 낮추고 있지만, 록으로 무장한 신보 수록곡을 먼저 접한 사람들은 올해의 앨범감이라며 호평하고 있다.


젊은 가수들의 것보다 훨씬 빼어난 거장다운 음악이라서 음악계 전체가 조용필의 새 앨범에 초긴장 상태라는 얘기도 들린다. 조용필은 게다가 신보 출시에 맞춰 젊은 가수들의 특전인 ‘쇼 케이스’ 무대를 가진다. 환갑을 훌쩍 넘긴 노장 음악가로선 파격적 접근이다. 이후의 스케줄은 늘 그랬듯 전국 순회공연이다. 신작 앨범과 콘서트의 양면 공략은 돌아온 거장들의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레전드의 귀환이라고 해서 결코 잠룡으로 머물지 않겠다는 회심의 선언이다. 


‘발라드의 아이콘’ 이문세도 6월 공연으로 컴백한다. 공연에 붙인 ‘대한민국’이라는 타이틀에 자신감이 묻어난다. “공연으로 대한민국 관객들의 지난 세월을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 역시 무대만이 아니라 11년 만의 새 앨범 제작에 땀을 쏟고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음악적 정체성과 앞으로의 30년’을 위해서라도 신곡을 내야 한다고 밝혔다. 


노련한 역전의 용사들이 단발의 성격이 강한 콘서트를 넘어 음반으로 컴백 포인트를 잡았다는 것은 위험하지만, 위험하기에 고부가가치의 행보로 평가된다. 


싸이를 비롯한 젊은 K팝 전사들이 독점하는 듯한 판의 한가운데서 아버지뻘의 전설적 아티스트들이 앨범을 내고 공연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은 이례적이다. 조용필, 들국화, 이문세 외에도 활동이력 20년을 넘긴 많은 중견들이 오랜 무기력을 털고 신보로 컴백할 것이라고 한다. 지금이 어쩌면 음악계가 실한 내외를 다지는 ‘조정기’인지도 모른다. 모처럼 반가운 풍경을 본다. 노래가 정말 잠에서 깰 모양이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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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대중가요는 흔히 사랑과 이별 타령이라고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사랑의 환희보다는 헤어짐의 아픔을 다룬 노래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잘돼서 희희낙락하는 사랑보다는 역시 연정의 대상에게 퇴짜를 맞거나 이별을 당해 보답 받지 못한 사랑이 오래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대중가요는 이러한 관계의 ‘비참 정서’를 반영함으로써 위로의 기능 측면에서 빛을 발한다.


이별의 쓰라림을 담은 노래에 특히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한 여성들의 공감지수가 높다. 요정으로 통하는 박정현의 노래 ‘미장원에서’는 이별을 맞은 여자의 기분을 너무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게 두 가지 삶이 있죠/ 그대 함께했던 인생과 나 홀로 살아갈 인생/ 나 이제 머리를 자르며 그 두 번째를 준비하지만….”


이 분야의 여왕이라고 할 이소라의 노래는 어떠한가. “까만 눈물과 번진 입술의 사랑은 불결함입니까/ 굳은 잠금과 죽은 닫힘의 고상은 순결함입니까.” 그가 부른 ‘블루 스카이’란 곡의 노랫말을 놓고 이게 도대체 뭔 말이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짝을 잃어본 여성들은 아마 금방 그 의미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 다음 부분의 가사는 가히 방점을 찍는다. “나 혼자 일어난 미친 아침은 맑아도 눈물입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눈물을 달고 사는 앙상한 ‘이별 여인들’의 심정이 꼭 이처럼 패배적이지만은 않다. 헤어지고 나서 쓰라린 마음을 훌훌 털고 다음을 준비하는 노래도 있다. 미국 여성이든 한국 여성이든 지금도 실연(失戀) 뒤에는 진주가 부른 ‘난 괜찮아’의 원곡 ‘아이 윌 서바이브(I will survive)’를 열창한다고 한다. ‘너 같은 남자 없어도 난 충분히 견디며 살 수 있다’고 다짐하는 뜻에서 이 노래를 선곡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재기의 메시지보다 좌절과 체념의 노래가 훨씬 많고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 대중가요가 고마운 것은 비밀을 풀어주듯 이런 섬세하고 복잡다단한 여심을 살짝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시인 중의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는 “사랑에 병들었을 때 여자는 남자보다 더 고통을 겪지만 그것을 감출 줄 안다”고 했다. 애이불비, 즉 태연한 표정으로 아픔을 은폐해버리니 남자들이 그 마음을 알 리가 없다.


빼어난 가창력의 가수 장혜진은 마침 ‘왜 나만 아프죠’라는 노래를 불렀다. “왜 나만 아프죠/ 왜 그댄 괜찮죠/ 우리 함께 사랑한 것이 아니었나 봐요/ 그댄 남자라서 상한 곳 하나 없어서/ 웃음도 질 수 있나 봐요….” 여자의 마음을 누군가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이라고 말했다. 톨스토이도 내밀하고도 감출 줄 아는 여심이 신비로웠던지 여성을 “아무리 연구를 계속해도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묘사했다.


제54회 그래미어워드 시상식에서 총 6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 가수 아델 (경향신문DB)


근래 음악계는 전 세계 공히 여가수들 세상이다. 다시 말해 여성들의 실연가가 판친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그래미상을 휩쓸며 최고가수로 등극한 영국 여가수 아델도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통한 마음을 ‘롤링 인 더 딥(Rolling in the deep)’에 담아냈다. “저 깊은 곳까지/ 너는 네 손안에 내 마음을 가졌지/ 하지만 박동에 맞춰 그것을 갖고 놀았던 거야….”


아델보다 먼저 복고열풍을 자극하며 세계를 석권한 같은 영국 여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음악의 내용물은 비슷하다. 사랑의 상처가 없었더라면 2000년대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그의 ‘백 투 블랙’ 앨범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가수만 그러랴. 남자가수들의 경우도 실연의 고통으로 가득한 곡들이 부지기수다. 아픈 사람들, 아픈 노래들 천지다. 언제나 그랬지만 요즘은 더욱이나 이별가가 대중가요의 주 종목으로 굳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대중가요의 이별은 이별의 쓰라린 심정, 체념과 좌절을 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 향하는 희망과 재기로 이어진다. 


괴테의 말이 맞다. “앞길에 아름다운 희망이 있으면 이별도 축제와 같다!” 대중음악은 이별 축제가 아니라 실은 이별을 내건 ‘힐링 축제’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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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는 록밴드의 역경을 그린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10년이 훨씬 지난 작품이지만 모든 음악가들이 두고두고 기억할 명대사를 남겼다. 음악에 삶 전체를 건 극중 인물 성우에게 친구가 던지는 말이다. “너, 행복하니? 그렇게 하고 싶은 음악하면서 살아서 행복하냐고. 우리 중에 지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놈 너밖에 없잖아. 행복하냐고?”


비단 음악하는 사람들뿐이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누구한테 불쑥 삶이 행복하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감독은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큰 질문’이라고 했다. 지금의 모든 가수, 연주자, 작곡가를 비롯한 음악관계자들 대다수가 이 물음에 영화 장면에서 성우가 그랬듯 분명한 응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출처:경향DB)



지난해는 우리 K팝이 그야말로 보통명사화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위용의 깃발을 휘날린 해였다. 그래서 ‘아이돌 음악에 관한 한 한국이 일본을 확실히 제쳤다!’는 말도 나왔다. 무엇보다 ‘글로벌 센세이션’으로 수식된 싸이의 ‘강남스타일’ 선풍이 있었다. 외형적 지표로 보면 한국의 대중음악은 급성장의 페달을 밟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선을 그러나 밖에서 안으로 돌리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음악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음악계 전체에 피로감이 짙게 퍼져있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 음반시장은 죽었고 디지털 시장마저 여전히 음악계에 온기를 제공해주지 않아서 좀처럼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기 힘든 경제적 측면만을 두고 토해내는 푸념은 아니다.


가수 지망생은 거대 기획사에 들어가지 않으면 홍보와 마케팅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오디션 프로가 터준 숨통은 빙산의 일각이다. 기획사 가수로 뽑히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다고 인디 쪽으로 방향을 잡자니 심리적 안정감이 들지 않아 하기 전부터 숨이 찬다. 왜 한국 음악계만 이러냐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무자비한 IT 침공에 따른 미디어 변화에 음악이 대표로 희생돼 비단 우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 음악계가 신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쯤은 안다. 심각한 것은 현저하게 나락으로 떨어진 음악가들의 사기와 활력이다. 상당수가 음악을 해도 설레거나 신나지가 않는다고 한다. 할 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왜 이러는 걸까. 경제적 대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대중적 관심이 후퇴한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음악관계자들은 앞으로 전(全) 세대가 듣는 만인의 애청·애창곡은 나올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강남스타일’은 싸이 본인의 말대로 ‘어쩌다 걸린’ ‘만에 하나인’ 경우다. 30대만 돼도 매주 순위가 바뀌는 다운로딩 차트 상위권 노래를 잘 모른다. 짝이어야 할 ‘대중’과 ‘대중가요’의 거리가 한참 벌어져있는 셈이다. 음악이 대중예술을 진두지휘하며 호령한 양상은 과거의 추억이고 지금은 살아가는 데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은 ‘배경음악’ 신세로 전락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게임에 삽입되거나 깔려야 겨우 대중이 귀 기울이는 상황이다.



음악이 위축되면 음악인들의 꿈과 희망도 퇴각한다. 가수와 밴드 지망생들한테 간혹 이런 질문을 받는다. “음악을 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요? 정말 궁금해서 묻습니다.” 그러면 “하고 싶은 것을 해야죠. 젊었을 때 하지 않으면 후회합니다”라는 말을 건네지만 개운하지가 않다. 사회전반이 그럴 테지만 음악계 종사자들이 느끼는 불안의 늪은 깊다.


20대 초반의 한 밴드 멤버가 술자리에서 넋두리를 한다. “K팝이 저렇게 외국에서 떵떵거리는데, ‘강남스타일’은 반년이 다되도록 저렇게 잘나가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흔들릴까요? 음악계가 잘되면 더 음악을 하고 싶어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네요.” 어쩌면 대중음악의 실제 키워드는 ‘K팝 낙원 그리고 K팝 사막’이 아닐까. 한쪽은 떠들썩하고 다른 한쪽은 허덕이는 이 극심한 콘트라스트가 더욱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우울한 후자 쪽에 당분간 희망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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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1970년대 말 디스코음악 전성기 때 LA 타임스의 유명 저널리스트 로버트 힐번은 디스코 유행에 분통을 터트리듯 신랄하게 휘갈겨 썼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우리들 삶에 신념을 불어넣었고 1960년대 록뮤지션들은 사랑과 고통을 노래했던 반면 디스코는 매춘굴의 밤과 같은 일시적인 전율만을 제공할 뿐이다.” 반복적인 리듬에 의한 음악성 빈약과 과잉 상업성을 이유로 디스코를 혹평한 것이었지만 그의 독설에는 실은 댄스음악에 대한 유서 깊은 편견이 숨어있다.


로버트 힐번이 엘비스 프레슬리에게는 존경을 표하는 위의 글을 쓰기 20년 전인 1950년대 중반에 엘비스가 데뷔했을 당시 미국 기성사회의 반응이 어땠는지 몰랐을 리 없다. 엘비스가 텔레비전에 나와 능란하게 허리 아래를 돌리며 야릇한 춤을 추고 거기에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광경에 어른들은 ‘망할 놈의 세상’이라고 개탄했다. 오클랜드의 한 경찰은 “만약 그가 거리에서 그렇게 몸을 놀려댔더라면 우린 그를 체포했을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가수 앨비스 프레슬리 (출처; 경향DB)



조금 깨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몸을 흔드는 댄스를 방정하지 못하다고 보는 인식은 남아있다. 춤을 자극적 몸놀림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그 일단이 나타난다. 당연히 춤을 내건 댄스음악도 예술성과 품격이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에 시달려왔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젖어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막 글로벌 센세이션을 몰고 왔을 때 한 방송관계자는 빈정거리는 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곡이 빌보드 2위에 오를 만한 곡이나 됩니까? 솔직히 좀 창피해요. 그저 춤이나 추자는 건데 이런 노래 때문에 마치 한국 대중가요가 온통 댄스음악으로 인식될까봐 걱정되네요.” 


세계를 무대로 뻗어가는 K팝에 박수는커녕 우려와 비판의 시선으로 일관하는 사람들 중에도 비슷한 입장을 피력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K팝은 왜 모조리 아이돌의 ‘댄스’음악이냐고, 경박하고 천속하지 않느냐고 얼굴을 찌푸린다. 일회성, 단발, 퇴조 등의 표현들에는 댄스음악이 딴 음악들에 비해 유통기한이 짧다는 시각이 깔려있다. 댄스음악에 대한 홀대와 무시가 은연중에 산재해 있는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 K팝의 문제는 댄스음악이라서가 아니라 ‘댄스음악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는 생각이다. 다양성 부재에 대한 비판은 백번이고 동의하지만 행여 댄스음악을 예술적으로 폄하하는 것에 기반한 K팝 불신론은 편견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중음악은 기본적으로 놀이이고 그것의 쌍둥이 자매는 바로 춤이다. 위대한 역사가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에서 “춤은 놀이의 구체적이면서 완벽한 형태”라고 했다. 이게 대중음악의 기원이라고 하는 아프리카 음악의 본질, 다름 아닌 리듬이며 그것은 음악과 춤이 동체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댄스음악을 깔보는 것은 곧 대중음악을 무시하는 것이며 나아가 대중을 경멸하는 것이다. 고전음악과 대중음악, 고급과 저급, 진지함과 오락이라는 19세기 중·후반의 근대에 확립된 잔혹한 계급적 분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르주아적이며 엘리트적인 시각이다. 음악이 대중화, 댄스화하는 것은 쇠퇴하는 문화의 증상이 아니라 평등과 보편화로 향하는 현상이다.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해 댄스음악이란 용어를 회자시킨 김완선은 무대를 휘저으며 춤을 췄지만 그가 부른 곡은 신중현, 산울림의 김창훈, 손무현 등 대부분 록 음악가들이 썼다. 워낙 댄스음악이 음악적으로 대우받지 못하자 그 고정관념을 뒤집기 위해 음악성을 인정받는 록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중음악이 담론도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자리에도 낄 수 없었던 거의 30년 전의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만약 아직도 댄스나 댄스음악에 대한 그런 선입관이 존재한다면 K팝은 의연하게 설 자리가 없다. 아니 대중음악이 영원히 이해를 얻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강남스타일’의 선풍을 비웃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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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대중음악평론가



올해는 음악계의 판을 주도한 신진가수들 못지않게 유난히 베테랑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한 해였다. 해외만 하더라도 2012년은 비틀스가 1962년 영국에서 첫 히트곡 ‘러브 미 두’를 발표한 지 50년이 된 해이며 그들의 라이벌이었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로큰롤밴드’ 롤링 스톤스도 올해로 결성 반세기를 맞았다. 이 그룹은 막 50년 활동을 압축하는 명곡 50곡을 추린 베스트앨범을 출시했다.


1963년 사망한 ‘프랑스의 목소리’ 에디트 피아프도 사후 50년을 앞둔 올해 다시금 추모열풍이 일었다. 현재 가장 잘나가는 샹송가수 파트리샤 카스가 얼마 전 내한공연을 가진 것은 순전히 대선배 에디트 피아프의 반세기를 기리는 헌정 앨범을 내놓은 데 따른 것이다. 역시 지난달 말 내한무대에 선 엘튼 존은 공연타이틀로 ‘로켓 맨의 40주년 기념 투어’를 내걸었다. 비틀스가 시작한 록을 완성했다는 평을 듣는 밴드 레드 제플린도 오랜만에 실황앨범을 냈다. 1968년에 결성했으니 하드 록 팬들이 레드 제플린의 이름을 안 지도 어느덧 45년의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40 혹은 50이란 숫자에 해당하는 캐리어의 가수들은 이밖에도 나열하기 힘들 만큼 많다. 그들이 근래 들어 부쩍 쓰임새가 많아진 어휘, 이른바 레전드(legend)다.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 (출처;경향DB)

 



대중음악의 황금기라는 1960년대에 그토록 록과 팝이 글로벌 시장에서 맹위를 떨쳤어도 서구 기성세대와 클래식 진영은 대중음악에 대한 전폭적인 인정에 인색했다. 무엇보다 역사가 일천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1950년대 초중반 솟아난 로큰롤은 황금기인 1970년대에 겨우 20년밖에 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대중음악도 나이테를 쌓으면서 10과 20만해도 대단하던 숫자가 이제는 40과 50으로 불어났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역사를 축적한 것이다. 서구에 레전드들이 부지기수라면 우리는 어떠한가. 전혀 뒤질 게 없다. 이미자, 패티김, 최희준, 신중현은 활동 50년을 넘겼다. 고 임정수 지구레코드사 사장은 생전에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히트하면서 음반사를 차릴 수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도 1960년대에 음반산업이 개화했음을 말해준다. 이미자를 비롯해 남진, 나훈아, 하춘화 등은 트로트의 별들이며 최희준, 패티김, 정훈희는 스탠더드 팝의 전설들이다. 청춘과 손잡은 록 부문의 신중현, 조용필, 산울림, 들국화 그리고 포크 부문의 송창식, 한대수, 이장희, 정태춘, 김광석 등도 모두 레전드들이다.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능히 오를 이름들이다. 서태지를 비롯한 이후 시대의 예비 전설들도 즐비하다.


‘돌아온 세시봉’이 말해주듯 얼핏 우리도 근래 들어 레전드에 대해 대접을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몇 십 주년 하는 제목의 거장 공연도 심심찮게 열린다. 며칠 전에는 ‘록의 대부’ 신중현의 공연이 개최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의 빛나는 명곡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레코드매장에선 1980년대를 주름잡던 가수들의 음반조차 구하기가 어렵다. 그 이전 가수들은 종류가 지극히 제한된 히트곡 모음집이 전부다. 그나마도 수록된 노래를 들으면 원곡이 아닌 경우가 수두룩하다. 이건 MP3의 경우도 다를 게 없다. 여기서 수십 년 전의 곡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음악 강국들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


정작 중요한 레전드의 음악을 젊은 세대가 챙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출연한 TV 프로그램 덕분에 이름은 기억하더라도 그들이 남긴 전설의 명곡은 새로운 수요자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레전드의 소환시대’라는 규정이 말뿐인, 여전한 레전드에 대한 푸대접이다. 한 대학생은 “거장을 알고는 싶지만 그 음악을 일일이 듣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레전드에 대한 관심은 있어도 레전드음악에 대한 수요는 태부족이라고 할까. 그러니 가뜩이나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결여로 음원관리가 소홀한데 음악을 찾는 사람도 적으니 레전드시장이 확립될 리 없다. 계통 부재는 당연하다. 하긴 가수사전 하나도 없는 나라, 이게 K팝의 휘황찬란한 광채에 깔린 대한민국 음악계의 그늘진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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