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보기=====/임진모 칼럼'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16.06.20 가수의 인성교육
  2. 2016.05.20 ‘아시아 송 페스티벌’의 꿈
  3. 2016.04.15 장범준 유감
  4. 2016.03.18 소외되는 최신음악
  5. 2016.02.19 인종 불평등에 저항하는 대중음악
  6. 2016.01.08 아델 ‘CD음반’ 열풍의 의미
  7. 2015.12.11 아레나와 음악 활성화
  8. 2015.11.20 삶의 애환이 있는 음악

세계 음악시장에 깃발을 휘날리는 K팝 퍼레이드의 펀치력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해외에서 열리는 K팝 가수들의 공연열기를 보면 아직 기세가 꺾인 것 같지는 않다. 미국 배우 엠마 스톤이 ‘훌륭함을 넘어선 중독’이라고 표현할 만큼 서구도 인정하는 한류 대중음악은 그들에게 도대체 뭐가 매혹적일까. 흔히 K팝의 성공 요인으로 역동적인 군무, 가창 역량, 빼어난 비주얼 그리고 기획사의 프로듀싱 기술 등 크게 네 가지가 꼽힌다.

음악관계자들은 요즘 들어 이것들에 ‘가수의 인성’이 추가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한다. 해외에서도 두꺼운 팬 층을 보유한 톱스타들에게 사회적 물의와 추문이 잇따르면서 인성교육이란 화두가 동시 부상하고 있다. 연예계에서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것은 유행의 변화나 창의의 후퇴가 아니라 ‘사고 한방’이다. K팝이 내수를 넘어 어엿한 ‘글로벌 상품’으로 뛰어오른 상황에서 스타의 사건·사고는 우리뿐 아니라 해외 고객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외국의 K팝 팬들조차 최근 제이와이제이(JYJ) 박유천의 성폭행 피소 뉴스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일본의 혐한(嫌韓) 시위에는 동조하지 않아도 적지 않은 일본의 기성세대가 K팝에 비호감을 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은 음악적으로 감동을 못 느끼는 것이겠지만 만약 그 ‘비호’가 가수의 도덕성과 인성 부재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면 치명적이다.




스타 가수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중·고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다. 청소년들은 또한 예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스타 ‘따라쟁이들’이다. 하지만 일부 스타의 사례로 알 수 있듯 공인으로서의 모범은커녕 성범죄, 사기, 뺑소니, 유흥 행각 등 지극히 비교육적인 일탈이 빈번히 매체를 장식한다. 현재 학교에서 인성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그 못지않게 TV 쇼프로를 통해 비치는 아이돌 댄스가수들의 지나친 노출, 선정적 동작, 짙은 화장 등을 우려한다.

게다가 공중파 및 종편 예능프로에 출연한 인기가수와 연예인들의 대화에는 무의식 중에 성희롱적인 언어, 외모지상주의적인 시선, 툭툭 내뱉는 투의 발언 등등 상대에 대한 공격성이 산재한다. 방송의 시청률 제고에 기여할지 모르지만 이런 행태가 학교의 인성교육에는 급속도의 타격을 가한다. 서울 오금고 박경전 교장은 “아무리 교육현장에서 인성함양에 애쓴다 해도 ‘비인성교육적인’ 상황이 매체를 통해 여과 없이 전달되면 학생들은 고스란히 영향을 받는다. 이런 현실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한다”며 어려움을 호소한다. 박 교장은 학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K팝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TV 쇼와 예능프로가 청소년교육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K팝의 체계적 인재양성과 관련해 학교교육이 감당해야 할 대목은 바로 ‘인성교육’이다. 사실 근래 들어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는 학교는 없다. 대중문화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을 위한 외부전문가 특강, 방과후교실, 진로 멘토와의 만남, 외부 관련기관 견학 등 학교마다 다채로운 프로그램 마련에 골몰한다. 일선 교사들은 기획사의 연습 훈련과 스케줄을 이유로 지망학생들이 요청하는 ‘결석’을 원천적으로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학교 출석횟수가 줄어들면 인성교육의 부재는 불 보듯 훤하다. 하지만 이미 공부에 마음이 떠난 학생들을 무조건 입시과정에 묶어 놓을 수는 없다. 교과과정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 ‘결석하지 않은’ 예비예술가들을 위해 ‘사외교사 제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서울 면목고 김소진 교사는 “대중음악 지망생들이 학교에서는 겉돌고 학원에만 목매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중·고교 교육현장에 대중음악 지도자가 배치돼 하나의 교육과정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발굴하는 여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류와 K팝이 부상한 십수년 전부터 줄곧 가수의 인성교육 문제가 제기돼 왔다. 백년대계는 아니더라도 10, 20년을 내다보는 근본적 접근이 안 되면 그것은 방치고, 방치는 병을 낳는다. K팝이 양호한 건강상태에서 점점 멀어져 걱정이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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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음악축제라고 할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관해 얘기하면 상당수 어른들이 ‘아직도 그걸 하나?’라는 반응을 보인다. 1970~1980년대에는 이 대회의 수상 결과가 국내 신문에 게재될 만큼 인기와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언제부턴가 우리의 관심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하지만 유럽의 방송연맹이 주최하는 이 행사는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여전히 유럽권에서는 ‘빅 이벤트’로 각국에 생중계된다. 1956년에 시작해 올해로 61회.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거행된 올해 대회에는 42개국이 참가했고, 2억명 이상이 시청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평상시에는 시큰둥하다가도 ‘국가 대항전’에는 뭐든 눈을 붉히는 게 인지상정이듯 출전 개별국가들의 음악적 자존심이 발동하고 그것이 각국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경쟁력을 잃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과거 클리프 리처드와 올리비아 뉴튼존도 영국 대표로 출전해 순위 싸움을 벌였다.

스포트라이트는 덜했지만 이번 대회에서 주목할 사항은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로 출전해 당당히 준우승을 차지한 ‘임다미’라는 인물이 한국계 이민자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폭발적인 가창력을 발휘해 현장 점수로는 거의 우승이었다고 한다. 국내 TV프로 <복면가왕>에도 출연해 우리 시청자들에게도 낯설지는 않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음악을 통한 유럽 공동체라는 비전, 제1의 세계라는 자긍의 산물이다. 이 대회가 시작된 1956년에 미국에는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출현했다. 솔직히 이 한방으로 유럽음악의 전성시대는 끝이 났다.

펄펄 날던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 포르투갈의 파두 그리고 영국의 민요는 미국의 로큰롤과 팝송에 밀리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 비틀스 이후 영국이 미국과 합을 이뤄 앵글로 색슨 문화의 세를 불리면서 가히 ‘팍스 아메리카나’의 형국이 펼쳐졌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결선 우승을 차지한 우크라이나 재즈 가수 자밀라_AP연합뉴스



미국이 문화적 패권을 구축한 그때,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싹쓸이 기세로 밀려드는 미국 음악의 파고를 막고 견디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우리의 경우도 비틀스의 로큰롤, 카펜터스의 팝이 맹위를 떨치던 그 무렵에도 ‘유럽의 유행음악’을 듣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정규 라디오 프로그램 청취율이 웬만한 팝송 프로에 뒤지지 않았다. 식자층 회합에서는 미국의 팝을 부르는 것보다 샹송과 칸초네를 뽑는 것이 우월한 취향으로 인식됐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배출한 프랑스 갈의 ‘꿈꾸는 샹송인형’과 모세다데스의 ‘에레스 투’ 같은 비(非)영어권 노래가 라디오 전파를 타면서 널리 알려졌다. 어쩌면 유럽 지역의 대중음악이 세계인들의 정서에서 나름의 지분을 유지한 데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한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시아가 그 힘을 몰랐을 리 없다. 아시아태평양방송(ABU)이 중심에 나서 ‘아시아판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기획해 마침내 1985년에 ABU 가요제가 열렸다. 국내에서도 구창모와 정수라 듀엣, 민해경이 출전해 대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들이 총집결하는 완전체 대회로 발전하지 못한 데다 가요제라는 형식미가 퇴조하면서 결국 1991년 대회로 마감하고 말았다. 아시아의 음악축제가 어쩌면 가장 필요한 때가 지금일지도 모른다. 엠넷이 주최하는 아시안 뮤직 어워드(MAMA)가 국내 시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라는 타이틀 아래 마카오, 싱가포르, 홍콩에서 개최해오고 있는 것도 아시아 비전에 대한 욕구인 셈이다. 세계 인구의 43%에다 지속적인 국내총생산(GDP) 상승으로 앞으로 아시아가 대륙의 주도권을 쥐게 될 전망임을 감안할 때 ‘아시아 송 페스티벌’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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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는 한국의 K팝도 단독이 아닌 아시아 속에서 파괴력을 축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참가한 음악축제에서 우리 가수들의 후련하고 힘에 넘치는 가창의 유전자를 증명해야 한다. 장르 다양성 압박에 시달리는 K팝에도 변화의 계기가 될 것이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준하는 아시아 음악 페스티벌을 기다린다.



임진모 ㅣ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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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열차 KTX를 타고 여수엑스포역에 내리면 여행 필수코스의 하나로 ‘여수 밤바다’를 내건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여수 바다 야경이 주는 낭만적인 멋은 오래전부터 회자되어 왔지만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여수시 지정 공식 명소로 된 것은 분명 그룹 ‘버스커버스커’의 곡 ‘여수 밤바다’ 덕분일 것이다. 대중가요의 광대한 영향력이다. 이 그룹의 또 다른 히트작 ‘벚꽃 엔딩’으로 가면 그 파괴력은 더 커진다.

2012년에 나온 이래 해마다 벚꽃 시즌만 되면 어김없이 울려퍼지며 음원차트 상위권에 오른다. 버스커버스커를 이끈 장범준은 이 곡으로 지금까지 46억원의 저작권료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누구 말대로 벚꽃연금이다. 이후 ‘봄 사랑 벚꽃 말고’ 등 이 곡의 자장에서 벗어나거나 넘으려는 무수한 곡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올 벚꽃축제를 구경한 사람들이 질리도록 접한 곡은 역시나 ‘벚꽃 엔딩’이었다.

버스커버스커를 중단하고 개시한 솔로 활동에서도 장범준은 호응의 측면에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존재감은 각별했다. 방송활동이나 행사 출연을 거절하면서 음악에 매진하는 태도는 조금이라도 더 비치려고 애쓰는 딴 가수들과 대조를 이뤘다. 얼마 전 그가 CD 두 장으로 된 솔로 두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1만장만 한정해 찍었지만 앨범은 순식간에 동났고 마니아 소장 욕구를 불지르면서 인터넷 개인 직거래 마켓에선 원래 2만원짜리가 12만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사진 버스커버스커 <벚꽃 엔딩> 뮤직비디오 캡처_경향DB


장범준은 TV 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해 솔로 활동은 ‘음악공부’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위상을 가꿔준 키워드라고 할 ‘음악에 대한 진지함’이 배어난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곧이어 <무한도전>에 나와서 한 발언은 음악 관계자들 사이에 언어도단의 평지풍파를 불렀다. 고정출연자 박명수가 그의 연주를 듣다가 노래들이 비슷하다고 하자 대뜸 “제가 자가복제가 좀 많아요”라고 말한 것이다. 잠시 흘린 말일 수도 있지만 그렇고 그런 아이돌 댄스음악의 범람 속에서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해온 음악가의 말로서는 아주 실망스럽다. 예술가의 기본이 새로운 영역으로 나가는 실험과 도전에 위치함을 거리낌없이 부정하는 발언이다. 변화와 혁신을 꾀하지 않으면 예술가는 복잡한 자아를 표현하지 못하며 대중에게 다양성을 전할 길이 없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안정’을 향하는 자가복제는 아티스트에게 독으로 작용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신보의 ‘사랑에 빠졌죠’는 나오자마자 ‘여수 밤바다’의 코드 진행과 닮아 거의 표절 수준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한 앨범 기획자는 “장범준은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 모두 없어 보인다”며 퇴행적 변화불감증을 성토했다. 자가복제가 결코 지나가는 말이 아닌 것은 “시도보다는 기대만큼 만족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라는 장범준 자신의 토로로도 알 수 있다. 즉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대중의 기호에 충실히 봉사하겠다는 뜻이다. 자기복제는 성공 공식에 매몰된, 상업적 숭배 마인드의 일그러진 발현이다.

작곡자는 때로 ‘성공한’ 곡의 진행 스타일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한 유명 작곡가가 “솔직히 대중의 검증을 훌륭하게 거친 히트송의 코드워크를 반복하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고 고백한 게 기억난다. 이전 방식을 답습하면서 “그게 내 스타일!”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이란 점으로 접근하는 자기복제의 수명은 짧다. 지금의 장범준은 뭘 해도 잘되지만 앞날은 모른다. 실적에 매달리고 현실에 안주하면 어느 때에 가서는 대중의 심판을 당한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음악계의 전설들은 신곡과 신보를 낼 때마다 시도와 혁신을 거듭해 반짝 영예의 굴레에서 벗어난 인물들이다. 음악가가 자기복제에 발을 담그면 결국 순수의 산물이라 할 초기작으로 끝이 난다. 아무리 지속적으로 새 음원을 내놓아도, 게다가 순간 잘 팔려도 사람들이 데뷔 때의 노래만 기억하면 괴로운 일이다. 장범준 하면 기억되는 곡이 ‘벚꽃 엔딩’과 ‘여수 밤바다’뿐이 아니기를 바란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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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도 비틀스의 음원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서비스가 개시되면서 한 30대 초반 음악팬은 스마트폰으로 비틀스 음악을 듣는 만족감을 ‘간만의 음악적 축복’으로 표현했다. 비틀스에 관한 한 우리는 물론, 외국도 얼마 전까지는 CD를 사서 들어야 했다. 20~30대 이용고객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소식을 보면 그동안 비틀스를 듣기 어려웠던 ‘밀레니얼’ 세대가 전설의 비틀스와 간격을 좁힐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기성세대와 친숙했던 음악가들이 세월이 흘렀어도 대물림에 성공해 뒷세대와 무난히 접합하는 것은 세대 동행과 다양성 확대의 측면에서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수 젊은이들도 “소비로 흐르는 요즘 음악보다는 옛날의 순수한 음악이 좋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1970~80년대, 흔히 음악의 전성기로 불리는 그때를 장식했던 전설이 잇따라 젊은 세대들에게 소환되고 있다. 관심과 형세를 지금 맹렬히 달리는 요즘 가수들보다는 활동하지도 않는 레전드들이 쥔 형국이다.

또한 올해 들어 데이비드 보위, ‘이글스’의 글렌 프라이,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모리스 화이트,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키스 에머슨 등등 굵직한 해외 전설들이 줄줄이 타계하면서 상황이 더욱 왕년 쪽으로 향하고 있다. ‘과거가 현재를 무릎 꿇리는’ 독특한 시제 환경에 처한 것이다. 음악 관계자들은 “앞으로 우리나 외국이나 유망주의 새 음원 발표보다는 전설들의 부고를 전하는 데 에너지를 할애해야 할 판”이라며 “그래미상 시상식부터가 ‘추모 그래미’로 바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래된 미래 혹은 온고지신이라는 말처럼 옛날의 것이라고 ‘미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옛 음악’이란 말은 전설의 음악이 근래의 음악에 영감을 주고 영향을 미치는 게 고금의 진리임을 웅변한다.


그룹 비틀즈


하지만 과거는 현재의 상황이 나름 견고할 때 가치를 발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문제는 음악소비자들의 체감 숫자가 하향하고 있는 현실에서 ‘근래 음악’이 갖는 심리적 위상이 허약하다는 데 있다. 젊음이 주도하는 최신 음악이 소비자들과 정력적으로 겹치고 원활하게 가지를 창출하는 움직임 속에서 과거가 의미를 갖는 것이지, 현재가 부실한데 과거가 중심에 서버리면 그것은 퇴행이며 건강과 앞날의 가능성을 구할 수는 없다.

요즘 음악계를 보면 주류 판을 리드해오던 아이돌 댄스음악도 축 처져 기운이 없어 보인다. 인디든 주류든 부쩍 밴드 해산도 잦아진 인상이다. 그룹이 깨지는 것은 구성원들의 갈등도 있겠지만 ‘좋은 음악이 팬들을 인양하는’ 선순환 구조의 부실에 기인하는 가여운 초상이다. 아무리 혁신적인 앨범을 만들어도 사람들이 ‘안’ 들어주는데 답이 있을 리 없다.

주변의 젊은 세대 몇 명에게 ‘왜 요즘 음악을 듣지 않는가?’ 물었더니 “들을 만한 음악이 없다!” 혹은 “찾아보면 괜찮은 음악이 있을 테지만 그 정도 성의를 보이기가 귀찮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거기에 취업 불안과 경기악화가 거들면서 새로운 음악을 향한 탐미는 이미 초토화한 상태고 나른한 관심마저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이런 현실에서 그나마 음악인구라고 할 사람들이 과거의 음악에 굴복해 버린다면 현재의 음악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이지만 환경이 열악해지면 대중은 익숙한 음악을 선호한다고 한다. 잊힐 만하면 꼬박꼬박 돌아오는 복고가 말해주듯 원래가 시간이 쌓인 음악은 유리하다. 여기에 묻히면 안된다. ‘레트로’나 ‘돌아온 전설들’ 등 과거 숭배의 흐름 모든 게 최신 음악, 새로운 음악을 지속적으로 수혈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조건에서 용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구축을 위해선 음악생산자의 분발과 방송의 균형감도 중요하지만 음악소비자의 협조도 절실하다. 괜찮은 음악은 찾아보면 넘쳐난다. 비틀스와 더불어 지금의 음악에 귀 기울여야 진정한 음악적 축복이다. 금년도 음악에 봉사해야 할 대중음악이 까딱하다가는 ‘왕년 음악’이 될 위기에 놓여 있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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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국내에서도 방영한 드라마 <뿌리> 덕분에 국내 기성세대들에게 가장 친숙한 흑인의 이름은 ‘쿤타 킨테’일 것이다. 당시 얼굴이 조금만 까무잡잡해도 그에게는 자동으로 쿤타 킨테라는 별명이 붙곤 했다. 알렉스 헤일리의 동명 소설에서 쿤타 킨테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왔지만 노예 이름을 거부하고 백인지배 사회의 흑인에 대한 혹독한 억압과 차별을 견디면서 ‘아프로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지키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인종문제가 잠잠한 듯한 상황에서 미국의 힙합 뮤지션 켄드릭 라마는 지난해 ‘킹 쿤타’라는 노래로 오랜만에 쿤타 킨테를 소환해 민감한 인종 불평등 문제를 끄집어냈다. 이 곡이 수록된 켄드릭 라마의 앨범 <투 핌프 어 버터플라이>는 힙합을 중심으로 펑크, 재즈 등을 화학적으로 교배해 음악 예술성의 개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앨범에 음악계의 관심이 쏠린 것은 흑인에 대한 경찰의 총격, 흑인부자에 대한 부당한 조세, 빈민가 흑인의 고통 대물림 등 엄존하는 흑인차별이라는 사회적 주제를 적나라하게 부각했기 때문이었다.

팝 음악관계자들은 ‘안팎이 처절하게 검은’ 이 앨범이 나온 5월에 “연말까지 갈 것 없이 올해의 앨범은 이미 정해졌다”고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음반의 한 수록 곡을 2015년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꼽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지난 16일 개최된 58회 그래미상에서 11개 부문의 후보에 올라 본상 가운데 하나인 ‘올해의 앨범’ 부문 트로피를 받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지만 끝내 수상하지 못했고 최고의 인기 여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영광이 돌아갔다.

여기에 시비를 걸 건 없지만 그래미가 ‘대세’ 앨범을 애써 외면한 결과를 내놓으면서 음악계 한편에서는 백인과 중진들이 다수 포진한 그래미 심사위원 구성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고 그래미가 ‘흑인에 의한 흑인차별 문제제기’를 혐오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만약 흑인차별 문제를 백인 가수가 주제화해 훌륭한 음악에 담아내고 언론의 좋은 평판을 받았다면 그래미가 과연 등을 돌렸을까?




60년 이력에 다다른 그래미는 사실 역사적으로 흑백을 떠나 ‘사회참여’ ‘현실비판’ 음악은 홀대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오로지 예술성이 중심이었다. 거칠게 말하면 ‘음악만 잘하면 됐지 무슨 사회문제야?’하는 식이다. 이번 켄드릭 라마의 수상 실패는 그래미의 반(反)흑인, 반청춘, 반사회성이라는 기조를 재확인해주며, 그래미상이 다양한 음악 흐름에 관한 한 더 이상 ‘길’이 아니라 ‘벽’임을 드러냈다. 과거에 사로잡혀 새로운 미디어와 트렌드에 대한 방향감각이 전혀 없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됐다.

그래미상 시상식 이상으로 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미국프로풋볼(NFL) 슈퍼볼 결승전의 하프타임 공연에서 논란을 부른 비욘세 공연도 다를 바 없다. 흑인여가수 비욘세가 무대에서 흑인의 정체성을 공격적으로 노출한 신곡 ‘포메이션’을 검은 옷과 베레모 차림의 흑인 댄서들과 춤을 추면서 노래하자 보수 세력은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검은 옷과 베레모는 과거 1960년대에 미국 백인들이 끔찍하게 기억하는 흑인의 무장단체 ‘흑표당(블랙 팬서 파티)’ 제복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슈퍼볼은 경기장이지 연설장이 아니다”라며 비욘세의 정치성에 맹공을 퍼부었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비욘세 반대집회를 위해 NFL 빌딩으로 모이자”는 선동의 메시지가 등장했다.

대중음악은 퓨전이다, 크로스오버다 해서 어떤 분야보다 인종 화합에 전심전력해왔고, 백인가수 중 상당수가 대중음악의 뿌리인 흑인음악을 구사해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켄드릭 라마와 비욘세 사건이 웅변하듯 ‘아프로 아메리칸’에 대한 백인사회의 차별과 편견은 살아 있다. 흑인가수 샘 쿡은 1965년에 발표한 ‘바뀔 거야(A change is gonna come)’라는 노래로 변화에 대한 신념을 역설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소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흑인이 반항하면 억누르려 한다. 대중음악이 ‘저항’의 기치를 내걸 이유는 많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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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 세계 음악계는 1988년생 영국의 여가수 ‘아델’ 열풍에 휩싸여 있다.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음악인구가 온통 그에 대한 관심에 쏠려있는 것을 보면 가히 전염병 퍼져나가는 ‘신드롬’의 수준이다. 신곡 ‘헬로’를 담고 있는 신보 <25>에서 주목할 것은 형체를 갖춘 이른바 ‘음반’이 폭발적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음반이 아니라 엄연히 음원시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컴퓨터 통신망으로 파일을 내려받는 ‘다운로드’ 아니면 실시간 듣기인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접한다. 엘피(LP)는 저 옛날얘기고 시디(CD) 구매를 하지 않은지 오래다. 시디를 들을 오디오나 플레이어가 없다. 음악 산업을 견인한 시디의 판매량은 미국만 해도 2004년 7억6700만장에서 10년이 지나서는 1억4100만장으로 급감했다.

대세는 다운로드가 아닌 스트리밍이다. 그런데 아델은 신곡 ‘헬로’와 앨범 <25>를 출시하면서 ‘헬로’를 빼놓고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한했다. 이 말은 앨범에 수록된 곡 개별로 구매해서 다운로드하거나 아니면 시디를 사서 들으라는 뜻이다. 놀랍게도 ‘디지털 시대’의 음악수요자들은 때아닌 아델의 ‘아날로그’ 전략에 충성으로 화답했다. 앨범이 나온 지 6주 만에 미국에서만 700만장 이상, 세계적으로는 한 달 만에 1200만장의 앨범이 판매됐다. 속도와 양에서 이전의 모든 기록을 갈아엎는 가공할 매기(賣氣)의 지속이다.

사실 음반의 전성기였던 1970~1980년대에도 이러한 판매량 폭주는 톱스타가 아니면 요원한 것이었다. 그러니 ‘디지털 시대 속의 아날로그의 대반격’이니 ‘음반 깡패’니 하는 격한 표현이 나올 법도 하다. 실제로 음악 관계자들은 이번 앨범이 다운로딩과 스트리밍에서 다시 시디로 일부 소비자 구매 패턴을 돌리는 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한다. 도대체 아델의 음악이 왜 이토록 시대를 거스르는 선풍으로 나타나는 걸까.



지난 20일 전세계에 동시 발매된 아델의 새 앨범 ‘25’.



요즘은 장르 유행을 주도하는 일렉트로닉 댄스음악과 힙합이 득세하면서 ‘듣는 음악’이 줄었다. 아델 음악은 그런 주류와는 울타리를 치는 감상용 발라드의 전형이다. 하지만 차분함으로 그치지 않고 요소요소 격정적으로 목청을 높여 내질러 후련하고 시원하다. 쾌감은 배가된다. 시디로 듣고 소장하고픈 욕구가 솟는다. 본고장 언론도 그에게 목청껏 부른다는 점에서 ‘벨터’라는 수식을 붙이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기계적이고 정해진 패턴으로 일관하는 음악과는 사뭇 다른 전통의 노래미학으로 특화에 성공했다고 할까.

우리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섹시한 군무와 비주얼을 내세운 K팝이 판을 움켜쥔 가운데 2010~2011년에는 춤이 아닌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슈퍼스타K’나 ‘나는 가수다’ 등의 오디션 프로 열풍이 불었다. 빠른 템포의 춤과 천편일률적인 무대스타일이 싫은 시청자들은 “노래가 돌아왔다!”며 환호했다.아델의 음악은 많은 젊은이의 지지를 받지만 스탠더드 발라드에 가깝다. 전문용어를 빌리면 ‘어덜트 컨템포러리’다. 정체가 퇴행적이라는 점에서 이 음악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영국밴드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는 아델을 두고 ‘할머니나 듣는 음악’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덜트 컨템포러리 음악은 미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전체 시장의 대략 25% 지분을 차지해 왔고 특히 청춘 위주의 음악이 독점적이거나 어른의 감성 혹은 취향과 부조화를 이룰 때 강한 반발력을 형성한다.

지금의 아델이 그렇고 1985년의 휘트니 휴스턴이 그랬다. 성향을 떠나 아델 음악의 급부상은 어덜트 컨템포러리 스타일의 음악이 그간 상대적으로 너무 위축되어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크게 보면 유행이 결코 한쪽으로 쏠리지 않으려는 균형과 조정의 흐름으로 봐도 무방하다. 문화 분야는 다양성을 위해 이전 유행과 부분 동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수가 묻히지 않고, 어른 취향도 대접받고, 아날로그도 살아있으며 이런저런 스타일이 공존하는 것, 그게 문화의 참모습이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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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의 여왕’으로 통하는 마돈나는 국내 공연관계자들 사이에서 해외 팝스타 내한공연 유치의 영순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미국인들도 마돈나 콘서트를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공연’으로 여긴다. 2010년에 한 공연업체가 마돈나와 한국 공연에 합의했다고 발표했지만 불발됐고 2012년에도 공연 소문이 돌았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마돈나가 한국 무대와 인연을 맺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한국에는 아레나가 없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마돈나는 내년 2월 태국 임펙 아레나, 일본 사이타마 슈퍼아레나 등지에서 아시아 투어를 전개하지만 거기에 한국은 빠져 있다.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 어원을 두고 있는 아레나(arena)는 근래 옥외든 실내든 주로 전문공연장의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 각국의 아레나는 음악콘서트만이 아니라 스포츠 경기, 각종 행사를 망라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 아레나가 없다. 세계 10대 도시 가운데 아레나가 없는 곳은 서울뿐이다. 아시아에 일본과 중국은 물론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도 아레나가 있다.

보통 객석 1만석에서 2만석 규모의 아레나가 갖는 강점은 음악공연의 전문성을 살리고 흥행 여건에 부합한다는 점에 있다. 더 큰 규모의 공연장, 가령 우리의 경우 월드컵 및 올림픽 주경기장도 가능하지만 이런 곳은 외곽에 위치한 관객들에게는 무대가 너무 멀어서 집중력이 떨어진다. 사실 3만명 이상의 관객을 채울 가수도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톱 가수들은 적정 객석의 스케일인 아레나를 선호한다. 공연의 성격과 관객 수에 따라 무대와 자리배치를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는 강점은 결정적이다. 아레나가 없어서 그간 우리의 K팝 스타와 해외 인기가수들은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공연을 해왔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체조경기장이 기본적으로 체육시설로 지어진 것이다 보니 음향과 무대배치에 있어서 문제점을 노출해왔다.

팝스타 마돈나가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월드투어 콘서트에서 퍼포먼스를 하고있다._연합뉴스


음향은 공연가수들에게 제1의 요소다. 시나위의 신대철도 “뮤지션들은 좋은 음향을 갖춘 무대에 서고 싶어한다. 소리를 잘 내고 잘 들리는 공연장이 우선이다”라고 말한다. 체조경기장과 그 이전의 펜싱경기장에 음악가들과 관객들이 불편을 호소한 것은 첫 번째가 음향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음향시설을 갖춘 전문공연장은 국내 음악관계자들의 오랜 숙원 중 하나였다.


K팝이 해외에서 승전보를 날리며 한국 대중음악의 위상을 높이고 있지만 그 스타들이 국내에서 설 무대가 마땅치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연말에 적당한 공연장을 잡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창동·상계 지역에 아레나가 건립된다는 소식은 반가움 이상이다.

수익성을 고려하는 운영이 불가피해 다목적으로 사용되고 부대사업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겠지만 일단 서울아레나가 음악 활성화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 기대를 건다. 때마침 음원이 아닌 공연의 시대다. 해마다 공연이 10%의 매출 신장을 기록하는 추세에서 아레나는 록페스티벌과 함께 더 많은 인구를 공연장으로 끌어들이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아레나가 조용필과 같은 거장 혹은 빅뱅, 엑소, 슈퍼주니어, 투애니원 같은 K팝 슈퍼스타들의 전유물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인디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 서울 홍대 주변에 인디 음악팬들을 위한 클럽과 소규모 공연장이 증가하는 현실에서 여기에서 관객을 확보한 밴드나 가수가 떠올라 아레나로 뻗어가는 사례를 보고 싶다.

이런 점에서 아레나는 음악의 기운이 현저히 처진 상황을 탈출해 음악에 대한 욕구와 의지가 상승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확실히 우리 음악계는 주류의 경우 깊이와 다양성을 지향해야 하고 비주류와 인디는 분발해 지분 상승을 꾀해야 한다. 아레나가 주류와 비주류가 함께 성장하고 나아가 다양한 음악 산출물을 제공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2020년대 아레나 시대를 기다린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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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음악팬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뮤지션을 꼽으라면 아마 밴드 ‘혁오’일 것이다. 지난해 데뷔했을 때는 인디음악 쪽에서 설왕설래가 이어지더니 올해에는 어른들에게도 생소하지 않은, 꽤나 대중적인 이름으로 점프했다. 텔레비전, 그것도 대세 예능프로 <무한도전>에 출연한 덕분이다. 여전히 막강한 TV의 영향력에 힘입어 언더에서의 ‘암약’에서 벗어나 주류에 거뜬히 진입한 것이다.

무엇보다 음악의 개성이 밴드의 상승을 이끌었다. 분류와 수식이 어려울 정도로 혁오의 음악에는 다양한 스타일이 버무려져 있다. 록이지만 펑크(Funk), 힙합, 그리고 멋진 곡 ‘후카’가 말해주듯 블루스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고 심지어 비틀스의 느낌도 난다. 기존의 것들을 통해 자신만의 음색과 표현방식을 찾았으니 전가의 보도라 할 ‘가공의 미학’의 최신 성공 사례인 셈이다. 사운드는 투명하지만 몽롱하고, 흑과 백의 느낌이 공존하며, 완급 또한 뚜렷해 무심한 것 같지만 때로 날갯짓이 힘차다. 이 부담스럽지 않고 ‘쿨’하며 세련된 음악이 근래 우리 음악 소비자들의 청취 감성을 건드렸다고 할 수 있다. 음악 관계자들은 혁오를 두고 줄곧 ‘제때 나온’ 음악이라고 규정한다. 시의성은 음악과 대중이 결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노랫말도 그렇다. 포기와 불안을 친구로 삼고 살아가는 젊은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내용이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곡 ‘와리가리’의 마지막 가사는 ‘다들 그렇게들 떠나나요/ 이미 저 너머 멀리에 가 있네/ 여기에는 아무도 안 올 테니/ 그냥 집으로 돌아갈래’이며, 상기한 ‘후카’는 그 속에서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내용이다. ‘언제부턴가 주위에 남는 친구가 많아/ 어깨에 슬쩍 손을 올리는/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다시 또 너 몰래/ 스쳐서 버려진데도/ 거꾸로 웃음을 지어줄게/ 너희들 품에 내가 있잖아’



4인조 밴드 혁오_경향DB



혁오는 노래를 부르는 오혁을 포함, 밴드 멤버 네 명 모두가 20대 초반의 한창 나이다. 그들 눈에 비친 세상,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 서로 간의 갈등과 연민 등이 함축된 톤의 노랫말에 실려 있다. 분명 그들 세대에게는 ‘삶의 노래’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조금은 다른 패턴의 삶, 그리고 다른 색조의 소리를 듣고 살아온 그들 윗세대가 어떻게 느끼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얼마 전 여러 후배 가수들의 도움을 받아 신곡 ‘너와 나’를 발표한 전인권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삶은 애환이 가득하고 그 대중의 애환을 멋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제 음악의 목표지요. 요즘에 최헌의 ‘오동잎’ 같은 노래가 있나요? 음악이 기예화되면서 지금은 대중이 술 한잔 기울이며 애환을 풀 때 들을 노래가 사라지고 있어요.”

그는 이어서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한 젊은 밴드와 작업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절했습니다. 왜냐면 아직 그들에게 애환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죠. 한번 생각해봤어요. 그들의 노래가 지금 길거리를 분주하게 운전하며 고생하는 택시기사분들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애환을 모르면 음악은 수학이 되어버립니다.”

대중적인 음악은 어떤 평가를 받든, 또한 어떤 형식으로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담아낸다. 하지만 젊은이들과 어른들 간의 감성과 정서의 체계가 달라도 너무 달라 한 노래가 두 세대 모두에게 위로를 건네줄 가능성은 점점 줄고 있다. 이것을 굳이 근래 돌출된 세대갈등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사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음악의 전성기에도 신구 세대의 정서를 동시에 포괄한 가수와 노래는 드물었다.

각 세대는 그 음악과 메시지가 다른 세대와도 접점을 형성할 수 있도록 더 고민해야 한다. 젊은 음악가의 경우, 한때의 인기만 누리려는 목표를 잡지는 않을 것이고 오랜 이력을 원한다면 비전을 넓게 짜야 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젊은 감각에 대한 어른의 이해는 두말할 것도 없다. 대전제는 신구 모두 삶의 애환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게 잘 안되고 있다.




임진모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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