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베 정권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로 촉발된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한창인 가운데 <주전장(主戰場)>과 <영화 김복동>, 두 다큐멘터리영화가 화제다. 지난 7월25일 개봉한 <주전장>은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 감독의 작품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일본 우익의 민낯을 낱낱이 들춰낸다. 감독이 지난 3년여간 한국과 미국, 일본을 넘나들며 직접 진행한 30여명의 활동가·정치인·연구자들의 인터뷰와 수집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위안부 문제의 쟁점을 둘러싼 진보·보수 양측의 논거를 교차 편집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감독의 문제의식은 일본의 인종주의에서 출발한다. 일본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던 당시 일본의 인종주의와 차별을 지적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올린 후 극우 민족주의자에 시달리던 감독은, 같은 집단에 시달리던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에게 주목한다. 그는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일본에 최초로 보도하며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에 던진 인물이다. 일본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실체는 무엇인가. 주요 쟁점은 무엇인가. 감독은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 하나하나에 문제풀이를 시도한다. 병렬적 구조로 답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단단한 과일껍질 벗기듯 동심원 구조로 문제의 핵심에 깊숙이 들어간다. 


‘일본 불매 운동’ 상징 로고와 개봉을 앞둔 항일 관련 다큐멘터리와 영화 포스터. 개봉 앞둔 항일 관련 영화들.


영화는 “위안부는 매춘부였다”라는 익숙한 주장에서부터 난징 대학살 ‘날조설’을 거쳐 “(소녀상 옆에서) 이 추악한 대형 쓰레기에는 종이봉투가 딱이다” “한국은 시끄럽게 구는, 버릇없는 꼬마처럼 귀여운 나라다”라는 등의 일본 우익들 발언을 전달하고, 이를 반박하는 다른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주장과 자료를 통해 관객의 판단을 유도한다. 한 걸음 물러난 듯 보이는 감독의 위치는 일본 우익의 수상한 로비와 역사왜곡의 체계적 과정을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화면 위로 튀어 오른다. 역사적인 것, 외교적인 것,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인종차별, 성차별, 제국주의, 식민주의는 어떻게 교차하며 재생산되는가. ‘2015 한·일 합의’에 항의하며 외교부 고위 공무원에게 호통치는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으로 시작해 김학순 할머니의 1991년 공개 기자회견장의 발언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는 이유다. 


8월8일 개봉할 <영화 김복동>은 올해 초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에 대한 영화다. 1992년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이후 27년간, 할머니가 어떻게 살아오고 싸워왔는지 일상과 공적활동을 담담하게 포착해낸 다큐멘터리다. 감독인 ‘뉴스타파’의 송원근 프로듀서는 자신이 직접 찍은 영상 이외에 음성파일, 사진, 다른 사람이 찍은 비디오 등으로 할머니의 삶을 조명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책임을 우회적으로 건드린다. 미디어 몽구와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 측과 함께한 사실상의 공동 작업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할머니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배우 한지민씨의 내레이션과 가수 윤미래씨의 노래에 덧입혀져 풍부하되 절제된 감정구조를 구축한다. 


“저는 서울에서 온 피해자, 나이는 90세, 이름은 김복동.” 세계를 누비며 증언했던 할머니, 재일조선인 학교 청소년들과 만나고 이들에게 남은 전 재산을 기부하는 할머니, 암과 싸우는 와중에도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위해 1인시위를 감행하는 할머니, “우리는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라며 당당하게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할머니. 생전의 할머니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은, 역사 속에서 아무런 이름도 없던 존재, 아니 지워져야만 했던 한 여성이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집단 정체성을 획득하고, 인권운동가로 살아가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외로운 피해자가 활동가들과 만나고, 이들이 손잡고 공감하는 대중들을 확장시켜가는 과정 속에 무심했거나 무지했던 나는 어디에 있었는지 질문하게 되고, 그들이 좌절하고 아파하는 장에 혹시나 작용했을지 모를 나의 역할을 성찰하게 된다. 


<주전장>이 정지된 머리를 흔들어 이성적 판단을 이끌어 낸다면, <영화 김복동>은 딱딱한 심장을 공략해 정치적 판단을 중지시킨다. <주전장>이 문제 발생과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원인을 찌른다면, <영화 김복동>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넌지시 던진다. <주전장>의 크고 날카로운 칼날이 외부를 겨누고 있다면, <영화 김복동>의 작은 비수들은 아프게 내부를 향하고 있다. 그래서 두 영화는 반드시 한 쌍으로 묶어서 봐야 한다. 


오는 8월14일은 1992년 1월부터 진행된 수요시위가 1400차를 맞이하는 날이다. 그 자리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지켜낸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일본을 향한 우리의 분노가 어떻게 가야 할지 두 영화를 통해 가늠해 보시길 진심으로 권한다.


<이나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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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계층의 알레고리를 그린 영화이다. 마치 오래된 우화 같다. 이 영화는 분명 계급 적대를 함축하고 있지만, 그것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분법적인 적대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감각의 알레고리를 통해 그 계급적 적대를 희화화하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는 계급의 적대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영화는 알레고리적 영화라기보다는 상징의 영화이다. <설국열차>는 이동 중인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계급의 적대를 명확하게 구획된 객실의 머리 칸과 꼬리 칸의 공간으로 표현했다. 


배우 송강호, 최우식이 출연한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반면 <기생충>은 고정된 집에서 벌어지는 계층의 욕망을 지상과 지하라는 공간으로 표현했다. 전자가 상징적 표현이라면 후자는 알레고리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은유와 알레고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기차의 칸막이 공간은 계급의 적대를 구획하는 실체적 이미지를 가진다. 열차의 머리 칸과 꼬리 칸은 계급적 적대를 명시하는 상징의 공간이다. 반면 <기생충>에서 집의 지상과 지하는 완벽한 차단 막이라기보다는 스며들고, 삼투하고, 녹아내리는 공간이다. 집의 위와 아래의 공간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으며, 통제가 느슨하고 상황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갈 수 있다. <기생충>의 기택 가족이 살고 있는 반지하도 소독약이 스며들고, 물이 스며들고, 와이파이가 스며든다. 열차의 머리 칸과 꼬리 칸은 전복과 배제를 위한 살벌한 투쟁의 상징적 장소로 풀어냈다면, 특히 동익네 대저택의 지상과 지하는 스며듦과 얽힘의 혹은 불안한 공존의 우울한 상태를 우화적으로 풀어냈다. 그래서 <기생충>은 <설국열차>와 유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살인의 추억>과 유사하다. 


그런데 알레고리로서 <기생충>이 돋보이는 점은 알레고리적 장치를 공간으로만 표현하지 않고, 감각으로도 표현했다는 점이다. 바로 ‘냄새’라는 감각이다. 냄새는 지상과 지하라는 공간적 알레고리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알레고리이다. 동익의 가족들은 지속적으로 기택 가족의 냄새를 말한다. 동익의 아들 다송은 위장 취업한 기택, 기정, 충숙의 옷과 몸에서 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동익은 운전기사인 기택을 평하며 고용된 기사로서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는 기택의 행동을 주시하다가도, 차 뒷자리로 넘어오는 퀴퀴한 냄새를 못마땅해한다. 동익의 아내 연교도 기택의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코를 막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 집의 오래된 가정부 문광의 남편인 근세의 쓰러진 몸 아래 깔린 자동차 열쇠를 빼낼 때에도 냄새는 스멀거리며 올라와 가진 자들에게 혐오의 감각이 된다. 


냄새는 계급, 인종, 지역, 장애의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는 최종심급에서의 감각이다. 다른 것은 지울 수 있어도 냄새만큼은 지울 수 없다. 냄새는 스며들고, 경계를 무디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차별을 결정하는 최후의 감각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감각의 알레고리이다. 발터 베냐민은 독일 바로크 시대의 비애극에서 발견했던 우울함과 무상성을 알레고리의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베냐민에게 있어 알레고리는 “사물들의 무상성에 대한 통찰”이다. 그것은 “건설과 파괴, 희망과 슬픔, 미몽과 각성, 실재와 허구 사이의 긴장을 분절해 낸다”. 베냐민은 19세기 파리에 등장한 아케이드가 화려하지만, 언제든지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울함과 무상함을 알레고리로 표현했다. 


지상과 지하공간의 스며듦의 시간들, 그래서 잠시 저들의 욕망을 대체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졌던 기택 가족의 비극, 그 비극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아들 기우의 허망한 바람, 그리고 냄새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구별 짓는 감각 안에서 상상될 것이라는 것은 놀랍게도 우리의 현실이다. 그 현실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 이것이 영화 <기생충>의 감각의 알레고리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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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계급 투쟁과 혁명에 대한 노골적 은유였던 봉준호의 <설국열차>(2013)는 어렴풋한 희망과 함께 끝났다. 빙하기 생존자들이 탑승한 열차에서 ‘꼬리칸’의 하층민은 반란을 일으킨 뒤, 급기야 열차를 탈선시켜 멈춰세운다. 열차 안에 널리 퍼져있던 지식과는 달리, 열차 바깥에는 생명체가 살아 있었다.    


2년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옥자>는 동화적인 결말을 냈다.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는 글로벌 식품기업에게 도축당할 뻔한 슈퍼돼지 옥자를 되찾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강원도 산골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평화롭다. “옥자와 미자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자막이라도 넣고 싶을 정도였다. 


두 전작들과 비교하면 봉준호의 신작 <기생충>의 결말은 사실상 파국이다. 10명의 주요 등장인물 중 4명이 칼에 찔리거나 계단에서 굴러 죽는다. 살아남은 6명중 3명은 전과자가 되고, 그중 하나는 살인 혐의로 수배돼 끝없는 도피에 들어간다. 나머지 3명조차 눈 앞에서 벌어진 참극에 남은 생은 트라우마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친구 민혁(박서준)이 기우(최우식)에게 이 산수경석을 선물로 준다. 기택(송강호) 가족은 이 수석과 함께 많은 일을 겪는다. CJ E&M 제공


영화가 파국이라 한 건 등장인물들이 불행에 빠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종반부 ‘가든 파티’에는 이전 봉준호 영화에서 보지 못한 잔혹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연쇄살인을 다룬 <살인의 추억>(2003)에서조차 살인 장면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았던 봉준호는 <기생충>에선 초등학생 생일 파티에서 벌어진 살인극을 눈앞에서 벌어진 듯 묘사한다. 돌로 사람 머리를 깨고, 칼로 찌르고, 산적용 꼬치로 쑤신다. 백주의 평화로운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충격이다. 


이 결말이 갑작스럽긴 했지만, 영화의 흐름상 비논리적이진 않다. 박 사장(이선균) 저택의 숨겨진 지하공간이 드러나면서 <기생충>의 분위기는 급변한다. <기생충>은 신흥 부유층과 그들에 기생하려는 하층민의 영리한 전략을 그려내던 블랙코미디였다가, 이 지점부터 하층민끼리의 아귀다툼, 상류층과 하층민의 갈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기괴해진다. 박 사장의 부에 기생하기 위해 기택 가족과 문광(이정은) 부부는 목숨을 걸고 싸운다. 박 사장은 기택(송강호)이 ‘선을 넘지 않아 좋다’고 하다가도, 그의 냄새만은 선을 넘는다며 비웃는다. 서사가 이렇게 진행되면 모든 등장인물이 만족할만한 합리적이고 평화로운 결말은 기대하기 어렵다. 


턱시도 입은 영화 엘리트들의 모임인 칸영화제는 이 파국의 계급갈등 드라마에 최고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수여했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이창동의 <버닝> 역시 계급갈등 드라마였다. <기생충> 속 박 사장네 사람들이 기택 가족에게 친절했듯이, <버닝>의 부유한 벤 역시 가난한 종수를 스스럼없이 대한다. 벤은 친절하고 매너좋은 사람이지만, 종수를 향한 태도 이면엔 묘하게 기분 나쁜 구석이 있다. 벤은 종수를 향해 악의를 드러내거나 해치려 한 적도 없지만, 종수는 결국 벤을 허허벌판에 불러내 살해하고 그의 포르쉐를 불태운다. 


최전선의 한국영화인들이 2년 연속 칸에 보낸 영화에는 양극화, 계급갈등, 빈자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것이 한국의 특수상황이 아니라는 점은 칸에서 <기생충>을 본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우리나라 이야기 같다”고 말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다른 계급에 속한 두 사람이 만나서 갈등하다가 결국 누군가 누군가를 죽이는 결론, 친절이나 호의가 이 아슬아슬한 갈등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결론이 잇따라 나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봉준호의 영화는 배우의 연기, 서사의 흐름, 은유의 유효성이 매우 세심하게 조율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기생충>에서 ‘수석’ 은유만큼은 유독 튀었다. 명문대 재학생 민혁(박서준)이 4수생 친구 기우(최우식) 앞에 갑자기 나타나 수석을 준다는 점, 물난리가 난 반지하 집에 들어간 기우가 다른 것은 제치고 물에 둥둥 뜬 수석을 들고 나온다는 점, 지하공간에 감금된 이들을 죽이기 위해 기우가 굳이 수석을 들고 간다는 점이 그렇다. 


지난 토요일 오전 조조로 <기생충>을 보았다. 극장의 주요 관객층이 아닌 40~50대 관객들도 다수 눈에 띄었다. 분명 ‘황금종려상 효과’ 같았다. 하지만 관람후 극장을 나서는 표정들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화창한 주말 오전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한 조각 현실을 얼떨결에 목격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내겐 <기생충>이 깔끔한 거실 한복판에 놓인 기괴한 수석같은 영화로 보였다. 얼떨결에 <기생충>을 본 관객들에게도 그랬을 것 같다. 보고 싶지 않아도 자꾸 눈에 들어오고, 지나쳐 가도 자꾸만 생각이 난다. <기생충>은 훌륭하다. 황금종려상으로 국위를 선양해서가 아니라, 관객에게 분노든 불쾌든 각성이든 어떠한 감정이나 말을 유발하고 그것들이 유래한 사회적 조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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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열린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영화 <미쓰백>이 여자최우수연기상(한지민), 신인감독상(이지원), 여자조연상(권소현) 등 3관왕에 올랐다. 이지원 감독은 “영화의 미약한 불씨를 살려준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특별히 관객을 호명한 데는 사연이 있다.


지난해 10월 개봉한 <미쓰백>은 스크린을 충분히 잡지 못했다. 아동학대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룬 데다, 감독이 신인 여성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개봉 이후 여성 관객을 중심으로 호평이 늘며 스크린 수가 역주행했다. ‘쓰백러’로 불린 열혈 관객층은 ‘N차 관람’(다회차 관람)에 나섰다. 아동학대 장면을 보는 일이 고통스러운 이들은 ‘영혼 보내기’로 대신했다. 영혼 보내기란, 영화를 지지하지만 사정상 관람이 어려울 경우 표를 사서 영혼이라도 극장에 보낸다는 뜻이다. <미쓰백>은 총 관객 수 72만여명으로 손익분기점(70만명)을 넘겼다.


배우 라미란과 이성경이 출연한 영화 '걸캅스'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최근 <걸캅스>가 개봉하며 ‘영혼 보내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여성 경찰이 디지털 성범죄를 추적하는 내용에 공감한 여성 관객들이 N차 관람에 ‘영혼’까지 보태고 있어서다. 걸캅스는 개봉 전 일부 남초(男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공격받고, 포털사이트에선 평점 테러도 당했다. 하지만 개봉 후엔 여성들의 응원에 힘입어 순항하고 있다. 누적 관객 147만여명(25일 현재)으로 손익분기점 150만명(순제작비 기준)에 거의 도달했다.


영혼 보내기를 두고 ‘사재기’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사재기란 이윤을 목적으로 대량 매집하는 행위다. 흥행으로 돈 버는 ‘관계자’가 아닌 ‘관객’이 지갑을 여는 일은 해당하지 않는다. 문화 다양성을 위한 주체적 소비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개봉한 순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실사 한국영화 39편 중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10편에 불과했다. 벡델 테스트는 1985년 미국에서 고안된, 영화 속 성평등 측정 지수다. △이름을 가진 여성 인물이 2명 이상 등장하는지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지 △이들이 남성과 관련 없는 대화도 하는지 등 3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34년이 흘렀는데 테스트를 통과하는 영화가 네 편 중 한 편꼴이라니. 영혼을 보낼 만도 하지 않나.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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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작품 <기생충>이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한국 영화가 세계 3대 영화제 가운데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세계적 거장 감독 반열에 오른 봉 감독 개인의 크나큰 영예이면서, 한국 영화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높인 쾌거다. 올해는 한국 영화 역사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영화인들의 피땀 어린 헌신과 열정 하나로 한국 영화는 놀랄 만한 성취와 진전을 이뤄왔다. 봉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 영화 100년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뜻깊은 선물이 됐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25일 프랑스 칸에서 진행된 제72회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기생충>은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을 통해 빈부격차를 다룬 블랙코미디다. ‘반지하 방’으로 상징되는 다분히 한국적 방식으로 빈자와 부자를 드러내지만 다양한 장르 변주를 통해 빈부격차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세계 보편적 현상인 양극화와 빈부격차 문제를 한국적 감수성과 장르적 독창성으로 풀어낸 것이다. 칸 영화제가 중시하는 다양성을 담지하면서 재미와 작품성을 확보했기에 ‘콧대 높은’ 칸의 문이 열린 것이다. 봉 감독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조화하면서 사회성도 겸비하는 ‘장르 영화’의 독보적 자리를 지켜왔다.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이후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옥자> 등 작품마다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보편적 재미를 갖춘 장르 영화의 틀 안에 그만의 독창적 영화문법과 색깔을 입혀온 성과다. 봉 감독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로 ‘장르’를 확장·변주하면서도, 언제나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섬세한 연출 속에 새겨넣어 울림 큰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가 영화 ‘기생충’으로 25일(현지시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포토콜에서 상패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르 영화에 인색한 칸 영화제가 봉 감독의 <기생충>에 최고상을 수여한 것에 외신들은 주목하고 있다. “장르 영화의 쾌거”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봉준호만의 장르적 독창성과 스토리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한동안 해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는 주변의 특이함이나 색다름, 아니면 예술성만으로 주목받았다. <기생충>은 세계 영화의 주류인 ‘장르 영화’에서 최고로 평가받음으로써 한국 영화의 성취를 각인시켰다. 봉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한국 영화가 세계적 보편성을 공인받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번 수상이 한국 영화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전기가 되고, ‘또 다른 100년’을 여는 힘찬 북소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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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행위, 즉 명상은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아무런 왜곡 없는 순수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의미의 한자만을 본다면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세상을 찾는 생각의 실천이 명상이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봤다.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답답할 정도의 지난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다. 어릴 때부터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는 수업시간과 교과서, 역사책,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들어보았지만, 이처럼 아픈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더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그걸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이 더 아프고 미안했다. 특히 주연 여배우의 10대 표정으로 느껴지는 밝은 표정이 어두운 8호실 감방에서 보여질 때는 더 숨이 막혔다. 영화가 끝난 뒤 한참 동안 다시 숨을 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항거>는 그렇게 흑백영상과 어두움으로 역사의 명상을 하게 한 작품이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한 장면.


1995년 5월9일자 영화전문지 ‘씨네21’의 창간 다음호에서는 이런 특집이 표지기획으로 실렸다. ‘남벌 : 이현세 만화의 대일본선전포고.’ 당시 단행본으로 <공포의 외인구단> 이후 이현세 만화의 대중성을 다시 불러일으킨 문제작이 <남벌>이었다. 동남아시아의 석유자원을 둘러싼 일본의 패권주의가 전쟁을 일으키며 한국을 압박하고, 결국 핵무기를 개발한 북한과 남한의 연합군이 일본열도를 폭격하여 일본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낸다는 이야기가 <남벌>의 통쾌하면서도 웅장한 아우라였다.


그 마지막 권에서 일본이 서명해야만 했던 문서의 내용은 지금 다시 읽어도 새롭다. ‘과거 한·일 간에 맺었던 한일조약을 전면 폐기하고 새 조약을 만들며, 과거 한반도 침략행위에 대한 철저하고도 명백한 공식사과문을 천황의 이름으로 명문화한다.’ ‘종군위안부를 조직했던 배후를 철저 색출하고 그 명단을 통보하고 피해자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합리적인 배상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국모였던 명성황후를 시해한 배후를 철저 색출하고, 당시 시해자의 명단 및 그 후손의 명단을 한국 측에 통보하고 이를 일본 교과서에 명문화한다.’ ‘지난 과거에 한국으로부터 수탈해간 문화재를 전면 반환한다.’ ‘독도와 그 반경 200해리를 완전한 한국영토로 인정하고 쓰시마섬에 한국 자유무역구와 한국인 영주도시를 만들며, 일체의 관세를 폐지한다.’ ‘방어적 개념 외의 자위대를 축소하고, 일년에 한 번씩 한국 측의 공식 사찰을 받는다.’ 만화적 상상력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의 아픈 문제점들을 완전히 해결해내는 카타르시스를 준다. 하지만 아직도 단 한 가지 해결된 것이 없다는 점에서 실재는 더 미안하고 죄스럽다. 우리에게 3월은 매번 그러한데, 이제 100년이 되었다는 것이 큰 숙제로 다가온다.


최근 교과서에 근현대사 내용이 세밀해지면서 일제강점기 때 영화와 그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상영되었던 <동주> <밀정>; <박열> 등은 <미스터 선샤인> 등의 드라마와 함께 역사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었다. 1980년대에는 <독도는 우리땅> 가수 정광태의 히트곡이 연일 불려지다가도 갑자기 노래가 들리지 않고 가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루머와 함께 반일 및 항일의 콘텐츠가 제한적으로 통제된다는 믿기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콘텐츠가 제작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풍문으로 들리기도 했다. 


이제는 보다 다양한 콘텐츠가 지나간 그 시절의 아픈 역사를 살려내야 한다. 그래서 잊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100년이 지나면서 철들어가는 생각이다. 만화 <남벌>도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한다. 마지막 서명되는 항복문서의 그 문장들을 영화의 내레이션으로 듣고 싶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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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처가 어른들과 식사를 하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이야기가 나왔다. 장인은 근 10년 만에 처음 극장에 가신 거라고 했다. 그 와중에도 TV에서는 퀸의 노래가 끊임없이 흘렀다. 광고, BGM,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퀸이 국민가수로 등극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럴만도 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국 관객수는 총 936만397명이다. 역대 외화 흥행 6위다. 개봉 10주가 지났음에도 예매 순위가 떨어지지 않는 추세로 봐서는 1000만 관객도 꿈이 아니다. 퀸의 모국인 영국을 상회할 정도로 한국에서 특히 돌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흥행세는 세계적이다. 개봉 첫 주에 50개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이익도 엄청나다. 5200만달러를 들여 7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14배 장사다. 세계 2위 시장인 중국에서 개봉하지 못했음에도 그렇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돈 되는 비즈니스에는 사람이 몰리는 법. 벌써 할리우드는 제2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꿈꾸나보다. 2016년 세상을 떠난,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한 이래 가장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었던 데이비드 보위를 스크린으로 옮긴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의 아들인 영화감독 던컨 존스의 트위터에 의하면 그렇다. <어벤져스>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슈퍼 히어로 무비의 시대가 열렸듯, <보헤미안 랩소디>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다. 그저 ‘음악영화’의 전성기라고 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나는 ‘록스타 무비’라 부르고 싶다.

 

극장은 위기다. IPTV, 넷플릭스 등 플랫폼은 다양해졌다. TV의 사이즈는 점점 커지고 화질은 점점 좋아진다. 스토리, 영상미 등 대중이 영화를 통해 얻고자 했던 지점을 더 이상 극장은 독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체험과 경험이다.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아바타>의 3D혁명, 히어로 무비 붐을 주도하고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스펙터클한 세계관 같은 것들이 그렇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경험욕구의 다음 단계를 제시한다. 이 영화는 자체로서는 흠결이 많다. 하지만 그 흠결을 마지막 15분 라이브 에이드신은 단숨에 덮어 버린다. 프레디 머큐리의 드라마틱한 삶이 압도적 퍼포먼스와 웸블리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군중 위에서 불타오른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음악가는 많다. 스타디움을 꽉 채운 스타 역시 많다. 이 둘을 겸비한 록스타는 그러나 많지 않다.

 

언젠가부터 스타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은 존재하기 힘들어졌다. 인터넷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음악시장은 지역 단위로 분화되었다. 언젠가 폴 매카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공연계를 보면 앞으론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곡의 히트곡을 내는 밴드는 있어도 공연 전체를 계속 들뜨게 하는 레퍼토리가 있는 밴드는 없다. 아마 U2와 메탈리카가 마지막 스타디움 밴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대중의 취향이 잘게 나뉘면서 세계 시장을 씹어 먹기가 불가능해졌다는 얘기다.

 

대중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삶, 히트곡 하나로 수억달러가 요동치던 음반시장, 수만명의 관객을 압도하는 쇼맨십과 퍼포먼스가 삼위일체를 이뤘던 때가 바로 퀸이 활동하던 때였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퀸 같은 록스타들이 빛나고 불탔다. 그때 차트와 유행을 바꾸고 운명을 달리한 이들이 한둘이던가.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명단을 작성할 수 있다. 마이클 잭슨, 조지 마이클, 커트 코베인, 존 레넌…. 아직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또 어떤가. 마돈나, 롤링 스톤스, 폴 매카트니… 너무나 굵직해서 이름을 한 품에 안을 수 없는 이들만 해도 이 정도다. 충분히 영화로 만들 만한, 흥망성쇠의 삶과 찬란한 절정의 순간을 남긴 이들은 차고도 넘친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만들어낸 새로운 흥행의 방정식을 과연 영화산업이 바라만 보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늙어가는 극장은 돌아올 수 없는 시대의 음악과 손잡을 준비를 하고 있다. 과거의 플랫폼, 과거의 콘텐츠가 결합하여 새로운 현재를 만들려 하고 있다. 가장 낡은 것들이 가장 새로운 것이 될 것이다.

 

<김작가 |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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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지난 13일 저녁 광화문 씨네큐브에 <로마>(감독 알폰소 쿠아론)를 보러 간 건 완전한 돈낭비였을지도 모른다. 내겐 넷플릭스 아이디가 있고, 몇 시간 후면 넷플릭스에서 <로마>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아이디가 없다 하더라도, 신규 가입하면 첫 한 달은 무료다.)

 

유명 배우 하나 나오지 않는 1970년대 초반 멕시코 배경의 흑백영화였지만, 객석은 의외로 거의 찼다. 멕시코시티 한 상류층 가정의 가사도우미 클레오가 중심인물이다. 클레오는 의사인 가장 안토니오와 그의 아내 소피아, 아이 4명을 뒷바라지한다. 클레오의 무책임한 남자친구는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잠적하고, 소피아의 남편 안토니오 역시 외도로 가정을 떠난다. 임신한 클레오와 당황한 소피아는 안간힘을 내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낸다.

 

관객은 영화 시작과 함께 곧바로 클레오의 공간으로 깊숙이 초대된다. 3D 안경이나 VR 기어를 쓰지도 않았지만, 마치 클레오와 소피아와 아이 네 명이 곁에서 먹고 자고 살아가는 것 같다. 이 경험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건 소리다. 클레오가 비질하는 소리, 빗물 떨어지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 가족들이 여러 가지 언어로 잡담하는 소리들이 극장 공간 사방에서 들려온다. 배경음악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기에, 이 일상의 소리들은 더욱 주의를 끈다. 음향 시설이 좋은 극장이라면 그 효과가 배가될 것이다. 사람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듯, 카메라의 좌우 패닝샷이 많다는 점도 공간에 대한 몰입감을 높인다.

 

영화 ‘로마’의 종반부 한 장면. 롱테이크로 촬영된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넷플릭스 제공

 

스마트폰, 컴퓨터, 텔레비전에서 넷플릭스로 <로마>를 보았어도 클레오의 삶의 감각이 전해졌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볼 때 극장만큼 집중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개인이 아무리 좋은 음향·영사 시설을 갖췄어도 전문가들이 설계한 극장 관람 환경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로마>는 상영시간 135분 동안 관객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요구하는 종류의 영화다. 자신을 모두 내어주지 않는 관객에게 <로마> 역시 그 감흥을 완전히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로마>를 영화관에서 보길 권하고 있다. <베이비 드라이버>의 감독 에드거 라이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적었다. “한 가족과 시대에 대한 심오한 연구이자, 몰입할 만한 경험.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돌아가고 싶었다. 큰 스크린으로 보길 권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극장에서 <로마>를 보기는 쉽지 않다. 개봉 이틀 뒤 곧바로 온라인 공개하기로 한 제작사 넷플릭스의 방침을 주요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들은 극장에서만 수익을 챙길 수 있는 일정 기간 이상의 상영기간(홀드백)을 요구한다. <로마>는 애초 세계 최고 권위의 칸국제영화제 출품을 타진했으나 넷플릭스의 정책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결국 <로마>는 넷플릭스 방침에 유연하게 반응한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출품돼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로마>뿐 아니라 폴 그린그래스의 <7월22일>, 코언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 오슨 웰스의 전설적인 유작 <바람의 저편>처럼 평소라면 칸의 레드 카펫을 밟을 만한 넷플릭스 작품들이 다른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대자본·뉴미디어의 편리함을 내세운 넷플릭스와 극장 수익·전통적인 극장 경험을 내세운 영화관·영화제의 힘겨루기가 이어지고 있다.

 

영화 ‘로마’의 한 장면. 소피아와 네 아이들, 클레오는 휴양지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넷플릭스 제공

 

영화관에 간다는 것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자신을 속박시키고, 낯선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꽤 굳은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많은 관객이 긴장 속에 침묵하며 어둠 속의 커다란 스크린을 주시하는 극장을 경험하면서 자라온 세대다. 다이아몬드가 귀하게 여겨지는 건 그 자체에 내장된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지 드물기 때문이다. 난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몇 번의 클릭으로 <로마>의 한 장면을 재생할 수 있다. 이 편리함이 반가우면서도 낯설다.

 

기술 발달의 도저한 물결은 한 인간의 취향 같은 것은 쉽게 휩쓸고 지나간다. 강력한 시네필인 정성일 감독·평론가조차 경향신문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변화하는 플랫폼은 내가 반대한다고 해서 오지 않을 것도 아니고, 환대한다고 해서 꼭 긍정적인 것도 아니다. 스스로 영화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시네마테크, 영화제의 프로그래머가 됐다. 플랫폼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을 것이고, 경계는 희미해질 것이다.”

 

난 <로마>를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극장 관람 경험을 특권화할 생각은 없다. 넷플릭스는 이용자에게 종래 방식으로는 만나기 어려웠던 빼어나지만 독특한 작품들을 소개했고, 창작자에게는 권한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마음속의 프로젝트를 꺼내들 수 있게 했다.

 

이제 무엇이 영화이고, 영화가 아닌지 결정해주는 사람은 없다. 백가쟁명하는 미디어가 저마다의 장점을 내세워 이용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그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자본의 이해가 아니라, 이용자의 경험에 민감한 미디어가 부흥하길 바랄 뿐이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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