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2>의 장면. 지난해 1월 공개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킹덤>이 배고픔에 내몰린 백성과 역병의 실체를 다뤘다면, 지난 13일 공개된 <킹덤2>는 역병의 근본적 원인인 피를 둘러싼 이들의 욕망과 사투를 그렸다. 넷플릭스 제공


역병이 퍼졌다. 병에 걸린 자는 이성을 잃고 사람의 피와 인육을 탐하게 된다. 전염성이 높고, 잠복기는 매우 짧으며, 결과는 치명적이다. 그렇게 조선의 왕자 이창(주지훈)에게 미션이 주어진다. 그는 지지자들을 모아 ‘어린 중전’과 부패한 외척을 물리치고, 역병으로부터 백성을 구해야 한다. 드라마 <킹덤>(2019~2020)의 줄거리다.


영화 <창궐>(2018)에 이어 <킹덤>까지 보고나니 궁금하다. 지극히 서구적인 괴물인 좀비는 어떻게 조선 땅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좀비는 가장 현대적인 괴물로 평가받는다. 뱀파이어 등과 달리 20세기 인간의 창작물인 데다, 21세기에 들어 그에 대한 소구력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좀비는 세뇌당한 노예일 수도 있고(<화이트 좀비>), 소비자본주의에 포획된 소비자일 수도 있으며(<시체들의 새벽>), 생존주의로 내몰린 신자유주의적 주체일 수도 있다(<워킹데드>). 무엇이 되었건, 그것은 당대 대중에 대한 은유로서 그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이라 할 만하다.


연상호의 <부산행>(2016) 역시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현실을 밑절미로 삼은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마찬가지로 연상호가 연출한) 프리퀄 애니메이션 <서울역>(2016)에서 남성 포주들에게 착취당하다 좀비가 된 청년 여성(심은경)이 부산행 기차에 뛰어들어 KTX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를 물면서 시작된다. 결국 펀드매니저 석우(공유)가 주가조작으로 살려낸 바이오 벤처기업에서 유출된 바이러스가 재난의 원인임이 밝혀진다. 그 덕분에 연상호의 좀비 연작은 신자유주의적 불안정 노동에 기생하는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평가됐다.


2년 후, <창궐>(2018)이 개봉했다. “내가 이러려고 왕이 되었나”라고 중얼거리는 왕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려는 적폐가 좀비로 그려졌고, 그 좀비 떼를 물리친 왕자 이청(현빈)은 영화의 끝에 횃불(=촛불)을 든 백성들 앞에 우뚝 선다. 무능한 왕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자살하는 소원세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고 왕이 되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선군이 되는 이청이 문재인 대통령을 상징한다는 건 너무 명백해 지루할 정도다. 여기서 배경이 되는 ‘조선’이란 그야말로 ‘헬조선’, 그러니까 2018년의 대한민국이었던 셈이다.


2019년 시작된 또 하나의 조선 좀비물 <킹덤> 시리즈는 현실정치와 신자유주의적 삶의 조건 둘 다에 대한 비평을 시도한다.


이 드라마에서 역병의 병근(病根)을 제공한 건 부패한 권력이지만, 전염은 각자도생으로 내몰린 백성들의 고육지책 때문에 시작된다. 굶주린 이들이 이 병으로 사망한 이웃의 인육을 나눠 먹으면서 병원체가 변형되고 전염성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킹덤>은 ‘선군 만들기’에 몰두하는 <창궐>보다 그 의미망이 좀 더 복잡한 작품이 되었다.


무엇보다 <킹덤>이 낡은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창궐>은 이청의 진보적인 남성연대가 김자준(장동건)의 보수적인 남성연대를 물리치면서 새로운 세계를 이끌 선군이 도래한다고 말한다. 반면 <킹덤>에서 낡은 세계를 끝장내는 건 “계집이라 무시당해 온” 중전(김혜준)이다.


여기서 중전을 움직이는 동력은 오직 분노뿐이라는 점이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그는 권력을 잡아 낡은 세계에 군림하고자 할 뿐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이 없다. 그가 ‘혁명을 조직’하기보다는 그저 다른 여자들을 죽여 아이를 빼앗고, 아버지 조학주(류승룡)가 만든 인간병기=좀비를 이용하려 하는 건, 아마도 이 탓이다. 결과는 자명하다. 구세대의 침몰과 함께 그 역시 가라앉는 것.


물론 드라마 내내 대체로 무능한 왕자에게도 별다른 비전은 없어 뵌다. 그러므로 여전히 신분제 사회인 (헬)조선이 시즌3로 이어진다. “정치 지도자들의 비전 없음.” 그것이야말로 <킹덤>이 그려내는 2020년 대한민국의 현실 아닌가 싶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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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이 올해 오스카의 얼굴이 됐지만 감독상 후보에 오른 모두가 남성이었고 배우상 후보 대부분도 백인이었다. 배우 내털리 포트먼은 로렌 스카파리아, 그레타 거윅, 셀린 시아마 등 훌륭한 작품을 냈지만 아카데미가 주목하지 않은 여성 영화인들의 이름을 새겨넣은 망토를 걸친 채 시상식장에 나타났다. 로이터연합뉴스

영화 <기생충>이 네번째 오스카상까지 거머쥐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회의가 한창일 때였다. 휴대폰 화면에 단톡방 메시지가 떴다. “작품상 받았대요”라는 말 뒤로 글자보다 많은 여덟 개의 느낌표가 붙어 있었다. 코로나19를 필두로 쏟아지는 무거운 소식들 때문에 발랄한 기분이기 어려운 시기에, 모처럼 모두에게 얼마간 들뜬 얼굴이 되게 하는 단비였다. 나 역시 각종 영상과 이런저런 뒷얘기와 해석들을 찾아보며 <기생충>의 성취를 흠뻑 즐겼다. 그후 며칠간, 누구와 만나도 대화의 얼마간은 <기생충> 얘기로 채워졌다. 대단한 개인의 성취를 목격하는 것은 그 자체로 근사한 일일뿐더러, 그 성취를 얼마간 ‘우리의’ 성취처럼 느낄 만한 구석이 있다면 함께 고양되는 흐뭇함을 느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시상식의 무게중심이 급격히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으로 쏠리기 시작한 순간은 뭐니뭐니해도 ‘감독상’이 주어졌을 때였다. 봉 감독이 무대에 서서 마틴 스코세이지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옮기고 무대 아래 영화인들이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칠 때, 등줄기가 살짝 서늘해지는 비현실감이 느껴졌다.  봉 감독은 외부자에게 문을 열어준 아카데미에, 나 역시 당신들과 연결된 일부라는 메시지를 우아하게 되돌려주고 있었다.  봉 감독의 이 소감은 탁월하고 영리했지만, 동시에 가장 진실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성취를 향한 여정의 출발엔 영화를 그저 미친 듯이 좋아했던 12살 소년의 개인적 열망이 있었을 뿐이다. 영화학도들을 대상으로 한 과거의 한 강연에선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해라. 누가 뭐라든 듣는 척만 하고 무시해라.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닌가”라는 말을 힘줘 한 바도 있다. 긴 시간 개인적인 열망을 놓지 않는 게 순탄하기만 했을 리 없다. 매끈하지만은 않았을 길을 걷는 동안, 스코세이지의 그 말이 희미한 가로등 하나쯤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4개 부문에서 오스카를 수상하는 데는 탁월한 영화와 위대한 감독 이상이 필요하다. <기생충>은 딱 알맞은 순간 등장한 작품이었고, 2020년 아카데미를 몰아가는 바람은 <기생충>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OscarsSoWhite(오스카는 백인 일색) 해시태그 운동으로 요약되는 다양성 요구는 5년 넘게 이어지며 점점 세가 커진 사회적 요구였다. 카메라의 뒤든 앞이든 백인 남성으로 한가득 채워진 영화들, 그런 영화들로만 가득 채워진 오스카 시상식을 사람들은 부자연스럽게 느끼기 시작했고, 백인 일색의 오스카는 낡고 뒤처진 것으로 보이기에 이르렀다. 한둘의 목소리가 사회적 요구가 되고, 사회적 요구가 시장의 흐름이 되면, 그때부터 목소리는 놓치면 안되는 기회이자, 넘기면 도태될 위협이 된다. 바로 이 변곡점이 가장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 2020년의 오스카 시상식이었을 것이다.

 

<기생충>을 밀어준 사회적 요구의 바람은 영화계에만 부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문제를 비즈니스의 기회로 해석하고 포착하는 임팩트 비즈니스는 이런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기 시작하는지 보여주는 풍향계의 역할을 한다. 환경을 고려하는 소비,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기술, 포용적인 금융, 젠더 편견을 탈피하는 패션, 일하는 자의 복지를 돌보며 만들어지는 서비스. 임팩트 비즈니스가 지향하는 가치들의 예시다. 이런 가치들은 개별의 창업자들이 자기 마음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기에 비즈니스로 구현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 되는 순간들이다.

 

임팩트 비즈니스가 영화 한 편처럼 가장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면, 임팩트 투자는 사회적 요구를 알아채는 데서 출발한다. 임팩트 투자는 개별의 개인적인 것들이 사회적 요구가 되고, 곧이어 시장의 흐름이 되는 순간을 한발 앞서 포착하려는 시도다. 어느 지점 어떤 순간에 자본을 투입해야, 그 시장의 기회를 한발 앞서 잡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과 다르지 않다. 어떤 사회적 요구에 언제 힘을 실어야 가장 큰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가? 어떤 사람들의 가장 개인적인 욕구는 사회적 바람의 풍향계가 되어준다. 그 바람이 너무 거세져 돛을 세울 수 없어지기 전에 큰 돛을 지어 좋은 배에 달아주는 일이 임팩트 투자다.

 

<기생충>이 올해 오스카 얼굴이 되었지만, 오스카를 향한 다양성 요구는 멈추지 않는다. 감독상 후보에 오른 모두가 남성이었다는 점, 배우상 후보 대부분이 백인이었다는 점은 빠지지 않고 지적을 받았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다. 내년의 오스카도, 점점 더 많은 영화자본도 이 바람에 반응할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바람을 거스르는 사람이 바람을 등에 업은 사람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

 

<제현주 임팩트 투자사 옐로우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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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봉준호 감독이 남긴 여러 ‘어록’ 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LA비평가협회 감독상을 받은 뒤 말한 수상 소감이었다. 그것은 아카데미 4관왕과 봉준호붐이 가진 여러 역설 중 하나를 선명히 표현해줬다. 그는 자기 예술의 ‘원천’에 대해, 소년 시절 AFKN(미군방송)에서 “야하고, 폭력적인”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몸속에 영화적 세포를 만”들었는데 영어를 몰라 멋대로 이야기를 상상했던 그게 “어른이 돼서 보니” 브라이언 드 팔마, 존 카펜터, 마틴 스코세이지 같은 대가들의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20~30대에겐 낯설 AFKN은 대한민국 안방극장의 황금 채널(2번)을 노골적으로 차지한, 냉전문화와 미국의 신식민지적 지배의 상징이었다. 미군방송을 보며 자란 ‘시네마키드’가 이룬 아카데미 4관왕은 현대 한국(문화)과 미국(문화)의 관계를 압축하고, ‘한국적인 것’의 역설도 유감없이 나타낸다. 


과연 봉준호의 ‘영화 세포’들엔 ‘한국적인 것’의 지층이 축적돼 있다. 그는 식민지 모더니즘의 대표격이었다가 자진 월북한 소설가 박태원의 외손이며, 1980년대 말 학생운동에 참여해 구속된 적이 있다. 그런 청년 봉준호를 1990년대 한국영화아카데미와 충무로가 기린아로 양육했다. 처음부터 그는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을 풍자와 유머로 감쌌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살인의 추억> <괴물>도 엄청난 매력과 규모를 가진 ‘봉준호 리얼리즘’(송강호) 서사였다. 이를 잘(?) 이해한 박근혜 정권은 ‘좌파’ 봉준호를 블랙리스트에 등재해줬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일면 무척 게으르고, 일면 역설적 탄성이 들려오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기실 ‘한국적인 것’은 이미 ‘미국적’이고 또 ‘주변’으로서 세계적이었던 것이다. 이 수상과 붐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은 한국인들이 이토록 기뻐한다는 사실 자체겠다. 물론 이는 제국의 인정에 갈급했던 찢어지게 가난한 식민지 의식과는 결이 좀 다른 듯하다. 이 성취는 한국영화사뿐 아니라 현대문화사에 온 ‘특이점’일까?


이로써 ‘한국문화’는 이전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대단히 역설적으로, 재벌 CJ와 함께, 또 그 힘으로, 미국 중심 문화체제에 더 깊숙이 연루·개입된다. 이 사건은 (월드컵 4강처럼) 한국인의 자기인식 - 문화적 눈높이와 위치 감각을 한번 더 재조정할 것이다. 그리고 한류의 흐름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며 이정동 교수의 책 <축적의 시간>(2015)을 떠올렸다. 각 분야의 서울대 공대 교수들을 인터뷰해 쓴 것으로, 산업계뿐 아니라 대통령도 읽고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영향을 끼쳐 국가-이데올로기-서사 재구성의 중요한 소재가 됐다. 그 서사는,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추격형 발전’은 이제 끝났고, 앞선 미국·일본·유럽의 ‘선진국’과 엄청난 속도로 쫓아오는 중국 사이에 끼여 저성장·저혁신 위기를 맞게 됐다는 줄거리다. ‘개념설계역량’이란 게 있어야 ‘진정한 선진국’인데 추격형 발전국가인 한국엔 그게 없다. 그래서 위기를 돌파하고 ‘혁신’하려면 서구 선진국과 같은 오랜 경험과 암묵지 축적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계속 발전’ 구호를 초조히 외치면서도 한편 ‘오랜 축적’만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는 당착이 책을 감싸고 있다. 그래서 의아하지만, 변해온 세계체제 속에서의 대한민국의 좌표와 위치 감각을 새로 표현해줬기 때문에 책은 인기를 끌 수 있었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또한 이 사회가 축적한 또 다른 것의 결과다. <축적의 시간> 식이라면 ‘영미나 일본처럼 앞으로도 더 세계인에게 잘 팔릴 콘텐츠의 원천 기술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식으로 귀결되겠지만 문화예술의 축적과 탁발성은 그와 다를 것이다. 


봉준호 같은 ‘거장’이 또 나올까? 사람을 기생충처럼 만들고 저 깊은 지하로 수직계급화하는 극심한 불평등이 당장 해소될 전망이 없어 보이니 일면 낙관적(?)이다. 높은 예술은 비판정신과 고통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분명 어딘가에 제2, 제3의 청년 봉준호가 자라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회학과를 다니며 학생운동 덕분에 만든 원초적 ‘개념설계역량’ 같은 게 고갈되고, 예술과 문학 같은 데 투신하려는 청년들이 사라지고, 의대와 공무원 지망생만 양산하는 사회라면 비관적이다. 


하여 ‘봉하이브’와 <기생충> 붐엔 감당 안되는 더 큰 아이러니가 있다. 처음 개봉 때 호오·찬반이 엇갈렸던 <기생충>의 충격적이고 ‘불편한’ 계급적대 서사는 어떻게 수용 가능한 풍자·유머, 그리고 ‘한국적인 것’으로 전환됐는가? 부자들은 느낀다는 빈자들의 ‘냄새’와 그런 부자를 도륙하고 싶은 빈자의 살의는 어떻게 할까? 이 세계적인, 세계에 ‘시전’된 불평등과 적대를 해결하러 나설 때가 아닌가.


<천정환 민교협 회원·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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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 미국 유학생들은 비디오테이프 한 보따리로 향수를 달랬습니다. 구석에서 비디오 복사하는 한국 식료품 가게가 흔했습니다. 한 집에서 잔뜩 빌려다 놓으면 다음 집에서 보고 또 돌려보고 했죠. 돈도 들고 수고스럽기도 하니 한국방송을 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죠. 인터넷으로 실시간 뉴스를 봅니다. 한류팬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할리우드의 반대쪽 미 동부 시골이라 그런지 한국영화를 개봉하는 일은 없습니다. <기생충>이 개봉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지난 10일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작품상 트로피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LA_ 로이터연합뉴스


반가운 마음에 극장에 가서 봤습니다. 직장 동료도 보러왔더군요. 그리고 지난 주말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감독상을 받은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작품상을 받으며 대미를 장식할 땐 함성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뿐이 아니었죠. 세계 곳곳에서 <기생충>, 봉준호 감독, 그의 예전 작품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 말대로 ‘로컬영화제’인, 백인 남성 위주라는 오명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였기에 더더욱 놀랍고 뜻깊습니다. 미국에서는 외국영화가 흥행이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영화도 미국 시장에서는 맥을 못 추죠. 한 분석에 따르면 총티켓 판매액의 1%도 못 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미국 사람들은 외국영화를 안 보는 겁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영화의 인기가 가장 크지 않을까 합니다. 외국에서도 인기가 많은데(2019년 한국 영화시장 매출액 27%가 미국영화였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오죽 좋아할까요. 굳이 외국영화를 찾아볼 필요를 못 느끼는 겁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 2월 11일 (출처:경향신문DB)


<기생충>도 마찬가지입니다. 2월10일 현재 미국 시장 총수입은 3603만2519달러로 430억원 정도 됩니다. 이것도 대단합니다. 앞으로 더 늘겠죠. 그래도 미국영화에 비하면 아직은 초라합니다. 이번 학기 가르치는 학생이 약 80명인데 물어보니 들어본 사람이 네댓 명, 본 사람이 두 명이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카데미는 최고의 영예를 <기생충>에 준 겁니다. 물론 뛰어난 작품입니다. 하지만 <기생충>만 한 외국영화가 없진 않았죠. 


그렇다면 왜 <기생충>일까. 인종, 성별 등에서 다양성이 없다는 비난에 대한 자정 노력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동적 사회 흐름에의 할리우드식 저항도 <기생충>의 성공에 한몫을 했을 겁니다. 변화하는 사회에 뒤지지 않기 위해 이선균 배우 말대로 <기생충>이 아닌 “오스카가 선을 넘은 것”이죠.


청룡영화상은 그 선을 넘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선을 넘을 수 있을까요?


2016년 <곡성>의 구니무라 준이 남우조연상을 받은 게 외국인으로 유일합니다. 최우수 외국영화상도 1990년에 와서야 시작했지만 1995년을 끝으로 없어졌습니다. 그나마 수상작도 다 서구 영화였죠. 익숙지 못한 태국영화에 작품상을 주면 다음날 어떤 기사가 실릴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긴 제3국가 출신 외국인 노동자, 이민자들이 겪는 고초를 생각하면 이는 한가한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안한 신분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임금체불,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성폭력 등의 고초를 견뎌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개선책을 논의해도 갈 길이 먼데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외국인은 세금도 안 냈고, 기여한 바도 없다”며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임금 차등 지급을 주장했죠. 인권 차원에서도 문제이고, 법적으로도 “국적·신앙·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는 근로기준법 제6조 위반 소지가 있습니다.


선을 넘기에 저들과의 경계선은 아직 너무 멀리 있어 보입니다. 게다가 그 선은 길고 높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늘리고 높여도 그 선은 넘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회라는 게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죠. 코를 막고 칼에 찔릴지, 선을 넘어 연대의 손을 내밀지 결정해야 합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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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미국 현지시간 9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수상자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하 호칭 생략)·한진원 작가가 호명된 순간, 한 아시아계 여배우가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조여정도, 박소담도, 이정은도, 장혜진도 아니었다. 한국계 캐나다 배우 샌드라 오(49·한국명 오미주)였다. 


봉준호 감독이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환호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_ AP연합뉴스


1960년대 캐나다로 이민 간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샌드라 오는 미국 의학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다. 지난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킬링 이브>로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한국어로 소감을 전해 화제가 됐다. 샌드라 오는 아카데미 시상식 후에도 “기생충의 수상을 축하한다. 한국계여서 너무너무 자랑스럽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여배우’라는 비주류로 버텨온 그의 진심 어린 축하에 가슴이 뭉클해졌다는 이들이 많다. 


샌드라 오의 기쁨이 그만의 것이랴. <기생충>이 아카데미 최고상인 작품상을 포함해 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까지 4관왕에 오르자 온 나라가 환호하고 있다. “마침내 ‘기생충’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겼다”는 우스개까지 돌 정도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소환되고, ‘전설’ 김연아와 박태환까지 다시 호명된다. 어제 오늘, 아니 앞으로 며칠쯤이야 신화와 전설에 취해도 나쁘지 않을 터다.


영화 <기생충>이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직후 봉준호 감독과 제작자, 출연진들이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연합뉴스


<기생충>이 거둔 놀라운 성취는 근본적으로 봉준호라는 희귀한 재능에서 비롯한 것이다.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유머감각, ‘봉테일’(봉준호+디테일)로 불릴 만큼의 치밀함까지 겸비한 영화감독은 흔하지 않다. 특히 영화계에서는 봉준호가 권위적이지 않고 배우·스태프의 가치를 존중하며 최고의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한다. 봉준호의 전작 <설국열차> 제작자인 박찬욱 감독은 이런 평을 했다. “봉준호 같은 재능의 소유자와 동시대 동종 업계에 종사하고, 친구로 지내는 일은 크나큰 축복이지만 사실 적잖이 귀찮다. ‘기생충’이 공개된 후 외국 영화인들이 자꾸 전화해서 ‘한국 영화인들이 먹는 무슨 약 같은 게 있으면 같이 좀 먹자’고 하더라.”(문화일보) 


하지만 희귀한 재능이라고 모두 꽃을 피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봉준호에겐 천시(天時)도 따랐다. 


2015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평화대행진을 다룬 영화 <셀마>가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 후보에서 누락되자 ‘#OscarsSoWhite(오스카는 너무 하얗다)’는 해시태그가 소셜미디어를 뒤덮었다. 그러나 2016년에도 흑인은 남녀 주·조연상 후보에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유명 흑인 배우와 감독들은 분노해 시상식 보이콧을 선언했다. ‘화이트 오스카’ 논란이 이어지자 오스카상 투표권을 갖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신규 회원을 증원하며 유색인과 여성 비중을 단계적으로 높였다. 그 결과 지난해 아카데미에선 흑인 개인상 수상자가 6개 부문 7명으로 늘어났다.


지난해 10월 봉준호는 미국 매체 ‘벌처’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별로 큰일은 아니다. 오스카상은 국제영화제가 아니지 않나. 굉장히 지역적(very local)이니까”라고 살짝 ‘디스’를 한 적이 있다.


AMPAS 회원들은 이에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과감하고 담대한 선택으로 답했다. ‘가장 아카데미스러운’ 전쟁영화 <1917>을 제치고 외국어영화 <기생충>에 작품상과 감독상 등 주요 부문 상을 안겨줬다. 비영어권 영화를 향해 쌓아올렸던 담장을 무너뜨리고,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이라는 ‘글로벌’ 이슈에 주목했다. ‘로컬’의 한계를 스스로 깨부순 것이다. 봉준호의 승리이자, 아카데미의 승리다. 


봉준호는 아카데미 시상식 후 기자들과 만나 “골든글로브 (시상식) 때 자막을 ‘1인치의 장벽’이라고 했는데, 사실 그때도 때늦은 소감이었다. 이미 장벽들은 부서지고 있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봉준호가 옳다. 전 세계 곳곳에서 장벽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당장은 배제와 차별과 혐오의 힘이 세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편과 개방, 포용과 환대가 조용히 공간을 넓혀가고 있다. <기생충>과 봉준호에 대한 열광이 이른바 ‘국뽕’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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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10일, 따뜻한 날이었다. 미세먼지 주의보가 내려졌지만, 화창했다. 마스크를 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봄날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절기로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놀랄 만한 봄 소식은 태평양을 건너 왔다. 이날 낮(현지시간 9일 저녁)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한국영화 <기생충>의 수상 소식을 잇따라 전했다. 처음은 각본상이었다. 곧이어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았고 끝내 최고 권위인 작품상까지 수상했다. 아카데미(오스카)상 4관왕. 앞서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운 기록이다. 2020년 2월10일은 한국영화사를 새로 쓴 날이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20년 2월 11일 (출처:경향신문DB)


지난달 5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77회 골든글로브의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이어 13일에는 제92회 아카데미상의 작품·감독·편집·미술·국제영화상 등 6개부문 후보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큰 기대는 없었다. 오스카상의 국제영화 부문상만 받아도 대성공이라고 했다. 이후 <기생충>이 1000곳이 넘는 미국 영화관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아카데미상 수상의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다. 결과는 작품상을 포함한 4관왕이었다. 한국의 아카데미상 수상은 1919년 단성사에서 <의리적 구토>를 상영하며 영화사를 써내려간 지 101년 만에 처음이다. 


<기생충>은 미국 아카데미영화제의 역사도 새로 썼다. 비영어권 영화의 오스카 작품상 수상은 92년의 아카데미 역사에서 <기생충>이 처음이다. 그간 아카데미는 ‘백인영화제’ ‘미국 로컬영화제’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비영어권 국가에는 폐쇄적이었다. 아카데미영화제에서 국제영화상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문의 상은 미국 영화가 독차지했다. <기생충>은 또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수상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기생충>이 거둔 성과는 미국 영화 <마티>가 황금종려상(1955년)·아카데미 작품상(1956년)을 한꺼번에 거머쥔 이후 64년 만이다.


<기생충>은 한국어로 쓰고 한국자본으로 만든 ‘토종 한국영화’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것은 봉준호 감독의 뛰어난 연출 미학이 거둔 쾌거임은 말할 것도 없다. 봉 감독은 앞서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등을 통해 독특한 상상력과 빼어난 예술성을 선보였다. 그러나 봉 감독이 말했듯이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수상하기까지 수많은 감독, 배우, 작가, 기획자들의 노력이 뒷받침됐다. ‘한류 열기’를 타고 영화의 수출·배급·합작 등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최근에는 한국의 배우나 감독, 제작자들이 오스카상 후보작과 수상작을 선정하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속속 위촉돼 한국영화의 존재감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lt;기생충&gt;이 다룬 빈부격차·계급갈등의 이야기가 각본상을 수상하고, 편집·미술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호평을 받은 것은 한국영화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영화는 더 이상 변방이 아니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지켜본 전 세계 수억명의 사람들은 한국영화에 새롭게 눈을 떴다. <기생충>은 앞서 오스카상을 받은 <벤허> <타이타닉> <대부> <양들의 침묵> <마지막 황제> <아마데우스> <레인맨> 등과 함께 세계영화사에 기록될 것이다. 오스카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영화는 세계영화의 무대에 진입했다.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한국인이라고 주눅들 필요가 없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게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 ‘토종 감독’ 봉준호와 ‘순수 한국영화’ <기생충>은 이를 입증해 보였다. 제2, 제3의 봉준호가 나와야 한다. 지난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영화는 올해 두번째 100년의 역사를 시작한다. 그 시작점에 <기생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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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자신이 관찰해온 초상화 모델의 사소한 습관을 나열하는 화가에게 모델은 말한다. 우리는 정확히 같은 자리에 있다고. 당신이 캔버스 앞에서 나를 그리고 있는 동안, 나 역시 의자에 앉아 당신을 보고 있었다고.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엘로이즈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화가 마리안느의 사랑을 담은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예술가에게 귀속되었던 응시의 자격을 뮤즈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예술에서 주체와 대상이 맺어온 관계를 묻는다. 그런데 예술가와 뮤즈가 시선의 평등을 이루는 일은 정말 가능할까?


18세기를 배경으로 레즈비언들의 사랑을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한 장면.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제공


엘로이즈와 마리안느, 두 연인의 입장은 동등하지 않다. 죽은 연인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려오는 길에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다시 연인을 잃은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함께 읽는 장면에서, 그 차이가 드러난다. 먼저 하녀 소피는 사랑을 참지 못하고 연인을 다시 죽게 만든 오르페우스를 비판한다. 한편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연인이 아니라 에우리디케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는 시인이 되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에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스스로 오르페우스에게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한다. 마리안느가 오르페우스를 미성숙한 연인이 아니라 열정적인 시인으로 뒤집어본다면, 엘로이즈는 기억하려는 시인의 욕망을 기억되려는 뮤즈의 요구로 한 번 더 전복하는 것이다. 뒤돌아보라고 말하는 에우리디케의 마지막 모습은 결혼을 앞두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 자신의 것이 되어 저택을 떠나는 마리안느의 눈에 영원히 담긴다.


몇 년 후, 마리안느는 연주회장에서 엘로이즈를 멀리서 바라본다. 과거에 마리안느가 하프시코드로 연주해 주었던 비발디의 사계를 관현악으로 들으며 감정에 북받친 듯 울고 있는 엘로이즈의 얼굴은, 여름 3악장이 흐르는 내내 롱테이크로 카메라에 담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자신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엘로이즈는 울고 있는 자신의 옆얼굴이 마리안느에게 응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엘로이즈는 예술가의 시선을 그대로 되돌려주거나 멈춰선 채로 기억되려는 뮤즈가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 움직이는 초상화를 스스로 완성하는 예술가가 되는 셈이다. 아니, 애초에 엘로이즈는 관념적으로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를 비판했으며, 정혼자에게 보낼 초상화를 직접 결정했다. 시선은 전복되어 평등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녀 자신의 것이었다.


영화는 그동안 남성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이자 아름답지만 침묵하는 존재로 숭배되어온 뮤즈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시선의 평등은 단지 남성의 시선(male gaze)을 여성의 시선(female gaze)으로 단순히 전복하는 작업이 아니라 시선 자체에 깃든 위계와 권력을 질문하고 그 형질을 바꿔보려는 과정에서 획득된다. 이는 예술가의 뮤즈, 아내, 애인, 누이로 명명된 수많은 이름들과 창조적인 협업을 삭제해온 예술의 역사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 소피와 함께 임신중절을 화폭에 담아내는 공동작업과 자신의 회화를 아버지 이름으로 출품하는 모습은 남성과 예술가 중심으로 주조된 예술사의 앞뒷면을 보여준다.


이 시선의 평등은 여성 예술가들과 더불어 역사에서 누락되어온 여성 퀴어의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은 유혹이나 동정, 위계에 의해 한순간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관찰하는 섬세한 시선과 조금씩 알아가는 대화 속에서 천천히 깊어진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묻는다. “모든 연인들이 사랑을 창조하고 있다고 느낄까?” 마리안느는 대답 대신 키스를 하지만 영화는 이미 우리에게 말했다. 모든 연인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매번 사랑을 창조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창조는 서로를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보는 시선과 대화로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말이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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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아카데미)는 국제영화제가 아니지 않나. 매우 ‘로컬’(지역적)이니까(The Oscars are not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hey’re very local).” 지난해 10월7일 “한국영화가 여태껏 왜 단 한 작품도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했나”라는 미국 매체의 질문에 봉준호 감독이 내놓은 대답이다. 미국 중심으로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아카데미상에 대한 조롱일까. 승자독식의 할리우드 영화 제작 관행에 대한 비판일까. 이게 아니었다면, 아카데미상을 이솝 우화에 나오는 ‘신 포도’쯤으로 생각한 것일까.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수상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가운데)과 배우 이정은(왼쪽), 송강호씨가 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스힐튼호텔의 무대 뒤편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트로피를 들어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_ UPI연합뉴스


봉준호 감독은 그 후 벌어질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며칠 뒤 북미에서 개봉한 영화 <기생충>은 대흥행이었다. 언론과 평단은 <기생충>에 호평을 쏟아냈다. 봉 감독은 미국 방송 토크쇼, 언론 인터뷰 출연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로컬’ 미국을 접수해갔다. 지난 3일 SNS에 공개된, 미 유명 배우 브래드 피트와 송강호가 함께 찍은 사진은 <기생충>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브래드 피트는 송강호의 손을 잡으며 “<기생충> 팬”이라고 말했다. 


지난 5일(현지시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5월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은 이후 상복이 넘쳐났다. 시드니영화제(SFF) 대상, 호주 아카데미영화제 아시아최고영화상 등 지금까지 받은 해외 영화상만 40여개에 달한다. 그러나 골든글로브상 수상은 폐쇄적인 미국 할리우드에서 한국영화가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골든글로브는 아카데미와 함께 할리우드의 양대 영화상이다. 골든글로브 수상이 아카데미로 이어지는 사례는 많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 영화팬들의 시선은 벌써 다음달 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가 있다. 그러나 수상보다 값진 것은 세계인이 영화를 함께한다는 사실일 터. 봉준호 감독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말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한다. 그 언어는 영화다(I think we use only one language, Cinema).”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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