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처가 어른들과 식사를 하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이야기가 나왔다. 장인은 근 10년 만에 처음 극장에 가신 거라고 했다. 그 와중에도 TV에서는 퀸의 노래가 끊임없이 흘렀다. 광고, BGM,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퀸이 국민가수로 등극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럴만도 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국 관객수는 총 936만397명이다. 역대 외화 흥행 6위다. 개봉 10주가 지났음에도 예매 순위가 떨어지지 않는 추세로 봐서는 1000만 관객도 꿈이 아니다. 퀸의 모국인 영국을 상회할 정도로 한국에서 특히 돌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흥행세는 세계적이다. 개봉 첫 주에 50개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이익도 엄청나다. 5200만달러를 들여 7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14배 장사다. 세계 2위 시장인 중국에서 개봉하지 못했음에도 그렇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돈 되는 비즈니스에는 사람이 몰리는 법. 벌써 할리우드는 제2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꿈꾸나보다. 2016년 세상을 떠난,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한 이래 가장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었던 데이비드 보위를 스크린으로 옮긴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의 아들인 영화감독 던컨 존스의 트위터에 의하면 그렇다. <어벤져스>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슈퍼 히어로 무비의 시대가 열렸듯, <보헤미안 랩소디>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다. 그저 ‘음악영화’의 전성기라고 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나는 ‘록스타 무비’라 부르고 싶다.

 

극장은 위기다. IPTV, 넷플릭스 등 플랫폼은 다양해졌다. TV의 사이즈는 점점 커지고 화질은 점점 좋아진다. 스토리, 영상미 등 대중이 영화를 통해 얻고자 했던 지점을 더 이상 극장은 독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체험과 경험이다.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아바타>의 3D혁명, 히어로 무비 붐을 주도하고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스펙터클한 세계관 같은 것들이 그렇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경험욕구의 다음 단계를 제시한다. 이 영화는 자체로서는 흠결이 많다. 하지만 그 흠결을 마지막 15분 라이브 에이드신은 단숨에 덮어 버린다. 프레디 머큐리의 드라마틱한 삶이 압도적 퍼포먼스와 웸블리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군중 위에서 불타오른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음악가는 많다. 스타디움을 꽉 채운 스타 역시 많다. 이 둘을 겸비한 록스타는 그러나 많지 않다.

 

언젠가부터 스타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은 존재하기 힘들어졌다. 인터넷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음악시장은 지역 단위로 분화되었다. 언젠가 폴 매카트니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공연계를 보면 앞으론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 곡의 히트곡을 내는 밴드는 있어도 공연 전체를 계속 들뜨게 하는 레퍼토리가 있는 밴드는 없다. 아마 U2와 메탈리카가 마지막 스타디움 밴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대중의 취향이 잘게 나뉘면서 세계 시장을 씹어 먹기가 불가능해졌다는 얘기다.

 

대중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삶, 히트곡 하나로 수억달러가 요동치던 음반시장, 수만명의 관객을 압도하는 쇼맨십과 퍼포먼스가 삼위일체를 이뤘던 때가 바로 퀸이 활동하던 때였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퀸 같은 록스타들이 빛나고 불탔다. 그때 차트와 유행을 바꾸고 운명을 달리한 이들이 한둘이던가.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명단을 작성할 수 있다. 마이클 잭슨, 조지 마이클, 커트 코베인, 존 레넌…. 아직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은 또 어떤가. 마돈나, 롤링 스톤스, 폴 매카트니… 너무나 굵직해서 이름을 한 품에 안을 수 없는 이들만 해도 이 정도다. 충분히 영화로 만들 만한, 흥망성쇠의 삶과 찬란한 절정의 순간을 남긴 이들은 차고도 넘친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만들어낸 새로운 흥행의 방정식을 과연 영화산업이 바라만 보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늙어가는 극장은 돌아올 수 없는 시대의 음악과 손잡을 준비를 하고 있다. 과거의 플랫폼, 과거의 콘텐츠가 결합하여 새로운 현재를 만들려 하고 있다. 가장 낡은 것들이 가장 새로운 것이 될 것이다.

 

<김작가 |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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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저녁 광화문 씨네큐브에 <로마>(감독 알폰소 쿠아론)를 보러 간 건 완전한 돈낭비였을지도 모른다. 내겐 넷플릭스 아이디가 있고, 몇 시간 후면 넷플릭스에서 <로마>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아이디가 없다 하더라도, 신규 가입하면 첫 한 달은 무료다.)

 

유명 배우 하나 나오지 않는 1970년대 초반 멕시코 배경의 흑백영화였지만, 객석은 의외로 거의 찼다. 멕시코시티 한 상류층 가정의 가사도우미 클레오가 중심인물이다. 클레오는 의사인 가장 안토니오와 그의 아내 소피아, 아이 4명을 뒷바라지한다. 클레오의 무책임한 남자친구는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잠적하고, 소피아의 남편 안토니오 역시 외도로 가정을 떠난다. 임신한 클레오와 당황한 소피아는 안간힘을 내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낸다.

 

관객은 영화 시작과 함께 곧바로 클레오의 공간으로 깊숙이 초대된다. 3D 안경이나 VR 기어를 쓰지도 않았지만, 마치 클레오와 소피아와 아이 네 명이 곁에서 먹고 자고 살아가는 것 같다. 이 경험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건 소리다. 클레오가 비질하는 소리, 빗물 떨어지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 가족들이 여러 가지 언어로 잡담하는 소리들이 극장 공간 사방에서 들려온다. 배경음악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기에, 이 일상의 소리들은 더욱 주의를 끈다. 음향 시설이 좋은 극장이라면 그 효과가 배가될 것이다. 사람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듯, 카메라의 좌우 패닝샷이 많다는 점도 공간에 대한 몰입감을 높인다.

 

영화 ‘로마’의 종반부 한 장면. 롱테이크로 촬영된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넷플릭스 제공

 

스마트폰, 컴퓨터, 텔레비전에서 넷플릭스로 <로마>를 보았어도 클레오의 삶의 감각이 전해졌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볼 때 극장만큼 집중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개인이 아무리 좋은 음향·영사 시설을 갖췄어도 전문가들이 설계한 극장 관람 환경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로마>는 상영시간 135분 동안 관객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요구하는 종류의 영화다. 자신을 모두 내어주지 않는 관객에게 <로마> 역시 그 감흥을 완전히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로마>를 영화관에서 보길 권하고 있다. <베이비 드라이버>의 감독 에드거 라이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적었다. “한 가족과 시대에 대한 심오한 연구이자, 몰입할 만한 경험.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돌아가고 싶었다. 큰 스크린으로 보길 권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극장에서 <로마>를 보기는 쉽지 않다. 개봉 이틀 뒤 곧바로 온라인 공개하기로 한 제작사 넷플릭스의 방침을 주요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들은 극장에서만 수익을 챙길 수 있는 일정 기간 이상의 상영기간(홀드백)을 요구한다. <로마>는 애초 세계 최고 권위의 칸국제영화제 출품을 타진했으나 넷플릭스의 정책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다. 결국 <로마>는 넷플릭스 방침에 유연하게 반응한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출품돼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로마>뿐 아니라 폴 그린그래스의 <7월22일>, 코언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 오슨 웰스의 전설적인 유작 <바람의 저편>처럼 평소라면 칸의 레드 카펫을 밟을 만한 넷플릭스 작품들이 다른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대자본·뉴미디어의 편리함을 내세운 넷플릭스와 극장 수익·전통적인 극장 경험을 내세운 영화관·영화제의 힘겨루기가 이어지고 있다.

 

영화 ‘로마’의 한 장면. 소피아와 네 아이들, 클레오는 휴양지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넷플릭스 제공

 

영화관에 간다는 것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자신을 속박시키고, 낯선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꽤 굳은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많은 관객이 긴장 속에 침묵하며 어둠 속의 커다란 스크린을 주시하는 극장을 경험하면서 자라온 세대다. 다이아몬드가 귀하게 여겨지는 건 그 자체에 내장된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단지 드물기 때문이다. 난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몇 번의 클릭으로 <로마>의 한 장면을 재생할 수 있다. 이 편리함이 반가우면서도 낯설다.

 

기술 발달의 도저한 물결은 한 인간의 취향 같은 것은 쉽게 휩쓸고 지나간다. 강력한 시네필인 정성일 감독·평론가조차 경향신문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변화하는 플랫폼은 내가 반대한다고 해서 오지 않을 것도 아니고, 환대한다고 해서 꼭 긍정적인 것도 아니다. 스스로 영화를 선택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시네마테크, 영화제의 프로그래머가 됐다. 플랫폼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을 것이고, 경계는 희미해질 것이다.”

 

난 <로마>를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극장 관람 경험을 특권화할 생각은 없다. 넷플릭스는 이용자에게 종래 방식으로는 만나기 어려웠던 빼어나지만 독특한 작품들을 소개했고, 창작자에게는 권한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마음속의 프로젝트를 꺼내들 수 있게 했다.

 

이제 무엇이 영화이고, 영화가 아닌지 결정해주는 사람은 없다. 백가쟁명하는 미디어가 저마다의 장점을 내세워 이용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그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자본의 이해가 아니라, 이용자의 경험에 민감한 미디어가 부흥하길 바랄 뿐이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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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500만명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프레디 머큐리라는 그토록 비범했던 뮤지션을 그토록 평범하게 주무른 영화가 <맘마미아> <라라랜드> <비긴 어게인> 같은 수작들을 이미 제쳤고 <레미제라블>(592만명) <미녀와 야수>(513만명)를 넘어서며 음악영화의 새로운 흥행 기록을 경신할 수도 있다니….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른 결과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말 얼마 만이던가?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그 날짜에 맞추어 예매하고 극장을 찾았던 때가…. <보헤미안 랩소디>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그런데 이럴 수가, 이렇게 시시하고 볼품없을 수가…. 틀에 박힌 진부한 구성이나 음악 자체에 몰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어수선한 편집은 그렇다 치자. 설사 그게 퀸 음악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졌다 해도, 문제는 캐스팅이었다. 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계속 구시렁거리게 만드는 가장 핵심에 가까운 문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왼쪽)와 <헤드윅>의 한 장면.

 

“완전 캐스팅 미스야. 다른 멤버들은 다 비슷해, 브라이언 메이는 소름 끼치게 똑같고. 정작 주인공만 이상해. 프레디 머큐리는 양성애자고 때때로 여장을 했지만 남자보다 더 마초스럽고 훨씬 더 동물적인 듯한 아주 복잡한 매력이 있었다고. 그런데 라미 말렉이라는 이 애송이는 그 튀어나온 앞니로 마치 풀을 뜯을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있잖아. 밋밋하달까? 무엇보다 무대에서 훨씬 더 압도적인, 관객의 눈과 귀는 물론 심장까지 꼼짝 못하게 움켜쥐는 프레드 머큐리 특유의 ‘불멸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라미는 뭐랄까, 좀 작게 느껴져. 프레디에 비하면 왜소하고 어딘지 나약해 보이고, 왠지 좀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 하다못해 사슴처럼 촉촉한 그 눈망울도 영 비위에 거슬려. 자기랑 어울리지 않는 배역을 그저 학습된 연기력으로 임하는 배우의 모습이라고 할까? 하여튼 진짜 같지 않은 거지.”

 

그 때문인지 정반대 지점에 놓인 위대한 음악영화 <헤드윅> 생각이 간절했다. 성전환 수술에 실패한 후 애인에게 버림받고 또다시 배신당하는 트랜스젠더 가수 ‘헤드윅’은 결코 실존인물이 아니지만 존 캐머런 미첼이 연출하고 연기하는 헤드윅은 진짜 같았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주인공의 열창과 독백, 그 몸짓 하나하나가 너무도 드라마틱하고 매력적인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또 너무도 진실되게 느껴져서 어두컴컴한 작은 극장(지금은 없어진 관철동의 코아아트홀에서였다!)에 앉아서 요의를 참으면서도 이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기억이 난다.

 

그랬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객이 주연 배우와 캐릭터를 너무도 동일화시킨 나머지 그의 실제 성정체성을 의심했다. “진짜 트랜스젠더 아냐?” 그 질문에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남자’였다고 답하는 전대미문의 걸출한 예술가 존 캐머런 미첼에게 더욱더 열렬히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가 뜨겁게 안겨준 ‘영화의 진정성’이랄지 ‘나와 다른 타자의 아픔을 바라보는 성숙한 시선’에 대해서 진정 온 마음으로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참 초라하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비겁하기까지 하다. 영화 속 ‘라이브 에이드’ 신은 실로 대단해 보였지만, 사실과 좀 다르다. 무엇보다 영화와 달리 프레디 머큐리는 자신이 에이즈라는 사실을 ‘라이브 에이드’ 이후에 알았다. 어떤 면에서는 그 무대 이후 그의 진짜 ‘절정’이 시작된 셈이었다. 그는 에이즈와 그로 인한 여론과, 죽음의 공포와 싸우면서 훌륭한 음악들을 이전보다 더 많이 탄생시켰다. 심지어 그러는 와중에도 양성애자다운 방식으로 연애하며 자기만의 신성한 사랑 안에서 나름대로 행복한 죽음을 맞았다. 실로 누구와도 닮지 않은 단 하나의 비범한 인생이었다.

 

나는 <헤드윅>이라면 모를까,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그다지 진정성이라든가 배우의 열연, 작품성과는 거리가 먼 그저 그런 범작 수준의 영화가 음악영화 랭킹 1위를 차지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 같은 소수의 음악영화 애호가(음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해서 음악영화라면 일단은 덮어놓고 먼저 보는 사람들) 몇몇이 딴지를 걸어봤자 대세에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도 안다.

 

물론 나도 안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이런 과분한 영광을 누리는 건 어디까지나 퀸이라는 전설적인 밴드가 만들어낸 음악의 힘이라는 걸. 게다가 내게도 이제야 <보헤미안 랩소디>가 가진 나름의 미덕이 조금 보인다. <헤드윅>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그와 비슷한 방식으로심장이 멎을 만큼 멋진 음악과 함께 성적소수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을 한층 성숙시켰다고 나는 느낀다. 게다가 영화를 쉽게 만든 덕분에 기대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프레디 머큐리의 열정적인 삶과 음악으로 함께 공명하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좋은 일이고 기꺼이 축하할 만한 일이다.

 

다만 <보헤미안 랩소디>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며 <헤드윅>을 챙겨보는 젊은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소외감과 분노를 품고 사는, 체념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자 하는, 포기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남몰래 사랑을 갈망하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만하면 영화에 열광한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영화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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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72)의 신작을 한 달 간격으로 보며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했다. 좋은 영화는 영화관을 벗어난다. 극장을 나선 뒤에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화두를 준다는 점에서 스필버그는 거장이다.

 

2월 개봉한 <더 포스트>는 1971년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뉴욕타임스가 미 국방부의 비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에 관한 특종을 터뜨린다. 이 보고서에는 트루먼에서 존슨에 이르기까지 4명의 대통령들이 베트남전에 대한 진실을 감추려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경쟁사를 자처하는 워싱턴포스트의 편집국장 벤은 어떻게든 낙종을 만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사망한 남편의 뒤를 이어 워싱턴포스트 사주가 된 캐서린의 입장은 다르다. 캐서린은 정부와의 관계, 주식시장 상장, 회사의 장기적인 생존, 게다가 오랜 친구인 맥나마라 전 국방부 장관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이미지

 

쉬운 선택은 뉴욕타임스와 ‘펜타곤 페이퍼’를 최초 보도한 기자의 이야기를 뒤따르는 것이다.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하기까지의 숨막히는 과정, 보도를 막으려는 정부와의 투쟁, 최초 보도를 따라잡으려는 워싱턴포스트와의 경쟁을 그렸으면 영화의 전개는 깔끔하고 명확하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앞서간 뉴욕타임스가 아니라 ‘물 먹은’(‘낙종’을 뜻하는 언론계 은어) 워싱턴포스트가 중심이고, 그중에서도 강경한 편집국장 벤보다는 주저하는 발행인 캐서린에게 극의 전개를 맡긴다. 더 흥미로운 건 벤을 추동하는 힘이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 위험에 빠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걱정, 베트남전에서 죽어가는 미국 청년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벤이 기밀 문건을 입수하기 위해 수하 기자들을 달달 볶고 기사를 내기 위해 발행인 캐서린을 들이받는 이유는, 뉴욕타임스에 대한 경쟁심 때문이다. ‘2등 신문’에 근무하는 자존심 강한 벤은 뉴욕타임스가 어마어마한 특종을 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함과 동시에 불안, 초조해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민주주의든, 언론자유든 벤에게는 관심 밖이다. 벤이 기사를 쓰려는 이유는 라이벌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벤의 직업윤리다. 기자는 기사를 잘 써야 하고,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봉사해야 한다. 직업윤리에 충실한 사람이 결국엔 자기 자신과 세상을 구한다. 그것이 <더 포스트>의 결론이다.

 

그런데 일만 열심히 하면 삶은 무슨 낙인가. 지난달 개봉한 스필버그의 또 다른 신작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일하기 전에 갖춰야 할 것들을 알려준다. 근 반 세기 전의 과거를 배경으로 한 <더 포스트>와 달리, <레디 플레이어 원>은 27년 뒤인 2045년이 배경이다. 대부분의 인류는 컨테이너를 겹겹이 쌓아놓은 듯한 슬럼가에서 극빈의 삶을 살아간다. 이들의 유일한 낙은 ‘오아시스’라 불리는 가상현실(VR)이다. 각자의 비좁고 더러운 공간에서 사람들은 VR 고글을 쓴 채 오아시스에 접속해 제2의 인생을 살아간다.

 

오아시스 안에서 이용자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늘을 날며 춤출 수 있고, 치열한 전투에 참여할 수도 있다. 막대한 사이버머니가 걸린 레이싱 경기에도 도전할 수 있다. 이용자들은 무엇이든 될 수도 있다. 흑인 여성이 거구의 백인 남성 행세를 할 수도 있고, 아예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나 괴물이 될 수도 있다.

 

스필버그는 오아시스를 대중문화 영웅들에 대한 찬사의 공간으로 활용한다. 1970년대 이후 영화, 만화, 게임, 음악의 찬란한 유산들이 영화 속에 담긴다.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공포영화 <샤이닝>(1980)의 무시무시한 호텔이 재현되고, <빽 투더 퓨처> 시리즈의 타임머신 자동차 드로리안이 레이싱 경기에 등장한다. 인기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스타크래프트, 오버워치도 인용된다.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의 바이크나 건담은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다른 감독이 <레디 플레이어 원>을 만들었다면 가장 어려운 점은 연출이 아니라 이 많은 콘텐츠에 대한 사용권 획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필버그라는 이름값에 그 모든 창작자들은 앞다퉈 자신들의 창조물을 <레디 플레이어 원>에 등장시키도록 허락했다. 그건 스필버그가 단지 돈을 많이 번 명성 있는 감독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난 시대 대중문화에 뜨거운 애정을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추정 제작비는 1억7500만달러(약 1800억원)다. 이 많은 돈을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 과시, ‘오타쿠’에 대한 헌사에 쏟아붓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그렇게 했다. 자신의 취향에 대한 끝없는 탐구, 취향을 나누는 사람들에 대한 동료의식, 남들이 뭐라 하든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애착이 우리를 풍성하게 한다. 그것이 <레디 플레이어 원>의 결론이다.

 

<백승찬 토요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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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모처럼 영화를 보았다. 일본 만화가 원작이라는, 이미 일본에서는 두 편의 영화로 제작된 적 있는 <리틀 포레스트>다. 도시 생활에서 좌절을 겪은 청춘이 자신이 자란 시골 마을로 돌아가 1년을 보내는 풍경을 담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무엇보다 음식이다. 원작인 일본 영화는 주위 자연에서 구하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종의 자급자족형 삶을 보여준다고도 하지만, 한국 버전에 나오는 영화 속 식재료 중 일부는 서울에서도 일부러 찾지 않으면 구하기 어려운 것이다. 애초에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래서 돌아갈 고향도 없고, 돌아가야 빌려줄 논이나 과수원이 있는 부모는 처음부터 갖지 못한 청춘이 대부분인 우리 사회에서 이 영화를 보고 주제가 귀농이니 도시 탈출이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는 판타지일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음식이다. 좌절한 마음을 넘어서기 위해 먹는 음식들, 추억을 빌려와 만드는 음식들. 더러는 혼자 먹고, 더러는 나누어 먹지만 새로운 음식은 없다. 자기가 살아온 시간을 밥으로 지어 먹는다는 것. 그것을 묵묵히 먹어 삼키는 것, 그것이 성장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추억의 음식에 비로소 자신만의 레시피를 덧붙였을 때, 훌훌 떠날 수 있던 것일 터였다.

 

<리틀 포레스트>포스터

 

그런데 어이없게도 나는 <리틀 포레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문득 일본 영화 <원더풀 라이프>가 떠올랐다. <원더풀 라이프>는 사후 세계에 대한 영화이다. 죽은 이들이 이승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자기 인생의 가장 좋았던 기억을 기록하고 떠나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다. 전혀 연관되지 않는 영화인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감당하고 거기에서 비로소 출발해보려는 <리틀 포레스트> 주인공의 담담하지만 밝은 웃음을 보면서 나는 그만 아, 죽었구나, 죽음 이후의 환상이구나 혼자 중얼거리고 말았다. 대체 무슨 막장 드라마 같은 상상을 하느냐는 일행의 힐난을 들었고, 그의 비난은 타당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어떤 불길함에 마음이 아팠는데, 돌아와 생각하니 아무래도 나는 영화 속 그 아름다운 세계가 우리가 살아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늙어서 혹은 세상을 떠나서 돌아볼 수 있는 기억 속의 세계는 맞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청춘은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우울한 청춘이다. 아르바이트 같은 일자리마저 포함했는데도 사상 최고의 실업률이고, 그마저도 최저임금 인상을 이유로 쫓겨난 청춘들이다. 해놓은 것 없는 기성세대에게 착취당하거나 감성팔이당하거나 하는 와중에 부당함을 폭로하면 사회의 안녕을 해치는 공작 세력으로 비난 받는다. 이들의 기억 어디에서 사과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 “내일의 꿈을 오늘 미리 가불해 주고, 그 가상의 현실을 당장 오늘의 그것으로 착각하고 즐기게 하여 진짜 현실의 갈등을 잠재워 버리는 말의 요술은 이 섬을 다스려 온 사람들의 해묵은 수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오늘의 삶이라는 것이 늘 힘겹고 짜증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지극히 손쉽고 효과적인 지배술의 하나였습니다.”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 나오는 이 문장은 1970년대의 한 섬을 배경으로 한다. 그 섬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섬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제는 진보인사의 민낯을 폭로하며,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 한 젊은이를 향해 쏟아진 소름 끼치는 댓글을 읽었다. 드디어 공작이 시작되었다던가. 들불처럼 번지는 미투 폭로를 두고 처음 공작 음모론이 제기됐을 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공작’이란 ‘허위’ ‘왜곡’ ‘조작’의 가능성을 염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 말은 단지 목적 달성에 대한 훼방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천지분간 못하는 이들의 미투 폭로 때문에 촛불로 어렵게 세운 진보정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덜덜 떠는 이들은 ‘고작 이런 일’로 무너질 대의를 걱정하지만, 나는 이런 일로도 타격 받지 않는 ‘그들만의 대의’를 보게 될까 그것이 더 두렵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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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기간에 말에 대한 영화 두 편을 보았다.

하나는 <위대한 쇼맨>(2017), 다른 하나는 <패터슨>(2016)이다.

<위대한 쇼맨>은 ‘PR(홍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P.T 바넘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영화다. 빈털터리 소년에서 세계적인 흥행사로 성장하는 바넘이 갖가지 기지로 위기를 극복할 때마다 “사기꾼이잖아”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사기의 기술이야말로 별 의미 없는 물건을 화려하고 특별한 상품으로 도약시키는 자본주의의 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속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바넘의 어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 그의 화려한 언변은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다. 어떤 말이 빼어나게 아름답다면, 그건 어딘가에 거짓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위대한 쇼맨> 스틸 이미지

 

<패터슨>은 패터슨시(市)에서 버스를 몰면서 시(詩)를 쓰는 패터슨에 대한 영화다. 패터슨의 말은 바넘의 말과 사뭇 다르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비밀의 노트에 기록된 그의 말은 일상에서 길어올린 느낌들 그 자체다. 성냥에 대한 관찰은 연인에 대한 사랑의 시로 이어지고, 그 사랑의 속삭임은 매일 지나치는 길모퉁이에서 만나는 또 다른 빗방울이 된다. 영원처럼 반복되는 시간들 속에서도 어제와 완전히 같은 오늘은 없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보폭으로 음미하는 세계의 인상은 매 순간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하나의 우주라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과장이 아니다.

 

주저하지 않고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바넘의 말과 노트 위에 족적을 남기는 펜의 움직임을 따라 머뭇머뭇 흘러가는 패터슨의 말. 그 말들 사이의 간극이 아무에게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는 말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여기저기에서 넘쳐나는 글들이 가장 현란하게 거짓을 꾸밀 수 있는 때이기에 더욱, 과시하지 않는 말의 진실함을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이다. <패터슨>은 시란 문학 장르의 하나가 아니라 나와 타인과 세계를 만나는 태도를 일컫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시적인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끈다. 그래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패터슨시(市)가 아닌 2018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국 문학에 노벨상을 안겨 주리라” 기대됐던 한 시인의 추태가 폭로되고, 그 폭로를 폄하하는 온갖 천박한 말들이 소위 ‘문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여기에서 과연 시를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란 말인가.

 

문학을 잘 모르는 나는 시에 대한 또 한 편의 영화를 떠올렸다. 이창동 감독의 <시>(2010)다. 영화는 간병 도우미 일을 하면서 외손자를 키우던 중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60대 중반의 미자가 한 편의 시를 쓰는 과정을 따라간다.

 

외손자가 친구들과 집단으로 강간한 소녀 희진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안 미자는 외손자를 위해서라도 조용히 묻어두자는 주변 사람들의 설득을 뒤로한 채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한다. 미자는 할머니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와 달리 손자가 아닌 피해자인 희진에게 충실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작(詩作)을 통해 희진이라는 완전한 타자를 만나고 그의 삶과 죽음을 애도한다. 그에게 말이란 내가 사라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상실의 공간이자 타자를 끌어안아 그에게로 녹아드는 제의의 공간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미자의 시 ‘아네스의 노래’는 이 빈곤한 세계에서 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선선하게 답한다. 시의 임무란 어쩌면 불충과 충실의 기예를 선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우리로 하여금 침묵하게 했던 익숙한 법에 불충하고,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 보이지 않았던 존재를 드러내고 대면하게 하는 사건들에 끝까지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렇게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야말로 시가, 영화가, 그리고 예술이 해야 하는 일 아니겠냐고.

 

그리하여 지금, 여기에서 가장 시적인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이들이 ‘예술혼’이라는 변명으로 지키고 싶어하는 그 이름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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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는 미국의 건국신화다. 1776년 7월4일, 미국인들은 대영제국에 맞서 민주공화정을 선포했다. <스타워즈>는 거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제국’에 맞선 ‘공화국’의 투쟁을 그린다.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 역사를 영화적으로 재현하는 현대판 신화다. 고전 신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영웅의 모험담이라면, 현대 신화는 영화의 스토리텔링과 스펙터클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할리우드 문화 상품이다. 서부극의 존 웨인은 인디언 학살자가 아니라, 미국 역사의 개척자가 된다. <스타워즈> 영웅 루크 스카이워커는 팰퍼틴 황제와 ‘어둠의 제국’에 맞서는 미국식 민주주의 수호자다.

 

라스트 제다이 포스터

 

1977년 <스타워즈> 오리지널 3부작 첫 편의 제목은 ‘새로운 희망’이다. 이 영화의 기록적 흥행은 베트남전 패배와 경제 위기로 절망했던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이 갈구했던 ‘새로운 희망’은 1980년 신보수주의 레이건 대통령의 ‘위대한 미국’과 ‘스타워즈’ 전략핵무기 계획으로 변질된다.

 

로빈 우드가 통찰했듯이, <스타워즈>는 신자유주의 레이건 시대의 개막작이었다!

1999년, <스타워즈> 프리퀄 3부작이 시작된다. 이 시기에 미국은 2001년 뉴욕 9·11 테러-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2003)-세계금융위기(2008) 등 전쟁과 테러, 경제적 파국의 위기에 내몰렸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에 맞서 ‘영웅적 전쟁’을 감행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서서히 다스베이더로 변해가는 조지 부시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다.

 

<스타워즈>는 제국과 공화국의 대립이라는 뚜렷한 선악 이분법에 기초한다. 황제-총독-다스베이더-스톰트루퍼 등 ‘어둠의 제국’과, 루크-레아 공주-한솔로-오비완-요다 등 저항군 진영이 맞서 싸운다.     

 

조지 루카스는 조지프 캠벨의 ‘분리-입문-귀환’의 영웅 신화 3단계 법칙을 충실히 따라간다. 오이디푸스 신화, 기독교 신앙을 비롯하여 불교, 도교, 힌두교, 일본 사무라이 등 다양한 동서양 신화들을 뒤섞는다. <스타워즈>는 새롭고 특이한 ‘권선징악’ 영웅 서사극이다.

 

2015년 <스타워즈 에피소드 7: 깨어난 포스>와, 2017년 <스타워즈 에피소드 8: 라스트 제다이>는 미국 건국신화의 완성을 위한 마지막 시퀄 3부작이다. 루카스필름과 21세기폭스를 인수한 디즈니 미디어 ‘제국’은 영화, TV, 소설, 음반, 게임 등 프랜차이즈 마케팅을 위한 새로운 신세대 가족주의 영화를 선보인다. 루크와 요다는 구시대 제다이 경전을 불태운다. 이제 영웅의 운명은 여성 제다이 레이에게 넘어간다. 흑인 전사 핀, 포, 로즈 등 신세대 전사들은 다인종 미국 사회의 젊은 세대를 상징한다. 마치 악당과 보안관이 겨루는 서부극의 ‘마지막 결투’처럼, 붉은 소금 사막을 배경으로 신세대 악당 카일로 렌과 라스트 제다이 루크의 최후 결전이 벌어진다.

 

극장 바깥에서는, 또 다른 ‘별들의 전쟁’이 벌어진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 트럼프가 북한과 중동이라는 악의 무리들과 맞서 싸울 것을 천명한다. 1977년 <스타워즈> 최초 개봉 이후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불행히도 ‘악의 제국’에 맞서 싸우는 미국의 운명은 여전히 계속된다. ‘옛날 옛적 먼 은하계에서’ 제다이 기사단의 영웅적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할리우드 영화는 양날의 칼이다. <스타워즈>는 미국인의 꿈을 실현하는 ‘정의의 광선검’이기도 하지만, 대중의 희망을 전쟁과 파시즘의 욕망으로 이끄는 ‘어두운 포스’가 되기도 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위트 넘치는 표현처럼, 할리우드 영화는 천진난만한 ‘영웅 흉내 내기’일 뿐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겐 차라리 있는 그대로의 삶을 버티는 편이 더 낫다. 트럼프 시대의 깊은 어둠 속에서 극장 문을 나서는 모든 지구인들에게, ‘포스가 그대와 함께하기를!’

 

<정헌 중부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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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전 세계에 강력한 팬덤을 만들어낸 <스타워즈> 오리지널 3부작(1977~1983)은 대단히 봉건적인 영화였다. 고아 소년 루크 스카이워커는 은하계 외딴 행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악한 황제가 평화로운 공화국을 무너뜨리며 은하계가 요동친다. 제국군의 손에 큰아버지, 큰어머니를 잃은 루크는 은둔한 제다이 기사 오비완 케노비에게 수련을 받으며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자신이 강력한 ‘포스’의 소유자임을 깨닫는다.

 

‘포스’는 스타워즈 시리즈를 지배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흔한 인사말이 “포스가 당신과 함께하기를”(May the Force be with you)이다. 포스는 동양의 기(氣) 개념과 유사하다. 포스를 사용하면 지적, 물리적 능력을 모두 증진시킬 수 있으며, 때로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초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움직이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포스를 가진 것은 아니다. 포스는 수련에 의해 증폭되지만, 애초에 포스가 강한 사람은 따로 있다. 루크 스카이워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루크는 어쩌다 그리 강력한 포스를 갖게 됐을까.

 

오리지널 <스타워즈>는 이를 ‘혈통’으로 설명한다. 루크의 아버지는 대중영화가 낳은 가장 매력적인 악당, 다스베이더이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요다, 오비완 케노비, 레아 공주, 한 솔로 등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오리지널 <스타워즈>는 결국 강력한 포스를 가진 다스베이더와 루크 부자의 대결을 중심에 둔다. 레아 공주 역시 다스베이더의 딸이긴 하지만 어쩐 일인지 포스와 인연이 없다는 점에서, 오리지널 <스타워즈> 시리즈는 남성 영웅의 서사이기도 하다.

 

2015년 개봉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는 오리지널 <스타워즈> 다음 세대의 이야기다. 오리지널에서 루크가 있던 자리에는 집도 절도 없는 여성 레이가 자리한다. 레이는 추락한 우주선 부품을 고철로 팔아 먹고산다.

 

하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레이에게 엄청난 포스가 잠재해 있음이 드러난다.

루크의 제자였던 악당 카일로 렌은 수년간 포스를 수련했으나, 평생 광선검 한번 잡아보지 못한 레이의 포스를 쉽게 당해내지 못한다.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루크가 다스베이더의 아들이라고 밝혀졌던 것처럼, 팬들은 레이 역시 고귀한 혈통이며 영웅의 운명을 타고났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영화<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포스터.

 

개봉 중인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레이의 부모는 제다이도, 귀족도 아니었다. 레이 부모는 레이를 술값 몇 푼에 팔아버린 주정뱅이였으며, 지금은 죽어서 걸인 묘지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레이 역시 이를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애써 부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레이는 강력한 포스를 물려받은 고귀한 혈통이기는커녕 그저 ‘흙수저’일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레이가 지닌 강력한 포스는 어찌된 일인가. <라스트 제다이> 초반부, 레이는 은둔한 루크를 찾아가 속세로 나와 힘을 보태달라고 청한다. 도가의 신선들이 그러하듯, 루크도 처음에는 레이의 요청을 거부하다가 결국 레이에게 몇 가지 가르침을 전한다. 그중 하나가 포스의 성질에 대한 것이다. “포스는 제다이가 갖는 힘이 아니라 만물에 존재하는 힘으로 만물을 연결한다.”

 

포스는 특정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깨달음. 포스는 돌을 들어올리거나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세상에 내재하는 에너지 자체라는 믿음.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고귀한 혈통을 가진 영웅에게 내재했던 포스는 2017년에 이르러 누구나 갈고 닦을 수 있는 덕성에 가까워졌다. 영화의 종반부, 저항군이 대부분 궤멸하고 극소수의 생존자만이 남았다. 이 적은 사람들로 강력한 다수의 악당들을 물리칠 방법은 없어 보인다. 영화는 제다이, 장군, 베테랑 군인이 아니라 생각지 못한 곳에서 희망을 찾는다. 예닐곱 살 됐을 법한 소년이 청소를 하기 위해 빗자루에 다가선다. 소년이 손을 뻗자 마치 자석이라도 달린 듯 빗자루가 손으로 딸려온다. 포스는 마구간지기 소년에게도 있었다.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난 자, 돈 많은 자, 권력 있는 자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가진다는 믿음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스타워즈의 세계관은 40년 만에 경천동지하게 바뀌었다. 오만한 권력자가 무너지고 선량한 무명의 시민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민주주의 서사는 전 세계를 상대로 펼쳐지는 할리우드 최대의 이벤트 영화에도 틈입했다. 민주주의 서사가 그만큼 낭만적이고 매력적이라는 방증이다.

 

다가오는 연말, 우리 모두에게 포스가 있었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포스를 믿되, 함부로 휘두르진 않았으면 좋겠다.

 

<백승찬 토요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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