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블라블라/전인권의 내 인생'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02.14 ④ 재채기
  2. 2019.01.31 ③ 사랑한 후에
  3. 2019.01.17 1985 ‘행진’은 그렇게 쓰여졌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내내 성적이 30등 이하였다. 성적이 30등 이상인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친구들은 나와는 다른 아이들. 얼굴이 왠지 하얗고 도시락 반찬도 달랐다. 도시락에 반찬통도 따로 있고, 같은 계란말이도 왠지 하얘 보였다. 그 아이들은 우리가 노는 곳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우리와 서로 따로 놀았다. 그냥 우리와 서로 다른 애들. 가끔 “야, 걔가 또 일등했대”로 시작하는 야유 정도. 나는 그런 속에서 간혹 우울감을 느꼈다. 


5학년 때 내 짝이던 여자애는 이뻤다. 공부를 잘했고 역시 나와 모든 게 달랐다. 나는 그림을 잘 그렸지만 그 애와 가까워질 수 없었다. 외로웠다. 공부 잘하고 집도 부자인 아이들과 공부 못하고 가난했던 우리는 이 다음에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다른 공간에 서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씩씩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초등학생 때부터 30등 이하였던 친구들 중 상당수는 육체노동자가 되어 먹고산다. 그중 한 선배는 열심히 일해서 서울 종로에 김치찌개집을 냈고, 돈을 벌어 작은 빌딩까지 샀다.


‘재채기’ 악보.


나는 주로 혼자 놀거나 나의 작은형님과 함께 산에 다녔다. 산속 깨끗한 개천의 구석 즈음에 다다르면 물속의 돌들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 순간 크고 작은 거무튀튀한 가재 여러 마리가 마구 달아나는데 정말 신기했다. 


나는 북악산의 열매나무 있는 곳을 진짜로 모두 안다. 주로 많은 게 버찌(벚나무 열매). 우리는 버찌나 아카시아꽃을 따 먹었다. 11월이 되면 서리가 내리는 속에 ‘파페’라는 열매가 나온다. 잎사귀는 없고 앵두보다는 조금 작고 통통하고 빨갛게 익는데 맛이 일품이다. 날이 저물어서까지 혹시 뭔가 먹을 게 있을까 찾아헤매던 내가 우연히 발견한 나무가 파페나무다. 그 열매를 딸 때는 추워서 손도 곱는다. 나무는 크지 않은 게 주로 많지만 열매는 다닥다닥 기분좋게 풍성하다. 그렇게 열매를 따 먹으러 산을 오르내릴 때는 산의 모양새를 관찰했다. 여기는 밟아도 안 넘어질 것 같고 저기는 ‘부웅~’ 하고 뛰어넘어도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감잡기가 어려웠지만 계속 시도하면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지혜가 생겼다. 내 삶의 지혜는 어릴 때 내 집 바로 뒤 북악산에서 놀며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 것 같다.



나는 내 노래 ‘재채기’ 중 ‘옛날이여 지금 어디 살기 바빠~’ 부분이 슬프다. 그래서 노래 스타일에 약간 기분을 가미했다. 문학·미술·음악의 서론의 느낌들은 우리나 서방이나 같다고 생각한다. 미국 LA에 멜로즈라는 거리가 있는데 인도나 다른 나라의 골동품도 사고판다. 여기는 말의 스타일로 친구들 ‘끼리끼리’가 형성되는데, 전혀 편파적이지 않고 선진국다운 면이 있다. 말의 느낌이 통하면 친구가 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돈이나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며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많다. 못된 범죄행위나 다름없다. 


‘재채기’의 마지막 가사는 ‘어제의 다툼은 깊은 곳의 내 마음 아니지. 너와 내가 만들어낸 유령이 분명한데’이다. 이 노래 역시 만든 사람과 돈 버는 사람이 다르다.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음악이 발전하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로 큰 힘이 된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범죄자로 폄하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세계를 한손에 쥔 거인이시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5가지 이유를 보면 얼마나 범상치 않은 분인지 알 수 있다.


요즘 이상한 거짓뉴스들이 쏟아지고 있다. 유령이 분명하다.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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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클래식 기타로 만들어진 성가곡인 이 노래를 나름 대중화시킨 앨 스튜어트는 1970년대 중반쯤 ‘Year of the cat’이라는 노래로 유명해진 포크록(folk rock) 가수다. 포크록은 대중들이 어떤 시대의 불만이나 아픔들을 흥얼대며 노래하는 것으로 입소문으로 번지게 될 때 큰 힘이 된다. 록 음악의 정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백구’ ‘작은 연못’ ‘친구’ 등 천재 김민기의 모든 노래가 포크 음악이다.

 

‘사랑한 후에’ 악보.

 

김광희의 ‘세노야’ 같은 곡들은 1970년대 초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우리 국민들에게 ‘민초끼리’라는 힘을 갖게 했다(서방, 특히 미국은 ‘House of the rising Sun’ 같은 곡이 원래 흑인들이 자주 불렀지만 백인들, 가령 밥 딜런 등이 불러 크게 알려졌다. 그후 애니멀스가 록 블루스로 노래해 세계적인 명곡이 됐다. 이 노래를 밥 딜런이나 애니멀스가 만든 곡으로 아는 사람이 꽤 있지만 그렇지 않다. 원래 포크뮤직이다.

 

우리나라의 포크 음악들은 포크의 정신이라고 할 ‘풍자성’으로 볼 때 그 수준이 서구의 그것과 비교해도 훨씬 높다고 자부할 수 있다. 기막힌 ‘정선아리랑’ 등도 포크 음악이다. 지금 불러도 대중음악으로서 손색이 없다. 세계가 모를 뿐이다. 만약 세계인들이 우리나라 포크 음악의 풍자 수준을 안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 확신한다.

 

나는 어느 날 내 삶에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죽음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꼈다.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현실과의 타협을 싫어하는 한학자의 아내였다. 아버지는 평생 공부하며 잘 쓴 서예, 잘 그린 그림을 병풍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셨다.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서예·문학 등의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판단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께서 판단한 것에 대해선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해 궁금했다. 분명히 강한 분임에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드러운 분을 나는 아직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도 포크적 예술가였다. 북청사자놀음의 꼭쇠를 자처하며 즐기셨다. 그러니 생활고는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형님들이 돈을 번 것은 나중의 일이다.

 

어릴 때 나와 나의 작은형님은 공부하는 것보다 어머니와 놀고 싶었다. 어머니와 같이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 보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했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해 매일 새벽 6시경이면 남대문시장으로 장사를 나가셨다. 그때는 자정이면 사이렌 소리가 들렸는데 어머니는 매일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에야 돌아오셨다. 그래서 나와 작은형님은 우리 친척 중에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아주머니 손에 의해 키워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의 힘이 필요했다.

“에구 요것들아. 너희는 내가 없으면 고생문이 훤하다.”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그 말씀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함경도 사람들은 “사랑한다”라는 말을 잘 안 한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셋째주 일요일에 딱 한 번 쉬셨다. 그러나 그것도 두세 달 만에 한 번이었다. 약속은 깨지기 일쑤. 집에 돈이 없었다. 구청은 툭하면 무허가로 지어진 우리집 지붕을 헐어버렸다. 나와 작은형님은 엄마 빽밖에 없었다. 지붕이 헐린 것을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 확인한 어머니는 우셨다. 우리도 따라 울었다.

 

우리 삼형제 중 나를 어머니는 유독 이뻐하셨다.

“학교 다녀오는 길에 시장으로 와라. 냉면 사줄게.”

어머니도 우리가 보고 싶으신 거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원래 그러면 안되지만 병원에서 ‘야매로’ 집으로 모신 어머니 앞에는 하얗게 촛불이 밝혀졌다. 나는 그때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을 목격했다. 갑자기 아버지께서 하얀 방의 어머니 시신 앞에 털썩 주저앉아 “내가 미안하다. 잘 가거라. 내가 잘못했다”며 커다란 소리로 엉엉 우시는 거였다. 나도 울었다. 작은형님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늘 들어오시던 뒷문 앞에서 울었다. 동시에 큰형님은 갑자기 “어머니!” 하고 밖에서 어머니를 목놓아 부르셨다.

 

나는 그후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졌다.

이 노래의 사연은 ‘사랑한 후에’ 가사 안에 모두 있다. 그로부터 1~2년 후, 들국화는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긴 하루 지나고~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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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1985년. 


이제 곧 들국화의 첫번째 앨범이 나온다. 



뭔가가 부족했다. 감동도 강해야겠지만 느끼면서 멋이 있고 ‘함께’라는 자신감의 노래가 필요했다.


자신이란 무엇인지. 지난날 그때의 통제들. 그래서 생긴 낭만보다 가사로 쓰여지기 힘들고 해적판이었지만 손에 쥐고 꿈꾸는 미래. 


나는 무엇이 중요한지 그건 알았다.


왜 어두웠는지. 우리가 알았던 걸 확인해야 한다(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읽으며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불을 지펴 몸을 녹이면서 내는 “나요!”라는 작은 소리조차 위험했다. 


우리는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풀이는 김민기 음악에 대한 무례함. 나는 지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지러운 침묵. 나의 과거는 내 방에서 언제나 자신이 있고 없었다. 미칠듯이 모아둔 LP판을 들으며 좋은 부분을 흉내내고 그 LP판에 괜히 동그라미를 긋기도 했다. 내가 이 노래를 안다고 3번곡에 동그라미를 치는 신나는 기분. 그러나 그건 어쩌면 나에 대한 한심함(기타로 만들지 못하는 실력). 


삼청공원은 공부가 싫어 그저 피하고 피하던 나의 어두운 쉼터. 여자문제도 사실 이어갈 수 없는 돈의 문제.


그것뿐이 아니다. 나는 어렸다. 자유는 말뿐이었다. 알아야 상상도 할 테지만 설레였던 나는 너에게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침묵. 참 어두운 과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그림 그리기 그러나 또 한번 넘을 벽에 나는 적응하기 전 자신이 없다는.


그러나 내 할 일이 생긴 듯 밖에 나가고 형님과 친구들이 신나 보이던 과거. 그렇게 30대가 된 거다. 신나 보이는 거 허상일 지라도 신은 났었다.


그러나 그렇게 모여진 빚은…. 반성도 깊이 했다. 


어느날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나를 달라지게 했다. 잊을 수 없는 거울 속 내 모습. 엄청 놀랐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던 허약하고 바보같은 내 모습이 거울 속에 들어 있었다. 설마 또 다른 내 모습이 어딘가에 있겠지…. 그런 나를 가려주고 부정해주는 옆모습. 거울에 비친 내가 하나라면 나는 엉터리, 그 자체였다. 혼이 빠져나가 주저앉고 싶은. 


간절하면 열린다. 내가 지나 온 날들. 어릴 적 놀던 산과 나의 과거들이 천천히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때부터 내 인생은 방황을 자신있게 했다. 이유있는 안간힘. 다른 방법이 없다. 어릴 때 산을 뛰던, 넘어지지 않으려고 바위를 훌쩍 넘어 안착하던  내가 보였다. 그리고 또 거울로 나를 본 어느날 내곁 앞뒤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보였다 


나는 우리 같이 행진하자고 했다. 나는 우리가 되고 그런 스타일의 가수가 되어갔다. 


하는 거야. 하는 거야. 나는 노래할 거다! 크게!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행진!


<전인권 |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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