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로 알려진 ‘마이 웨이’는 샹송이 원곡이었다. 1967년 가수 클로드 프랑수아가 질 티보와 함께 작사하고, 자크 루보와 함께 작곡한 ‘콤 다비튀드(Comme d’Habitude)’는 의역하자면 ‘늘 그랬듯이’다. 원곡은 우리가 알고 있는 노랫말과는 사뭇 다르다.


“눈을 떠서 너를 흔들어 보지만 잠에서 깨어나지 않네. 늘 그랬듯이/ 나는 네가 추울까 봐 이불을 덮어주지. 늘 그랬듯이/ 내 손은 나도 모르게 네 머리칼을 쓰다듬지. 늘 그랬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지만 마치 옆에 둔 것처럼 하루를 시작하는 남자의 얘기를 시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안타까운 사랑 얘기가 부드러운 프랑스어와 어우러진 노래다.


1969년 27세의 싱어송라이터 폴 앵카는 프랭크 시내트라를 염두에 두고 영어로 개사해 헌사했고,원곡보다 유명해졌다. 그러나 고독한 사랑노래는 확신에 찬 인생노래로 변질됐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왔고, 이뤄야 할 것들을 다 이뤘노라고 노래한다. 또 모든 것에 정면으로 맞서왔고, 부끄러운 짓은 안 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노랫말 때문에 이 노래는 한때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중장년 신사들의 18번이었다. ‘자존감의 끝판왕’쯤 되는 노래지만 젊은층들에게는 ‘꼰대들의 애창곡’으로 비치기도 했다.


‘클로클로’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클로드 프랑수아는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이 노래는 프랑스인들이 사랑하는 샹송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1978년 3월 파리의 자택에서 전구를 바꿔 끼우려다 감전당해 3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정작 클로클로는 프랭크 시내트라와 만났지만 ‘마이 웨이’를 쓴 원곡자라고 밝히지 못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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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듣다가 가슴 한쪽이 무너져내린 경험이야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들을 때마다 번번이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노래가 있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세상도 끝나고/ 날 위해 빛나던 모든 것도 그 빛을 잃어버려.’


<1991>이라는 제목의 앨범 수록곡으로 불혹을 눈앞에 둔 양희은이 쓰고, 26살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이병우가 만들었다. 양희은이 단 하룻밤 만에 완성했다는 노랫말과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없는 이병우의 기타 선율이 어우러져 뜨겁고도 처연한 사랑과 절망의 노래를 조율해냈다.


1987년 결혼한 후 뉴욕으로 갔던 양희은이 ‘아침이슬’ 20주년을 기념해 준비한 앨범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유학 중인 이병우를 뉴욕으로 불러서 노래를 만들어 연습하고 딱 하루 만에 앨범 전 곡을 녹음했다, 그러나 정작 처음에는 장사 안되는 음악이라면서 제작자들이 외면했다. 이 노래가 유명해진 건 몇 년이 지난 뒤 드라마에 삽입되면서부터였다. 


불혹의 양희은은 이 앨범에서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목소리를 선보인다. ‘아침이슬’과 ‘한계령’을 거쳐 이 노래로 보컬리스트로서 정점을 찍은 느낌이다. 슬픔을 꾹꾹 눌러 담는 듯한 창법으로 그 안에 뜨겁고도 처연한 사랑을 펼쳐 보인다. 양희은과 이병우는 사랑에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고, 그네들의 슬픔을 거둬가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요즘같이 쓸쓸한 겨울 저녁이면 이 노래의 울림이 다른 계절보다 더 크다. 조수미, 이은미, 나윤선 등 굵직한 보컬리스트들이 리메이크했지만 그 백미는 최백호가 아닐까.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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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트로트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젊은층도 그 열기에 합류했다. ‘아모르 파티’의 김연자,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송가인, 트로트 가수로 거듭난 유산슬(유재석)에 이르기까지 그 인기가 그칠 줄 모른다. 대중음악계에서 트로트는 어떤 장르보다도 뿌리가 깊다. ‘뽕짝’으로 불리며 천대받으면서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는다.


트로트 가수들 사이에서 “노래 한 곡 히트시키려면 적어도 3년은 홍보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댄스나 발라드 장르에 비해 트로트가 그만큼 히트곡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1993년 봄, 한 음반사 사무실에서 작곡가 유영건과 대중음악 담당기자가 마주앉았다. 유씨는 출반된 지 3년이 지난 CD 한 장을 꺼내서 기자에게 내밀었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세월의 강 넘어 우리 사랑은/ 눈물 속에 흔들리는데….”


유씨의 애틋한 사랑얘기를 담은 이 노래를 들어본 기자는 그 사연을 기사로 썼다. 실연의 아픔을 솔직하게 쓴 가사와 기교를 부리지 않은 멜로디, 김수희의 흐느끼는 듯한 창법이 어우러진 노래였다. 기사를 접한 팬들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신청엽서를 보내면서 이 노래는 대중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신승훈, 김건모, 서태지가 독주하던 1993년 가요계에서 ‘애모’는 방송 횟수 1위를 기록했으며, 김수희는 당시 갤럽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에 올랐다. 또 KBS 가요대상,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거의 모든 대중음악상을 휩쓸었다. 본인도 거의 잊고 있던 노래가 히트하면서 김수희는 ‘멍에’ 이후 10년 만에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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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 놀리면서/ 밖에 보내네.’


1969년 남산 드라마센터에 갓 스물한 살의 히피청년이 무대에 섰다. 전주도 없이 느닷없이 토해내는 노래에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대중잡지에서는 ‘한국 땅에 첫 히피 상륙’이라고 썼다. 훗날 송창식은 그 무대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작곡을 시작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뉴욕에서 막 귀국한 한대수는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등 파격적인 노래들을 선보였다. 뉴욕사진학교에 다니면서 틈만 나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가서 잭슨 폴락의 추상화를 감상하던 청년이 외롭고 답답할 때마다 쓴 노래들이었다. 


그는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할아버지 한영교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 신학대학장까지 지낸 엘리트였다. 그의 부친 한창석은 서울공대 재학 중 미국 코넬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핵물리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한대수가 7살 때 아버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재가했고, 그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초등학교는 뉴욕에서, 중·고등학교는 한국에서 다니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한대수가 17세가 되던 해, FBI가 아버지를 찾아냈다. 아버지는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하워드 한’이라는 이름으로 백인 여자와 결혼해 살고 있었다. 다시 미국에 간 한대수는 뉴햄프셔대학교 수의학과를 거쳐 뉴욕사진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노래들은 태평양을 오가며 사춘기를 보내야 했던 청년의 내면 풍경이다. 첫 음반 <멀고 먼 길>(1974년)과 2집 <고무신>(1975년)으로 한국 포크음악사의 역사를 썼지만 군부정권이 금지곡으로 낙인찍어 그를 다시 미국으로 내몰았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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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상 시상식이 눈앞이다. 당대 최고의 가수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누가 될까? 많은 이들이 브루노 마스를 꼽지 않을까? 올해는 주춤하지만 그는 이미 새로운 ‘팝의 황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2010년 발표된 그의 데뷔앨범 수록곡 ‘저스트 더 웨이 유 아(Just The Way You Are)’는 단숨에 전 세계를 평정했다. 귀에 쏙쏙 꽂히는 리듬과 멜로디, 마이클 잭슨을 연상케 하는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그는 황제로서 손색이 없었다.     


1985년 하와이 호놀룰루 출생. 아버지는 퍼커션 연주자였고, 어머니는 훌라댄서였다. 그를 3살 때부터 무대에 세운 삼촌은 엘비스 프레슬리 이미테이션 가수였다. 그는 무대 경험뿐 아니라 일찌감치 지미 헨드릭스에 매료되어 기타도 마스터했다. 그는 어린 시절 레슬링 선수 브루노 사마티노를 닮아 붙여진 별명 ‘브루노’에 여자애들에게 화성에서 온 사람 같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마스(Mars)’를 붙여 예명을 완성했다. 가수로서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캘리포니아로 진출했지만 처음부터 순탄한 건 아니었다. 처음 그는 래퍼 비오비(B.O.B)의 ‘나싱 온 유(Nothin’ on You)’를 작곡,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이 노래는 빌보드 1위,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싱글로 기록되면서 브루노 마스의 주가를 높였다. 그는 데뷔 이전부터 싱어송라이터이자 최고의 보컬로 인정받은 것이다. 


단 3장의 정규앨범으로 그는 전 세계 대중음악 시상식에서 무려 128개의 트로피를 품에 안았으며 제임스 브라운, 마이클 잭슨, 프린스로 이어지는 계보에 이름을 올렸다. 또 아델과 함께 지난 10년간 팝 음악계를 양분해 왔다. 어쨌든 한국의 가수 BTS가 이들 가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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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흘러 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이 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어제 다시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 둘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 밤이 새면은 첫차를 타고/ 행복 어린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됐을 때의 가사는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 둘은 하나가 되었답니다”였다. 그러나 공연윤리위원회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 1979년, 한국 경제가 수직상승하면서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 남단인 신사동이 유흥가로 발돋움했다.       


길옥윤은 그 현상을 포착하여 노랫말로 만들었다. 그 이후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이나 문희옥의 ‘사랑의 거리’ 등 신사동을 배경으로 하는 노래들이 줄을 이었다. 


혜은이에게도 중요한 노래지만 시대상을 반영한 대중가요로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곡이다. 우스갯소리로 한강다리와 관련된 노래로 ‘제3한강교’를 떠올리면 기성세대이고,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떠올리면 신세대라고 했다.


패티김과 이별한 길옥윤은 미모와 가창력을 겸비한 혜은이에게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 결과 데뷔곡 ‘당신은 모르실거야’를 비롯하여 ‘감수광’ ‘새벽비’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그를 ‘국민 여동생’ 반열에 올려놓았다. 요즘 혜은이가 1982년 부른 ‘천국은 나의 것’(이범희 곡)이 홍대 앞 클럽에서 밀레니얼 세대가 좋아하는 시티팝으로 떠오르면서 선우정아가 다시 불렀다. ‘디스코의 시대’, 네온사인이 반짝이던 신사동을 호명하는 노래지만 지금 들어도 낡은 느낌이 없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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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의 원곡보다 마틴 허켄스의 유튜브 동영상으로 더 유명한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은 사랑과 위로를 담고 있는 노래다. 힘들고 지쳤을 때 당신이 나를 일으켜줬고, 덕분에 거친 바다도 헤엄칠 수 있었다는 노랫말이 새해와 잘 어울린다.


시크릿 가든의 2002년 앨범에 객원가수 브라이언 케네디가 불러 수록됐다. 롤프 뢰블란이 편곡을 하고, 소설가 브랜던 그레이엄이 가사를 썼는데 원곡은 북아일랜드의 런던데리에서 1850년대부터 구전되던 민요였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나간 자식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민요 채집자인 제인 로스가 채록, 민요 권위자였던 조지 패트리 박사에게 보냈다. 여기에 작곡가이자 시인, 변호사였던 웨덜리가 노랫말을 붙여 ‘대니 보이’라는 곡으로 탄생했다. 국내에도 1950년대 ‘아, 목동아’로 번안되어 여러 가수가 불렀다. 무려 170년 전 노래인 셈이다.


이 노래는 9·11 테러 당시 추모곡으로 불리면서 이후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다. 팝페라 가수 조시 그로반과 웨스트 라이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버전이 있다. 


최근 들어 유튜브의 인기를 타고 이 노래의 주인(?)이 된 이가 있다. 2010년 크리스마스이브, 네덜란드 소도시 한복판인 마스트리흐트 광장. 한 초로의 남자가 노래를 시작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스물세 살 때부터 32년간 제빵사 생활을 하다가 해고 통보를 받은 마틴 허켄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있던 순간에 둘째딸이 아빠 몰래 지원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우승을 했다. 마스트리흐트의 작은 지역 방송국 L1은 그가 ‘유 레이즈 미 업’을 부르는 장면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이 동영상은 현재까지 2825만회가 조회되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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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전파상이나 음반매장이 동네 골목에도 있었다. 이런 계절이면 그곳에서 울려퍼지는 크리스마스캐럴을 들으면서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곧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날씨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던 노래도 있었다. 살바토레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통브 라 네즈: Tombe La Neige)가 그것이다. 아재개그로 말하면 아내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다. 그 발음이 ‘돈 벌어 나줘’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샹송곡으로 손꼽히는 노래로 김추자, 이숙, 이선희 등 여가수들이 번안하여 불렀다. 


아다모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출신으로 벨기에에서 광부의 아들로 자랐다. 빅토르 위고, 자크 프레베르를 좋아하던 그는 14세 때 직접 만든 노래로 지역 노래자랑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는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와 5개 국어를 구사하는 언어감각으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눈이 내리네’는 아다모가 스무살 때인 1963년에 발표한 곡이다. 눈 내리는 겨울밤,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한국인들에게 이 노래가 유독 사랑받은 이유는 마치 ‘뽕짝 발라드’에 가까운 멜로디 때문이다. 그 인기로 아다모는 모두 3차례 내한공연(1978년, 84년, 94년)을 펼친다. 1978년 공연 때는 이 노래를 정확한 우리말로 불러서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내한공연을 주관했던 동양방송(TBC)은 1980년 11월, 신군부에 의해 문을 닫을 때 고별방송을 통해 이 노래를 내보냈다. 시청자들에게는 강제로 문을 닫아야 했던 방송사의 심경을 대변하는 노래로 들렸을 것이다. 아다모가 부른 ‘여름의 왈츠’(Valse D’ete), ‘밤’(La nuit), ‘상 투아 마 미’(Sans toi Ma Mie) 등도 올드팬들에게 친숙한 노래다.


그는 협심증으로 심장시술을 받았지만 유니세프 홍보대사를 맡아 베트남, 레바논, 보스니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자선공연을 펼치며 말년의 삶을 보내고 있다. 그가 조국으로 여기는 벨기에에서 작위도 받았다. 유독 눈이 오지 않는 이 계절에 눈도, 노래도 그립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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