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스럽지도 않은데 중독성이 강한 노래가 있다. 한 번 들으면 좀처럼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이럽션의 ‘원웨이 티켓(Oneway ticket)’이 그런 노래다. 1970년대 말 이 노래가 히트하던 시절에는 소위 고고장으로 불렀던 디스코텍이 대세였다. 그곳을 지배하던 음악은 단연 디스코였다.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에서 존 트래볼타가 나팔바지를 입고 하늘을 찔러대던 그 춤과 노래 말이다. 디스코텍의 단골 레퍼토리였던 ‘원웨이 티켓’은 공부밖에 모르던 샌님을 빼고는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었다.

 

원래 이 곡은 닐 세다카가 처음 불렀다. 잭 켈러와 행크 헌터가 쓴 원곡은 닐 세다카의 1959년 싱글 ‘오 캐럴’에 수록돼 있다. 이럽션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정서적이고 감미롭다.

 

‘Choo choo train Chuggin’ down the track/ Gotta travel on Never comin’ back/ Got a one way ticket to the blues.’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뒤 편도 티켓으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슬픔을 노래했다. 이별노래에 맞춰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면서 하늘을 찔러대던 디스코텍의 청춘들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럽션은 1974년 ‘사일런트 이럽션’(Silent Eruption)이란 이름으로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남성 5인조였다. 한 명이 탈퇴한 뒤에 자메이카 출신의 여성보컬 프레셔스 윌슨을 영입하고 ‘이럽션(폭발)’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노래를 발표했다. 그룹 이름처럼 유럽과 미국을 강타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국내 인기를 등에 업고 1980년 코미디언 출신 가수 방미가 ‘날 보러와요’로 리메이크하여 부르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모두 철거됐지만 DMZ의 대북확성기에서 한때 가장 많이 나왔던 노래가 ‘날 보러와요’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본인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송대관의 ‘차표 한 장’ 역시 이 노래의 영향 아래 있다.

 

그런데 마치 이 노래가 편도 티켓밖에 허용되지 않는 우리네 인생 얘기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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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힙합은 더 이상 생소한 장르가 아니다. 힙합을 하는 래퍼들이 겨루는 TV 쇼프로그램은 이미 일상이 됐다. 쿨리오의 ‘갱스터스 파라다이스’는 힙합의 클래식 반열에 오른 노래다.

 

 

이 노래가 발표된 건 1995년이다. 당시 신인 래퍼 쿨리오는 영화 <위험한 아이들>의 OST의 삽입곡을 의뢰 받았다. 미셸 파이퍼 주연의 이 영화는 흑인빈민가의 한 고등학교에 부임한 여선생이 엉망진창인 학교를 참 교육현장으로 만들어 간다는 내용이다. 원래 1960년대 흥행했던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원제:투서, 위드 러브)>(시드니 포이티어 주연)을 리메이크한 1990년대 버전 영화였다.

 

캘리포니아의 흑인빈민가 콤튼 출신인 쿨리오는 약물과 범죄로 얼룩진 이곳에서 갱스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흑인 소년들의 절망을 노래에 담았다. 역시 흑인폭동 때 총격에서 살아남은 동료가수 LV와 함께였다. 쿨리오는 “빈민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꿈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위한 우울한 송가”라고 밝힌 바 있다.

 

쿨리오가 랩을, LV가 코러스를 맡아서 녹음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코러스 부분은 스티비 원더의 노래 ‘패스트타임 파라다이스’를 샘플링했는데 그가 욕설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사용을 불허했다. 결국 쿨리오는 욕설을 뺀 새로운 가사로 스티비 원더의 허락을 받아냈다.

 

결과적으로 이 노래는 영화보다도 크게 히트했다. 쿨리오와 LV는 1995년 빌보드뮤직어워드에서 대선배인 스티비 원더와 함께 무대에 섰다. 영화 OST에 앞서 발매된 싱글앨범은 미국과 영국에서만 5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대성공을 거뒀다.

 

‘나는 미친 갱스터, 확실한 범죄자/ 날 화나게 하지 마, 내 부하들이 가만 안 둘 거야/ 죽음은 순간이야/ 죽을 각오로 산다는 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 나는 지금 스물세 살, 스물네 살까지 살 수 있을까.’

 

노래 전체에서 묻어나는 슬픔이 묘한 힘을 갖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파라다이스라는 단어가 주는 역설도 이 노래를 떠받치는 힘이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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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가보고 싶은 콘서트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연실을 꼽겠다. 누구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모를 법도 하다. 1990년대 중반 대중 앞에서 홀연히 사라진 그녀는 여전히 잠행 중이니까.

 

‘멋들어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에서 껄껄껄 웃던/ …/ 오늘도 목로주점 흙 바람 벽엔/ 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 월말이면 월급 타서 로프를 사고/ 연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 그래 그렇게 산에 오르고/ 그래 그렇게 사막엘 가자.’

이연실이 작사·작곡한 ‘목로주점’은 지금 들어도 신선하다. 월급 타는 날 긴 나무 널빤지 탁자가 놓인 주점에서 막걸리 한잔하면서 호기롭게 사막으로 여행하는 꿈을 꾸는 풍경이 떠오른다. 파워 넘치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주는 감흥도 상당하다.

 

전북 군산 출생. 포크 1세대인 그녀는 홍익대 미대 시절 라이브클럽에서 노래하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1971년 가수로 데뷔한다. 좋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기 위해서 대구로 내려가 ‘다방 레지’를 체험하고, 노래하다가 시비 거는 취객과 맞붙어 싸우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는 일화도 있다.

 

데뷔곡 ‘조용한 여자’와 ‘새색시 시집 가네’에 이어 다음해 발표한 ‘찔레꽃’은 이연실의 탁월한 음악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노래다. 특히 ‘찔레꽃’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른 가수들이 많지만 이연실이 그것은 군계일학이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과 어울리면서 포크계의 송라이터로 명성을 날렸던 이연실은 1975년 대마초 사건 때 연루되어 주춤한다.

 

‘목로주점’은 1981년 발표한 재기곡이다. 이제는 LED 조명으로 대체되어 30촉(30W) 백열등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막걸리를 마시다가 취해서 눈앞에서 백열등이 왔다갔다한 경험이 있는 술꾼이라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시간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풍문에 의하면 강원도 어디선가 감자농사를 짓고 있다는 이연실은 왜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물론 그 선택도 이연실의 몫이니 대중 앞으로 나와달라고 강요할 수 없지만 열성팬의 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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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의 전성시대였던 1990년대 댄스음악과 발라드음악을 양분한 히트곡 제조기들이 있었다. 김창환과 김형석. 김건모와 박미경, 클론 등 댄스음악계의 밀리언셀러 제조기가 김창환이었다면 솔리드와 신승훈, 임창정, 박정현, 성시경 등 발라드계에는 김형석이 있었다.


지금은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은 외모로 TV에 나와 ‘허당끼’를 내뿜는 김형석의 당시 별명은 ‘발라드의 시인’. 광주 태생.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와 음악교사였던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그는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친해졌다. 한양대 음대에 진학해서 만난 이가 고 유재하. 그가 그룹 퀸의 ‘Love of my life’를 연주하는 걸 보고 대중음악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래 어쩌면 난 오래전부터/ 우리의 사랑이 늦출 수 없는/ 이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울지마 이 밤의 끝을/ 잡고 있을테니.’ 헤어진 연인을 위한 애절한 송가인 ‘이 밤의 끝을 잡고’는 졸업 후 피아노 세션으로 활동하던 김형석이 처음 프로듀서로 나선 앨범의 타이틀곡. 미국에서 온 3인조(김조한, 정재윤, 이준) R&amp;B그룹 솔리드는 이 노래가 담긴 2집 앨범(1995년 3월)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솔리드는 “김형석이 멜로디와 가사에 한국적인 취향을 가미해서 명품으로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이 앨범의 수록곡 ‘슬럼프’의 후렴구 코러스에 “밤새 밤새 밤새”라는 대목을 넣을 정도로 ‘밤샘 녹음’을 하면서 공을 들였다. ‘이 밤의 끝을 잡고’는 김형석과 정재윤의 공동 작곡으로 별들의 전쟁이 펼쳐지던 음악 순위 프로그램 정상에 오르면서 120만장이 판매됐다.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R&B 장르로 정상에 오른 건 이들이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업타운, 이현우, 박정현, 브라운아이드소울, 바비킴, 박효신 등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앨범의 히트로 김형석은 1990년대 톱가수들의 단골 프로듀서로 등극했다. 박진영, 김원준, 엄정화, 김정민, 임창정, 유승준, 박정현, 베이비복스, 보아, 성시경 등을 밀리언셀러 가수 반열에 올렸으니 가히 ‘천만 작곡가’라 할 만하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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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의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겨울에 한번쯤 이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성긴 눈발이 날리는 겨울 어느 날 찻집에 앉아 커피 한잔의 정취를 즐기다 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노래다. 조용필의 대표곡 중 하나이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애창곡으로, 지난해 조용필과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이 함께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미 명반이 된 8집 앨범 수록곡으로 김희갑·양인자 콤비의 작품이다. 이 앨범 수록곡인 ‘킬리만자로의 표범’ ‘바람이 전하는 말’ ‘허공’에 밀려서 처음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뒤늦게 역주행하면서 유명해졌다. 양인자는 대학을 졸업한 뒤 작가 김수현과 월간 ‘여학생’ 기자로 일하던 시절에 신춘문예에 낙방한 뒤 함께 쥐약을 샀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문학도였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미리 써둔 당선소감 메모였고, ‘그 겨울의 찻집’은 습작 메모였다. 지금은 없어진 경복궁 내 찻집에서 썼다. 양인자 극본의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으로 쓰이면서 주인공이었던 왕영은이 먼저 불렀다. 조용필은 이 노래를 처음 받았을 때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고. 시적인 가사와 세련된 멜로디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겐 별로 없는 겨울 노래라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오히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긴 가사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그 겨울의 찻집’은 대중적이면서도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 때문에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당시 김희갑은 이혼, 양인자는 사별로 ‘싱글’이었다. 작업 때문에 이들을 자주 만났던 조용필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작정하고 두 사람이 함께할 시간을 만들어 주면서 결혼을 부추겼다. 덕분에 두 사람은 1987년 결혼식을 올린 뒤 아직까지 백년해로하고 있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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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널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이 거리를 떠나고 싶지도 않아/ 어쨌든 이 도시는/ 절대로 밤에 잠드는 법이 없잖아(I don’t ever want to let you down/ I don’t ever want to leave this town/ Cause after all/ This city never sleeps at night).’

 

가사를 들으면서 서울을 생각했다. 서울이야말로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절대 잠들지 않는 도시가 이닐까. 그런데 ‘잇츠 타임(It’s Time)’을 작사, 작곡한 댄 레이놀즈는 미국 서부의 도박 도시 라스베이거스 출신이다. 밤이 되면 더 휘황찬란해지는 카지노의 천국을 두고 ‘절대 잠드는 법이 없는 도시’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노래는 젊은이들에게 과감하게 꿈을 향해 나아가라고 외친다. 그리고 꿈을 성취하더라도 초심을 잃지 말고 검소하게 살라고 충고한다. 어찌 보면 건전가요 같은 느낌이다. 레이놀즈는 10대 후반에 2년 동안 학업을 접고 선교활동을 할 정도로 독실한 모르몬교도였다. 이 때문에 그가 만든 노랫말에 종교적인 표현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관심보다 앞서는 것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명문 네바다 라스베이거스대학(UNLV)에 입학한 직후부터 음악에 몰입했다. 결국 그는 대학을 포기하고 모르몬교도들이 많이 사는 유타주에 정착, 기타리스트 웨인 서몬과 함께 밴드 이매진 드래곤스를 결성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명들이 그러하듯 늘 음악에 목말라 하는 가난한 밴드일 뿐이었다. 레이놀즈 자신도 우울증과 불안함에 시달렸다. 그때 영감처럼 이 노래가 떠올랐다. 다이내믹한 멜로디에 자신을 비롯해 모든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자는 노랫말을 붙였다. 이매진 드래곤스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에 참여키로 했던 록밴드 ‘트레인’의 불참으로 2만6000명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행운을 꿰찼다. 이 무대를 계기로 인터스코프 레코드사에 픽업, 2012년 첫 메이저 EP 앨범 <Continued Silence>를 내놨다.

 

다시 새해다. 우리에게 새해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희망을 향해 뛸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혹 연초부터 희망을 잃은 청춘이 있다면 이 노래를 권하고 싶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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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어떤 이는 꿈을 나눠주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을 이루려고 사네/ 어떤 이는 꿈을 잊은 채로 살고/ 어떤 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은 없는 거라 하네.”

 

 

음악을 통해 꿈을 나눠주면서 살다가 안타깝게 세상과 작별한 전태관의 시작은 1986년 데뷔한 봄여름가을겨울의 드러머였다. 보컬인 김현식(작고)을 리더로 유재하(작고), 김종진, 장기호, 전태관(작고)이 멤버였다. 그러나 김현식의 마약사건 이후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 밑에 김종진과 전태관만 남았다. 김종진은 고려대 사학과, 전태관은 서강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성향은 달랐지만 호흡만큼은 최고였다. 김종진은 전태관이 경영학과 출신이라는 이유로 밴드의 온갖 잡무를 맡겨서 너무 미안했다고 토로했다.

 

‘어떤 이의 꿈’을 발표한 건 1989년 2집 <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을 통해서였다. 두 사람은 조용필처럼 자신의 음악을 하면서 유명해지길 원했다. 그들의 선배 송홍섭은 “너희들이 원하는 음악을 해라. 유명해지는 건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고 충고해줬다. 재킷은 전태관의 친구인 설치미술가 서도호가 맡았다. 이 앨범이 수십만장 팔리면서 스타 반열에 올랐다.

 

김종진은 ‘어떤 이의 꿈’을 두고 여러 생명을 구한 노래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라디오 DJ 시절에 ‘자살하러 가는 길에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를 듣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라는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한 바 있다. 또 직간접적으로 이 노래로 삶의 희망을 갖게 됐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음악에 책임의식을 갖게 됐다. 당시 밴드의 주 수입원인 나이트클럽 출연을 지양하고 대신 공연에 집중했다.

 

1990년대 초에 내놓은 그들의 라이브앨범은 100만장 이상 나가면서 선풍을 일으켰다. 여전히 봄여름가을겨울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밴드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 덕분이다.

 

이제 곧 새해다. 이떤 이들은 새로운 꿈을 꿀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꿈이 어디 있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꿈꾸는 것도 자유다.

 

<오광수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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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이 다시 떠 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외양만 보면 연말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평범한 사랑 노래다. 그러나 ‘사랑으로’를 작사·작곡한 해바라기의 이주호는 사랑 노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주호가 이 노래를 쓴 시기는 1987년 11월이었다. 시대적 배경부터 살펴보자. 그때는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모두가 경제대국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정수라가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라고 노래했던 ‘아 대한민국’(1991)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부동산 투기가 만연하고 증권시장은 활황이었으며 강남 졸부라는 말이 유행했다. 압구정동은 유흥과 환락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주택 200만호 건설로 개발 경기가 타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조명이 있으면 반드시 어둠이 더 깊은 법이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소외받는 이웃이 더 늘어났으며 빈부의 격차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분배에 대한 사회정의도 요구됐지만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늘은 되도록 천막으로 가렸다.

 

어느 날 이주호는 신문 사회면 귀퉁이에 난 기사 한 줄에 눈길이 갔다. 서울 김포공항 근처에 부모도 없이 살아가는 4자매의 이야기였다. 막내는 겨우 3살이었으며 영양실조 등으로 인해서 목숨이 위태롭다는 기사였다. 그러나 적은 보조금으로는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4자매에게 막내를 치료할 돈이 없다는 거였다.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한 그 저녁에 이주호는 4자매를 향한 연민과 사랑을 듬뿍 담아 이 노래를 만들었다. 바람 부는 벌판에 서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자는 사랑과 봉사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송구영신의 길목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내 이웃에 소외된 이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오광수 출판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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