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1995년 ‘패닉’의 이적과 김진표가 데뷔 앨범을 내놨을 때 대중은 단숨에 그들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달팽이)라는 도발적 노랫말은 일찍이 우리 가요계에서 찾기 힘든 감성이었다. ‘왼손잡이’와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등은 훗날 시와 소설, 노래 등 전방위적인 글쓰기로 주목받은 이적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노래였다.


2007년 이적이 3집 <나무로 만든 노래>의 타이틀곡으로 내놓은 ‘다행이다’ 역시 따뜻한 노랫말과 어쿠스틱한 멜로디로 이 풍진 세상을 사는 우리를 위로하는 노래다. 같은 해 정옥희씨와 5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한 이적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치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


애시당초 1분30초 길이의 짧은 소품이었지만 주변에서 타이틀곡으로 적극 추천했다. 이적은 이 노래를 매만져서 3분이 넘는 지금의 곡으로 다시 썼다. 아내를 처음 소개받은 뒤 다른 친구에게 소개팅을 주선했던 이적은 두 번째 만남에서 운명과 같은 사랑을 예감했다. 그래서 “나랑 사귈래요?”라고 고백했고 “예”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술을 마시면 전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적은 “나랑 사귀자고 물었고, 그녀가 예라고 답했다”고 메모를 해놨다. 그 운명같은 사랑의 얘기를 이 노래에 담은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다’는 천천히 반응이 왔다. 다큐멘터리에 삽입되고, 파업 현장에서 불리는가 하면 연인들의 고백송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발표된 지 5개월이 지나서야 인기를 얻게 된 건 단순한 사랑 노래를 뛰어넘어 사람 사이의 체온을 확인할 수 있는 따스함 때문이었다.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하는 건 결국 사랑이 아닐까.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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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가을과 닮았다. 붉은 단풍처럼 타오르다가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진다. 사랑은 모든 잎을 대지에 주고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와도 닮았다. 그런 사랑이 그리운 계절에 딱 어울리는 노래가 있다.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목소리와 애절한 노랫말이 어우러져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뒤흔들려도 당신이 나만 사랑해준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노래한다. 또 검은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라면 그리할 것이고, 도둑질을 하라면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말한다. 당신이 원한다면 조국도 버리고, 친구도 버릴 수 있다고 노래한다. 


142㎝의 작은 키에 연약한 몸 때문에 예명조차 참새(피아프·piaf)라고 지은 그는 삶 자체가 비극이었다. 그가 노랫말을 쓴 ‘사랑의 찬가’는 그 비극의 정점에 있는 노래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맡겨졌다가 14살 때부터 서커스단원인 아버지를 따라 유랑생활을 했던 에디트 피아프는 가끔씩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탁월한 노래 솜씨를 인정받으면서 파리의 클럽에서 스타가 됐다.       


그녀는 뉴욕 공연에 갔다가 만난 세계미들급 챔피언인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는 이미 세 아이를 둔 유부남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르당은 1949년 10월28일 포르투갈 인근의 아조레스 제도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피아프를 만나러 뉴욕으로 가던 길이었다. ‘사랑의 찬가’는 연인을 잃은 아픔을 담은 노래다.  


1951년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에디트 피아프는 고통을 잊기 위해 모르핀과 술에 의지했다. 그 와중에도 노래를 향한 사랑과 열정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나 남편 자크 필스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1963년 10월10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그녀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라 비앙 로즈>(장밋빛 인생)가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 에디트 피아프의 삶이야말로 어떤 영화보다도 더 파란만장했기에 보는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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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라도 내리는 가을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물론 세대 차이가 있겠지만 40대가 넘었다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노래다.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질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다시 떠오르나/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 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이두형 작사, 백태기 작곡의 ‘가을비 우산 속’은 가수 최헌이 1978년에 처음 불렀다. 이후 몇몇 가수들이 리메이크하여 희자매, 조영남과 김도향이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다. 사람 좋고 의리를 생명으로 아는 가수였던 최헌은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였다.


1948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최헌은 명지대 경영학과 재학 중 미8군 무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 1등을 차지한 뒤 록그룹 ‘히식스’(He6)의 보컬리스트로 영입됐다. 당시 기타리스트 김홍탁과 조용남이 이끌던 ‘히식스’는 ‘초원의 빛’ 등이 히트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우리 대중음악사에서 1970년대는 그룹사운드의 전성기였다. 이후 최헌은 1974년 ‘검은 나비’를 결성해 ‘당신은 몰라’를 발표했고, 1976년에는 ‘호랑나비’를 만들어 ‘오동잎’을 히트시켰다. 1977년 그가 솔로로 전향한 것은 시대의 흐름이었다. 록그룹의 보컬들이 잇따라 솔로로 변신하여 록감성을 바탕으로 한 발라드곡을 발표했다. 


최헌은 ‘가을비 우산 속에’로 1978년 MBC 가수왕을 차지하는 등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1979년에 제작된 석래명 감독의 영화 <가을비 우산 속에>도 이 노래의 산물이다. 정윤희와 이미 고인이 된 신성일과 김자옥이 출연했다. 빨간 우비의 정윤희와 노란 우비의 김자옥이 마주 본 포스터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후 그룹사운드의 부활을 꿈꾸면서 그룹 ‘불나비’를 결성해 미국 버티 히긴스의 번안곡 ‘카사블랑카’(1983년)를 발표하여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2012년 9월 식도암으로 투병하다 가을비 속으로 떠났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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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오지 말래도 온다. 그러나 늘 기다려지는 게 가을이다. 그런데 그 가을은 허망하리만치 짧다. 그래서인가. 가을은 아름답지만 외롭고, 슬프고, 허망하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윤도현이 1994년 데뷔앨범에 발표한 이 노래는 싱어송라이터 김현성의 작품이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등 많은 작품으로 사랑받는 그는 파주를 기반으로 한 노래모임 ‘종이연’에서 윤도현을 만났다.


“그 당시 파주 광탄면에 작은 우체국이 있었어요. 그 우체국을 지나다가 ‘가을 우체국 앞에서’라는 제목을 먼저 떠올렸죠. 그 우체국 앞에 은행나무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사가 계속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결국 세 번째 만에 완성한 곡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노랫말이 목표였어요.”


그런데 노래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었다. 윤도현이 부르기로 한 뒤에 바로 김광석의 전화가 왔다. 자신의 새 앨범에 이 노래를 넣고 싶다는 거였다. 김현성은 잠시 고민했다. 신인가수가 부르는 것보다 유명가수가 부르는 게 작품자에겐 더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모임의 막내 윤도현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 김광석도 흔쾌하게 포기했다.


조용필의 노래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누군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서울 서울 서울)에서 보듯이 우체국은 우리에게 소통의 공간이다. 김현성은 그 공간에서 소멸을 보았다. 그의 말처럼 아름다운 건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소멸을 인정해야 홀로 설 수 있지 않을까.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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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 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다 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가객 김광석이 1994년 발표한 4집 수록곡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지금은 유명 시인이 된 류근이 작사한 노래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서른 즈음에’ ‘일어나’와 더불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시집 <상처적 체질>과 <어떻게든 이별>을 내고 방송에도 출연 중인 류근이 이 노랫말을 쓴 건 무명 시인 시절이던 1991년경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집안이 망해서 다니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복학할 등록금이 없었다. 한 후배가 아르바이트 삼아 노랫말을 써보라고 했다. 당장 밥벌이가 급했던 그는 하루 만에 29곡의 가사를 썼다. 가수 윤선애의 앨범에 들어갈 곡이었지만 음반사가 망해서 빛을 보지 못했다.


몇 년 뒤 김광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의 새 앨범에 ‘너무 아픈 사랑은…’을 쓰겠다는 거였다. 녹음실에서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류근은 살짝 실망했다. 군복무 시절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연인을 잊지 못해서 쓴 노랫말이었는데 슬픔이 묻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 듣다보니 역설적 슬픔이 느껴졌고, 무엇보다도 거금 50만원을 받아서 한숨을 돌렸다, 김광석도 죽기 직전까지 무대에서 부를 정도로 이 노래를 아꼈다.


이 노래의 작사가와 작곡가로 인연을 맺은 류근과 김광석은 홍대 근처 김광석의 작업실 등에서 만나 5집 앨범 작업을 같이했다. 그러나 5집 앨범은 끝내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김광석이 자살로 세상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류근과 김광석이 콤비를 이룬 노래가 더 나왔을 것이다. 김광석은 생전에 류근에게 저작권협회에 가입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당장 10만원의 협회비가 없었던 류근은 발표된 지 17년 뒤에야 저작권 등록을 했다. 그는 매달 술값 이상의 저작권료가 나와서 감사하고 있지만 먼저 보낸 김광석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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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튜브를 통해 강제 소환되는 콘텐츠 중 작고한 DJ 이종환이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의 디스크쇼> 등 음악 프로그램의 이름을 달고 그의 목소리가 추억의 팝송과 함께 전파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생각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하늘 아래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는 일입니다/ 알고 지내던 모든 것들이/ 바로 내 자신의 삶이 되었지만/ 안녕이란 말을 하기도 전에/ 좋은 시절은 이별을 고하는군요.”


이종환 특유의 콧소리가 섞인 낭송과 멜라니 사프카의 슬픈 목소리가 어우러진 ‘더 새디스트 싱(The Saddest Thing)’은 이런 가을이면 사춘기의 기억 어디쯤 잠복해 있다가 튀어나온다. 1947년 뉴욕주의 퀸스에서 태어나 연기자를 꿈꿨던 그녀는 음반기획사를 영화사로 착각하여 오디션을 보러가는 바람에 가수가 됐다. 1967년 첫 앨범을 낸 뒤 매니저이자 프로듀서였던 피터 스체커릭과 이듬해 결혼한다. 그러나 사프카는 밥 딜런이나 존 바에즈 등 거물 포크싱어들의 명성에 가려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1973년 발표된 ‘더 새디스트 싱’은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곡이었지만 정작 미국에서는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 한국에 불어닥친 포크 열풍과 유난히 슬픈 노래를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취향과 맞물려 라디오 프로그램과 음악다방 리퀘스트곡으로 사랑받았다. 


2006년에서야 첫 내한공연을 왔던 멜라니 사프카는 반전 및 인권 활동을 해왔던 포크싱어답게 공연에 앞서 임진각을 방문하여 눈길을 끌었다. 칼라 보노프, 리타 쿨리지 등 미국의 여성 포크싱어들과 함께한 무대였지만 ‘더 새디스트 싱’만으로도 올드팬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 노래가 유행했던 시절에 그런 속설이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이 노래를 신청해 들으면 반드시 헤어진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과 다를 바 없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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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너무 힘들고 초라할 때/ 네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내가 닦아줄게/ 힘들고 어려울 때/ 친구가 없을 때도 나는 늘 너의 편/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를 눕힐게.”



이 아름다운 계절에 문득 이 노래가 그리웠다. 눈만 뜨면 치고받고 싸우고, 증오하고 경멸하는 작금의 상황을 노래로라도 위로받고 싶었다.    


팝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이먼 앤드 가펑클이 1970년 발표한 이 노래는 빌보드 팝 싱글차트에서 6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이듬해 그래미상에서 총 5개 부문의 트로피를 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 두 친구는 서로에게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지 못했다. 불화가 시작된 건 가펑클의 영화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가펑클과 사이먼이 영화 &lt;캐치-22&gt;에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촬영일정이 늦춰지면서 앨범 제작도 지연됐다. 더군다나 나중에 사이먼의 촬영 분량은 대본에서 사라졌다. 


뒤늦게 가펑클이 스튜디오로 복귀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불편한 감정은 자꾸만 커졌다. 더군다나 NBC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 이 노래가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스폰서 기업들이 후원을 포기했다. 제작 과정에서 두 사람 간 의견충돌이 잦아졌고, 결국 이 앨범이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 됐다. 사이먼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가펑클에게 노래를 양보했던 사이먼은 뒷날 뼈저리게 후회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사이먼이 솔로로 독립하고, 가펑클은 영화배우 겸 가수로 활동했다.


1981년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두 사람은 듀오를 이뤄 무료 공연을 펼쳤다. 이를 기점으로 이들의 우정도 회복됐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무려 50만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의 노래는 한국팬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나 끝내 내한공연은 하지 못했다. 한동안 결혼식장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로도 인기를 얻었다.  


지난해 9월 폴 사이먼은 뉴욕 퀸스의 코로나파크에서 공연을 열고 더 이상 순회공연은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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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앞에서 패티 김의 노래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초우’ ‘이별’ ‘9월의 노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등 많은 노래가 스쳐 지나간다. 그중에서도 ‘이별’은 이 노래의 작품자이자 남편이었던 길옥윤과의 짧지만 아름다운 만남이 스며 있는 노래다. 


‘다리를 꼬고 앉아 큰소리로 웃는 모습이 좀 건방져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 당당함이 지나쳐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1958년 도쿄 국제극장에서 패티 김(당시엔 린다 김)을 처음 본 길옥윤의 회고다. 길옥윤은 색소폰에 심취하여 일본에서 일하는 재즈 뮤지션이었고, 패티 김은 미8군 공연단의 신인 가수였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1965년이었다. 길옥윤은 일하던 클럽이 망해서 귀국했고, 패티 김도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길옥윤은 패티 김이 묵는 호텔에 전화를 해서 노래를 불렀다


‘사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사랑한다면 가지를 마라’


결국 패티 김은 사랑스러운 로맨티스트에게 청혼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주례로 결혼을 했다. ‘4월이 가기 전에’와 ‘사랑의 세레나데’가 담긴 앨범을 하객들에게 나눠주고, 신혼여행은 베트남 파병 한국군 위문 공연으로 대신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파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 거야’


1973년 5월 ‘이별’이 발표됐을 때 팬들은 두 사람의 파경을 직감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두 사람은 이혼을 발표했다. 1994년 폐암 판정을 받은 길옥윤을 위해 SBS가 마련한 &lt;길옥윤 이별 콘서트&gt;에서 패티 김은 ‘사랑은 영원히’를 열창했다. 이듬해 3월 길옥윤은 파란만장했던 한 생애를 마감했다. 그리고 패티 김도 은퇴했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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