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가까이 음악인들을 지켜봐왔다. 대부분 스스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부르는 친구들이었다. 모두 시작은 미약했다. 끝은 각기 달랐다. 입소문을 타고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친구들이 있었다. 어쩌다 출연하게 된 방송을 통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친구들이 있었다. 차곡차곡 한 단계씩 스스로를 알리며 대기만성을 이룬 친구들이 있었다. 재능이 있다 하여 모두 성공한 건 아니다. 나는 안타깝고 괴로웠다. 운이 따르지 않아 결정적 고비에 기회를 놓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잠시 반짝했던 영광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세월과 정비례로 증가하는 현실의 무게에 눌려 빛나던 총기를 잃은 친구들을 볼 때마다. 


불운의 소산일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예술가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한 탓이 컸다. 무대의 조명 아래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일상의 형광등 아래서 간혹 드러나는 그림자를 친구들은 화려한 조명의 기억으로 덮으려고 했다. 음악인들이니 자신이 만든 곡과 무대 위에서의 연주를 통해 자신을 드러냈겠지만 예술인으로서 모두 보여줄 수 없는, 현실인으로서의 자신은 생활의 현장에서 계속 닳아가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글로 먹고살았다. 주로 남의 이야기를 썼다. 음악에 대해 썼다. 이렇게 저렇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썼다. 내 이야기를 쓴 적은 없다. 처음 글로 온전히 밥을 책임질 수 있었을 때는 맹렬히 내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그 글을 묶어 책을 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책은 망했다. 홍보 한번 제대로 못하고 묻어야 했다. 그 후로 나에 대해 써본 적이 거의 없다. 어차피 책 한 권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나는 계속 썼다. 남에 대해 썼다. 글은 때로 다른 부가가치의 시작점이어서 강연과 방송 같은 다른 활동도 따랐기에 혼자 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먹을 만큼 먹고 마실 만큼 마시고 놀 만큼 놀 수 있었다. 오늘 일하고 오늘 놀았다. 사는 게 마냥 재미있었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평범한 친구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이는 계속 쌓였고 세상도 그만큼 변해갔다. 글을 쓸 수 있는 잡지는 매년 사라졌다. 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매년 줄어갔다. 물론 지금도 사라지고 지금도 줄어간다. 글로 전달되던 내용들은 영상으로 전달된다. 그 와중에도 마감 때마다 머리를 싸매고 자판을 두드리는 내가 마치 타이태닉호에서 연주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럼에도 스스로 위안하곤 했다. 오만가지 핑계를 대가며 현실을 외면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반성보다는 도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남아 있는 게 없었다. 현실이 바짝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현실이 자객처럼 다가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보병부대였다. 뚜벅뚜벅 진군해왔다. 사주경계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음악 하는 친구들처럼 ‘예술가의 자존심’ 따위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 내가 예술가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얼마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었다. 글쓰는 사람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간단한 이력서를 제출했다. 나이 지긋한 점장은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가지신 분이…. 하실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화려하다니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미안합니다.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그가 나한테 미안해야 할 까닭은 없다. 문자를 들여다보며 많은 것들에 대해 미안해졌다. 과거의 나에게, 나의 현실 도피로 속 끓인 사람들에게. 친구들을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었다. 일로 인해 생긴 약간의 조명으로 창백한 형광등 불빛을 덮으려 한 건 오히려 나였다. 친구들이 힘들다고 했다면, 그 속내를 좀 더 자주 주고받았다면, 힘든 속마음을 나도 좀 더 쉽게 털어 놓을 수 있었을까. 반성한다.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의 일부만이라도 나 자신에 대해 온전히 썼다면, 이야기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유서 같은 글 한 편이라도 썼다면 어땠을까 하고.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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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밭둑 뽕나무 _ 450×470㎜ _ 초배지에 먹 _ 2015


강촌의 늙은 내외


가랑비 좀 뿌린다고 고추밭 고랑에서 나오지 않는다


장대비 좀 쏟아져라 푹푹 찌는 마른장마



원주 남한강변의 펜션은 그 마을의 수익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졌는데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그래서 내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장기 임대. 난 저렴한 작업 공간(사실은 스스로의 유배 공간?)을 얻었고 마을은 건물 관리자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봄여름 건물 주위의 무성한 풀들을 감당하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예초기를 마련해서 직접 풀을 베고 치우기도 하지만 자주 가 있지 못할 때에는 감당키 어려울 만큼 자라 있어서 돈을 내고 마을에 부탁해야 했다. 그러면 이장이 직접 오거나 마을 노인회장님과 총무님이 오기도 했다. 이장은 좀 젊은 분이지만 회장님과 총무님은 나보다 훨씬 더 연세가 많은 분들이다. 돈 때문이 아니고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참 마음 편치 않은 것은 푹푹 찌는 더위에 그분들이 힘들여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남의 노동을 산다는 일이었다. 이것이 윤리적인가…. 


노인회장님 내외분은 펜션 옆 그분들의 고추밭에서 자주 마주쳤었다.


<정태춘 싱어송라이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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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네’ 악보.


얼마 전 장애인의 행사에 갔다. 일종의 ‘서로 친해지기’ 축제(서로 친해지기는 내가 답을 내려보고 싶었다)였다. 미술을 하는 나는 관찰력이 있다. 집안의 내력인 것 같다. 


장애인 돕기, 불우이웃 돕기 같은 행사의 제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때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장애인과 왠지 어색한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제목에 ‘돕기’ ‘위한’ 같은 표현은 안 썼으면 좋겠다. ‘돕는 거라고? 나는 그런 게 아닌데 왠지 어색해’하는 거북함을 행사 내내 느끼게 된다. 그저 어떤 친구는 귀가 안 들리고, 어떤 친구는 눈이 안 보이고, 또 어떤 친구는 지적장애일 뿐…. ‘서로 친해지기 장애인과 함께.’ 이 정도의 제목이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명칭을 써야 한다며 인권을 이야기하셨다. 나는 그 연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리허설을 기다리며 대기실에 있을 때 우리 밴드의 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지적장애 친구들이 직접 만들어 왔다면서 기분 좋은 얼굴로 원두커피를 돌렸다.


10대 후반~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도 잘생긴 청년이 재미있어서 나는 말을 걸었다. 일부러 약간 화가 난 말투로 “어이 학생, 내가 몇살인데 이런 쓴 커피를 주는 거야?”라고 했다. 그러자 청년은 아주 빠르게 대처했다.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어요”라고 답했다. 우리 밴드와 청년의 담당 선생 모두 웃었다. 짧지만 정확한 답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웃지 않고 나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나는 또 장난치고 싶어서 “어이 친구, 나, 이거 써서 못 마셔!” 하자, 또 한번 “어쩔 수 없어요” 하며 울 것만 같았다. 나는 웃으면서 “아 참, 나는 이거 못 마시는데” 하며 뜨거운 커피를 훌쩍 마시다가 “앗, 뜨거. 뜨겁잖아!” 하고 엄살을 부렸다. 순간 청년이 씩 웃었다. 그러더니 “그거 안 마셔도 돼요. 어쩔 수 없어요”라고 했다. 그러고는 웃으면서 대기실에서 나갔다. 나는 “잘 가”라고 했고, 청년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야 해요” 하고 갔다.


그날의 행사는 대단했다. 비장애인인 우리가 부끄러웠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피아노 비트는 열정으로 변했다. 들리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언젠가 내가 병원에서 퇴원한 후 제주도에서 밴드 ‘들국화’ 연습을 할 때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핵의학 교수로 일하던 친구에게 “동정표도 표야”라고 얘기하며 같이 공감의 웃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았다. 대다수가 나를 우려하는 듯한 시선이어서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대에 어떻게 올라가지?’ 싶었다.


산과 바다, 나무와 꽃 외엔 사람이 싫었다. 참 부끄러웠던 날들…. 나를 이해해주는 것도 싫었다.


나는 교수 친구와 통화하며 이렇게 말했다. “ ‘와, 전인권씨죠? 좋아했어요’ 하고 꼭 뒷말이 ‘힘내세요, 힘내세요’더라. 그 말이 들리면 마치 날 위하는 게 아니라 표적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좌우간 기분이 안 좋아지고 내가 아주 작아지는 기분이지. 마치 믿는 사람에게 동정을 받는 듯한….” 그러자 친구는 “야 그게 뭐…” 하면서도 공감이 간다는 듯한 말을 했고, 순간 문득 지난날 힘겨웠던 날들이 생각나서 “야 동정표도 표야”라고 말하며 둘이 웃었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저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죽는다는 건?’ 하고.


그런 생각들을 떨쳐낼 수 있을까? 서로 똑같은 시간을 살아가며 ‘떳떳하자. 이왕이면 내가 고개 숙일 필요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내 앞날은 희망밖에 없지’ 하며 스스로 이겨냈다. ‘내가 답이지, 내가 왜 사람들의 답이 돼야 하나’라고도 생각했다. 


다시 또 뭉친 ‘들국화’ 기자회견 때도 취재진이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얘기했다. “여러분을 황당하게 했죠? 미안해요.”


그날 장애인의 사운드가 바로 우리들이 원하는 비트(몰입, 강한 박자)였다. 우리는 목표가 같은 거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장애인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 또한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건 이미 자신을 이겨낸 뭔가 또 다른 것이지 않을까.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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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들을 때마다 부채 의식이 느껴지는 가수가 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가수 심수봉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1979년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당시 현장에 있었다. 노래를 잘한 죄로 불려갔다가 역사의 격랑에 휩쓸렸다.


‘이 몸이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어도/ 하늘이여 보살펴 주소서 내 아이를 지켜 주소서/ 세월은 흐르고 아이가 자라서 조국을 물어 오거든/ 강인한 꽃 밝고 맑은 무궁화를 보여 주렴.’


심수봉은 이 노래를 가장 아끼는 곡으로 꼽는다. ‘그때 그 사람’이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보다 먼저 꼽는 이유는 뭘까? 사건 직후 그는 한 달간 서울 한남동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방송 출연금지와 출국금지를 당했다. 이 노래는 해금을 기다리던 시절에 우연히 국립묘지에 갔다가 무명용사의 비문을 보고 쓴 곡이다. 아들한테 우리꽃 무궁화를 위한 노래 한 곡 정도는 남겨주고 싶었다. 


드디어 해금이 돼서 1985년 MBC TV <쇼 2000>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 어떤 방송에서도 출연 제의가 없었고 노래를 틀어주지도 않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저런 노래가 어떻게 TV에 나오냐?”고 했다는 것이다. 노래보다는 심수봉의 등장이 불편했을 수도 있다. 


심수봉은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여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나’라든가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고 썼지만 전체적으로는 뜨거운 조국애를 담은 노래였다. 말로만 해금됐을 뿐 여전히 그는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북녘땅을 고향으로 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심수봉은 “그냥 당하면 당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고 말한 바 있다. 


1976년 남산 도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하던 심수봉을 발굴한 건 손님으로 왔던 나훈아였다. 그날 저녁의 만남이 ‘파란만장 심수봉’을 만들었으니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덕분에 우리는 심수봉의 절창을 듣고 살았으니 고맙고, 고맙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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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즉발 산업전쟁 _ 600×610㎜ _ 화선지에 먹 _ 2019


세기말의 세계화, 관세 철폐, 자유무역…, 그리고 지금 저 사나운 얼굴들.


탐욕과 오만의 무례한 언사들. 소위 21세기 신문명을 이끌고 가는 이들의 대화….


자국의 이익과 패권을 추구한다. 이웃과의 호혜와 선린은 구 문명의 낙후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자국 국민의 삶이 기아선상에 놓이기라도 했다는 듯이 비장하다. 이익이 침해당하면 언제든, 얼마든 보복하겠다고 공언을 한다. 군함과 전투기로 시위를 한다.


차별과 좌절이 분노를 만들고 그 분노가 자기 내부의 성찰로 가지 않고 이웃과 경쟁자들을 향한다.


트럼프, 아베, 푸틴, 시진핑의 얘기가 아니다. 거기 공동체 시민들 얘기다. 그런 야만에까지 왔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얼마나 더 성장을 해야 하는 걸까. 왜 선한 분배와 공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걸까. 언제 우발적으로 꽝! 터지지 않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지금 전쟁 중이다. 새로운 세기의 절대적인 화두는 돈이며 산업문명은 불안 그 자체다.


지성과 이성은 어디로 갔을까.


<정태춘 싱어송라이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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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피어린 항쟁의 세월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 위에/ …/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몇 손가락에 꼽히는 ‘조국 찬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노래를 조영남, 송창식, 김민기, 윤지영 등이 불렀으니 뚜렷한 주인이 없다. 1970년대 초 음악평론가 이백천과 기자 정홍택이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났다. 이백천이 천재 뮤지션들이라며 정홍택에게 소개한 대학생들이 김민기와 양희은이었다. 두 사람은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청년들에게 매료됐다. 그래서 전국의 대학을 돌면서 공연하는 통기타 팀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 팀이 함께 부를 노래가 필요했다. 서울 충무로 라이온스호텔 3층에 방 2개를 빌려 합숙을 했다. 김민기와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양희은 등 소위 ‘세시봉’ 멤버들이었다. 김민기가 노랫말을 쓰고, 송창식이 곡을 붙여 완성했다. 기타를 치면서 떼창을 할 수 있는 엔딩송으로 만든 것이다.


처음 이 노래를 불러 앨범에 수록한 가수는 조영남이었다. 1971년에 나온 그의 앨범에 ‘동해의 태양’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됐다. 이어 1972년 송창식 2집에 ‘내 나라 내 조국’이란 제목으로 발표됐다. 1974년 포크싱어 윤지영의 2집 <고향 가는 길>에 김민기가 내레이션에 참여하여 수록됐지만 이 앨범은 검열 때문에 시장에서 사라졌다. 김민기가 공을 들였던 남자 포크싱어 윤지영도 자취를 감췄다.


1993년 김민기가 작품집을 내면서 내레이션 부분도 정리해서 넣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의 내레이션과는 사뭇 달라졌다.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 저 뜨거운 모래바람 속 메마른 땅은 아니다. 나의 조국은 찬바람 몰아치는 저 싸늘한 그곳도 아니다.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 지금은 말없이 흐르는 저 강물 위에 내일 찬란히 빛날 은빛 물결.’


아직도 동해바다에 서면 이 노래가 가장 먼저 떠오르면서 피가 끓는다. 우리에게 제2의 애국가쯤 되지 않을까.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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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JK씨의 음악을 뒤늦게 이제야 발견했습니다. 가슴속에 뭔가 느껴지는 것 같고 쿵쾅쿵쾅 뛰는 심장에 너무 신났어요. 특히 ‘고집쟁이’란 곡에 큰 희열을 느꼈는데, 이 음악은 어느 특정 세대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발 그 곡으로 활동 좀 해주세요. 이제야 이런 음악을 알게 됐다니, 참….”


얼마 전 팬미팅 자리에서 만난 60대 어머니 팬이 해주신 말이다. 내 두 손을 꼭 잡고, 극찬을 보내준 그분의 아우라는 젊음 그 자체였다. 여기서 내 음악은 나이 제한이 없는 멋진 음악이라며 자화자찬을 하겠다는 게 절대 아니다. 물론 어머니 팬의 따뜻한 말씀이 날 몸 둘 바 모르게 행복하게 했고, 내 심장이 춤추게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질투 날 정도로 부러웠던 건 음악을 대하는, 음악으로 유지할 수 있는 그분의 젊음이었다. 


요즘 들어 바쁜 일정 속에 반겨주시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 그중 연세가 많은 분들도 알아봐주시고 악수를 청하거나 셀카 사진을 부탁하시곤 한다. 조금은 머쓱해진 분위기에 그분들이 항상 빼놓지 않는 멘트가 있는데….


“아 참 타이거씨를 좋아하는데, 난 이제 그 음악을 즐길 수 없는 나이라서 멀리서 응원할게요! 파이팅!” 이렇게 내게 힘을 주는 한마디 뒤에 꼭 나이 얘길 언급하는 ‘어른이’ 팬들이 꽤 있다. 


우리나라에는 ‘나잇값’이라는 명사가 있다.(나잇값:나이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 철없고 개념 없는 행동으로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쓰이는 말이겠지만 나잇값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곳이 이외에 얼마나 더 있을까? 어른들은 나이라는 선에 자신들을 가둔다. 굳이 늙지 않아도 되는 정신을 늙게 만드는 사회적 풍토일까?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보약과 비타민들이 광고되고 불티나게 팔리는 걸 보면 ‘만수무강’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인사말도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사용되는 유행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이란 음식, 좋은 공기,  물처럼 건강에 도움이 되는 도구라고 믿는다. 특히 젊음을 유지하는 데 음악만큼 효과 있는 약은 없다. 힙합이란 젊음을 느끼는 데 가장 효과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힙합에는 한국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한’이 있고, 어르신들이 흥에 취할 수 있는 트로트의 ‘정’이 있다. 흔히 트로트 음악에서 표현되는 인생사에 관한 희로애락을 직설적이고 때론 시적으로 풀어내는 맛이 있고, 간단하면서도 힘찬 붐뱁이라는 리듬은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요소다. ‘한’과 ‘정’이라는 감정과 붐뱁이라는 공격적인 리듬, 그리고 화를 풀 수 있는 스웩이기도 하다. (붐뱁: 드럼소리가 붐 뱁 붐 붐 뱁 하며 다른 악기 소리보다 크게 튀어 나온다고 해서 얻게 된 힙합음악의 장르)


걸음걸이, 패션, 몸짓, 질러대는 소리와 추임새, 원하는 대로 표현해도 되는 멋. 이런 것들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법의 정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화를 풀어주는 데 가장 효과적인 음악이 힙합이라는 거다. 이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다면 잊고 지냈던 젊음의 짜릿함을 다시 느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외국에서는 힙합 1세대들이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그들은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그들의 말투, 옷차림 등은 여전히 나잇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음악을 즐기는 60~70대의 젊은이들도 여전히 행복해 보인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한다.


자, 오늘부터 힙합을 듣고 젊어지자!!!


<타이거JK |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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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는 너무 쉽고, 예술가에게는 너무 어렵다.”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은 모차르트의 소나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를 잘 연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랜 경험과 숙련된 기교가 아니라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이라는 의미였을까? 정말로 모차르트의 음악과 어린이 사이에 일맥상통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모차르트의 음악은 어린이 피아니스트의 단골 레퍼토리로 연주되고, 소위 ‘어린이를 위한 음악’ 같은 제목을 내건 음반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서양음악사 속에는 어린이와 관련된 몇몇 음악이 있다. 슈만의 ‘어린이정경’이나 드뷔시의 ‘어린이 차지’, 차이콥스키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 도루 다케미쓰의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곡’ 등이 그러한 예다. 내가 이 음악들을 처음 만난 것은 피아노를 매일 연습하던 청소년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어린이를 위한 것이니 한층 쉽겠지’라고 생각하며 자신만만하게 악보를 펼쳤지만, 예상만큼 쉽지 않아 씁쓸한 마음으로 악보를 덮었다. 작곡가들이 상상한 어린이 수준에 못 미치는 청소년이 된 것 같아 속상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곡들은 어린이가 연주하라고 만들어놓은 곡이 아니었다. 어린이는 연주자나 청취자가 아니라 표현 대상이었다. 그 음악이 상당히 ‘어른의 시점’에 입각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그러려니 한 채 그 음악들을 잊고 지냈다.


어린이에 관한 음악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어린 조카와 함께 생활하면서부터다. 가족들은 내게 가끔 “고모가 음악을 전공했으니 조카에게 피아노도 쳐주고 좋은 음악도 들려줘”라고 요청했다. 조카에게 줄 수 있는 게 달리 없으나 음악만큼은 잘 골라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에게 좋은 음악이 무엇일지를 상상하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물론 나름대로 동심을 표현했다는 서양음악사의 사례나 최신 인기 동요, ‘어린이를 위한 음악’ 목록들을 접할 수 있었고 이들이 나름대로 좋은 출발점이 되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기엔 조금 아쉬웠다. 음악을 세계를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키는 것을 좋은 음악이라 믿는다면, 아이에게 보다 유연한 형태로 음악을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얼마 전, 팀원으로 몸담고 있는 아츠 인큐베이터의 활동을 통해 덴마크의 아방가르드 음악 축제 ‘클랑’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만난 어린이 워크숍 및 공연 프로그램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어린이들은 일상적인 사물로 악기를 만들거나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가 프로그램을 통해 변조되는 것을 주의 깊게 듣는 등 즉흥음악이나 유럽 전통의 현대음악계에서 이루어질 법한 작업을 놀이로써 경험하고 있었다. 어린이만을 위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올해 봄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소음장난’에서도 어린이들은 아티스트와 함께 여러 사물과 전자기기를 앞에 둔 채 음악을 만들어냈다. 더 나아가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와 공연창작집단 뛰다가 제작한 ‘하늘아이 땅아이’ 등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공연도 종종 열리고 있다. 어린이를 현장으로 초대하는 만큼 이런 사례들에서 음악 및 공연의 형태는 이전의 관습과 사뭇 달라져 관객과 공연자의 관계도 재설정되고, 예기치 못한 상호작용도 발생하고, 때로는 실험성을 추구하는 최근의 사례들보다 더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기존의 것을 어린이 시점으로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린이의 입장을 고려해 만들어진 이 사례들은 성인 관객인 내게도 새로운 시각을 던져줬다. 그 공연들이 어린이에게 선사하는 것은 내가 예술에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새로운 경험’과 결코 다르지 않았고, 심지어 그 방식은 훨씬 편안하고 다채로웠다. 어린이들이 이제까지의 관습이나 편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테다. 어린이들은 예술을 즐거운 놀이로 받아들이며 우리가 너무나 어렵게 해내는 것을 너무나 쉽게 해내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쯤 어린이의 음악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어떨까. 거기에 많은 비밀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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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