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스럽지도 않은데 중독성이 강한 노래가 있다. 한 번 들으면 좀처럼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이럽션의 ‘원웨이 티켓(Oneway ticket)’이 그런 노래다. 1970년대 말 이 노래가 히트하던 시절에는 소위 고고장으로 불렀던 디스코텍이 대세였다. 그곳을 지배하던 음악은 단연 디스코였다.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에서 존 트래볼타가 나팔바지를 입고 하늘을 찔러대던 그 춤과 노래 말이다. 디스코텍의 단골 레퍼토리였던 ‘원웨이 티켓’은 공부밖에 모르던 샌님을 빼고는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었다.

 

원래 이 곡은 닐 세다카가 처음 불렀다. 잭 켈러와 행크 헌터가 쓴 원곡은 닐 세다카의 1959년 싱글 ‘오 캐럴’에 수록돼 있다. 이럽션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정서적이고 감미롭다.

 

‘Choo choo train Chuggin’ down the track/ Gotta travel on Never comin’ back/ Got a one way ticket to the blues.’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뒤 편도 티켓으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슬픔을 노래했다. 이별노래에 맞춰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면서 하늘을 찔러대던 디스코텍의 청춘들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럽션은 1974년 ‘사일런트 이럽션’(Silent Eruption)이란 이름으로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남성 5인조였다. 한 명이 탈퇴한 뒤에 자메이카 출신의 여성보컬 프레셔스 윌슨을 영입하고 ‘이럽션(폭발)’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노래를 발표했다. 그룹 이름처럼 유럽과 미국을 강타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국내 인기를 등에 업고 1980년 코미디언 출신 가수 방미가 ‘날 보러와요’로 리메이크하여 부르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모두 철거됐지만 DMZ의 대북확성기에서 한때 가장 많이 나왔던 노래가 ‘날 보러와요’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본인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송대관의 ‘차표 한 장’ 역시 이 노래의 영향 아래 있다.

 

그런데 마치 이 노래가 편도 티켓밖에 허용되지 않는 우리네 인생 얘기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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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생 시절 내내 성적이 30등 이하였다. 성적이 30등 이상인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친구들은 나와는 다른 아이들. 얼굴이 왠지 하얗고 도시락 반찬도 달랐다. 도시락에 반찬통도 따로 있고, 같은 계란말이도 왠지 하얘 보였다. 그 아이들은 우리가 노는 곳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우리와 서로 따로 놀았다. 그냥 우리와 서로 다른 애들. 가끔 “야, 걔가 또 일등했대”로 시작하는 야유 정도. 나는 그런 속에서 간혹 우울감을 느꼈다. 


5학년 때 내 짝이던 여자애는 이뻤다. 공부를 잘했고 역시 나와 모든 게 달랐다. 나는 그림을 잘 그렸지만 그 애와 가까워질 수 없었다. 외로웠다. 공부 잘하고 집도 부자인 아이들과 공부 못하고 가난했던 우리는 이 다음에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다른 공간에 서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씩씩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초등학생 때부터 30등 이하였던 친구들 중 상당수는 육체노동자가 되어 먹고산다. 그중 한 선배는 열심히 일해서 서울 종로에 김치찌개집을 냈고, 돈을 벌어 작은 빌딩까지 샀다.


‘재채기’ 악보.


나는 주로 혼자 놀거나 나의 작은형님과 함께 산에 다녔다. 산속 깨끗한 개천의 구석 즈음에 다다르면 물속의 돌들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 순간 크고 작은 거무튀튀한 가재 여러 마리가 마구 달아나는데 정말 신기했다. 


나는 북악산의 열매나무 있는 곳을 진짜로 모두 안다. 주로 많은 게 버찌(벚나무 열매). 우리는 버찌나 아카시아꽃을 따 먹었다. 11월이 되면 서리가 내리는 속에 ‘파페’라는 열매가 나온다. 잎사귀는 없고 앵두보다는 조금 작고 통통하고 빨갛게 익는데 맛이 일품이다. 날이 저물어서까지 혹시 뭔가 먹을 게 있을까 찾아헤매던 내가 우연히 발견한 나무가 파페나무다. 그 열매를 딸 때는 추워서 손도 곱는다. 나무는 크지 않은 게 주로 많지만 열매는 다닥다닥 기분좋게 풍성하다. 그렇게 열매를 따 먹으러 산을 오르내릴 때는 산의 모양새를 관찰했다. 여기는 밟아도 안 넘어질 것 같고 저기는 ‘부웅~’ 하고 뛰어넘어도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감잡기가 어려웠지만 계속 시도하면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지혜가 생겼다. 내 삶의 지혜는 어릴 때 내 집 바로 뒤 북악산에서 놀며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 것 같다.



나는 내 노래 ‘재채기’ 중 ‘옛날이여 지금 어디 살기 바빠~’ 부분이 슬프다. 그래서 노래 스타일에 약간 기분을 가미했다. 문학·미술·음악의 서론의 느낌들은 우리나 서방이나 같다고 생각한다. 미국 LA에 멜로즈라는 거리가 있는데 인도나 다른 나라의 골동품도 사고판다. 여기는 말의 스타일로 친구들 ‘끼리끼리’가 형성되는데, 전혀 편파적이지 않고 선진국다운 면이 있다. 말의 느낌이 통하면 친구가 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돈이나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며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많다. 못된 범죄행위나 다름없다. 


‘재채기’의 마지막 가사는 ‘어제의 다툼은 깊은 곳의 내 마음 아니지. 너와 내가 만들어낸 유령이 분명한데’이다. 이 노래 역시 만든 사람과 돈 버는 사람이 다르다.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음악이 발전하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로 큰 힘이 된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범죄자로 폄하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세계를 한손에 쥔 거인이시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5가지 이유를 보면 얼마나 범상치 않은 분인지 알 수 있다.


요즘 이상한 거짓뉴스들이 쏟아지고 있다. 유령이 분명하다.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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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힙합은 더 이상 생소한 장르가 아니다. 힙합을 하는 래퍼들이 겨루는 TV 쇼프로그램은 이미 일상이 됐다. 쿨리오의 ‘갱스터스 파라다이스’는 힙합의 클래식 반열에 오른 노래다.

 

 

이 노래가 발표된 건 1995년이다. 당시 신인 래퍼 쿨리오는 영화 <위험한 아이들>의 OST의 삽입곡을 의뢰 받았다. 미셸 파이퍼 주연의 이 영화는 흑인빈민가의 한 고등학교에 부임한 여선생이 엉망진창인 학교를 참 교육현장으로 만들어 간다는 내용이다. 원래 1960년대 흥행했던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원제:투서, 위드 러브)>(시드니 포이티어 주연)을 리메이크한 1990년대 버전 영화였다.

 

캘리포니아의 흑인빈민가 콤튼 출신인 쿨리오는 약물과 범죄로 얼룩진 이곳에서 갱스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흑인 소년들의 절망을 노래에 담았다. 역시 흑인폭동 때 총격에서 살아남은 동료가수 LV와 함께였다. 쿨리오는 “빈민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꿈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위한 우울한 송가”라고 밝힌 바 있다.

 

쿨리오가 랩을, LV가 코러스를 맡아서 녹음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코러스 부분은 스티비 원더의 노래 ‘패스트타임 파라다이스’를 샘플링했는데 그가 욕설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사용을 불허했다. 결국 쿨리오는 욕설을 뺀 새로운 가사로 스티비 원더의 허락을 받아냈다.

 

결과적으로 이 노래는 영화보다도 크게 히트했다. 쿨리오와 LV는 1995년 빌보드뮤직어워드에서 대선배인 스티비 원더와 함께 무대에 섰다. 영화 OST에 앞서 발매된 싱글앨범은 미국과 영국에서만 5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대성공을 거뒀다.

 

‘나는 미친 갱스터, 확실한 범죄자/ 날 화나게 하지 마, 내 부하들이 가만 안 둘 거야/ 죽음은 순간이야/ 죽을 각오로 산다는 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 나는 지금 스물세 살, 스물네 살까지 살 수 있을까.’

 

노래 전체에서 묻어나는 슬픔이 묘한 힘을 갖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파라다이스라는 단어가 주는 역설도 이 노래를 떠받치는 힘이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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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수염(脊髓炎·myelitis)은 척수의 염증을 동반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뇌와 사지를 잇는 중추신경계 기능이 망가진다.

 

발가락을 꿈틀거리고, 새벽녘 잠결에 이불을 슬쩍 걷어차고, 엉덩이를 옆으로 빼고 방귀를 뀌고, 다시 두 다리를 쭉 펴서 기지개를 켜는 정도의 동작들은 많은 생각과 계산 없이 이루어지는 당연한 몸의 움직임들이다. 오줌이 마려우면 누고, 배에 가스가 차면 방귀로 배출하면 된다. 특히 방귀를 뀌는 경우,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자유의 희열을 느끼면서 큰 소리와 메아리를 즐기며 그 공간을 지배할 때엔 정말 시원하다.

 

때로는 격식과 예의, 혹은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을 피해 항문근육을 조절하는 온몸의 세포와 조직들을 조정해 익명의 악플러들처럼 몰래 ‘쉬쉬’ 하면서 가스를 내보내는 방법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연기 그리고 혹시 억울하게 방귀 누명을 쓰는 제3자가 생겼을 때 모르는 척하는 뻔뻔함이다.

 

타이거JK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 앞에서 방귀는 웃음가스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큰 방귀는 소리, 길이, 템포에 따라 각각 다른 웃음을 자아내며, 때로는 소리 없이 퍼지는 냄새 지독한 방귀로도 주위 사람들에게 ‘얼굴을 찡그리며 짓는 미소’라는 굉장히 모순적인 상황을 선물하기도 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런 동물적인 인간들의 당연한 행위들이 불가능해지는 병이 척수염이다. 정확한 이유 없이 뇌에서 보내는 신호들이 멈춰버리는 척추 안에서, 이 신호들의 고속도로인 척수가 염증을 동반해, 꽉 막힌 도로에 신호를 운반하는 차들이 멈춰 서 있거나, 잘못된 신호와 엉킨 방향판들로 충돌하기 시작한다. 의도적인 것인지, 얼굴이 험하게 생겨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타이거JK가 강하고 거침의 상징으로 거듭나기 시작할 무렵, 나의 몸에는 잔근육과 빨래판을 연상시키는 복근이 있었다. 나는 얼굴에 꽃이 피는 미남 미녀들이 장악하는 시장 밖에서, 힙합이라는 비주류 음악 대표로, 가수 비 다음으로 청바지 브랜드의 대표모델로, 패션계에서도 모델로 불려 다니면서 복근 노출을 부탁받던 섹스심벌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복근이 멋진 상남자로 이미지화되어 있던 나에게 척수염은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안겨준 가장 원수 같은 희귀병이었다. 가장 큰 고통은 뇌에서 보내는 당연한 신호들의 장애였다. 방귀를 뀌고자 하는 욕구가 온몸을 떨게 해도, 한두 시간을 집중적으로 배를 누르고 때리고 방구석을 뒹굴뒹굴 굴러봐도, 배출되지 않는 가스. 이렇게 2년을 고생했다. 척수염 투병일기는 아마도 두꺼운 책 10권 정도 나올 분량의 더럽고 추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섭고 고통스러운 경험들이다.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나는 방귀가 주는 행복감을 깨달았다. 희귀병에 걸려 투병을 시작할 때 의사 선생님들이 처방한, 치료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사항들이 있었다. “음식을 꼭꼭 씹어 천천히 드세요. 물을 마시세요, 물이 좋습니다. 술과 담배를 줄이시고, 조금이라도 걸으세요. 좌욕을 하세요. 그 어떤 약보다도 지금 제가 말씀드린 주의사항들을 우선 지키셔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똥, 오줌입니다. 절대로 참지 마세요. 먹으면 제때제때 싸야 합니다. 프로바이오틱스 섭취와 장운동, 이런 간단한 것들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찡그린 미소를 유발하는 방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리고 방귀가 주는 행복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싶다. 만약 방귀를 자유롭게 뀔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명심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까지도 척수염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내게 척수염은 ‘방귀의 행복’이라는 소중한 깨달음을 줬다. 이뿐만 아니라 척수염과 턱수염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을 때 리듬감이 비슷하다. 타이거JK만 쓸 수 있는 단어의 발견이다.

 

2019년 기해년을 맞이하며 모두가 뿡뿡대는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타이거JK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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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於富村豪奢街(귀어부촌호사가)

尋非常口於陋巷(심비상구어루항)

 

“부자 동네 호사한 거리에서 돌아와

누추한 뒷골목에서 비상구를 찾네”

 

정태춘, 귀어부촌, 550×435㎝, 디지털 프린트에 먹, 스티커, 2018

 

아파트 후미진 담벼락 아래에 누가 버렸을까, 약간은 때가 낀 흰 페인트 판자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걸 사진 찍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다시 만난 사진을 보며 짧은 한시 짓는다. 그리고 큼지마악하게 출력해서

 

그 뒷골목 풍경에 어울릴 글씨를 쓴다. 그리고, 반(反)과 산(産)을 새긴 스탬프와 내 이름을 새긴 낙관을 찍는다.

“반산업”의 내 붓글 시리즈라는 뜻이다. 거기다 사채 업체 명함을 한 장 붙여 내 얘기를 끝낸다.

(난 저런 명함을 수십 장이나 가지고 있다. 대개, 요즈음 우리집 현관 앞이나 동네 길거리에서 주운 것들이다. 흔하다.)

 

몇 년 전에 ‘비상구’라는 사진전을 한 일이 있다.

문명 부적응자는 끝없이 비상구를 찾아 헤매고 결국은, 없다.

이 산업 문명은 열외도, 기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가혹하다.

 

어쨌든, 나는 저 찾을 심(尋)자를 좋아한다.

참 좋아한다.

 

<정태춘 싱어송라이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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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어부촌  (0)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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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기타로 만들어진 성가곡인 이 노래를 나름 대중화시킨 앨 스튜어트는 1970년대 중반쯤 ‘Year of the cat’이라는 노래로 유명해진 포크록(folk rock) 가수다. 포크록은 대중들이 어떤 시대의 불만이나 아픔들을 흥얼대며 노래하는 것으로 입소문으로 번지게 될 때 큰 힘이 된다. 록 음악의 정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백구’ ‘작은 연못’ ‘친구’ 등 천재 김민기의 모든 노래가 포크 음악이다.

 

‘사랑한 후에’ 악보.

 

김광희의 ‘세노야’ 같은 곡들은 1970년대 초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우리 국민들에게 ‘민초끼리’라는 힘을 갖게 했다(서방, 특히 미국은 ‘House of the rising Sun’ 같은 곡이 원래 흑인들이 자주 불렀지만 백인들, 가령 밥 딜런 등이 불러 크게 알려졌다. 그후 애니멀스가 록 블루스로 노래해 세계적인 명곡이 됐다. 이 노래를 밥 딜런이나 애니멀스가 만든 곡으로 아는 사람이 꽤 있지만 그렇지 않다. 원래 포크뮤직이다.

 

우리나라의 포크 음악들은 포크의 정신이라고 할 ‘풍자성’으로 볼 때 그 수준이 서구의 그것과 비교해도 훨씬 높다고 자부할 수 있다. 기막힌 ‘정선아리랑’ 등도 포크 음악이다. 지금 불러도 대중음악으로서 손색이 없다. 세계가 모를 뿐이다. 만약 세계인들이 우리나라 포크 음악의 풍자 수준을 안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 확신한다.

 

나는 어느 날 내 삶에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죽음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꼈다.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현실과의 타협을 싫어하는 한학자의 아내였다. 아버지는 평생 공부하며 잘 쓴 서예, 잘 그린 그림을 병풍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셨다.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서예·문학 등의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판단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께서 판단한 것에 대해선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해 궁금했다. 분명히 강한 분임에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드러운 분을 나는 아직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도 포크적 예술가였다. 북청사자놀음의 꼭쇠를 자처하며 즐기셨다. 그러니 생활고는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형님들이 돈을 번 것은 나중의 일이다.

 

어릴 때 나와 나의 작은형님은 공부하는 것보다 어머니와 놀고 싶었다. 어머니와 같이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 보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했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해 매일 새벽 6시경이면 남대문시장으로 장사를 나가셨다. 그때는 자정이면 사이렌 소리가 들렸는데 어머니는 매일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에야 돌아오셨다. 그래서 나와 작은형님은 우리 친척 중에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아주머니 손에 의해 키워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의 힘이 필요했다.

“에구 요것들아. 너희는 내가 없으면 고생문이 훤하다.”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그 말씀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함경도 사람들은 “사랑한다”라는 말을 잘 안 한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셋째주 일요일에 딱 한 번 쉬셨다. 그러나 그것도 두세 달 만에 한 번이었다. 약속은 깨지기 일쑤. 집에 돈이 없었다. 구청은 툭하면 무허가로 지어진 우리집 지붕을 헐어버렸다. 나와 작은형님은 엄마 빽밖에 없었다. 지붕이 헐린 것을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 확인한 어머니는 우셨다. 우리도 따라 울었다.

 

우리 삼형제 중 나를 어머니는 유독 이뻐하셨다.

“학교 다녀오는 길에 시장으로 와라. 냉면 사줄게.”

어머니도 우리가 보고 싶으신 거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원래 그러면 안되지만 병원에서 ‘야매로’ 집으로 모신 어머니 앞에는 하얗게 촛불이 밝혀졌다. 나는 그때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을 목격했다. 갑자기 아버지께서 하얀 방의 어머니 시신 앞에 털썩 주저앉아 “내가 미안하다. 잘 가거라. 내가 잘못했다”며 커다란 소리로 엉엉 우시는 거였다. 나도 울었다. 작은형님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늘 들어오시던 뒷문 앞에서 울었다. 동시에 큰형님은 갑자기 “어머니!” 하고 밖에서 어머니를 목놓아 부르셨다.

 

나는 그후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졌다.

이 노래의 사연은 ‘사랑한 후에’ 가사 안에 모두 있다. 그로부터 1~2년 후, 들국화는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긴 하루 지나고~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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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되었다.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섰다. 미술학원 가는 게 좋았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이른 저녁 무렵의 한적한 화실이 좋았다. 학생은 나 하나였다. 선생님은 아그리파 같은 석고상을 그리게 한 후 책을 읽었다. 나는 석고상 같은 걸 왜 그려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4B연필을 깨작거리며 선생님이 틀어 놓은 라디오만 들었다. 주파수는 89.1㎒ 고정이었다. 늘 성우 장유진이 진행하던 <가요산책>이 나왔다. 두 시간이 흐른 후, 스케치북에는 선 몇개만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릴 생각이 딱히 없었고, 선생님도 가르칠 생각이 딱히 없었다. 우리는 몇 만원 정도의 돈을 주고받고 시간을 때우고 때워주는 관계였던 것 같다. 그 시간을 대부분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으로 채웠다.

 

장유진의 목소리는 지금과 별 다르지 않았다. 많은 사연들이 소개되고 많은 노래들이 소개됐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가수들의 음악이 많았다. 들국화와 신촌블루스를 그때 알았다. 누구나 사춘기 때 꽂힌 노래와의 만남을 평생 기억한다. ‘행진’과 ‘골목길’을 처음 들었던 때는 어렴풋하다. 좋아했던 초등학교 동창의 얼굴은 떠오르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수준으로. 시인과 촌장을 처음 들었을 때는 첫번째 짝사랑의 얼굴과 이름, 집까지 또렷한 수준으로 생생하다. 장유진은 누군가의 사연을 읽어준 후 ‘사랑일기’를 틀었다. 그 목소리와 멜로디에, 나는 손에 잡고 있던 연필을 내려 놓고 잠깐 멍하게 있었다. 화실에 쌓여 있는 캔버스의 먼지 냄새와 그 맑은 목소리가 제법 잘 어울렸다. 그날 저녁의 몇 분은 눕혀 그은 연필선처럼 진하다.

 

지난달 26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이정선과 유지연의 합동 공연이 있었다. 두 포크의 거장이 한 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되어 발간 기념차 가지게 된 공연이다. 가야 할 공연이었지만 당위의 농도를 더한 건 게스트였다. 하덕규와 함춘호, 즉 시인과 촌장이 한 무대에 올랐다. 2000년 재결합 앨범 <더 브릿지> 이후 19년 만이다. 나는 그들의 공연을 본 적이 없다. 너무 일찍 활동을 멈췄고, 재결합은 너무 조용했다. 잠깐이기까지 했다. 크게 기대는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하덕규는 가수로서보다는 목회자로 더 많은 활동을 해왔다. 무대를 떠나있던 그의 성대에 미성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함춘호라는, 신뢰의 이름이 연주하는 기타가 ‘오리지널’을 증명하는 도장처럼 다가올 거라고만 예상했다.

 

이정선과 유지연의 1부 공연이 끝나고 시인과 촌장이 무대에 올랐다. 첫 곡은 2집에 담긴 ‘풍경’이었다. 기타 전주가 끝나자마자 하덕규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소름이 돋는 데는 첫 소절도 너무 긴 시간이었다. 1980년대의 미성이 마치 박제처럼 보존되어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문학소년처럼 떨리는 호흡이 타임캡슐에서 빠져 나와 공연장에 풀렸다.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가 3분 동안 흘렀다. 객석에서는 진심이 가득한 큰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이 순간을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는, 아우성 같았다. 노래는 이어졌다. ‘가시나무’ 그리고 ‘사랑 일기’. 자신들의 짧은 무대를 주인공처럼 만든 시인과 촌장은 이정선, 유지연과 함께 ‘섬소년’을 연주하는 것으로 공연을 끝냈다. 그들이 퇴장한 후 2부가 시작됐지만 나는 잠시 동안 공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사랑일기’를 처음 들었던 때가 펼쳐졌다. ‘가시나무’를 처음 소개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 이문세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세월이 하덕규의 성대에서 채도를 조금이라도 앗아갔더라면, 함춘호의 손가락에서 섬세함을 거둬갔더라면 그런 감상은 보정된 기억에 불과했을 것이다. 지금 음원 차트 어디에 가져다 놔도 이상하지 않을 감성과 음색이 진심으로부터의 기쁨을 호출했다. 시간의 먼지가 더해졌을 때 무게감을 더하는 음악이 있고, 유리 상자 속에서 시간의 흔적을 비켜나갈 때 빛나는 음악도 있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젊음의 순간에 남은 책갈피 같은 음악 말이다. 중1 때의 어느 저녁이 생생한 이유는 그날, 그들이 낙엽처럼 그 순간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리라. 공부와 그림 대신 음악으로 채우던 하루하루의 어느 저녁에.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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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가보고 싶은 콘서트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연실을 꼽겠다. 누구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모를 법도 하다. 1990년대 중반 대중 앞에서 홀연히 사라진 그녀는 여전히 잠행 중이니까.

 

‘멋들어진 친구 내 오랜 친구야/ 언제라도 그곳에서 껄껄껄 웃던/ …/ 오늘도 목로주점 흙 바람 벽엔/ 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 …/ 월말이면 월급 타서 로프를 사고/ 연말이면 적금 타서 낙타를 사자/ 그래 그렇게 산에 오르고/ 그래 그렇게 사막엘 가자.’

이연실이 작사·작곡한 ‘목로주점’은 지금 들어도 신선하다. 월급 타는 날 긴 나무 널빤지 탁자가 놓인 주점에서 막걸리 한잔하면서 호기롭게 사막으로 여행하는 꿈을 꾸는 풍경이 떠오른다. 파워 넘치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주는 감흥도 상당하다.

 

전북 군산 출생. 포크 1세대인 그녀는 홍익대 미대 시절 라이브클럽에서 노래하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1971년 가수로 데뷔한다. 좋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기 위해서 대구로 내려가 ‘다방 레지’를 체험하고, 노래하다가 시비 거는 취객과 맞붙어 싸우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는 일화도 있다.

 

데뷔곡 ‘조용한 여자’와 ‘새색시 시집 가네’에 이어 다음해 발표한 ‘찔레꽃’은 이연실의 탁월한 음악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노래다. 특히 ‘찔레꽃’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른 가수들이 많지만 이연실이 그것은 군계일학이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과 어울리면서 포크계의 송라이터로 명성을 날렸던 이연실은 1975년 대마초 사건 때 연루되어 주춤한다.

 

‘목로주점’은 1981년 발표한 재기곡이다. 이제는 LED 조명으로 대체되어 30촉(30W) 백열등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막걸리를 마시다가 취해서 눈앞에서 백열등이 왔다갔다한 경험이 있는 술꾼이라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시간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풍문에 의하면 강원도 어디선가 감자농사를 짓고 있다는 이연실은 왜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물론 그 선택도 이연실의 몫이니 대중 앞으로 나와달라고 강요할 수 없지만 열성팬의 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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