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1995년 ‘패닉’의 이적과 김진표가 데뷔 앨범을 내놨을 때 대중은 단숨에 그들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달팽이)라는 도발적 노랫말은 일찍이 우리 가요계에서 찾기 힘든 감성이었다. ‘왼손잡이’와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등은 훗날 시와 소설, 노래 등 전방위적인 글쓰기로 주목받은 이적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노래였다.


2007년 이적이 3집 <나무로 만든 노래>의 타이틀곡으로 내놓은 ‘다행이다’ 역시 따뜻한 노랫말과 어쿠스틱한 멜로디로 이 풍진 세상을 사는 우리를 위로하는 노래다. 같은 해 정옥희씨와 5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한 이적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치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


애시당초 1분30초 길이의 짧은 소품이었지만 주변에서 타이틀곡으로 적극 추천했다. 이적은 이 노래를 매만져서 3분이 넘는 지금의 곡으로 다시 썼다. 아내를 처음 소개받은 뒤 다른 친구에게 소개팅을 주선했던 이적은 두 번째 만남에서 운명과 같은 사랑을 예감했다. 그래서 “나랑 사귈래요?”라고 고백했고 “예”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술을 마시면 전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적은 “나랑 사귀자고 물었고, 그녀가 예라고 답했다”고 메모를 해놨다. 그 운명같은 사랑의 얘기를 이 노래에 담은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다’는 천천히 반응이 왔다. 다큐멘터리에 삽입되고, 파업 현장에서 불리는가 하면 연인들의 고백송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발표된 지 5개월이 지나서야 인기를 얻게 된 건 단순한 사랑 노래를 뛰어넘어 사람 사이의 체온을 확인할 수 있는 따스함 때문이었다.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하는 건 결국 사랑이 아닐까.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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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 작곡가가 독일음악저작권협회에 7만200개의 음악저작물 사용허가 신청서를 트럭으로 제출했다. 33초 분량의 그의 음악 ‘제품 간접 광고’(product placements)에 그 수많은 음악을 모두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요하네스 크라이들러라는 인물로, 그는 당시 디지털 환경에서 벌어지는 음악 개념의 변화를 적극 반영하며 기존 관념과 충돌하는 작업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던 차였다. 인용된 음악으로만 만들어진 ‘제품 간접 광고’도 그 일환이었다. 음악학자 신혜수의 표현처럼 이는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끌기 위한 젊은 작곡가의 해프닝처럼 보일 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기존 체제가 디지털 시대에서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을 야기”했다. 그 작품을 과연 크라이들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인용의 허용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디지털 환경에서 한 음악의 정체성을 가르는 핵심요인은 무엇인지 등 이 33초의 소리더미는 음악에 관한 적지 않은 질문을 끌어냈다.


이 논쟁적인 음악이 하필 저작권협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음악저작권은 우리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법제화되어 개별 사례에 실천적으로 적용되는 일종의 최종관문이다. 국내의 경우 음악저작물은 “음 또는 소리를 그 핵심요소로 하며 가락, 리듬, 화음 등을 요소로 하는 악곡”을 뜻할 뿐만 아니라 가사와 즉흥연주 모두 그 개념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한 사례가 음악저작물로 인정받으려면 법령에 명시된 음악의 구성요소들에서 한 음악을 다른 음악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독창성이 발견되어야 할 테다.


법으로 재단된 이 음악저작물의 개념은 일견 명료해 보이지만, 실제 창작의 현장에는 수많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음악 현장에는 구전되며 조금씩 변형되어온 선율, 인용과 차용, 가락과 리듬과 화음의 틀은 같을지언정 연주·노래하는 이에 따라 음악이 상당히 달라지는 경우가 만연하다. 그런가 하면 어떤 창작자는 다른 음악의 일부를 가져와 그것을 조금씩 바꾸는 것으로 창작을 시작한다고도, 엄밀히 말해 완전한 1차 창작은 없다고 실토하기도 한다. 그런 광경을 보면 한 음악과 다른 음악이 명확히 구분된 영역에 존재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스펙트럼처럼 이어져 있는 듯도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고군분투 끝에 다르게 들리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다른 차원에서 저작권 문제를 전면적으로 맞닥뜨리는 이들도 있다. 기존 음악을 재료 삼아 ‘샘플 기반 음악’을 만들어내는 프로듀서·디제이들이다. 여러 음악을 가져와 그것을 낯선 방식으로 뒤섞고 그로부터 생경한 묘미를 만들어내는 이들의 작업방식은 저작권법을 위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들의 음악은 동시대 음악문화의 특수한 조건을 발 빠르게 반영하는 흥미로운 사례들이지만, 매번 진정한 창작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세간의 인식뿐만이 아니다. 작업물을 음반으로 발매하거나 유튜브나 사운드클라우드 등의 디지털 플랫폼에 올리려 할 때, 샘플 기반 음악들은 저작권 필터링 단계를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나아가 이것은 때로 예술활동증명의 어려움으로도 이어진다. 저작권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공식화된 창작물’의 문제는 창작자가 행정적으로 예술인임을 증명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음악저작권 사안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간단치 않다. 누군가에게 샘플 기반 음악은 새로울 것 없는 실제적 침해 사례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음악의 존재론적 형식을 바꿔놓는 새로운 형식 실험이다. 저작권은 저작물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라는 두 축 사이에 놓여 있다. 이런 사례가 많아짐에 따라, 샘플링 금지는 예술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침해라거나 미미한 분량을 샘플링한 건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없다는 등 관련 판결들도 조금씩 누적되며 저작권에 관한 생각도 바뀌고 있다.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는 이 음악저작권 문제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음악’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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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먹고살기는 힘들다. 책으로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음악책은 어떻겠나. 한국에서 음악책이 귀한 이유다. 특히 비교적 최근에 인기를 얻은 음악가의 전기는 더욱 귀하다. 


이런 와중에 책 한 권을 읽었다. 콜드플레이의 전기다. 국내에서는 처음 출간된 그들의 전기다. 1996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만난 네 친구들이 밴드를 결성한 이후 2015년 <A Head Full of Dreams>까지 총 7장의 앨범을 발매하며 세계 정상의 팀으로 군림하는 과정을 풍부하게 묘사한 책이다. 보통 뮤지션의 전기는 평전의 형태를 띠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평가보다는 묘사에 치중한다. 멤버들을 포함해 그들의 역사에 발을 디뎠던 사람들의 코멘트를 빼곡히 인용한다. 그들이 처음으로 함께 찍었던 사진은 물론이고 첫 공연의 포스터 같은 희귀자료에서 색채 미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최근 공연 사진까지, 풍성한 시각 자료가 함께한다. 


이런 구성이 가능한 이유는 역시 저자 덕분일 텐데, 이 책은 두 명이 함께 썼다. 무명 시절의 콜드플레이를 맨체스터의 한 클럽에서 발견해 자신이 다니던 레이블로 픽업한 A&amp;R담당자 뎁스 와일드와 음악 작가인 맬컴 크래프트(방탄소년단에 대한 팬북을 쓰기도 했다)는 콜드플레이와의 오랜 친분을 통해 격의 없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다양한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직 그들이 레이블 계약을 맺지 않고 있었던 1998년, 영국의 음악 전문지 ‘NME’는 ‘1999년 주목해야 할 이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냈다. 여기에는 콜드플레이도 있었다. 맨체스터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 인 더 시티에서 콜드플레이가 화제를 모은 이후다. 크리스 마틴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해 크리스마스였는데 부모님 집 화장실에 있었어요. ‘NME’를 펼치자 1999년에 주목할 밴드를 소개하는 기사가 보였어요. 인 더 시티에서 알게 된 밴드도 있으려나, 하고 읽어봤죠. 뮤즈, 엘보, 벨라트릭스, 게이 대드…. 콜드플레이! 이건 뭐지? 진짜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거의 기절할 뻔했어요.” 


그들의 첫 히트곡이자 오늘의 콜드플레이를 만든 노래, ‘Yellow’에 대한 일화도 살펴보자. 데뷔 앨범을 녹음하는 기간 동안 레이블 관계자들의 걱정은 이 앨범에서 싱글로 낼 만한 곡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멤버들은 스튜디오 마당에서 별이 쏟아지는 맑은 밤하늘을 함께 보며 경탄했고, 다음날 크리스는 모든 소절의 가사가 ‘Yellow’로 끝나는 신곡을 멤버들 앞에서 흥얼거렸다. 조니가 16세 때 만든 기타 리프를 그 곡에 입혔다. 이렇게 탄생한 ‘Yellow’를 들은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는 회상한다. “ ‘Yellow’를 처음 들었을 때 난 바로 기타를 집어들면서, ‘젠장 내가 왜 이 곡을 먼저 안 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 외에도 콜드플레이 팬이라면 흥미있을, 에피소드들이 이 책을 마치 지방이 거의 없는 고기처럼 만든다. 그 일련의 에피소드와 증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21세기의 록 스타로 만들었는가다. 


20세기 중반, 10대 백인 청소년들의 댄스 뮤직으로 로큰롤이 탄생한 이래 록스타란 대중 앞에서 거만해도 괜찮은, 아니 거만할수록 추앙받는 몇 안되는 직업이었다. 술과 마약, 여자로 점철된 사생활은 그들의 특권이다시피 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졌다. 인터넷의 발달은 은폐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팬들은 신화적 존재 대신, 소통하는 존재를 원하게 됐다. 록과 팝의 경계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처럼 무너지고 융합했다. 


2000년에 데뷔한, 즉 21세기와 함께 세상에 등장한 콜드플레이는 새로운 세기가 원하는 덕목에 스스로 동기화됐다. 거만함 대신 선량함, 방탕함 대신 성실함, 위압 대신 친근으로 스타덤의 세계를 항해해 왔다. 저자는 크리스 마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크리스는 본연의 자아를 잃지 않았다. 그는 거친 바다를 항해해 왔지만 여전히 배움에 대한 열정이 넘치고,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늘 노력한다.” 음악만 잘하면 그만이라는 시대는 끝났음을, 이 책은 말해준다. 태도가 중요하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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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가을과 닮았다. 붉은 단풍처럼 타오르다가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진다. 사랑은 모든 잎을 대지에 주고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와도 닮았다. 그런 사랑이 그리운 계절에 딱 어울리는 노래가 있다.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목소리와 애절한 노랫말이 어우러져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뒤흔들려도 당신이 나만 사랑해준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노래한다. 또 검은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라면 그리할 것이고, 도둑질을 하라면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말한다. 당신이 원한다면 조국도 버리고, 친구도 버릴 수 있다고 노래한다. 


142㎝의 작은 키에 연약한 몸 때문에 예명조차 참새(피아프·piaf)라고 지은 그는 삶 자체가 비극이었다. 그가 노랫말을 쓴 ‘사랑의 찬가’는 그 비극의 정점에 있는 노래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맡겨졌다가 14살 때부터 서커스단원인 아버지를 따라 유랑생활을 했던 에디트 피아프는 가끔씩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탁월한 노래 솜씨를 인정받으면서 파리의 클럽에서 스타가 됐다.       


그녀는 뉴욕 공연에 갔다가 만난 세계미들급 챔피언인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는 이미 세 아이를 둔 유부남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르당은 1949년 10월28일 포르투갈 인근의 아조레스 제도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피아프를 만나러 뉴욕으로 가던 길이었다. ‘사랑의 찬가’는 연인을 잃은 아픔을 담은 노래다.  


1951년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에디트 피아프는 고통을 잊기 위해 모르핀과 술에 의지했다. 그 와중에도 노래를 향한 사랑과 열정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나 남편 자크 필스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1963년 10월10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그녀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라 비앙 로즈>(장밋빛 인생)가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 에디트 피아프의 삶이야말로 어떤 영화보다도 더 파란만장했기에 보는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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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邊秋蘆田(강변추로전) 강변엔 가을 갈대밭


西天熱火海(서천열화해) 서편 하늘엔 뜨거운 불바다 


붉은 노을 장엄하다 _ 700×340㎜ _ 초배지에 동양화 물감과 먹 _ 2018


유소년 시절에도 시골의 고향 들판에서 노을은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광활한 간척지와 거기 연이은 갯벌 너머로도 해는 날마다 졌을 테니까. 그런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이 들어 도시 살면서, 또 옥상 있는 집에 살면서 거기서 만나는 노을에 너무 많이 감격스러워한다. “오오… 저거 좀 봐아….”


아마도 노을 장관의 각별함이 나이와도 관련 있을 듯싶다. 그래서 어린 시절까지 떠올려 보는 것이다. 


들판에서 무감하게 노을 바라보던 그때 그 소년은 지금의 내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감정 과잉과 한 편의 청승. 


그 소년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정태춘 싱어송라이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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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라도 내리는 가을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물론 세대 차이가 있겠지만 40대가 넘었다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노래다.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질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다시 떠오르나/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 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이두형 작사, 백태기 작곡의 ‘가을비 우산 속’은 가수 최헌이 1978년에 처음 불렀다. 이후 몇몇 가수들이 리메이크하여 희자매, 조영남과 김도향이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다. 사람 좋고 의리를 생명으로 아는 가수였던 최헌은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였다.


1948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최헌은 명지대 경영학과 재학 중 미8군 무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 1등을 차지한 뒤 록그룹 ‘히식스’(He6)의 보컬리스트로 영입됐다. 당시 기타리스트 김홍탁과 조용남이 이끌던 ‘히식스’는 ‘초원의 빛’ 등이 히트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우리 대중음악사에서 1970년대는 그룹사운드의 전성기였다. 이후 최헌은 1974년 ‘검은 나비’를 결성해 ‘당신은 몰라’를 발표했고, 1976년에는 ‘호랑나비’를 만들어 ‘오동잎’을 히트시켰다. 1977년 그가 솔로로 전향한 것은 시대의 흐름이었다. 록그룹의 보컬들이 잇따라 솔로로 변신하여 록감성을 바탕으로 한 발라드곡을 발표했다. 


최헌은 ‘가을비 우산 속에’로 1978년 MBC 가수왕을 차지하는 등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1979년에 제작된 석래명 감독의 영화 <가을비 우산 속에>도 이 노래의 산물이다. 정윤희와 이미 고인이 된 신성일과 김자옥이 출연했다. 빨간 우비의 정윤희와 노란 우비의 김자옥이 마주 본 포스터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후 그룹사운드의 부활을 꿈꾸면서 그룹 ‘불나비’를 결성해 미국 버티 히긴스의 번안곡 ‘카사블랑카’(1983년)를 발표하여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2012년 9월 식도암으로 투병하다 가을비 속으로 떠났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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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은 돌고 돈다. 시대를 역행해 다시 트렌드가 되는 것처럼, ‘복고’란 흔한 키워드가 숨을 새로 불어넣어 다시 유행이 되곤 한다. 새롭다는 뜻의 New와 복고를 의미하는 Retro를 합친 신조어 뉴트로(New-tro) 열풍이 불 듯 말이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내 얘기 같은 노래를 접한다는 것, 잊고 지냈던 기억의 한 조각이 추억의 부메랑처럼 돌아와 당시의 나를 생각하고 떠오르게 하는 일이다. 그만큼 기억 속 멜로디는 마치 지난날 여러 단면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나의 학창시절을 지배한 음악들은 온전히 추억의 대상이다. 음반을 구해 밤새도록 듣고 그게 전부인 하루였다. 그것이 곧 나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내 음악의 초석이 됐을 그때의 습관은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두루 음악을 접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힌 것도, 무대에서 노래하는 평생 직업을 찾게 된 것도 학창시절 두루 음악을 접한 것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마치 탐험가라도 된 듯 좋은 음악을 발견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늘 좋은 음악을 놓칠세라 라디오 앞을 지켰고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음반을 구입했다.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은 나를 자극하기 일쑤였고 라디오와 잡지는 나의 음악 선생님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좋아하는 노래를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더욱 간절한 추억인지도 모르겠다. 소니 워크맨의 로망과 LP판을 뒤적거리는 그 촉감을 떠올리면 여전히 행복하다.


하루 종일 앨범 재킷을 만지작거리며 워크맨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 음악을 듣던 시절의 희열은 분명 음원사이트에서 마음에 드는 곡을 쉽게 골라 듣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가볍게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다. 소박한 취미라도 나만의 추억이라는 점에서, 내 인생에 가장 찬란한 기억 속 음악이라는 점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의미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다양하고 좋은 음악이 수없이 많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손쉽게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는 시대다. 레코드 가게를 열심히 다니면서 좋은 음악과 훌륭한 뮤지션을 탐구했던 나의 학창시절은 이제 추억일 뿐이다. 그 많던 레코드 가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서울 한복판에서 레코드 가게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쉽게 음악을 듣고 금방 다른 곡으로 바꿔 들을 수 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음악에만 집중하던 그때의 나른함이 때론 그립다.


오랜만에 밥 말리 음반을 꺼내 들었다. 재킷 종이 모서리가 닳아버린 걸 보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음악을 들었던 시절들이 한꺼번에 소환된다. 순간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 든다. 고작 차트 순위에 매달리고 진짜 음악을 즐기는 방법을 잊고 살았던 건 아닌가 싶다. 가끔은 어릴 적 꼬마로 돌아가 즐겁게 음악을 들어야겠다.


음반업계에서는 클래식이란 수식어를 함부로 붙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듣는 사람의 존중을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명반으로 거듭난다. 내 추억 속 음악들이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가치를 인정받는 것처럼 나의 오늘 하루는 나중에 더욱 빛날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2019년이 훗날 어떻게 기억될지 괜히 흐뭇해진다.


나의 음악도 누군가에게 훗날 최고의 추억이 되길 바라며….


<타이거JK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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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지’ 악보.


젊은 고행자 같은 사람이 눈을 작게 뜨고 눈동자는 아래로 향해 있다. 필리핀 어느 산 근방, 나도 모르게 도착한 이상한 카페 같은 곳의 한쪽 벽 전체에 걸린 커다란 그림이다. 주인은 그런 나를 보고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웃고 있다.


나의 머리카락은 길었고, 필리핀 타가이타이에 사는 어린 친구는 “옷을 사러 가자, 머리를 파마하는 곳이 있다, 여기에 저기에 가자”고 했지만 내가 번번이 말을 듣지 않자 포기할 무렵이었다. 한동안은 그쪽 동네 운송수단 중 트라이카(오토바이에 한 사람 정도 탈 수 있는 작은 가마를 붙여놓은 듯한 일종의 자동차)를 타고 산을 끼고 돌다 바다에도 가보며 놀았다. 그때마다 돈을 주고 트라이카를 빌렸는데 하루에 1000페소(약 2만3000원)를 주면 12시간 정도 빌려 탈 수 있었다. 친구 둘 중 한 명이 운전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운전석 바로 옆에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자꾸 속이기 시작했다. 모텔방을 비싸게 소개하고 파인애플값을 속여 먹었다. 또 자기네 동네 아이들이 잘 못 먹는다, 먹을 것을 주면 좋아한다며 돈을 더 가져갔다. 점점 더 심해지길래 화를 내고 앞으로는 절대로 내곁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나마 친구도 없어졌다.


나는 아침에 깨기 싫었다. 어딘가로 또 걸어야 했다. 가만히 쉬어지지 않았다.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만 괴로워졌다. 그렇게 열매 몇 개를 사서 봉투에 담아 배가 고프면 먹으며 계속 걸었는데 어느날 산쪽으로 올라가다 우연히 만난 카페처럼 보이는 허름한 곳, 그래도 나름 베란다도 있고 주변이 산이라 잠시 쉬어가기에 딱 좋았다. 긴 언덕을 올라가서야 보인 산 아래 수상한 카페였다. 일단 사람이 다니질 않았다. 주변에는 상점이나 음료를 파는 가판대 하나 없었다.


내가 들어가자 주인은 웃으며 아주 친한 사람처럼 맞아주었다. 배가 고프다고 하자 몇 가지 음식이름이 적힌 허름한 메뉴판을 가져왔다. 급하면 다 된다. 기억이 안 나던 영어 단어도 생각 나고 그쪽 사람들이 잘 쓰는 말들도 꽤 많이 알 때였다. 거의 “디스원 따블렛” 같은 말은 뭔가를 시킬 때 쓰는 말이다. 나는 라이스와 수프 같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주인은 웃으며 기다리라고 했고 나를 고행자 그림이 바로 보일 수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나는 그림을 자세히 봤다. 의외로 정교하게 그려진 잘 그린 그림이었다. 고행자의 얼굴은 잘생겼고 눈동자가 아래를 향하여 편안한 표정이다. 나는 더 자세히 봤다. 얼마 되지 않아 그 그림이 내 머릿속에 채워져 갈 때 밥과 카레 냄새가 배어있는 음식이 나왔다. 주인은 그림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행동이 조용한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말랐지만 강하게 생긴 친구다.


나는 음식을 먹다가 멈추고 그림의 내용을 알아갔다. 그림 속 인물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 밑으로 손이 있고 양손은 벌어져 있는데 그 양손 사이로 낙엽색깔의 작은 나뭇잎 스무개 정도가 마치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손 아래에는 연못처럼 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니까 아…, 고행 중인 사람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 카페 주인이 내 어깨를 아주 가볍게 쳤다. 나는 한번 웃어주고 다시 그림을 봤다. 그때부터 주인은 내 곁에서 조용히 그림을 같이 보는 것 같았다.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이 그림을 보고 있으니 서로 신경쓸 일이 없었다.


그림 속 고행자의 눈을 다시 봤다. 고행자는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가는 나뭇잎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아…, 집중을 하는구나 할 때 주인이 또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 그림은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손에서 저 손, 또 저 손에서 이 손으로 나뭇잎이 물에 빠지지 않게 하는 아마 깊은 도(道)의 그림이었다.


나도 흉내를 내봤다. 또 주인이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눈을 아래로 뜨고 손에 나뭇잎이 있는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나뭇잎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집중했다. 그러니까 이 손의 나뭇잎을 아주 천천히 저 손으로 옮기고 또 반대로…. 아….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는 나뭇잎을 열개로 상상하고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게 집중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해도 나뭇잎이 떨어진다. 나뭇잎의 모양도 바뀐다. 나뭇잎이 계속 공중에 떠있게 집중을 하는 거다.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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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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