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의 행위가 개별적으로 떳떳하다면, 개별행위들을 합쳐놓은 결과도 사회에 유익할 거라는 믿음은 우리 능력자 계층의 착각일 뿐이다.”


매튜 스튜어트가 <부당세습>에서 한 이 말을 오래 곱씹었다.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를 두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른바 86세대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는 항변을 듣게 된다. 불평등이 계급 문제라고 하면 주억거리지만, 세대 문제라고 하면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 심리를 스튜어트는 정확히 파악했다. 이름하여 대항서사. 그 서사를 우리 식으로 풀면 이렇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오른 건 오로지 실력 덕일 뿐이다. 알다시피 나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근근이 살아갈 만큼만 벌어왔다. 어머니의 현명함과 희생이 없었다면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터다. 고액과외나 받아 보았겠는가, 부족한 과목만 학원에서 보충하면서 스스로 공부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도 아르바이트와 성적 장학금으로 나왔다. 두루 내가 노력한 대가다. 


더욱이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는 사회 민주화에 이바지해왔다. 주변에 학생운동 안 한 녀석 없고, 여전히 운동성을 유지하는 녀석도 수두룩하다. 1억원 조금 넘는 연봉 가운데 후원금 명분으로 나가는 돈이 제법 되는 이유다. 그런데 왜 불평등의 원인이 우리 세대에 있다고 하나? 세대론을 들이대는 사람들 의도가 의심스럽다. 사회상층을 차지한, 특히 상위 1% 무리를 보라. 출발부터가 다르다. 실력과 노력으로 열매를 거둔 사람이 그 무리에 얼마나 되나. 금수저라는 딱지는 그쪽에 붙여야 마땅하다. 


자녀 문제에 이르면 핏대를 세우며 더 강한 대항서사를 써 내려간다. 재벌처럼 자식한테 재산을 물려줄 게 없으니, 공부라도 제대로 시키려 했다. 내가 번 돈으로 유학도 보내고 입시 컨설팅도 받았다. 정권 바뀔 때마다 널뛰는 입시제도 잘 활용했을 뿐이다. 융통성 있게, 네트워크 이용해 살아온 것일 뿐이다. 우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돈 있는 집안에서 하는 짓을 보아라.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말 그 사람들 너무 하더라.


지은이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집단을 능력자 계층이라 이름 짓는다. 대체로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2016년 기준으로 적게는 120만달러(약 14억원), 많게는 1000만달러(약 120억원)에 이르는 재산을 가진 계층이다. 능력자 계층의 소득수준을 보면 상위 9.9%에 해당한다. 흔히 사회 불평등 문제를 말하면 상위 1%를 지목해 그들을 악마화한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부를 집중적으로 늘려온 집단은 최상위 0.1%였다. 이 집단이 2012년 기준으로 미국 전체 부의 22%를 차지했다. 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자신의 몫을 단단히 거머쥐고 잘 지켜낸 집단은 능력자 계층이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지만 최상위와 최하위 집단의 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했다. 더욱이 능력자 계층은 “이 모든 혜택을 자녀들에게 대물림할 방법을 알아냈다.”


대물림 방법은 학벌세습이었다. 능력자 계층은 미국 대학 입시의 전형을 지혜롭게 활용했다. 꼭 공부만 잘할 필요는 없다. 동문 자녀 우대 정책이라는 에움길을 택하기도 했고, 체육특기자 선발을 이용하기도 했다. 스쿼시나 펜싱 같은 운동은 돈이 많이 드는지라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쳐서 문제가 되기는 했다. 유명인들이 수십만달러에 이르는 뒷돈을 주고 자녀를 체육특기생으로 부정입학시킨 사건이 터져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학벌세습에 목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미국에선 대졸자가 고졸 이하보다 70%나 돈을 더 번다. 10위권 안에 드는 명문대를 나오면 대졸자 평균보다 3배가량 연봉이 높다.


이 정도면 수치는 다르지만 미국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부의 양극화가 심각하지만 전문직 종사자의 소득과 재산은 우리 사회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자녀 대학입시 문제로 정치인이 공분의 대상이 되는 것도 학벌세습으로 부를 대물림한다고 대중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은이도 능력자 계층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분노를 문제 삼는다. 최상위 0.1% 세력은 만연된 불평등에 좌절한 집단을 포획해 능력자 계층과 대립하게 한다. 허무맹랑한 분석이라고 볼 일이 아니다. 트럼프의 성공이 이를 입증한다. 보수세력이 대중을 사로잡아 개혁이나 진보세력을 궁지로 모는 전략으로 공정성을 들고나오는 우리 정치현실도 여기에 들어맞는다.


인류는 지위와 부를 혈연관계에서 대물림하는 세습주의를 타파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나눠주는 능력주의 사회로 전환해 왔다. 미국이 대표적인 성공사례였고, 우리도 그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제 능력주의는 덫이 되었다. 능력이 세습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은이는 능력자 계층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데 주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역시 능력자 계층으로서 불평등을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은 점을 반성한다. “전쟁, 혁명, 국가의 붕괴, 전염병” 같은 치명적인 대재앙만이 불평등을 끝장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히려 최상위층과 공모해 왔노라 고백한다. 나 또한 내가 포함된 86세대를 비판하려고 이 글을 쓰지 않았다. 이철승이 말한 대로 “개인수준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수준의 비효율을 초래하는 예는 비일비재”한 법이다. 공동체의 가치에 이바지했으나 결과적으로 불평등이 강고해진 현실에 무관심했던 나 자신을 반성할 따름이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지은이가 한 다음의 말을 곱씹어 본다.


“미국혁명의 첫 세대는 대개 9.9%에 속했지만, 최상위층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최고의 혁명은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중상위 계층이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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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오직 인의일 따름인데 하필이면 이익을 말하느냐는 맹자의 결기가 말이다. 젊은 날 <맹자>를 읽었을 때는 당당함이 돋보였다. 권력자 앞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양보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그 용기야말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모든 것의 가치가 오로지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상황에서 맹자는 돈에 미친 시대를 건너게 해주는 지혜의 등대라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배병삼의 <맹자, 마음의 정치학>을 읽으면서 맹자 철학의 두터운 지층 가운데 한 켜가 철학 논쟁의 결과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맹자는 공자의 직계 제자가 아니다. 그는 제후의 푸줏간에는 살진 고기가 널려 있건만 들판에는 주려 죽은 백성의 시신이 널브러진 전란의 시대를 끝장내려면 어떤 철학이 필요한지 고심했다. 당대를 지배한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의 것을 섭렵하며 마침내 공자 철학에 동의했다. 그 철학을 이어나가되 비판하여 더 옹골찬 사유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맹자는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당장 전국시대를 사로잡았던 묵가와 싸워야 했다. 양주파 역시 그와 논쟁을 벌인 짝패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른바 명가, 법가, 병가와도 논전을 벌였다. 맹자 이해하기가 뜻밖에 어려운 것은 철학사의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인데, 달리 말해 맹자를 읽다보면 백가쟁명의 동양 고대철학을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배병삼의 책은 바로 이 논쟁점을 돋을새김하여 맹자 철학의 고갱이를 이해하도록 이끄는 데다 맹자와 맞붙은 쪽의 관점을 잘 해설해 놓아 두루 읽는 이에게 도움이 되도록 했다. 특히 묵가와 그 영향권에 놓인 고자와 벌인 치열한 철학적 전투는 흥미진진한 데다 다른 <맹자> 해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맹자 철학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하필왈리를 해설한 대목부터 묵가와 벌인 진검승부를 박진감 있게 풀이했다. 묵자 철학은 겸애로 수렴한다. 그런데 이 겸애하는 목적이 서로 이익을 나누기 위해서라는 점은 주목하지 않는다. 겸상애(兼相愛)는 곧 교상리(交相利)다. 맹자가 보기에 이 철학이야말로 교정리(交征利), 그러니까 이익을 다투는 위기를 몰고 온 주범이다. 묵자는 “남의 나라 위하기를 자기 나라 위하듯 한다면 그 누가 자기 나라를 들어 남의 나라를 치겠는가”라고 말했다. 배병삼은 이 구절에서 위민(爲民)주의를 읽어낸다. “요컨대 겸애를 바탕으로 군주가 백성을 ‘위하면’ 백성의 수가 늘어나고 군사력이 강해지므로 결과적으로 군주의 이익이 늘어난다는 것”일 뿐이다. 배병삼은 맹자 철학을 위민주의나 민본주의라 여겨온 통념을 비판하면서 맹자는 한마디로 여민(與民)의 철학이라는 점을 설득력 높게 풀이해냈다.


공손추가 맹자에게 부동심을 여쭙자 맹자가 직접 인용한 고자의 말은 교양인 수준에서 이해하기 상당히 어렵다. 고자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 했다. 배병삼은 고자가 한때 묵가에 몸담았던 인물이라는 점에 착안해 이 말을 묵가의 군사조직 원리에 기대어 풀이했다. 고자의 말은 상명하복의 피라미드식 조직이었던 묵가의 조직운영 원리인 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은 이해되지 않거나 불합리한 지시를 가리킨다. 묵가에서 마음은 “생존을 위한 계산 능력”에 불과했으니,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는 계산하지 말라는 뜻이다. 묵가는 마음을 다양하고 변화가 심해 고정불변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의는 외부에 있다는 의외론(義外論)을 펼쳤다. 반면, 맹자는 인의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제사에 쓸려고 끌고 가는 소가 부들부들 떨자 그 꼴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한 제선왕이나, 모르는 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 갈 적에 선뜻 구해주는 것은 오로지 누군가 겪는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없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마음에 깃든 선한 것을 지키고 키우고 확장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세우자는 게 맹자 철학이다.


이 대목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고자와 본성론을 두고 벌인 격론을 이해한다. 고자가 “인성으로 인의를 만드는 것이 꼭 버드나무로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외부에서 사람을 교정하는 제작적인 속성”을 드러낸 것이다. 고자가 성은 용출수와 같다고 하거나, 생이란 성이라 한 것이나, 성은 식색의 욕망이라 한 것은 인간을 한낱 본능적 동물로만 보았기에 한 말이다. 맹자가 공자에 이어 주목한 것은 기희(幾希)다. 사람이 금수와 구별되는 극히 드문 그 무엇을 찾았으니, 차마 못 본 척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그것이다. 어찌 보면, 맹자 철학은 위태롭다. 고작 마음에, 그것도 드문, 그런데 고작 ‘차마’라는 부사어로만 표현될 것으로 여민의 세상을 이루고자 했으니.


배병삼의 <맹자, 마음의 정치학>을 읽다보면 맹자의 고독을 느끼게 된다. 짐승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이루어내려면 어떤 방도가 있을까? 너도나도 지적 고투 끝에 방책을 내놓지만 결국에는 군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이르고 만다. 다른 길을 뚫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때 인의 가치를 신화적인 인물인 요순에 기대어 설파하는 공자를 발견한다. 맹자도 마음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발명하고 이를 널리 알렸으나, 권력자는 그의 철학을 외면한다. 이 책을 읽노라면, 2300년 된 &lt;맹자&gt;라는 현을 다시 켜 살아있는 음을 내려는 배병삼의 고독 또한 느껴진다. 여전히 이익만을 내세우는 시대에 맹자의 목소리는 한낱 소음으로 들리겠지만, 십여 년을 바쳐 &lt;맹자&gt;를 우리말로 옮기고 풀이해서 하는 말이다. 스스로 길을 낼 만한 인물이 아니라 자조한다면, 주저앉을 일이 아니라 길을 내며 남긴 발자취라도 따라가야 하는 법. 배병삼이 다시 연 맹자가 꿈꾼 그 길을 기꺼운 마음으로 걸어보자.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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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발표 때부터 화제가 되었던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를 읽으며 마음이 착잡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이끈 ‘386세대’가 이제 강고한 기득권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음 세대의 미래를 가로막는다는 분석에 대체로 동의할 수밖에 없어서다. 특히 지은이가 던진 질문은 등골이 서늘한 긴장을 느끼며 곱씹어 보았다. 지은이는 물었다. 386세대가 노동시장에서 고통받는 청년세대와 여성, 그리고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맞서 싸웠던 산업화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민주주의가 터 잡았는데 왜 우리 사회는 더 잔인한 계층화와 착취의 기제를 발달시켰는가, 라고.


386세대는 반체제 지식인과 민중세력의 결집으로 권위적인 정치권력을 무너뜨렸다. 민주화 이후 386세대는 대거 직업정치인이나 전문관료로 변신했다. 지은이는 이를 ‘시민사회의 국가화’라 했다. ‘1987년 체제’라는 말은 386세대가 이룬 역사적 성과의 한 상징이다. 운도 따랐다. 1997년에 몰아닥친 외환위기는 386세대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위기를 이겨내려고 자본은 구조조정의 칼을 뺐다. 윗세대가 경제영역에서 강제퇴역 당하고, 다음 세대는 아예 진입이 막혔다. 정보화 시대는 완전한 세대교체를 이루는 결정타였다. 정치와 경제, 시민사회를 장악한 386세대는 ‘이익 네트워크’를 이뤄내며 우리 사회의 확실한 지배그룹이 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386세대가 맞이한 화양연화의 시대는 찬란하나니, “다른 세대를 압도하는 고위직 장악률과 상층 노동시장 점유율, 최장의 근속연수, 최고 수준의 임금과 소득점유율, 꺾일 줄 모르는 최고의 소득상승률, 세대 간 최고의 소득격차”, 참으로 다 이루었도다! 라고 감탄할 만하다. 그런데 지은이가 또 물었다. ‘신분제 사회를 만들어 놓고 내 자식이 신분제 사회의 상층에 오를 확률을 높이는 전략과, 신분제 사회를 해체하고 내 자식과 다른 자식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사회적 위험을 분담하며, 노동의 대가를 적절히 공유하는 사회를 만드는 전략 중 어느 쪽이 현명한가?”라고.


아무리 386세대가 득세한다고 하더라도 신분제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항변할 수 있을 터다. <불평등의 세대>는 이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지를 밝히기 위해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산업화 세대는 주로 1930년대생이다. 이들은 벼농사 문화에서 비롯한 신분제와 위계문화가 몸에 배었다. 그러다보니, 산업화 세대는 교육과 자산 투자를 통해 과거의 신분제적 위계를 재생산하거나 극복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 세대의 불평등은 대물림되었다. 오늘의 노동 지위를 분석하는 틀로 지은이는 결합노동시장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고용형태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일터가 대기업인지 중소기업인지, 작업장에 노조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세 가지 기준을 내세웠다. 이 기준에서 두 개 이상을 충족하면 노동시장에서 상층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대기업-정규직-유노조의 조건에 들면 상층으로 전체 임금노동자의 20%가량이다. 대기업-비정규직-무노조는 중층으로 약 30%다. 중소기업-비정규직-무노조는 하층으로 50%를 차지한다. 이 결합노동시장 지위가 중요한 것은 한 지위에 들어서 줄곧 그 상태를 유지하면 신분계급화의 초기 단계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세대의 노동시장 지위가 자식세대에게도 이어진다면 이를 세습화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여러 지표로 새로운 의미의 신분제 사회가 닥쳤음을 입증했다.


이제 지은이의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386세대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난리냐는 항변은 통하지 않는다. 자유와 평등의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젊은날을 희생한 세대다. 그런데 자본의 자유는 실현되었을지언정 일하는 사람의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나서야 한다. 이 예기치 못한 지옥도를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젊은날 목청껏 외쳤던 평등의 가치가 오롯이 실현되도록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지은이는 그 방법으로 “한국사회에 대한 386세대의 두 번째 희생”을 촉구했다. 노동시장에서 가장 불리한 자리에 놓인 다음 세대에게 최대의 기회를 보장하려면 386세대의 양보를 전제로 몇 가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임금 삭감, 임금피크제, 연금 혜택 축소로 마련한 돈으로 청년고용을 확대하자고 한다. 지금의 연공제는 불황일 때 기업이 비정규직을 늘리고 고용을 동결하는 핑계가 되니 직무제로 전환해야 한단다. 그리고 증여나 상속에 따른 세금을 엄격히 집행해 그 일부를 청년세대 주거권 보장을 위해 사용하도록 법제화하는 방안도 내놓았다. 


청년세대를 위한 복지국가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대안도 제시했다. (재)훈련 시스템을 도입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취업 및 창업 알선기관을 확장해야 한단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정규직 위주의 유연화를 지양하잔다. 사회안전망을 확충하자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하여 “도발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담대한 젊은이가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보자고 호소한다. 지은이는 이 대안을 ‘사회적 자유주의’라 이름 붙였다. 고삐 풀린 자본의 횡포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회와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국가의 힘을 빌리자는 뜻을 담았다.


책을 덮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386세대는 과연 희생의 길을 택할까? 도리질만 했다. 지은이도 말했지만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경우는 드물다”. 거기다 지은이의 대안은 자본계급의 양보가 포함되지 않았다. 일방적 양보를 택할 세대는 없다. 내가 보건대 세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역시 지은이도 말했지만, 다음 세대가 “386세대를 통한 대리정치를 끝내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데 있다. 청년세대가 정치세력화해 386세대를 압박해야 한다. 자기 세대에게 주어진 소명을 명예롭게 마치고 퇴장할 것인지, 아니면 다음 세대에게 추방당할 것인지 택일하라고 말이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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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에로스의 짝패로 타나토스를 꼽았다. 우리 무의식에는 삶에 대한 충동뿐만 아니라 파괴 본능도 있다는 말이다.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의 대담을 기록한 <사쿠라 진다>를 보면 오늘의 일본이 타나토스적 충동에 빠져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우치다는 흥미로운 사례를 들었다. 일본도 지방이 황폐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뜻있는 이들이 지역 활성화 사업을 펼치려 하면, 일종의 토호세력 가운데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대체로 3대째 내려오는 여관이나 요정의 주인이다. 지역경제가 무너지면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데 상식 밖의 반응을 보인다. 속사정을 살펴보면 이해 가는 면이 있다. 이들은 물려받은 업을 지켜야 한다는 책무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능력이 없지만 스스로 버릴 수는 없으니, 누군가 무너뜨려주길 바라는 숨은 열망이 있었던 셈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늘의 일본 정치인은 3대조가 설계하고 만들어낸 체제를 물려받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스템이 낡고 망가졌다. 문제는 다시 세우고 고치기엔 실력도 열정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이 체제가 해체되길 바란다. 마치 지역 활성화 사업을 반대한 여관 주인처럼 말이다. 일본을 혐오하는 외국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을 터다. 하지만 일본의 지식인이 내뱉은 말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톺아보아야 한다. 특히 왜 일본의 지배층이 이런 극단의 길을 가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우치다는 말한다. “상상을 뛰어넘는 참혹한 사태에 이르면 누구의 책임이니 누구의 잘못이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이 잿더미로 돌아간 다음에 망연자실하며 제행무상을 느끼는, 그러니까 파국원망이 일본의 전통 무상관(無常觀)에 뿌리내린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 이쯤에 이르면 오늘 일본의 병증이 어느 정도 악화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소장 사회학자 시라이는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을 이른바 영속패전론이라는 프리즘으로 분석한다. 이 개념은 일본 지배층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부인하고 미국에 비굴하게 종속한 점을 가리킨다. 일본 지배층은 패배라는 말보다 종전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전쟁을 일으켰던 집단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어서 그렇다. 역사의 단죄를 받았어야 할 집단이 지배층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냉전체제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미국의 처지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해줄 게 뻔한 좌파에게 권력을 내줄 리 없었다. 비굴한 대미 굴종은 여기서 비롯했다. “일본의 보수 정치세력은 미국의 허락 아래 권력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터라” 미국에 감히 맞설 수 없으니 “일본은 미국에 영원히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일본 지배층이 패전을 숨기는 또 다른 방식은 아시아에서 패배한 사실을 감추는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했던 중국과 식민지배했던 한반도에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 경제가 재기에 성공하면서 주변국이 타협책을 모색한 것도 이런 경향을 강화했다.


일본이 위기에 놓인 것은 바로 이 구도가 끝장나서다. 먼저 냉전이 종식되었고, 한국과 중국이 눈부실 정도로 성장했다. 이른바 영속패전 체제가 무너졌는데, 새로운 체제에 걸맞은 방책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아베의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이라는 퇴행적 정책이 여론의 힘을 얻고 있다. 이 정책을 일러 우치다는 일본의 싱가포르화, 북한화라고 지적한다. 싱가포르의 국시는 경제성장이다. 그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잣대는 오로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가이다. 성장에 도움이 안되면 민주주의도 필요없다는 식이다. 더불어 북한처럼 핵무장하고 징병제 해서 무서운 국가로 동아시아에서 군림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 대목에서 다시 우치다는 말한다. “자력으로는 오늘날의 미·일 질서를 바꾸거나 수정 보완할 힘도 없고, 비전도 없기 때문에 전부 엉망진창이 돼버리는 파국이 도래하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이런 관점에서 <고질라> 시리즈는 재해석된다. 사토 겐지는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는 분열했고 파괴를 간절히 바라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그 무의식을 형상화한 게 고질라라고 보았단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의 상황은 고질라가 스크린에서 튀어나와 일본 본토를 습격한 격이었다고 분석했다고 한다. 우치다는 일본인의 죄책감과 자기처벌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 고질라라고 해석했다. 고질라가 일본을 습격한다는 내용은 근대 일본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억압한 것들의 귀환이라고 평가했다. 


두 논객의 날카롭고 거침없는 대담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베의 재집권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가 요동치는 이유를 알 수 있고, 최근의 무역보복이 뜻하는 바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이익 때문에 역사청산이 이뤄지지 않았고, 영속패전 체제 이후를 준비 못해 위기에 빠졌다는 점은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일제 잔재 청산을 못했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다. 아직은 일본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일본 못지않게 큰 위기를 맞이할 것이 확실하다. 


또 있다. 우치다는 극우세력이 극성을 떠는 나라의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프랑스는 전쟁기간에 나치에 협력했기에 패전국가라고 주장한다. 레지스탕스와 드골의 활약을 방패 삼아 비시정권의 과오를 은폐했을 뿐이다. 그 결과 자유·평등·박애의 나라에 극우집단이 나타나 세를 얻고 있다. “어떤 나라에서나 극우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이유는 말하기 어렵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을 억압한 데에 있다는 일반논리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역사 청산의 기한이 끝난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되물어볼 일이다. 왜 우리 사회에 다시 극우집단이 준동하는가, 라고.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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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문득 이 책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지성이 공유해야 할 ‘전환시대의 논리’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리영희가 쓴 그 책을 출판사에서 소개한 글을 찾아보았다. 그 소개글에 나온 특정한 단어를 괄호에 넣고 읽으면 두 책의 기본정신이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  “(  )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을 교정하고, (  ) 등을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함으로써 (  ) 허위의식을 타파하는 현실인식, 편협하고 왜곡된 (  ) 거부하는 넓은 세계적 관점, 냉철한 과학적 정신을 계몽하고 민주적 시민운동에 앞장서는 이론적 역할을 수행했다.” 김종철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이다.


그는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지구 온난화나 기후변화 같은 환경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그가 보기에 근대 자본주의 문명은 “자연을 끊임없이 수탈하고,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가공할 생태위기를 초래”한다. 이 지점에서 근대의 발전이 인류사에 불러온 놀라운 성장을 부정하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서구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의해서만 문명생활도 가능하고, 더 높은 단계로의 인간해방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관점을 ‘근대적 미신’이라 말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972년 로마클럽에서 출간한 <성장의 한계>는 제목 자체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제 더는 성장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환경 오염 문제가 심각한 탓이다. 두 번째는 “근원적으로 타자-동시대의 사회적 약자와 자연 그리고 미래세대-에 대한 무관심 혹은 무책임한 태도”에 바탕을 둔 비윤리성 탓이다. 타자를 변경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 근대 자본주의 문명은 늘 변경을 만들어왔다. 그 변경을 지배하고 수탈한 덕으로 발전하고 성장하고 팽창했다. 하나 변경은 이제 없다. 독립하여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고 있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진보를 추구한다는 것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모순”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40여년 전 리영희는 분단상황과 군사독재의 탄압으로 이성의 눈이 가려지고, 그 결과 사로잡혔던 이데올로기적 편협성을 부숴버리라고 했다. 베트남 전쟁의 실상,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통찰, 일본의 재군사화에 대한 경고,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그 전환의 길을 김종철이 걷는다. 근대, 자본주의, 산업화, 성장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홀로세에서 인류세로 치닫는 오늘, 우리는 어떤 전환적 사고를 해야 여섯 번째 대멸종을 피할 수 있는가, 라고.


그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대안으로 소농을 기반으로 한 생태적 순환사회를 내세운다. 석유에 기초한 문명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닥쳐올 재앙은 식량난이다. 일본의 식량자급률이 40%인데, 석유가 없으면 1%로 곤두박질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25% 수준이니 석유 수급에 이상이 생길 적에 겪을 고초를 짐작할 수 있다. 농사를 살려야 하는 이유다. 이런 사회는 궁극에는 “공동체의 호혜적 관계망을 토대로 다양한 상호부조의 경제”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이 사회가 가난하리라 짐작하면서 공빈(共貧)의 철학을 내세운다. “가난을 견딜 만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가난을 삶의 축복이 되게 하는 사회적 토대, 즉 공생공락의 네트워크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기본소득세이다. 신약성서를 보면 포도원 주인이 일꾼에게 품삯 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 점심 먹고 나서 일한 사람, 해지기 직전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 주인은 똑같이 1데나리온을 주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는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기본소득의 예고였다고 풀이한다. 무릎을 치게 하는 대목이다.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일정한 소득을 정기적으로 주는 ‘기본소득’을 그는 ‘시민배당’이라고 고쳐 말한다. 없는 이를 도와주는 복지의 개념이 아니라, 기업이 주주에게 배당하듯 한 공동체의 이익을 시민에게 나누는 뜻을 돋을새김하기 위해서다. 시민배당은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된다. 경제를 안정시키고, 노동조건이 개선되고, 교육지옥에서 빠져나오고, 관료적 정부형태에서 벗어나게 할 터다.


세 번째는 민주주의다. 인류의 미래가치에 동의하는 정치는 자본의 횡포를 막고 생태친화적 환경을 만들어 낸다. 라파엘 코레아가 에콰도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약속한 대로 외채를 청산하고, 은행세를 신설해 기본소득을 실시했고 야수니국립공원에서 발견한 새 유전의 개발을 잠정포기했다. 정치적 결단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지, 더 많은 경제성장은 아니다”.


성장과 진보의 세계관은 프로메테우스를 섬긴다. 그의 이름이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데다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어서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상식을 깨고 에피메테우스를 더 기려야 한다고 말했단다. 그의 이름은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던가. 인류가 걸어온 성장의 삶을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문명적 성찰의 상징으로 에피메테우스가 적격이라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에피메테우스의 아내인 판도라가 금기를 어기고 항아리 뚜껑을 열자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여기까지만 기억한다. 판도라가 급히 뚜껑을 닫는 바람에 항아리 맨 밑바닥에 놓여 있던 그 무엇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희망이었다.


다시 판도라의 항아리 뚜껑을 열어야 한다. 진보와 성장에 눈이 멀어 오랫동안 잊었던 그 희망을 인간세계에 퍼트려야 한다. 김종철의 사유를 20세기의 리영희를 읽는 심정으로 ‘열독’해야 할 이유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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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건축가 반 시게루는 불러야 비로소 가지 않았다.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즉 못 본 척할 수 없어 먼저 달려갔다. 1994년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이 일으킨 민족분쟁으로 난민이 발생했다. 한여름, 텔레비전 뉴스에 비참한 난민의 모습이 나왔다. 그는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다 담요를 두른 난민이 떠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보았다. 가을에 들어서면서 우기가 닥쳐 온도가 떨어져 벌어진 일이었다. 여름에는 콜레라로 시달리더니 이제는 폐렴이 돌았단다. 난민용 쉼터가 플라스틱 시트라 비바람을 막지 못한다는 것 을 알고 그는 단열 효과가 있는 종이 파이프 쉼터를 제안했다. 도쿄 소재 유엔난민기구 사무소에 직접 찾아가 한 일인데, 제네바에 있는 본부에 연락해 보라 했다. 편지에다 자료를 덧붙여 보냈는데 답신이 없자 아예 담당자를 찾아 제네바로 갔다.


가서 보니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유엔난민기구가 플라스틱 시트만 나눠준 탓에 나무를 함부로 베어 시트를 보강하는 틀을 마련했다. 당시 난민이 200만명이었으니, 아주 적게 잡아도 200만그루가 한꺼번에 잘려나간 셈이다. 과거에 알루미늄 파이프를 나눠준 적이 있는데, 돈이 된다고 내다 팔고 나무를 베었다고 한다. PVC파이프는 나중에 공해를 일으키는지라 참고 대상이 아니었다. 반은 이미 이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건축 공부를 마치고 일본에 돌아온 다음, 전시기획 일을 맡았다. 마침 핀란드의 건축가 알바 알토의 가구전을 기획하면서 이모저모 궁리했다. 반은 그의 작품세계를 살리려면 나무를 많이 써야 하는데, 예산 문제도 있고 전시회가 끝나고 나무를 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자원이 낭비되고, 환경이 파괴되고, 생태계가 무너지는 것을. 나라 전체에 돈이 넘쳐나 소비와 발전, 그리고 건설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혔을 적에 그는 ‘재생지’ ‘재활용’ ‘친환경’이라는 열쇳말을 두고 고민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지구는 전대미문의 커다란 문제, 즉 ‘환경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궁즉통이라, 마침내 새로운 소재를 발견했다. 재생지로 만든 종이 튜브.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두루마리 휴지의 심을 떠올리면 된다. 그걸로 어떻게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싶겠지만, 첨단기술로 나무보다 더 강한 종이 튜브를 만들 수 있고, 강도가 약한 재료로 외려 튼튼한 구조물을 세울 수 있다고 한다. 종이 튜브를 다닥다닥 붙여 벽면을 만들거나 고대 그리스풍의 건물처럼 줄기둥을 잔뜩 세우면 된다. 큰 지진이 나면 콘크리트건물은 무너지지만 목조건물은 멀쩡한 일이 잦았다. 건물이 가벼우면 지진에 잘 견디는 면이 있다. 종이집이 여러모로 맞춤하다는 말이다. 1995년 고베지역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다른 무엇보다 건축물에 깔려 목숨을 잃은 일이 아주 많았다. 직업과 관계없이 숱한 사람이 자원봉사하러 갔는데, 정작 건축가는 없었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었다. 반은 모른 척할 수 없어 베트남 출신 난민이 모인 다카토리성당으로 갔다. 성당도 큰 피해를 보았지만 지역 재건을 위한 자원봉사자의 활동기지 역할을 도맡았다. 신부님에게 예의 종이로 가설건물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신부님은 성당보다 지역민이 더 중요하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재건사업을 더 잘하려면 성당이 구심점이 돼야 했다. 좋은 일 하기도 쉽지 않은 법이다. 반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커뮤니티 홀인 종이성당을 지었다. 신도나 지역민이나 이 건물을 아낀지라 성당을 재건축하더라도 헐지 말자 했는데, 1999년 대만 푸리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같은 용도로 쓰고 싶다며 보내달라 했다. ‘과부 설움은 동무 과부가 안다’고 기꺼이 보내주었다. 본디 조립용인지라 해체해 배편으로 대만에 보냈고 현지에서 재조립해 커뮤니티센터 겸 콘서트홀로 쓰였다.


반은 종이성당을 지으며 베트남 출신 난민도 도왔다. 공원에 천막을 설치해 버티고 있는데, 여론이 심상치 않았다. 퇴거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싸고 쉽게 조립하고 단열도 되고 외관도 좋은 가설주택인 종이 로그하우스를 짓기로 했다. 맥주상자를 바닥으로 삼고 종이 튜브로 벽면을 세우고 지붕에 천막을 덧씌웠다. 선진국에는 가설주택으로, 개발도상국에는 주택으로 적합한 본보기가 완성된 셈이다. 그의 건축철학이 꽃피운 것은 독일 하노버 엑스포 일본관이었다. 박람회가 끝난 후 파빌리온 해체 과정에서 산업 폐기물을 최소화하는 것을 설계이념으로 삼았다. 기초는 강철 프레임과 비계용 판자로 구성한 상자에 모래를 채워 넣는 것으로 했다. 해체한 다음에 재사용하기 위해서다. 종이 튜브로 돔의 골격을 세웠으니, 종이건축의 새 장을 열었다. 


남들은 그야말로 기념비적 건축물 짓기에 급급한 현실에서 이 건축가는 도대체 왜 인도주의적이며 환경친화적 건축에 매달릴까 나는 궁금했다. 그는 스스로 물었단다. 우리 건축가는 과연 사회에 도움이 되는가라고. 그러고는 “세계 곳곳에서 민족분쟁, 지역분쟁이 발발하여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세계적 규모의 노숙인 문제, 빈발하는 재난 피해자 등 소수 계층 사람들이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는 바, “앞으로 건축가는 어떻게 사회와 소수자를 위해서 일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름하여 불인인지심의 건축학이라 할 만하다.


내가 사는 동네 근방에 신도시가 들어선다고 한다. 돈 있는 사람이 투기하는 크고 넓은 아파트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임대주택이나 청년을 위한 주거시설이 더 많아지길 소망하리라 여겼다. 착각이었다. 벌써 집값 내려갔다며 집단시위를 했다. 보금자리를 오직 환금가치로만 평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우리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지 되새김질해 보려면 반 시게루의 <행동하는 종이 건축>을 읽어볼 일이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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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을까? 화학을 사랑했던 한 청년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고, 거기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다. 주변 사람이 죽어나갔다. 이제, 운이 다한지도 모른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살아남았고, 수용소 생활에 버금가는 고난의 행군을 겪고나서야 귀향했다. 살고자 하는 의지보다 증언해야 한다는 열망이 죽음의 망토를 거둬냈다. 마침내 썼다, 그 짐승의 시대를. 시적 영감으로 가득한 자서전(<주기율표>)도 쓰고, 가혹한 고통을 담담하게 기록한 증언집(<이것이 인간인가> <휴전>)도 펴냈고, 시집(<살아남은 자의 아픔>)도 소설(<지금이 아니면 언제?>)도 썼다. 그런데 그에게 남은 말이 있을까?


프리모 레비와 조반니 테시오가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프리모 레비의 말>을 집어들며 떠오른 단상이다. 어쩌면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일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 다 괴롭지 않았을까 싶었다. 더는 나올 말이 없으니까. 그런데 심상찮은 점이 있었다. 마지막 인터뷰라는 부제가 달려서다. 1987년 1월12일 첫 대담을 하고 1월26일과 2월8일에 대담을 이어갔다. 레비가 수술을 받으면서 대담은 중단되었다. 4월 들어 부활절을 앞두고 레비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다시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단다. 그래서 다음주에 만날 약속을 잡기로 했으나, 그 약속은 끝내 잡을 수 없었다. 레비가 자살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떤 관점에서 <프리모 레비의 말>을 읽어야 할지 뚜렷해졌다. 그의 말을 읽으며 그가 끝내 말하지 않은 말을 읽어내기. 물론, 이 독법은 실패할 터다. 아직 누구도 레비가 자살한 이유를 속 시원히 말해준 사람은 없으니까. 만약 이 책에 그 답이 있다면 눈 밝은 이가 벌써 떠벌렸을 터다. 무모한 독서가 시작되었다. 레비는 이런 독법을 예측했을까? 대담집의 첫 구절이 “전투 계획은 벌써 다 세웠겠지요?”였다. 이런, 실패하겠군. 어찌 그를 능가할 전투력이 있겠는가.


레비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호기심이 강해, 책을 엄청나게 읽었다. 기술학교를 나온지라 배경지식이 부족했지만 무차별적으로 책을 읽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쓴 책을 읽었는데,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독일어판 쇼펜하우어 책을 읽는 호기를 부렸다. 앎에만 탐닉한 것이 아니라 삶을 즐길 줄도 알았다. 봉 비방(bon vivant)이라, 친구, 음식, 술을 좋아하는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레비에게서 엿볼 수 있는 진지한 독서인의 모습과 삶을 눙치는 유머가 다 아버지에게서 비롯한 듯싶다. 


레비는 반파시즘 유격활동을 하려다 잡혀 수용소로 끌려갔다. 무척 저항심이 강하고 정의로울 듯싶지만,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레비는 자신의 집안을 일러 부르주아라 했다. 아버지는 젊을 적에 외국에 나가 있었는데, 특히 헝가리혁명을 목격하고는 혁명이나 개혁을 마뜩잖게 여겼다. 아버지는 체질적으로 자유주의자인지라 파시즘 또한 못마땅히 여겼지만, 결국에는 파시스트당에 입당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서였을 터다. 레비는 파시즘 교리에 어떤 매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생명력, 생의 약동 같은 원리가 열다섯 살 소년의 호기심을 끌었던 것이다.


책 곳곳에서 레비가 내성적 인물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을 만난다. 그는 늦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제일 연약하고 제일 작았다. 유머감각을 발휘해 그 시절 성적은 만년 2등이지만 키 작은 거로는 1등 했노라 회고했다. 기를 못 펴던 소년 시절이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성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또래들의 성적 농담이 그를 괴롭혔다. 주로 “무모할 정도로 과격”한 등산으로 버텼다.


대담자는 레비의 이 부분을 짓궂게 물고 늘어진다. 레비는 사랑을 거부할 여성과 사귀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어렴풋하게 했을 뿐이며 극도로 순수했노라 토를 달았다. 하지만 여기에도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인종법이 발동하면서 더욱 위축되었던 셈이다. 그런 레비에게 큰 상처를 준 사건이 있었다. 한 여인을 사랑했다. 여성은 당황스러워했다. 그의 소극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다. 둘이 같이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다가 체포되었고, 그녀는 끝내 죽었다. 죄책감이 그를 억눌렀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야, 여동생의 친구인 반다 마에스토로와 결혼하면서 비로소 행복과 성취감을 느꼈다. 영혼이 파괴되는 단련을 겪고나서야 성인이 되었다. 누군가는 그의 결혼을 일러 “잔인하게 부정되었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확인하는 행위”라 했다.


글쓰기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본디 글쓰기에 중압감이 없었다 한다. 초기에 펴낸 책은 쓰고 싶어서 “쉽게, 부담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썼단다. “내 살과 피”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전업작가가 아니었던지라 공장에서 여덟 시간을 보내고 밤에 집에 와서 글을 썼다. 레비는 이런 자세에 자부심이 있었다. 두 가지 일을 오랫동안 적절히 해왔고, 그 성과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은 아주 강한 존재였다고 말했다. 왜 아니겠는가. 분명 레비는 샤먼이 되어 공수하듯 글을 썼을 것이다. 그 잔인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억울한 영혼을 위한 조사를 쓰지 않고선 배겨낼 수 없었을 테니.


레비의 말을 보면서 어떤 말하지 않은 말을 읽고 싶었을까?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왜 그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는지 그 징후를 눈치채고 싶었다. 마지막 인터뷰에도 실마리는 없었다. 단지 이 책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인지, 이때까지도 미처 말하지 못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거 때문에 죽었을까, 미래 때문에 저버렸을까? 자꾸 후자에 무게를 두게 된다. 탄압받고 고통을 당했던 이들이 오히려 악행을 저지르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그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성싶다. 레비가 처음인 독자라면 이 책과 함께 <이것이 인간인가>의 부록으로 실린 ‘독자들에게 답한다’를 읽어보길 권한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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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은 사랑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무릇 신분이 높고 돈이 많은 남자는 오만하기 십상이다. 이 오만은 지적이고 예민한 감수성의 여성에게 편견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의 감정이 싹터 오르기보다 견원지간이 될 공산이 크다. 사랑의 방정식이 오묘한 것은, 어떤 계기로 우호적인 감정이 갈마들다보면 오만의 정도는 옅어지고 그만큼 편견도 줄어들어, 해(解)가 보인다는 점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제인 오스틴은 말하고 싶었다. 오만과 편견이 해소되는 과정이라고.


진화심리학을 둘러싼 소란은 결국 오만과 편견이 충돌한 결과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과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양 설레발쳤다. 복잡미묘한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 치고 사이비 아닌 바가 없는 법이다. 맹공이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진화심리학은 인간세계에 퍼져 있는 불평등 구조를 옹호하는, 지극히 수구적인 학문으로 알려졌다. 무릇 오만과 편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데는 오만한 쪽에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더 자세히 설명하고 더 많은 근거로 설득하고 더 열린 태도로 반론에 대답해야 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전중환은 국내에서 진화심리학을 둘러싼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도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에서 “인간의 ‘모든’ 심리현상을 진화적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를 곱게 바라볼 리 없다. 진화의 결과로서 몸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마음마저 “인류가 진화한 먼 과거의 환경에서 조상들이 직면했던 적응적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심리기제들의 묶음”이라 여기기 난감할 터다. 전도사로서 전중환은 곤란을 겪었겠지만, 그동안의 논쟁을 바탕으로 진화심리학에 관한 백과사전 격인 &lt;진화한 마음&gt;이 나온 것은, 책 읽는 사람 처지에서는 무척 반가운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책의 앞부분은 진화심리학을 위한 변론으로 가득하다. 진화심리학의 기원과 그 핵심 내용을 설명했다. 진화심리학의 ‘공리’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현대인의 두개골 안에는 석기시대의 마음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다음을 이은 ‘흔한 오해들’ 편이다. 진화심리학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어떤 행동이든 수렵-채집 시기에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면 다 설명한 양 한다는 것. 이에 가설, 예측, 연구를 통한 검증을 거쳐 결과가 예측과 부합할 때만 진화적 가설로 받아들인다고 해명한다. 두 번째는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비난에 대한 변호. 심리기제는 특정한 환경에 걸맞은 적응적 행동의 설계라며 유전자 결정론이 아니라 선택론을 옹호할 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세 번째는 잘못된 행동을 자연적이라며 정당화했다는 비판에 대한 반론. 설명은 정당화가 아니라며 진화심리학의 인과적 설명이 오히려 이런 행동을 없애거나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자신했다. 마지막은 번식만이 인간의 유일한 목표인 듯 내세운다는 비판. 이에 대해서는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수준에는 ‘어떻게’에 해당하는 근접설명과 ‘왜’에 해당하는 궁극설명이 있는데, 진화심리학은 후자라고 말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확인해보자. 먼저, 혐오감은 왜 발생할까? 한 공중보건학자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목록과 병원체를 옮기는 요인이 겹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콧물은 결핵, 인플루엔자, 홍역, 폐렴을 옮긴다. 쥐는 유행성 출혈열이나 라사열을 일으키는 병원체를 옮긴다. 고름이나 딱지에는 우리 몸을 해칠 병원체가 숨어 있다. “혐오가 병원체 감염을 예방하는 심리적 적응”이라 할 만한 이유다. 이 관점에 서면 자기집단 중심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을 다른 차원에서 보게 된다. &lt;총, 균, 쇠&gt;를 통해 널리 알려졌듯 잉카제국의 전사는 스페인의 총보다 병균 때문에 패배했다. 총알보다 전염병이 더 빠른 법이다, 외부인의 병원체는 내가 속한 집단에게는 치명타를 입힌다. 그러니, 혐오 정서가 발동해 외부인을 기피하게끔 진화했을 터다. 여기서 논쟁이 비롯된다. 진화심리학은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나 다른 민족에 대한 혐오를 옹호하는 것이냐고. 전중환은 아니라고 말한다. “현상을 설명할 뿐,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잊지 말자. 사려 깊은 이성적 추론 능력도 진화된 인간 본성이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진화심리학은 이 말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밝혀낸다. 인간 아기는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으로 나온다. 여성의 산도는 좁아지고 인간의 두뇌는 커진 적응적 결과다. 뭇 인간은 다 조산아인 셈이다. 가족의 사랑과 배려라는 인큐베이터에서 양육되어야 훗날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 육아에 품이 많이 드는지라 대행어미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엄마의 아기, 아빠의 아마도(mother’s baby, father’s maybe)”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다른 누구보다 외할머니가 손주 보는 데 시간과 품을 기꺼이 투자했다. 이 사실은 한부모 가정에 대한 지원정책에 시사점을 준다. 미국의 사례이지만 10대 미혼모의 아이가 외할머니와 함께 살거나 자주 만났을 적에 엄마와 더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다른 연구에서는 숙련된 간호사가 첫 아기를 낳은 엄마의 집을 한두 달에 한 번 방문해서 고민을 들어준 것만으로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밝혔다. 금전적 혜택보다 정서적 지원이 더 큰 효과를 거둘 수도 있을 성싶다.


전중환은 책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진화된 본성을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과학과 합리적 추론을 통해 어떤 본성은 강화하고 어떤 본성은 억제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그것이 사회적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주목했더라면 소모적인 논쟁은 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이 해소돼 사랑에 이르면 오만은 자긍심이 된다고 했다. 이번 책을 기점으로 진화심리학이 과학적 사유의 자긍심이 되길 바란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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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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