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었다. 이 장편소설은 한국전쟁 이후 러시아문학을 주로 번역하던 백석이 1956년 동시를 발표하며 다시 시작활동을 하다가 1962년 역시 동시를 발표하고 절필한 시기까지를 서정적 문체로 복원했다. 작품을 읽으며 백석이 자문했던 세 가지 질문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 “나는 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은 백석이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의 선전선동에 동원되고 수령의 우상화에 이바지하는 시를 쓸 수는 없었다. 사람살이의 정겨움과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깃든 “음식 이름들, 옛 지명들, 사투리들”의 시어는 박살나고 “미리 제작한 벽체를 올려 아파트를 건설하듯이 한정된 단어와 판에 박힌 표현만으로 쓰인”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만 넘쳐났다.

 

그 새로운 시의 건설현장에 동원된다는 말은 한설야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문학은 오로지 수령의 후광을 빛내는 데 필요할 뿐이다. 권력의 시녀로 언어가 타락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얻은 권력으로 빼어난 문인을 숙청했다. 문학의 영토에 꽂혔던 자유와 상상의 깃발은 꺾였다. 종파주의와 소부르주아적 근성을 박멸하자는 깃발이 세워졌다.

 

본디 시는 한낱 촛불일 뿐이다. 당과 수령의 말은 “준엄하고 매섭고 치밀하다”. 촛불이 어찌 권력의 눈보라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 시인이 피워 올린 불꽃 덕에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 붙는” 법이다. 아마도 그래서 백석은 시를 다시 썼을 테다.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고 북한에도 해빙의 조짐이 보여서가 아니고.

 

두 번째 질문. “왜 그때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나?” 백석은 월북도 아니요 납북도 아니다. 흔히 재북(在北) 작가라 말한다. 일제강점기 끝무렵에 만주에 있다가 해방되자 고향 정주로 내려왔다. 오산고등학교 교장 출신인 조만식의 통역비서를 맡은 데서 볼 수 있듯, 그리고 그의 시세계가 펼쳐 보이듯 북한체제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 서울에서도 오랫동안 생활한지라 적절할 때 남하했다면, 전쟁 후 빈약한 남한 문단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왜 내려오지 않았을까? 거느린 식솔 때문에? 고향의 맛과 멋, 그리고 말 때문에? 시인다운 순진함 탓에 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안타까워할 도리밖에 없다.

 

세 번째 질문.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이 질문은 앞의 두 질문을 포함한다. 시는 생리적으로 평등보다 자유를, 이념보다 사랑을 더 중시하는 체제와 어울릴지 모른다. 그런데 백석은 다른 선택을 했다. 자고로 백석 같은 선택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는지는 20세기 세계문학사가 증명한다. 바스타치야. 전염병이 돌자 북한 당국은 이 예방법을 택했다. 소극적인 예방을 넘어 병인이 되는 외부환경 전체를 바꾼다는 뜻이다. 이 예방법은 하나의 은유였다. 잠깐의 해빙기가 지나자 당의 역공세가 펼쳐졌다. “사상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바꿔 궁극적으로 환경 전체를 개조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백석은 시를 다시 썼고, 시정신을 훼손하는 권력에 맞서 “현실의 벅찬 한 면만을 구호로 외치며 흥분하여 낯을 붉히는 사람들의 시 이전의 상식을” 배격하고, “시는 깊어야 하며, 특이하여야 하며, 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백석은 이태준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고백은 용납되지 않고 자백만 강요됐다. 쓰면 “낡은 미학적 잔재에 빠져 부르주아적 개인 취미로 흐른다”고 공격받고, 쓰지 않으면 수령을 싫어하는 감정을 품은 탓이라 매도당했다. 이태준이 함흥으로 쫓겨났듯 백석은 삼수갑산의 그 삼수로 가야 했다.

 

김연수는 백석이 삼수에서 시를 썼고, 시 쓴 종이를 찢어 난로에 집어던져 넣고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으리라 상상했다. 활자로 찍혀 영원히 남는 시가 아니라, 불꽃이 되어 찰나 황홀경을 보이다 사그라드는 시. 소설 말미에 저절로 난 산불을 뜻하는 천불을 보고 백석이 화전민이 느꼈을 삶을 향한 뜨거움과 느꺼움에 공감하는 장면이 나온다. 불타버렸기에 다시 열리는 새로운 삶의 길. 더는 쓰지 않기에 영원히 읽힐 시. 백석이 꿈꾼 불의 시학을 상징하는 대목으로 읽었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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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일단, 오늘을 지배하는 세력과 연배는 비슷하지만 그 어떤 권력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누리지도 않았다는 다소 낭만적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한다. 그다음에는 좀 더 이타적이고 더욱 정의로워지려고 나름대로 애써왔다는 알량한 자존심 덕이다. 물론 어찌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정의의 표본에 이른 분들과 비교하겠느냐만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생각이 바뀌었다. 어느덧 나를 포함해 우리 세대가 ‘척결’의 대상이 되고 있구나 싶었다. 좋은 말로 하면 세대교체가 되겠지만, 나는 이 말로는 지금의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본다. 거칠게 파고들어온 칼날은 페미니즘이었다. 권력의 상층부를 이루는 대다수가 남성이었으니, 권력에 대한 도전은 남성에 대한 단죄와 동의어였다. 다음에 몰아친 바람은 공정성이었다. 민주와 정의를 외친 세대가 과연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공정했느냐고 매섭게 질타했다.

 

이 거친 공세를 지켜보면서 나 정도면 괜찮다는 말을 더는 할 수 없겠구나 자인하는데, 권석천이 &lt;사람에 대한 예의&gt;에서 쐐기를 박았다. “돈 몇 푼에 치사해지고, 팔은 안으로 굽고, 힘 있는 자에게 비굴한 얼굴이 되기 일쑤다.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선 욕망의 관성에 따라,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려 한다. 소심할 뿐인 성격을 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무책임함을 너그러움으로 포장하며, 무관심을 배려로, 간섭을 친절로 기만”하지 않았느냐 묻는다. 젊은 날 품었던 패기와 이상대로 살아온 듯이 너스레를 떠는 기성세대의 민낯을 까발렸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 저널리스트는 동년배에게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의 자리에 가 있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동의한다.

 

불편할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이뤄냈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는. 하지만 과거의 화려한 이력이 오늘의 빛나는 삶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영화 &lt;시크릿 세탁소&gt;의 대사대로 분명히 처음에는 세상을 구원하려 했으나, 나중에는 그냥 나를 구원하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지은이가 너무 결벽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고 시비 걸지 말자. 그 자신이 기자로서 살아오면서 겪었던 부끄러운 일도 솔직히 고백하고 반성하고 있으니까.

 

권석천은 다음세대가 겪는 고민과 이율배반적 사고를 잘 이해한다. 사회는 벽을 높이 쌓아놓고 이를 넘어서는 사람만 ‘간택’한다.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왜 그 자리에 벽이 서 있는지 문제 삼지 않는다. 벽을 넘어선 이는 넘지 못한 이를 타박한다. 게을러서, 신념이 약해서, 능력이 없어서 못 넘은 것 아니냐고. 벽을 에둘러 새로운 길을 뚫으려면 공정성을 내세워 막는다. 여러 잣대를 내세워 구별하고 차별한다. 혐오가 넘쳐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권석천의 말대로 “개인적 자아는 과잉발달하지만 사회적 자아는 증발”했다. 이 놀라운 이중성은 “울타리 안 평등에는 민감하지만 울타리 밖 비참에는 무관심”하다는 박권일의 통렬한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권석천이 다음세대에 전하는 메시지는 절절하다. “너 자신을 착취하라고 요구하는 시대에 함께 연대해 맞서”라는 것이다. 모름지기 이 정신이 없다면 오늘 벌어지고 있는 세대착취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사회에 합류한 다음세대의 고민도 만만찮다. 이제 안온한 삶이 가능한 터전을 확보했는데, 구조악과 마주칠 때 과연 싸우겠다고 결단 내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들이 들을 가장 강력한 유혹의 말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일 터다. 기득권의 펜타곤을 지켜주는 힘은 작은 악이다. 일상에서 이것들과 맞서 싸울 때 그 견고한 성채에 금이 가는 법이다. 권석천은 패배하지 않을 거라 말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이 싸움에 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패배와 실패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단다. 패배가 상대에게 진 것이라면, 실패는 나한테 진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졌다면 실패한 게 아니다. 패배한 것”일 뿐이다. 다음세대가 동의해주길 바랄 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굳이 황금률을 정하자면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면 될 성싶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태도만으로 이 천박한 각자도생의 무간지옥에서 우리는 구원될지도 모른다. 권석천의 말대로 늘 불완전하고 삐걱거리겠지만 말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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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흔히 말하듯, 지도자란 타인을 돕기 위해 안전지대를 벗어난 사람이다.” 죽음을 앞두고 쓴, 성공한 한 과학자의 파란만장한 자서전에서 만난 인상 깊은 구절이다. 이 한마디에 지은이 바레스의 삶이 오롯이 응축되어 있었다. 가난했다. 끼니를 거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버지는 일보다 친구와 도박을 하거나 카드 게임하는 걸 더 즐겼다. 어머니는 4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어머니한테서 공부머리를 물려받아 학업성적은 늘 우수했다. 아버지는 중독성향을 물려주었으나, 도박이 아니라 ‘과학과 연구’에 대한 중독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특징을 일러 연구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강한 열정과 인내와 끈기, 그리고 회복력과 탄력성이라 했다. 갖은 난관을 이겨내고 MIT에 들어갔다. 당시 MIT 전체 학생 가운데 여학생은 5%에 불과했다.


여자여서 차별받는 느낌은 왕왕 있었으나 대학 2학년 때 결정적인 일을 겪었다. 이 무렵 인공지능에 매료되어 관련 수업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한 수업에서 교수가 아주 어려운 기말숙제를 내주었다. 오로지 바레스만 풀어왔다. 교수의 반응이 충격이었다. 누구도 이 문제를 풀어오지 못한지라 성적에 반영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를 찾아가 항의하자 돌아온 답이 ‘걸작’이었다. 남자친구가 대신 풀어준 거 아니냐는 것. 연구자로 활동하면서 받았던 차별 사례도 자서전 곳곳에 드러나 있다.


MIT를 졸업한 바레스는 신경과 의사 겸 신경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다트머스 의학대학원을 거쳐 하버드 의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연구분야는 신경아교세포와 신경계 질환의 연관관계다. 이 분야에서 이룬 업적은 자서전 2장인 ‘과학’에 소상히 밝혀져 있으나,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이라 이른바 ‘과알못’이라면 건너뛰어도 괜찮다. 박사후연구원 경력까지 치면 바레스는 무려 17년이나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도 스탠퍼드대 교수가 되고 나서 5년 동안 엄청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소장 과학자의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기성세대가 받아주지 않아 연구비를 받지 못했다. 학교를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정도였다. 국립 연구소의 사무관 두 명이 눈여겨보아 바레스가 이 분야의 정점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바레스는 개인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을 되밟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과감히 안전지대를 벗어났다. 2005년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이 성차별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네이처’에 실어 파문을 일으켰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해 과학연구기관의 성차별을 해소하는 데 일조했다. 젊은 과학자가 연구비로 고민하지 않게 하려고 전 재산을 자신이 있던 학과에 기부했다.


임용된 지 4년 만에 종신직 교수가 되던 해였다. 지역신문에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트랜스젠더이자 트랜스젠더 권리 운동가인 제이미슨 그린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기사를 읽으며 매우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서너살쯤부터 겉은 여자이지만 속은 남자라 느꼈다. 이란성 쌍둥이인 여동생과 비교하면 금세 알 수 있었다. 성장기에 성별 혼란으로 “지속적인 괴로움, 낮은 자존감, 강한 자살충동”을 겪었다. 성년이 되어 유명한 과학자가 되고 나서도 그 이유를 몰랐다. 심지어 이 기사에서 처음으로 트랜스젠더라는 낱말을 보았을 정도다.


바레스는 두려웠다. 성전환을 하는 순간 그동안 쌓은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잖은가. 마침내 결심했다. 성전환을 하겠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동료 과학자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저는 진심으로 저 자신이 좋은 과학자이자 좋은 선생이라고 느낍니다. 비록 성별은 달라지더라도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라고 썼다. 마침내 바버라 바레스는 벤 바레스가 되었다. 자서전 제목이 <어느 트랜스젠더 과학자의 자서전>인 까닭이다. 커밍아웃 이후 그는 젊은 성소수자 과학자의 길라잡이가 되었다. 또, 안전지대를 벗어난 것이다.


모퉁이 돌이 주춧돌이 된 ‘성공신화’는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주춧돌 위에 무엇을 세웠는지는 평가되지 않는다. 바레스는 동료 과학자 낸시 홉킨스의 말대로, 선의의 탑을 세웠다. 그는 진정으로 우리가 닮아야 할 지도자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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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고 나면 당혹감이 든다. 신화를 읽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이 서사시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다. 오디세우스가 10년에 걸쳐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신화의 얼개와 상당히 유사하다. 유혹을 떨쳐버리고 잇따른 위험을 지혜롭게 이겨내 마침내 귀환에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신화는 흔히 주인공이 과거보다 성숙해지고, 타인을 위한 희생을 통해 영웅으로 발돋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lt;오디세이아&gt;에서는 그런 면을 읽을 수 없다. 아내를 지키고 왕국을 되찾을 뿐이다. 뭔가 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고전학자 김헌은 <천년의 수업>에서 <오디세이아>를 인상 깊게 분석했다. 흔히 오디세우스의 방황이 10년이라 하지만, 8년 동안은 아이아이섬과 오귀기아섬에 머물면서 풍요와 환락의 삶을 누렸다. 특히 칼립스는 영원한 젊음과 건강, 그리고 아름다움을 주겠노라 유혹했다. 섬을 벗어나면 거칠고 넓은 바다를 항해하다 죽을 수도 있다고 겁박했다. 바닷길만 문제가 아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아내와 왕국을 빼앗으려는 무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들과 목숨을 건 일대 결투를 벌여야 한다. 그런데도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오귀기아섬을 떠난다.


김헌은 이 대목이 “신이 아닌 인간의 삶을 선택”한 것을 뜻한다며, 불멸과 유희의 삶보다 죽음이 있는 삶이 더 가치 있다는 선언이라고 보았다. 상식의 전복이다. 무릇 인간은 영생을 꿈꾸는 법이지 않은가.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죽음을 긍정하는 길을 택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김헌은 말한다. “영원히 산다면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순간들은 빛을 잃을 것이니” 죽음이 있기에 비로소 삶의 가치를 또렷이 인식할 수 있는 법이라고 말이다.


<오디세이아>에서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가 폴리페모스와 벌인 대결이다. 폴리페모스가 매일 저녁마다 한 사람씩 먹어치우겠다고 윽박지르며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묻는 장면이 있다. 그러자 오디세우스가 “나의 이름은 ‘아무도 안(nobody)’입니다”고 답변한다. 정말, 오디세우스답다. 그가 누군가. 트로이를 함락시킨 결정적인 전술을 제시한 지략가이지 않던가. 술에 취해 잠든 폴리페모스의 눈을 불에 달군 말뚝으로 찌르자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니, 다른 퀴클롭스들이 찾아와 누가 눈을 찌르느냐고 물었을 적에 “아무도 안이 그랬어!”라고 대답한다. 아무도 안 그랬다니, 동료들이 별일 아닌 줄 알고 돌아갈 수밖에. 다시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기발하고 재치 있고 약아빠진 전술가인지 확인한다.


김헌은 이 대목을 다르게 해석한다. 부하들이 폴리페모스에게 잡아먹히는데 오디세우스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절망감과 열패감이 엄습했다. 자신도 곧 잡아먹힐 판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조적 감정에 휩싸였을 터다. 그래서 이름을 물었을 때 아무도 안이라고 대답했으리라는 풀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해석이라,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천년의 수업>이 독특한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고전을 새롭고 깊이 있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철학적 열병을 앓을 적에 고민해봄직한 아홉 가지 주제의 질문에 답을 해주고 있다. 오디세우스가 인간의 삶을 선택했다는 해석은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라는 주제의 질문에 답을 준다. 인간은 종국에는 죽기 마련인지라 살아 있는 지금이 설혹 고통스러운 상황이더라도 가장 가치 있는 법이다. “인생은 유한하며, 그로 인해 삶의 순간들이 빛”나게 마련이다. ‘아무도 안’이라는 이름을 내뱉었던 장면은 “세상의 한 조각으로서 나는 무엇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을 준다. 누구나 무기력해지고 자괴심이 드는 절망의 순간이 있다. 아무도 아닌 존재라고 자조하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는 정말 아무도 아닐까라고 되묻게 된다. 그럴 수는 없으니,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오기도 일고 용기도 부리게 마련이다. 시쳇말로 바닥을 치고 힘차게 솟아 올라오게 된다. “아무도 아닌 줄 알았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단합하면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현대사에서 줄곧 확인하지 않던가.


기실 고전이야말로 지은이가 스스로 던진 근원적인 질문과 치열한 지적 고투 끝에 내린 답으로 이루어졌다. 오늘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 고전이 응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전이라는 우물에 질문의 두레박을 던져보자. 삶의 갈증을 달래는 지혜의 냉수를 길어 올릴 터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lkw10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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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본디 난분분하는지라 평정이 깨지고 심신이 산란해야 할 계절 아닌가. 햇볕은 졸음을 몰고 오고 바람은 얼굴에 난 솜털을 간질이며 꽃은 터져 나왔는데, 모두가 코로나19 탓에 심란하기만 하다. 거리 두기로 우울하기까지 하건만, 잇따라 요란한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신천지라는 교파 탓이었다. 그러다 이번에는 이 교파를 이단이라 부르는 일부 기성 교단에서 일이 터졌다. 당황스러웠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 모범을 보이고 위로가 되어야 하거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다니.


착잡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뒤적이다 손에 쥔 책이 김용옥의 <나는 예수입니다>와 김근수의 <슬픈 예수>였다. 전자는 마가복음을 기초로 예수의 삶을 재구성했고, 후자는 마가복음을 신학적으로 해설했다. 신약성경 편제를 보면 마태복음이 맨 앞에 나와 있지만, 성서학자들은 복음서 중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다고 본다.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는 마가복음을 바탕으로 또 다른 전승이나, 또 다른 종교적 염원을 담아 썼다고 보면 된다. 기실, 이 사실부터 전통적 해석과 갈등한다. 기성 교단은 천사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다 해서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데, 성경은 김용옥의 말처럼 담론 주체의 원망(願望)이 투사된 것으로, 김근수의 말대로 “인간의 고뇌와 한계를 숨김없이 드러낸 책”이라 봐야 마땅하다 싶다.


두 사람의 책을 읽으며 예수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누어 이해했다. 첫 단계는 다윗의 아들이고, 두 번째는 사람의 아들이며, 마지막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마가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전제에서 연역된 이야기다(김용옥). 메시아라는 히브리말을 희랍어로 옮긴 것이 그리스도인데,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뜻으로, 야훼가 선택한 이스라엘 민족의 왕을 가리킨다. 마태가 예수의 족보 맨 앞자리에 다윗을 둔 이유를 알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예수는 다윗의 아들을 부정한다. 이 대목은 데일 마틴이 <신약읽기>에서 잘 해명했다. 마가복음 8장을 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는데,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하자 호되게 꾸짖는 대목이 나온다. “모두 구세주는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땅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예수가 가르쳐야 하는 것은 구세주는 먼저 고난과 죽음을 겪어야 하며 그런 다음에야 영광이라는 보상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받고 죽음을 당하는 메시아”(김근수)를 뜻한다. 예수의 전도여행은 갈릴리 지역에서 출발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갈릴리에서 예수는 일약 스타가 된다. 무리가 따르고 이적이 벌어지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여정이었다. 예수의 이적을 두고 김용옥은 “더러운 귀신을 내쫓아내는 것, 그것이 곧 하늘나라, 즉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가 강림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율법의 속박이 민중이 겪는 고통의 근원이었기에, 예수가 이를 폐기하고자 했다고 분석했다. 김근수는 예수가 맞서 싸운 것은 “사람을 억압하는 모든 종류의 제도와 관행과 세력”이었다고 본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갈릴리에서 율법 문제로 바리새파와 싸웠다면, 예루살렘에서는 정치 문제로 사두개파와 일전을 펼쳤다. 지극히 종교적인 삶이 가장 급진적인 정치운동이 되었던 셈이다. 김근수는 예수의 성전항쟁을 힘주어 말했다. 성전에서 상인을 쫓아내고,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선포한 일을 가리킨다. 지배계층이 예수를 위험인물로 낙인찍고 죽여 버리기로 최종 확정한 이유다. 


마침내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받고 죽는다. 그때 사형집행관이었던 백인대장이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대목을 다윗의 아들이 되려는 유혹을 이겨내고 사람의 아들로서 본분을 다 마쳐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로 승화한 것이라 이해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야 부활할 수 있는 법. 김근수는 예수의 부활을 두고 역사에 희생된 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하느님의 선물이라 했다. “악인의 삶은 처벌받고 희생자의 삶은 위로받는다”는 것을 확인해준 사건이어서다.


김용옥은 마가복음의 예수를 “어둡고, 외롭고, 답답하고, 슬프고, 비극적”이라 평가했다. 김근수는 아예 책 제목을 ‘슬픈 예수’라 지었다. 오늘 온갖 교회가 섬기는 예수는 어떤 모습일까? 사람의 아들이 되려는 무리가 그립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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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콧등이 시큰해지며 울컥해진다. 얼마 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대구 주민을 위해 써달라며 119만원을 기부했다는 보도를 접하며 감동했다. 대구지역에서 확진자 숫자가 급증하자 광주에서 감염병 전담병원의 병상 중 절반을 대구 경증환자를 치료하는 데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두 지역의 골 깊은 지역감정과 그것이 빚은 역사적 참극을 생각하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경희대 학생 세 명이 뜻을 모아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을 돕자는 취지로 학내 커뮤니티에서 모금활동을 펼쳤는데, 일주일 만에 4600만원 정도 모았다고 한다. 애초 목표는 50만원. 뜻이 갸륵한 데다 말만 앞세우는 어른보다 낫다 싶었다.


전쟁은 예상할 수 있다. 설혹 선전포고 없이 일어나더라도 조짐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이 일으키는 재난은 과학의 레이더를 벗어나기 일쑤다. 한번 일어나면 경악과 충격, 그리고 속수무책이라는 수식어로만 겨우 상황묘사가 가능하다. 놀라운 것은 이런 재난의 잿더미에서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적인 행동이 꽃핀다는 사실이다. 9·11 참사 당시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던 대략 2만5000명은 서로 도우며 질서정연하게 대피해 피해를 줄였다. 재난 현장에는 공학기술자, 건설노동자, 의료요원, 용접기술자 같은 전문가가 자진하여 모여들었다. 강가에 고립된 사람을 구하려고 너도나도 배를 몰고 와 준 덕에 어림잡아 30만명이 대피할 수 있었다. 미담은 워낙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죽음의 냄새가 자욱한 지옥에서 천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랑과 연대의 향연을 만난 셈이다.


재난 현장에 섬광처럼 나타난 놀라운 이타적 장면을 포착해 그 의미를 탐색한 책이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이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 허리케인에 이르는 다섯 건의 대재앙을 톺아보고 있다. 지은이는 대재앙의 현장에서 벌어진 이타적 행위만을 과장해 설명하지 않는다. 일단, 재난 그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재난의 현장엔 기회주의적 행동도 있고,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 빈민과 소수자와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 약탈과 경제범죄에 대한 강박관념, 치명적인 무력에 기대려는 마음, 헛소문에 기초한 행동”인 엘리트 패닉이 종종 일어난다는 점을 인정한다.


지은이는 재난을 막 겪고 난 이를 만나서 들은 회고담을 소상히 밝혔다. 우리는 흔히 그가 공황상태에 놓여 있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예상은 빗나갔다. 모든 게 엉망이 돼버린 날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웃이 모두 집 밖으로 나와 서로 대화를 나누며 도와주고, 즉석에서 급식소를 세우고 노인을 보살폈단다. 그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서로를 보며 행복감을 느꼈죠”라고 말했다. 재난 때문에 “평소의 구분과 양식이 모두 파괴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형제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의식과 유대감은 혼란과 두려움, 상실과 죽음 속에서도 기쁨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폐허의 한복판에서 “공적 삶과 시민사회에 대한 열망”이 솟아오르고, “깊은 만족감과 새로운 사회적 유대, 자유”를 누리며, “공동체적이고, 융통성 있고, 상상력이 풍부한” 삶을 보이고, “아비규환 속에서 기적을, 슬픔 속에서 기쁨을,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주는” 역설적 상황을 지은이는 재난 유토피아라 이름 짓는다. 물론 이 유토피아는 오래가지 않는다. “끔찍한 순간에 아주 짧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 엄청난 순간을 두고 우리가 고민할 바는 수두룩하다. 인간 본성론으로 좁혀 보더라도 새로운 통찰이 가능하다. 가장 최악의 순간에 설핏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본성 아니겠는가. 재난이라는 번개가 치니 잠시 드러난 인간 본성은 제임스가 말한 시민기질, 그러니까 사회참여가 의무가 아니라 하나의 취향이자 지향이라는 말이나, “한마디로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며, 인간을 사회에서 벗어나게 하기는 불가능하다”는 토머스 페인의 언명과 일치한다.


고통스럽고 답답한 재난의 시절을 보내며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재난에 빠져 있을 적에야 비로소 짧게 “상호부조와 이타주의의 천국이 나타나는지가 아니라, 왜 평소에는 그런 천국이 다른 세계의 질서에 묻혀버리는가”라고. 그 답을 찾다보면, 지은이의 말대로 지옥의 문턱에서 연대와 사랑의 공동체로 열린 뒷문을 찾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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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화심리학자 전중환은 혐오가 병원체 감염을 예방하는 심리적 적응이라 말한 바 있다. 낯선 병원체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혐오 정서가 발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뜻이다. 새삼스럽게 이를 입증할 실험을 찾아볼 필요도 없게 되었다. “전염병이 다시 드러낸 바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퍼지자 우리 사회에 일어난 혐오증세를 개탄한 한 칼럼의 제목이다. 그 칼럼의 내용대로 전염병을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혐오와 배척의 정서가 일어나면서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현상을 보는 것도 무서운 일이었다. 


호모사피엔스의 미덕은 스스로 진화의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유년시절에는 혐오감이 생존과 번식을 가능케 했다면, 문명사회에서는 환대가 종의 멸종을 막고 더불어 사는 세계공동체를 이룰 핵심가치가 될 터다. 이를 수긍할 수 있게 설명한 책이 바로 김현경이 쓴 <사람, 장소, 환대>이다. 지은이는 사람과 인간을 뚜렷하게 나눈다. 사람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이 있다는 뜻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사람, 장소, 환대는 맞물려 있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이에 비해 인간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일 뿐 사회가 인정하는 문제는 아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자리’라는 낱말에 오랫동안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이 자리는 중의성을 띠었을 터다. 하나는 자리 잡고 살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직위나 지위다. 지은이 설명에 따른다면, 우한에 고립되었던 국민이 귀국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 일부는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돌아와 진단하고 치료할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 했고, 그들도 마땅히 우리의 국민이라는 지위를 부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환대의 대척점에 낙인찍기가 있을 터다. 고프먼은 낙인의 특징으로 ① 신체의 괴물스러움 ② 정신적인 결함(의지박약, 비정상적 열정, 잘못된 신념, 부정직 등) ③ 특정한 인종, 민족,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 등을 꼽았다. 낙인찍힌 이는 오염되었다고 여겨 공공장소에 접근할 수 없고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금지되었다. 신종 코로나 공포 탓에 오로지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택시에 태우지 않거나, 식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행위가 바로 낙인찍기다. 낙인찍기가 문제되는 것은 이들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인류사를 보면 낙인찍기와 배척은 반드시 희생양을 낳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를 낙인찍어 모욕하는 일에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유다.


지은이는 데리다의 환대론(論)을 지렛대로 삼되, 그 한계를 돌파하며 절대적 환대의 가능성을 설파한다. 먼저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고대사회와 달리 현대사회 들어 모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무조건적 환대를 받아 사회 성원이 된다. 이것은 “그 생명이 살 가치가 있는지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 안에 넣은 채 그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고대 로마 시절, 내다 버린 아이를 데려다 키운 사람은 아이를 종으로 부리거나 팔았다. 지은이는 이를 환대가 아니라 증여의 논리라 비판한다. 의무와 빚을 면책하거나 그 사실을 잊게 해주는 게 진정한 환대라는 것. 끝으로 복수하지 않는 환대. 적대적인 상대방도 환대해야 하는데, 이는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은이는 타자의 영토에 유폐된 이들에게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것이 절대적 환대라 말한다. 더불어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소품을 마련해주어야 마땅하니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문화인류학적 환대는 정치경제학적 환대로 도약한다. 집 없는 이에게는 주거수당을, 일자리 잃은 사람에게는 실업수당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는 게 환대이니 말이다.


한 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환대받지 못하자 입학을 포기했단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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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번쩍 띄었다. 제목이 심상찮았다. <중용>을 <일상사에 초점 맞추기(Focusing the familiar affairs of the day)>라 번역했다. 당연히 우리 학자는 아니다. 오랜 관행을 깨고 이미 그 뜻을 짐작하는 제목을 굳이 풀어낼 리 없다. 서구의 동양철학자라 가능한 일이다. 중용을 이처럼 번역하는 근거가 궁금해 책을 뒤적여보았다. 로저 에임스와 데이비드 홀은 먼저 중용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지 밝히고, 주요 용어를 영어로 그렇게 옮긴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나서 중용 본문을 옮기고 주석을 달고, 맨 끝에 중용 텍스트 분석을 실었다. 본디 고전은 이런 식으로 옮겨야 마땅하다. 독자는 이 과정을 따라가면서 옮긴이의 독창적 해석에 매료되고 새로운 번역을 지렛대로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게 마련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 저자는 고대동양의 사유를 과정지향적 세계관이라 분석했다. 서구는 정지와 영원을 선호한다. 동양은 연속성, 생성, 전이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 관점을 바탕으로 하나의 용어를 맥락에 따라 여러 단어로 옮기는, 일종의 언어 클러스트를 구성했다. 예를 들면 중(中)의 번역어는 초점(focus), 초점 맞추기(focusing), 균형(equilibrium), 중심(center), 불편부당(impartiality)으로 언어 클러스트를 이루었다. 파격은 성(誠)의 번역어이다. 기존의 번역어와 같이 성실(sincerity), 정직(integrity)을 쓰기도 하지만 대체로 창조성(creativity)이라 옮겼다.


저자는 성을 창조성이라 번역한 이유를 소상히 밝혔다. 동양철학을 과정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표리부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sincerity와 건강한 전체라는 의미의 integrity는 건실하게 되어가는 혹은 전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반드시 포괄해야 한다. 전체가 되어 가는 심미적 역동성이야말로 창조과정이 의미하는 것”이란다. “우주적 창조성의 지속적 과정에 인간의 참여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라는 말에 수긍이 갔다.


신정근은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에서 성을 완전한 진실이라 보고 26장을 “완전한 진실은 멈추는 적이 없다. 멈추지 않으면 오래 가게 되고, 오래 가면 효과가 나타나고, 효과가 나타나면 여유 있고 오래 가고,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면 넓고 두터워지고, 공간적으로 무한히 쌓이게 되면 고상하고 지혜롭게 된다”라고 옮겼다. 벽안의 저자는 이 대목을 “극진한 창조적 과정은 끊이지 않는다. 끊임이 없으니 지속한다. 지속하니 효과가 있다. 효과가 있으니 멀리까지 미친다.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넓고 두텁다. 넓고 두꺼워 높고 빛난다. 높고 빛남은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게 한다.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모든 사건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라고 옮겼다. 과연 적절한지 논쟁이 일어날 법하지만, 관점이 뚜렷한 번역이 주는 신선함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영어권에서 <중용>은 제임스 레그 이래 줄곧 <The Doctrine of the Mean>이라 옮겼다. 여기서 Mean은 평균값, 중간값을 뜻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족과 과잉이라는 두 극단 사이의 평균값에 자리한 덕성을 중용이라 하니, 예를 들자면 용기는 비겁과 만용 사이의 중용이 된다. 이에 비해 지은이는 용(庸)을 일러 정현이 말한 중도의 실천적 적용에서 ‘초점 맞추기’를, 주희가 말한 일상적이고 보통인 것에서 ‘일상사’를 착안해 <일상사에 초점 맞추기>라 제목을 옮겼다. 특히 familiar는 같은 어근의 family를 떠올리게 해 유가의 핵심인 가족의 가치를 확인해준다. 


동양고전을 영어로 옮긴 작업의 결과가 흥미로워 책을 읽다가 나중에는 오늘 우리에게 중용이 왜 중요한지 새삼 곱씹어 보게 되었다. 중용의 저자나 집필시기는 늘 논란이 되나, 대체로 전국시대의 작품으로 본다. 전쟁이 일상이 된, 극단의 시대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한 책이 바로 중용이다. 승자독식의 시대를 넘어 세대 간 불평등문제가 심각해지고 때아니게 이념으로 편을 갈라 싸우기 바쁘다. 우리가 사는 오늘이 바로 또 다른 전국시대다. 이제, 균형의 시대로 넘어가려면 중용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신정근은 모순의 공존과 현실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태도라 했다. 비록 칼날 위를 걸을 수는 있어도 중용의 길은 가기 어렵다 했으나, 우리 사회가 더 늦기 전에 이 길로 접어들기를 소망해본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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