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화심리학자 전중환은 혐오가 병원체 감염을 예방하는 심리적 적응이라 말한 바 있다. 낯선 병원체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혐오 정서가 발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뜻이다. 새삼스럽게 이를 입증할 실험을 찾아볼 필요도 없게 되었다. “전염병이 다시 드러낸 바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퍼지자 우리 사회에 일어난 혐오증세를 개탄한 한 칼럼의 제목이다. 그 칼럼의 내용대로 전염병을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혐오와 배척의 정서가 일어나면서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현상을 보는 것도 무서운 일이었다. 


호모사피엔스의 미덕은 스스로 진화의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유년시절에는 혐오감이 생존과 번식을 가능케 했다면, 문명사회에서는 환대가 종의 멸종을 막고 더불어 사는 세계공동체를 이룰 핵심가치가 될 터다. 이를 수긍할 수 있게 설명한 책이 바로 김현경이 쓴 <사람, 장소, 환대>이다. 지은이는 사람과 인간을 뚜렷하게 나눈다. 사람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이 있다는 뜻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사람, 장소, 환대는 맞물려 있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이에 비해 인간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일 뿐 사회가 인정하는 문제는 아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자리’라는 낱말에 오랫동안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이 자리는 중의성을 띠었을 터다. 하나는 자리 잡고 살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직위나 지위다. 지은이 설명에 따른다면, 우한에 고립되었던 국민이 귀국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 일부는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돌아와 진단하고 치료할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 했고, 그들도 마땅히 우리의 국민이라는 지위를 부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환대의 대척점에 낙인찍기가 있을 터다. 고프먼은 낙인의 특징으로 ① 신체의 괴물스러움 ② 정신적인 결함(의지박약, 비정상적 열정, 잘못된 신념, 부정직 등) ③ 특정한 인종, 민족,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 등을 꼽았다. 낙인찍힌 이는 오염되었다고 여겨 공공장소에 접근할 수 없고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금지되었다. 신종 코로나 공포 탓에 오로지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택시에 태우지 않거나, 식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행위가 바로 낙인찍기다. 낙인찍기가 문제되는 것은 이들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인류사를 보면 낙인찍기와 배척은 반드시 희생양을 낳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를 낙인찍어 모욕하는 일에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유다.


지은이는 데리다의 환대론(論)을 지렛대로 삼되, 그 한계를 돌파하며 절대적 환대의 가능성을 설파한다. 먼저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고대사회와 달리 현대사회 들어 모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무조건적 환대를 받아 사회 성원이 된다. 이것은 “그 생명이 살 가치가 있는지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 안에 넣은 채 그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고대 로마 시절, 내다 버린 아이를 데려다 키운 사람은 아이를 종으로 부리거나 팔았다. 지은이는 이를 환대가 아니라 증여의 논리라 비판한다. 의무와 빚을 면책하거나 그 사실을 잊게 해주는 게 진정한 환대라는 것. 끝으로 복수하지 않는 환대. 적대적인 상대방도 환대해야 하는데, 이는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은이는 타자의 영토에 유폐된 이들에게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것이 절대적 환대라 말한다. 더불어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소품을 마련해주어야 마땅하니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문화인류학적 환대는 정치경제학적 환대로 도약한다. 집 없는 이에게는 주거수당을, 일자리 잃은 사람에게는 실업수당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는 게 환대이니 말이다.


한 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환대받지 못하자 입학을 포기했단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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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번쩍 띄었다. 제목이 심상찮았다. <중용>을 <일상사에 초점 맞추기(Focusing the familiar affairs of the day)>라 번역했다. 당연히 우리 학자는 아니다. 오랜 관행을 깨고 이미 그 뜻을 짐작하는 제목을 굳이 풀어낼 리 없다. 서구의 동양철학자라 가능한 일이다. 중용을 이처럼 번역하는 근거가 궁금해 책을 뒤적여보았다. 로저 에임스와 데이비드 홀은 먼저 중용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지 밝히고, 주요 용어를 영어로 그렇게 옮긴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나서 중용 본문을 옮기고 주석을 달고, 맨 끝에 중용 텍스트 분석을 실었다. 본디 고전은 이런 식으로 옮겨야 마땅하다. 독자는 이 과정을 따라가면서 옮긴이의 독창적 해석에 매료되고 새로운 번역을 지렛대로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게 마련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 저자는 고대동양의 사유를 과정지향적 세계관이라 분석했다. 서구는 정지와 영원을 선호한다. 동양은 연속성, 생성, 전이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 관점을 바탕으로 하나의 용어를 맥락에 따라 여러 단어로 옮기는, 일종의 언어 클러스트를 구성했다. 예를 들면 중(中)의 번역어는 초점(focus), 초점 맞추기(focusing), 균형(equilibrium), 중심(center), 불편부당(impartiality)으로 언어 클러스트를 이루었다. 파격은 성(誠)의 번역어이다. 기존의 번역어와 같이 성실(sincerity), 정직(integrity)을 쓰기도 하지만 대체로 창조성(creativity)이라 옮겼다.


저자는 성을 창조성이라 번역한 이유를 소상히 밝혔다. 동양철학을 과정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표리부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sincerity와 건강한 전체라는 의미의 integrity는 건실하게 되어가는 혹은 전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반드시 포괄해야 한다. 전체가 되어 가는 심미적 역동성이야말로 창조과정이 의미하는 것”이란다. “우주적 창조성의 지속적 과정에 인간의 참여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라는 말에 수긍이 갔다.


신정근은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에서 성을 완전한 진실이라 보고 26장을 “완전한 진실은 멈추는 적이 없다. 멈추지 않으면 오래 가게 되고, 오래 가면 효과가 나타나고, 효과가 나타나면 여유 있고 오래 가고,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면 넓고 두터워지고, 공간적으로 무한히 쌓이게 되면 고상하고 지혜롭게 된다”라고 옮겼다. 벽안의 저자는 이 대목을 “극진한 창조적 과정은 끊이지 않는다. 끊임이 없으니 지속한다. 지속하니 효과가 있다. 효과가 있으니 멀리까지 미친다.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넓고 두텁다. 넓고 두꺼워 높고 빛난다. 높고 빛남은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게 한다.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모든 사건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라고 옮겼다. 과연 적절한지 논쟁이 일어날 법하지만, 관점이 뚜렷한 번역이 주는 신선함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영어권에서 <중용>은 제임스 레그 이래 줄곧 <The Doctrine of the Mean>이라 옮겼다. 여기서 Mean은 평균값, 중간값을 뜻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족과 과잉이라는 두 극단 사이의 평균값에 자리한 덕성을 중용이라 하니, 예를 들자면 용기는 비겁과 만용 사이의 중용이 된다. 이에 비해 지은이는 용(庸)을 일러 정현이 말한 중도의 실천적 적용에서 ‘초점 맞추기’를, 주희가 말한 일상적이고 보통인 것에서 ‘일상사’를 착안해 <일상사에 초점 맞추기>라 제목을 옮겼다. 특히 familiar는 같은 어근의 family를 떠올리게 해 유가의 핵심인 가족의 가치를 확인해준다. 


동양고전을 영어로 옮긴 작업의 결과가 흥미로워 책을 읽다가 나중에는 오늘 우리에게 중용이 왜 중요한지 새삼 곱씹어 보게 되었다. 중용의 저자나 집필시기는 늘 논란이 되나, 대체로 전국시대의 작품으로 본다. 전쟁이 일상이 된, 극단의 시대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한 책이 바로 중용이다. 승자독식의 시대를 넘어 세대 간 불평등문제가 심각해지고 때아니게 이념으로 편을 갈라 싸우기 바쁘다. 우리가 사는 오늘이 바로 또 다른 전국시대다. 이제, 균형의 시대로 넘어가려면 중용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신정근은 모순의 공존과 현실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태도라 했다. 비록 칼날 위를 걸을 수는 있어도 중용의 길은 가기 어렵다 했으나, 우리 사회가 더 늦기 전에 이 길로 접어들기를 소망해본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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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과학기술이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따지고 보면 예전에는 과학과 기술이라 했다. 그 ‘과’는 두 단어 사이가 무척 멀다는 것을 뜻했다. 앞은 좀 더 순수한 영역을, 뒤쪽은 좀 더 실용성을 띤 영역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두 단어 사이에서 ‘과’가 사라지면서 과학은 곧 기술이 되고 이는 경제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낱말이 되었다. 과학은 한마디로 돈이 되는 것, 조금 고상하게 말해서 미래성장 전략을 뜻했다.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한 괴짜가 세계와 우주의 근본원리를 파헤치려 고독하게 실험에 몰두하는 그림은 이제 떠오르지 않는다. 한마디로 품격이 사라진 셈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스스로 지식큐레이터라 부르는 강양구가 <과학의 품격>에서 이 점을 문제 삼았다. 지은이는 본디 과학기술은 빛나는 창의력의 산물이며,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 문화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대중은 과학기술을 마치 마술인 양 받아들여 원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효과를 성찰하지 않으며 그저 소비하고 감탄하는 데 그친다. 지은이는 과학기술이 “국가, 자본, 노동이 힘겨루기를 하는 정치의 장”이라면서 그 결과에 따라 “해방과 억압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충돌의 지점에서 과학의 품격이 솟아오른다. 오로지 과학기술을 기득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집단이 있지만, “‘돈’으로 측정할 수 없는 가치, ‘경제’로만 한정할 수 없는 역할, ‘성장’이 아니라 공존과 공생”이 되도록 맞서 싸운 집단이 있다. 말하자면 과학의 품격을 지키려는 “치열한 고민, 용감한 실천, 힘겨운 싸움”이 있었다는 말이다.


일례로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내세운 시민과학센터가 있다. 1997년 결성한 이 단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민주화가 심화해야 한다면 과학기술은 왜 예외가 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첫째, 관료, 정치인, 과학기술자가 독점해온 이 분야의 의사결정에 다양한 시민 참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둘째, 돈만 되면 사회에 미칠 부작용을 무시한 주류집단의 논리에 맞섰다. 셋째, 과학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환기하고,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 첫째는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문제를 시민이 숙의해서 결정하는 형태로, 둘째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셋째는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같은 단체의 탄생에 이바지했다. 아쉬운 점은 이 단체가 2017년 자진 해산했다는 것이다.


‘영화 제보자가 말하지 않은 황우석 사태의 진실’이란 부제가 붙은 1부는 한 과학자와 국가권력, 그리고 열광하는 대중으로 이뤄진 리바이어던과 싸운 진실한 과학자와 언론인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른바 황우석 사태에 얽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영화 <제보자>의 내용과 비교하면서 흥미진진하게 그렸는데, 한국사회를 집단적 광기로 몰고간 사건을 냉정하게 복기하는 데 맞춤하다. 유독 눈길이 갔던 대목은 “운이 좋았다는 구절”이다. 황우석 박사가 비록 법이 정한 것보다 엄청 많은 난자를 썼다지만, 중복사진, DNA 지문 분석 등에서 숱하게 논문을 조작했다지만, 만약 환자맞춤형 줄기세포나 인간복제 배아줄기 세포를 손에 쥐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자문한다. 애국주의 광풍에 휩쓸려 <PD수첩>은 줄기세포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상태지만 방영을 유보한 상황이고, 지은이는 테러 위협을 받았던 시절이다. 오로지 돈, 경제, 성장에만 매몰된 대중은 두 언론인을 사회적으로 매장했을 게 분명하다.


얼마 전 옥스퍼드 사전이 2019년 올해의 단어로 기후비상사태(climate emergency)를 선정했다. 일찌감치 환경과 기후 문제를 지적해온 지은이는 이번 책에서도 이 주제와 관련해 중요한 내용을 밝혔다. 먼저 미세먼지. 일반적인 어림짐작으로 미세먼지는 중국 탓이라 여기지만, 여러 조사 결과를 보면 국내 요인이 크다고 한다. 대체로 발전소나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나온 미세먼지와 오염물질이 대기가 정체되면 그 농도가 짙어진다. 특히 경유차 배기가스가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미세먼지로 바뀐다고 한다. 남 탓하지 말고 스스로 불편을 감수하며 오염물질 배출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다음으로는 에너지 전환 문제.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면 탄소문명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 대안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은이는 우리나라가 지형적으로 태양광 발전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을 한 방에 날려 보낸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독일의 태양광 발전이 올해 6월 최대 단일 전력 발전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독일은 우리보다 위도가 훨씬 높다. 그만큼 태양 에너지의 양이 적다. 독일이 되면 우리는 더 잘된다는 뜻이니, 앞으로 햇빛이 안 좋아 태양광 발전을 하기 어렵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세계는 지금 풍력발전의 적소로 바다를 주목하고 있단다. 육지보다 바람 좋은 곳이 많고 이런저런 갈등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이라는데, 삼면이 바다인 우리에게는 여러모로 유리하다. 똥오줌으로 전기를 만들고, 수소를 저장하고, 사람의 체열로 난방을 한다. 문제는 의지다. 그동안 석탄이나 원자력에만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여러 에너지원이 뒤섞인 ‘모자이크 에너지’ 모델을 구상하자는 지은이의 생각에 동의하게 된다. 


1969년 미국 의회가 가속기 연구비를 삭감하자 물리학자 로버트 윌슨은 “이것은 우리나라를 지키는 일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지킬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과학기술이 저절로 품격을 얻을 수는 없다. 당장의 쓸모를 넘어서 궁극적인 앎의 자리에 바짝 다가서려 할 때에, 가난하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일에 함께할 때에 비로소 과학은 품격을 얻게 될 것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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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어, 남들은 일부러 짬과 돈을 내어 가고 싶어 하는 바닷가 아름다운 도시에 초대받아 몇차례 다녀왔다. 한 여고의 2학년 학생들과 인문도서를 함께 읽는 시간을 보낸 까닭이다. 강의도 하고 학생들끼리 토론도 하고 발표도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잘 읽어왔고,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입시준비로 찌들 시기이건만, 공 들여 책을 읽어오는지라 학생들을 만나면 가슴이 뿌듯했다. 누가 일러준 대로 답을 찾지 않고 스스로 고민하고 함께 토론해 합의점을 찾는 일은 책을 함께 읽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않던가. 


지난주 학생들과 함께 읽은 책은 김응교 교수가 쓴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였다. 이 책을 고른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지은이가 섬세한 문학적 감수성과 탄탄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윤동주 시정신을 빼어나게 분석해서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에 들어가지만, 윤동주 시세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책으로 윤동주의 시를 잘 알게 되리라 믿었다. 더불어 청소년들이 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맞춤하다고 여겼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 번째는 치밀한 실증적 고증을 바탕으로 윤동주의 삶을 감동적으로 재구성한 점이다. 흔히 윤동주는 기독교적 가치관의 세례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만 보아도 그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기독교인이 세운 명동마을 출신에 미션학교인 연희전문과 도시샤대 출신이라는 점도 덧붙여 윤동주의 종교성을 쉽게 판단하게 한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윤동주가 청소년 시절에는 유학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


1899년 2월 회령과 종성에 살던 문병규, 김약연, 남도천, 김하규가 솔가하여 명동마을을 세운다. 김약연은 맹자의 대가였으며, 남도천은 김약연의 스승이었고, 김하규는 주역에 정통했다. 이들이 집을 세운 다음에 한 일이 서당을 짓는 일이었다.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한데, 그에게서 한학과 맹자를 배웠다. 김약연은 훗날 평양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어 명동에서 목회활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명동마을이 기독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나중 일이었던 셈이다.


이런 전기적 사실이 중요한 건 대표작 ‘서시’의 새로운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맹자 사유에 기대 ‘서시’를 분석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은 맹자의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을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부끄러움은 맹자가 말한 사단의 수오지심인 바, 윤동주의 인생관이라 할 법하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는 측은지심의 시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윤동주는 ‘해바라기 얼굴’ ‘슬픈 족속’ ‘병원’ ‘투르게네프의 언덕’ 등에서 남의 불행을 못 본 척하지 못하는 마음을 시적 언어로 드러냈다.


윤동주가 맹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이 책을 고른 세 번째 이유와 맞닿아 있다. 영화 &lt;동주&gt;를 보면 윤동주는 송몽규의 그림자인 양 나온다. 기실 문명(文名)을 먼저 떨친 이도 송몽규요, 청소년 시절 독립운동을 위해 김구를 찾아간 용맹성을 보인 것도 송몽규요, 교토대학에 들어가 교토에 먼저 자리 잡은 것도 송몽규다. 이 점에 착안하면 영화 &lt;동주&gt;의 윤동주 해석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윤동주의 판결문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윤동주가 일제의 징병제를 무력 봉기에 역으로 활용하자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스승이자 외삼촌인 김약연이 일찌감치 무장투쟁을 주창했다는 점, 송몽규의 판결문에도 같은 죄목이 있다는 점을 참작하면 이 역시 윤동주가 주도하지 않고 동의하는 정도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은이의 말대로, 윤동주가 이 혐의를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인정했다는 점은 단순한 동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단순 동의냐, 적극 참여냐 해명하는 데 윤동주가 맹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실마리가 된다. 지은이도 지적했듯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맹자가 강조한 반구저기(反求諸己)의 정신이다. 그 모든 것의 허물을 나에게서 찾는 성찰이야말로 수오지심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맹자는 수(羞), 나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데 그치라 하지 않았다. 오(惡),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증오하는 데로 나아가라고 했다. 반구저기하면 호연지기를 발휘하여 추기급인(推己及人)해야 마땅하다. ‘서시’를 맹자에 빗대어 보면 반구저기하여, 측은지심에 이르러, 마침내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추기급인의 정신을 선언한 셈이 된다. 맹자의 정신에 따르면, 윤동주는 소극적인 독립운동을 할 리가 없다. 송몽규의 그늘에 있던 것이 아니라, 윤동주는 그가 쓴 시처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윤동주는 우리 시사에서 드물게 자신이 쓴 시처럼 살다간 시인이다. 이 책을 함께 읽은 학생들이 이 대목까지 알아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번 책은 학생들이 부분을 나누어 발표하면서 윤동주 시세계에 바짝 다가갔다. 한 조씩 발표가 끝나면 그 부분에 나온 윤동주의 시를 한 편씩 낭송해보라 했다. 학생들은 발표할 때보다 더 즐겁게 윤동주의 시를 낭송했다. 문득,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강고한 학벌체제 안에서 성과를 보이라고 아이들을 몰아세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공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래서는 안된다며 도리질을 쳤다. 윤동주의 시를 소리 내 읽고 그 뜻을 새기며, 그의 삶을 곱씹는 게 진짜 공부가 아닐까. 학생들이 자라고 있는 이 도시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그럴 수 있다면 더 좋겠고. 수업을 마치며 여러분이 윤동주의 시‘처럼’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진심이 부디 전해졌으면 좋겠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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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의 행위가 개별적으로 떳떳하다면, 개별행위들을 합쳐놓은 결과도 사회에 유익할 거라는 믿음은 우리 능력자 계층의 착각일 뿐이다.”


매튜 스튜어트가 <부당세습>에서 한 이 말을 오래 곱씹었다.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를 두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른바 86세대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는 항변을 듣게 된다. 불평등이 계급 문제라고 하면 주억거리지만, 세대 문제라고 하면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 심리를 스튜어트는 정확히 파악했다. 이름하여 대항서사. 그 서사를 우리 식으로 풀면 이렇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오른 건 오로지 실력 덕일 뿐이다. 알다시피 나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근근이 살아갈 만큼만 벌어왔다. 어머니의 현명함과 희생이 없었다면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터다. 고액과외나 받아 보았겠는가, 부족한 과목만 학원에서 보충하면서 스스로 공부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도 아르바이트와 성적 장학금으로 나왔다. 두루 내가 노력한 대가다. 


더욱이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는 사회 민주화에 이바지해왔다. 주변에 학생운동 안 한 녀석 없고, 여전히 운동성을 유지하는 녀석도 수두룩하다. 1억원 조금 넘는 연봉 가운데 후원금 명분으로 나가는 돈이 제법 되는 이유다. 그런데 왜 불평등의 원인이 우리 세대에 있다고 하나? 세대론을 들이대는 사람들 의도가 의심스럽다. 사회상층을 차지한, 특히 상위 1% 무리를 보라. 출발부터가 다르다. 실력과 노력으로 열매를 거둔 사람이 그 무리에 얼마나 되나. 금수저라는 딱지는 그쪽에 붙여야 마땅하다. 


자녀 문제에 이르면 핏대를 세우며 더 강한 대항서사를 써 내려간다. 재벌처럼 자식한테 재산을 물려줄 게 없으니, 공부라도 제대로 시키려 했다. 내가 번 돈으로 유학도 보내고 입시 컨설팅도 받았다. 정권 바뀔 때마다 널뛰는 입시제도 잘 활용했을 뿐이다. 융통성 있게, 네트워크 이용해 살아온 것일 뿐이다. 우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돈 있는 집안에서 하는 짓을 보아라.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정말 그 사람들 너무 하더라.


지은이는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집단을 능력자 계층이라 이름 짓는다. 대체로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2016년 기준으로 적게는 120만달러(약 14억원), 많게는 1000만달러(약 120억원)에 이르는 재산을 가진 계층이다. 능력자 계층의 소득수준을 보면 상위 9.9%에 해당한다. 흔히 사회 불평등 문제를 말하면 상위 1%를 지목해 그들을 악마화한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부를 집중적으로 늘려온 집단은 최상위 0.1%였다. 이 집단이 2012년 기준으로 미국 전체 부의 22%를 차지했다. 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자신의 몫을 단단히 거머쥐고 잘 지켜낸 집단은 능력자 계층이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지만 최상위와 최하위 집단의 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했다. 더욱이 능력자 계층은 “이 모든 혜택을 자녀들에게 대물림할 방법을 알아냈다.”


대물림 방법은 학벌세습이었다. 능력자 계층은 미국 대학 입시의 전형을 지혜롭게 활용했다. 꼭 공부만 잘할 필요는 없다. 동문 자녀 우대 정책이라는 에움길을 택하기도 했고, 체육특기자 선발을 이용하기도 했다. 스쿼시나 펜싱 같은 운동은 돈이 많이 드는지라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쳐서 문제가 되기는 했다. 유명인들이 수십만달러에 이르는 뒷돈을 주고 자녀를 체육특기생으로 부정입학시킨 사건이 터져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학벌세습에 목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미국에선 대졸자가 고졸 이하보다 70%나 돈을 더 번다. 10위권 안에 드는 명문대를 나오면 대졸자 평균보다 3배가량 연봉이 높다.


이 정도면 수치는 다르지만 미국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부의 양극화가 심각하지만 전문직 종사자의 소득과 재산은 우리 사회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자녀 대학입시 문제로 정치인이 공분의 대상이 되는 것도 학벌세습으로 부를 대물림한다고 대중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은이도 능력자 계층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분노를 문제 삼는다. 최상위 0.1% 세력은 만연된 불평등에 좌절한 집단을 포획해 능력자 계층과 대립하게 한다. 허무맹랑한 분석이라고 볼 일이 아니다. 트럼프의 성공이 이를 입증한다. 보수세력이 대중을 사로잡아 개혁이나 진보세력을 궁지로 모는 전략으로 공정성을 들고나오는 우리 정치현실도 여기에 들어맞는다.


인류는 지위와 부를 혈연관계에서 대물림하는 세습주의를 타파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나눠주는 능력주의 사회로 전환해 왔다. 미국이 대표적인 성공사례였고, 우리도 그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제 능력주의는 덫이 되었다. 능력이 세습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은이는 능력자 계층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데 주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역시 능력자 계층으로서 불평등을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은 점을 반성한다. “전쟁, 혁명, 국가의 붕괴, 전염병” 같은 치명적인 대재앙만이 불평등을 끝장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히려 최상위층과 공모해 왔노라 고백한다. 나 또한 내가 포함된 86세대를 비판하려고 이 글을 쓰지 않았다. 이철승이 말한 대로 “개인수준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수준의 비효율을 초래하는 예는 비일비재”한 법이다. 공동체의 가치에 이바지했으나 결과적으로 불평등이 강고해진 현실에 무관심했던 나 자신을 반성할 따름이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지은이가 한 다음의 말을 곱씹어 본다.


“미국혁명의 첫 세대는 대개 9.9%에 속했지만, 최상위층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최고의 혁명은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중상위 계층이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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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오직 인의일 따름인데 하필이면 이익을 말하느냐는 맹자의 결기가 말이다. 젊은 날 <맹자>를 읽었을 때는 당당함이 돋보였다. 권력자 앞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양보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그 용기야말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모든 것의 가치가 오로지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상황에서 맹자는 돈에 미친 시대를 건너게 해주는 지혜의 등대라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배병삼의 <맹자, 마음의 정치학>을 읽으면서 맹자 철학의 두터운 지층 가운데 한 켜가 철학 논쟁의 결과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맹자는 공자의 직계 제자가 아니다. 그는 제후의 푸줏간에는 살진 고기가 널려 있건만 들판에는 주려 죽은 백성의 시신이 널브러진 전란의 시대를 끝장내려면 어떤 철학이 필요한지 고심했다. 당대를 지배한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의 것을 섭렵하며 마침내 공자 철학에 동의했다. 그 철학을 이어나가되 비판하여 더 옹골찬 사유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맹자는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당장 전국시대를 사로잡았던 묵가와 싸워야 했다. 양주파 역시 그와 논쟁을 벌인 짝패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른바 명가, 법가, 병가와도 논전을 벌였다. 맹자 이해하기가 뜻밖에 어려운 것은 철학사의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인데, 달리 말해 맹자를 읽다보면 백가쟁명의 동양 고대철학을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배병삼의 책은 바로 이 논쟁점을 돋을새김하여 맹자 철학의 고갱이를 이해하도록 이끄는 데다 맹자와 맞붙은 쪽의 관점을 잘 해설해 놓아 두루 읽는 이에게 도움이 되도록 했다. 특히 묵가와 그 영향권에 놓인 고자와 벌인 치열한 철학적 전투는 흥미진진한 데다 다른 <맹자> 해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맹자 철학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하필왈리를 해설한 대목부터 묵가와 벌인 진검승부를 박진감 있게 풀이했다. 묵자 철학은 겸애로 수렴한다. 그런데 이 겸애하는 목적이 서로 이익을 나누기 위해서라는 점은 주목하지 않는다. 겸상애(兼相愛)는 곧 교상리(交相利)다. 맹자가 보기에 이 철학이야말로 교정리(交征利), 그러니까 이익을 다투는 위기를 몰고 온 주범이다. 묵자는 “남의 나라 위하기를 자기 나라 위하듯 한다면 그 누가 자기 나라를 들어 남의 나라를 치겠는가”라고 말했다. 배병삼은 이 구절에서 위민(爲民)주의를 읽어낸다. “요컨대 겸애를 바탕으로 군주가 백성을 ‘위하면’ 백성의 수가 늘어나고 군사력이 강해지므로 결과적으로 군주의 이익이 늘어난다는 것”일 뿐이다. 배병삼은 맹자 철학을 위민주의나 민본주의라 여겨온 통념을 비판하면서 맹자는 한마디로 여민(與民)의 철학이라는 점을 설득력 높게 풀이해냈다.


공손추가 맹자에게 부동심을 여쭙자 맹자가 직접 인용한 고자의 말은 교양인 수준에서 이해하기 상당히 어렵다. 고자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 했다. 배병삼은 고자가 한때 묵가에 몸담았던 인물이라는 점에 착안해 이 말을 묵가의 군사조직 원리에 기대어 풀이했다. 고자의 말은 상명하복의 피라미드식 조직이었던 묵가의 조직운영 원리인 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은 이해되지 않거나 불합리한 지시를 가리킨다. 묵가에서 마음은 “생존을 위한 계산 능력”에 불과했으니,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는 계산하지 말라는 뜻이다. 묵가는 마음을 다양하고 변화가 심해 고정불변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의는 외부에 있다는 의외론(義外論)을 펼쳤다. 반면, 맹자는 인의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제사에 쓸려고 끌고 가는 소가 부들부들 떨자 그 꼴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한 제선왕이나, 모르는 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 갈 적에 선뜻 구해주는 것은 오로지 누군가 겪는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없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마음에 깃든 선한 것을 지키고 키우고 확장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세우자는 게 맹자 철학이다.


이 대목을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고자와 본성론을 두고 벌인 격론을 이해한다. 고자가 “인성으로 인의를 만드는 것이 꼭 버드나무로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외부에서 사람을 교정하는 제작적인 속성”을 드러낸 것이다. 고자가 성은 용출수와 같다고 하거나, 생이란 성이라 한 것이나, 성은 식색의 욕망이라 한 것은 인간을 한낱 본능적 동물로만 보았기에 한 말이다. 맹자가 공자에 이어 주목한 것은 기희(幾希)다. 사람이 금수와 구별되는 극히 드문 그 무엇을 찾았으니, 차마 못 본 척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 그것이다. 어찌 보면, 맹자 철학은 위태롭다. 고작 마음에, 그것도 드문, 그런데 고작 ‘차마’라는 부사어로만 표현될 것으로 여민의 세상을 이루고자 했으니.


배병삼의 <맹자, 마음의 정치학>을 읽다보면 맹자의 고독을 느끼게 된다. 짐승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이루어내려면 어떤 방도가 있을까? 너도나도 지적 고투 끝에 방책을 내놓지만 결국에는 군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이르고 만다. 다른 길을 뚫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때 인의 가치를 신화적인 인물인 요순에 기대어 설파하는 공자를 발견한다. 맹자도 마음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발명하고 이를 널리 알렸으나, 권력자는 그의 철학을 외면한다. 이 책을 읽노라면, 2300년 된 &lt;맹자&gt;라는 현을 다시 켜 살아있는 음을 내려는 배병삼의 고독 또한 느껴진다. 여전히 이익만을 내세우는 시대에 맹자의 목소리는 한낱 소음으로 들리겠지만, 십여 년을 바쳐 &lt;맹자&gt;를 우리말로 옮기고 풀이해서 하는 말이다. 스스로 길을 낼 만한 인물이 아니라 자조한다면, 주저앉을 일이 아니라 길을 내며 남긴 발자취라도 따라가야 하는 법. 배병삼이 다시 연 맹자가 꿈꾼 그 길을 기꺼운 마음으로 걸어보자.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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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발표 때부터 화제가 되었던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를 읽으며 마음이 착잡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이끈 ‘386세대’가 이제 강고한 기득권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음 세대의 미래를 가로막는다는 분석에 대체로 동의할 수밖에 없어서다. 특히 지은이가 던진 질문은 등골이 서늘한 긴장을 느끼며 곱씹어 보았다. 지은이는 물었다. 386세대가 노동시장에서 고통받는 청년세대와 여성, 그리고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맞서 싸웠던 산업화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민주주의가 터 잡았는데 왜 우리 사회는 더 잔인한 계층화와 착취의 기제를 발달시켰는가, 라고.


386세대는 반체제 지식인과 민중세력의 결집으로 권위적인 정치권력을 무너뜨렸다. 민주화 이후 386세대는 대거 직업정치인이나 전문관료로 변신했다. 지은이는 이를 ‘시민사회의 국가화’라 했다. ‘1987년 체제’라는 말은 386세대가 이룬 역사적 성과의 한 상징이다. 운도 따랐다. 1997년에 몰아닥친 외환위기는 386세대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위기를 이겨내려고 자본은 구조조정의 칼을 뺐다. 윗세대가 경제영역에서 강제퇴역 당하고, 다음 세대는 아예 진입이 막혔다. 정보화 시대는 완전한 세대교체를 이루는 결정타였다. 정치와 경제, 시민사회를 장악한 386세대는 ‘이익 네트워크’를 이뤄내며 우리 사회의 확실한 지배그룹이 되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386세대가 맞이한 화양연화의 시대는 찬란하나니, “다른 세대를 압도하는 고위직 장악률과 상층 노동시장 점유율, 최장의 근속연수, 최고 수준의 임금과 소득점유율, 꺾일 줄 모르는 최고의 소득상승률, 세대 간 최고의 소득격차”, 참으로 다 이루었도다! 라고 감탄할 만하다. 그런데 지은이가 또 물었다. ‘신분제 사회를 만들어 놓고 내 자식이 신분제 사회의 상층에 오를 확률을 높이는 전략과, 신분제 사회를 해체하고 내 자식과 다른 자식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사회적 위험을 분담하며, 노동의 대가를 적절히 공유하는 사회를 만드는 전략 중 어느 쪽이 현명한가?”라고.


아무리 386세대가 득세한다고 하더라도 신분제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항변할 수 있을 터다. <불평등의 세대>는 이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지를 밝히기 위해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산업화 세대는 주로 1930년대생이다. 이들은 벼농사 문화에서 비롯한 신분제와 위계문화가 몸에 배었다. 그러다보니, 산업화 세대는 교육과 자산 투자를 통해 과거의 신분제적 위계를 재생산하거나 극복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 세대의 불평등은 대물림되었다. 오늘의 노동 지위를 분석하는 틀로 지은이는 결합노동시장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고용형태가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일터가 대기업인지 중소기업인지, 작업장에 노조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세 가지 기준을 내세웠다. 이 기준에서 두 개 이상을 충족하면 노동시장에서 상층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대기업-정규직-유노조의 조건에 들면 상층으로 전체 임금노동자의 20%가량이다. 대기업-비정규직-무노조는 중층으로 약 30%다. 중소기업-비정규직-무노조는 하층으로 50%를 차지한다. 이 결합노동시장 지위가 중요한 것은 한 지위에 들어서 줄곧 그 상태를 유지하면 신분계급화의 초기 단계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세대의 노동시장 지위가 자식세대에게도 이어진다면 이를 세습화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여러 지표로 새로운 의미의 신분제 사회가 닥쳤음을 입증했다.


이제 지은이의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386세대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난리냐는 항변은 통하지 않는다. 자유와 평등의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젊은날을 희생한 세대다. 그런데 자본의 자유는 실현되었을지언정 일하는 사람의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나서야 한다. 이 예기치 못한 지옥도를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젊은날 목청껏 외쳤던 평등의 가치가 오롯이 실현되도록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지은이는 그 방법으로 “한국사회에 대한 386세대의 두 번째 희생”을 촉구했다. 노동시장에서 가장 불리한 자리에 놓인 다음 세대에게 최대의 기회를 보장하려면 386세대의 양보를 전제로 몇 가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임금 삭감, 임금피크제, 연금 혜택 축소로 마련한 돈으로 청년고용을 확대하자고 한다. 지금의 연공제는 불황일 때 기업이 비정규직을 늘리고 고용을 동결하는 핑계가 되니 직무제로 전환해야 한단다. 그리고 증여나 상속에 따른 세금을 엄격히 집행해 그 일부를 청년세대 주거권 보장을 위해 사용하도록 법제화하는 방안도 내놓았다. 


청년세대를 위한 복지국가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대안도 제시했다. (재)훈련 시스템을 도입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취업 및 창업 알선기관을 확장해야 한단다. 당연한 말이지만 비정규직 위주의 유연화를 지양하잔다. 사회안전망을 확충하자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하여 “도발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담대한 젊은이가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보자고 호소한다. 지은이는 이 대안을 ‘사회적 자유주의’라 이름 붙였다. 고삐 풀린 자본의 횡포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회와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국가의 힘을 빌리자는 뜻을 담았다.


책을 덮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386세대는 과연 희생의 길을 택할까? 도리질만 했다. 지은이도 말했지만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경우는 드물다”. 거기다 지은이의 대안은 자본계급의 양보가 포함되지 않았다. 일방적 양보를 택할 세대는 없다. 내가 보건대 세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역시 지은이도 말했지만, 다음 세대가 “386세대를 통한 대리정치를 끝내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데 있다. 청년세대가 정치세력화해 386세대를 압박해야 한다. 자기 세대에게 주어진 소명을 명예롭게 마치고 퇴장할 것인지, 아니면 다음 세대에게 추방당할 것인지 택일하라고 말이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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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에로스의 짝패로 타나토스를 꼽았다. 우리 무의식에는 삶에 대한 충동뿐만 아니라 파괴 본능도 있다는 말이다.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의 대담을 기록한 <사쿠라 진다>를 보면 오늘의 일본이 타나토스적 충동에 빠져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우치다는 흥미로운 사례를 들었다. 일본도 지방이 황폐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뜻있는 이들이 지역 활성화 사업을 펼치려 하면, 일종의 토호세력 가운데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대체로 3대째 내려오는 여관이나 요정의 주인이다. 지역경제가 무너지면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데 상식 밖의 반응을 보인다. 속사정을 살펴보면 이해 가는 면이 있다. 이들은 물려받은 업을 지켜야 한다는 책무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능력이 없지만 스스로 버릴 수는 없으니, 누군가 무너뜨려주길 바라는 숨은 열망이 있었던 셈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늘의 일본 정치인은 3대조가 설계하고 만들어낸 체제를 물려받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스템이 낡고 망가졌다. 문제는 다시 세우고 고치기엔 실력도 열정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이 체제가 해체되길 바란다. 마치 지역 활성화 사업을 반대한 여관 주인처럼 말이다. 일본을 혐오하는 외국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을 터다. 하지만 일본의 지식인이 내뱉은 말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톺아보아야 한다. 특히 왜 일본의 지배층이 이런 극단의 길을 가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우치다는 말한다. “상상을 뛰어넘는 참혹한 사태에 이르면 누구의 책임이니 누구의 잘못이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이 잿더미로 돌아간 다음에 망연자실하며 제행무상을 느끼는, 그러니까 파국원망이 일본의 전통 무상관(無常觀)에 뿌리내린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 이쯤에 이르면 오늘 일본의 병증이 어느 정도 악화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소장 사회학자 시라이는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을 이른바 영속패전론이라는 프리즘으로 분석한다. 이 개념은 일본 지배층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부인하고 미국에 비굴하게 종속한 점을 가리킨다. 일본 지배층은 패배라는 말보다 종전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전쟁을 일으켰던 집단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어서 그렇다. 역사의 단죄를 받았어야 할 집단이 지배층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냉전체제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미국의 처지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해줄 게 뻔한 좌파에게 권력을 내줄 리 없었다. 비굴한 대미 굴종은 여기서 비롯했다. “일본의 보수 정치세력은 미국의 허락 아래 권력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터라” 미국에 감히 맞설 수 없으니 “일본은 미국에 영원히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일본 지배층이 패전을 숨기는 또 다른 방식은 아시아에서 패배한 사실을 감추는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했던 중국과 식민지배했던 한반도에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 경제가 재기에 성공하면서 주변국이 타협책을 모색한 것도 이런 경향을 강화했다.


일본이 위기에 놓인 것은 바로 이 구도가 끝장나서다. 먼저 냉전이 종식되었고, 한국과 중국이 눈부실 정도로 성장했다. 이른바 영속패전 체제가 무너졌는데, 새로운 체제에 걸맞은 방책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아베의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이라는 퇴행적 정책이 여론의 힘을 얻고 있다. 이 정책을 일러 우치다는 일본의 싱가포르화, 북한화라고 지적한다. 싱가포르의 국시는 경제성장이다. 그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잣대는 오로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가이다. 성장에 도움이 안되면 민주주의도 필요없다는 식이다. 더불어 북한처럼 핵무장하고 징병제 해서 무서운 국가로 동아시아에서 군림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 대목에서 다시 우치다는 말한다. “자력으로는 오늘날의 미·일 질서를 바꾸거나 수정 보완할 힘도 없고, 비전도 없기 때문에 전부 엉망진창이 돼버리는 파국이 도래하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이런 관점에서 <고질라> 시리즈는 재해석된다. 사토 겐지는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는 분열했고 파괴를 간절히 바라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그 무의식을 형상화한 게 고질라라고 보았단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의 상황은 고질라가 스크린에서 튀어나와 일본 본토를 습격한 격이었다고 분석했다고 한다. 우치다는 일본인의 죄책감과 자기처벌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 고질라라고 해석했다. 고질라가 일본을 습격한다는 내용은 근대 일본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억압한 것들의 귀환이라고 평가했다. 


두 논객의 날카롭고 거침없는 대담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베의 재집권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가 요동치는 이유를 알 수 있고, 최근의 무역보복이 뜻하는 바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이익 때문에 역사청산이 이뤄지지 않았고, 영속패전 체제 이후를 준비 못해 위기에 빠졌다는 점은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일제 잔재 청산을 못했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다. 아직은 일본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일본 못지않게 큰 위기를 맞이할 것이 확실하다. 


또 있다. 우치다는 극우세력이 극성을 떠는 나라의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프랑스는 전쟁기간에 나치에 협력했기에 패전국가라고 주장한다. 레지스탕스와 드골의 활약을 방패 삼아 비시정권의 과오를 은폐했을 뿐이다. 그 결과 자유·평등·박애의 나라에 극우집단이 나타나 세를 얻고 있다. “어떤 나라에서나 극우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이유는 말하기 어렵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을 억압한 데에 있다는 일반논리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역사 청산의 기한이 끝난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되물어볼 일이다. 왜 우리 사회에 다시 극우집단이 준동하는가, 라고.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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