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2019년 제 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표지


1월 초부터 불거진 ‘이상문학상 사태’는 2월4일 문학사상사가 올해 수상자 발표를 하지 않고 계약 조항을 수정하겠다는 공식입장을 낸 이후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문학사상사는 공식 입장문에서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 부족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출판사가 저작권 양도 조항에 대해 몰랐을 리 만무하지만, 만에 하나 몰랐다고 하더라도 저작권에 대한 무지는 출판사의 기본적인 자격을 위협하는 몹시 심각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구가 저작권 갈취의 고의성을 덮기 위해 공식 입장문에 쓰인다는 사실은 돈 문제에 대한 무지가 문학계에서 양해될 만한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상문학상 사태’와 관련해 발표된 일부 글에서 문제의 핵심이 굴절되고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가지게 마련인 특유의 자존심” “상징권력” “창작자와 출판사는 동반자적 존재” “우정과 연대”와 같은 말들은 작가의 권익 보장과 불공정한 계약 거부라는 이번 사태와 섞일 이유가 없다.


돈 문제에 대한 무지가 용인되거나 그 심각성이 경시되는 현실의 밑바닥에는 문학의 경제적인 조건에 대해서 성찰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부정하기까지 하는 오랜 폐습이 있다. 한국 사회는 문학과 돈의 관계를 사유하는 데 있어 매우 미숙하다. 문학 작품에 그려지는 가난에 대해서는 열심히 공부하지만 현실에서 작가가 돈에 대해서 말하면 불편해한다. 한국문학의 독자가 늘어나길 바라지만 많이 팔리는 문학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저작권, 선인세 및 원고료 지급을 비롯한 공정한 계약 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무디다. 집단적인 경제불감증이다.


이는 문학에 대한 관념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것은 한국 문학이 지켜내야 할 오랜 미덕이자 자부였다. 산업사회 이후에도 문학의 존재 이유를 보증해주고 소위 대중예술과 구분되는 가치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을 위태롭게 만드는 근본적인 위험은 자본주의에 침윤되거나 시장 논리에 좌우되는 상황이 아니라 문학이 돈과 맺고 있는 관계 자체를 사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온다.


문제는 그 사유의 부재와 미성숙의 대가를 개인이 매번 자신에게 화살을 겨누며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윤이형 소설가는 1월31일 작품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입장문에서 자신이 “용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저작권’과 ‘출판권 및 배타적 발행권’을 구별하지 못”한 채로 양도 문서에 사인했다며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최은영 소설가 역시 같은 날 발표한 입장문에서 “작년에 우수상을 받았던 저의 안일함을 지난 몇 주간 돌아보며 채찍질”했다고 적었다. 출판사의 명백한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부조리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해야 한다.


이번 사태가 문학출판계의 열악한 노동환경, 예술인권리보장법 제정안 등 새로운 논의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문학계의 이 거대한 무지와 불감증을 깨려는 움직임이다. 여러 작가들이 문학사상사 업무거부 해시태그 운동에 가담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불공정한 계약 조건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위인 동시에 문학장에 진입한 행위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발화하겠다는 의지다. 스스로를 무지한 상태에 두기를 거부하고 오랫동안 문학에 덧씌워진 순수한 이미지에 복무하지 않겠다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작가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할 때, 이것이 비단 돈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학 자체의 문제라는 당연한 말을 언제까지 해명하듯 덧붙여야 하는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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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형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최근 ‘절필’을 선언한 윤이형 작가.


1년 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매년 기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을 ‘깜짝’ 발표하는 그곳에 소설가 윤이형이 있었다. 반가웠다. 2016년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운동 당시, 윤이형은 문단의 남성중심성과 폭력성, 그 안에서 ‘여성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작가였다. 그는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문단의 구조와 가해자들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고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문학계 성폭력의 방관자로서 폭력의 확대 재생산에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이런 일들을 자각한 여성 창작자로서 앞으로 어떤 서사를 쓸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는 그가 내놓은 문학적 답변이었다. 함께 살던 고양이의 죽음과 함께 결혼 제도의 폐해를 그리면서도, 문제를 적당히 봉합하거나 성급하게 파국을 그리지 않았다. 끈질기게 해답을 찾고 대안을 모색했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사회 속에서 필연적인 갈등에 부대끼는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서 감동과 위안을 받았다. 그런 작품이 ‘이상문학상 대상’으로 호명됐기에 적잖게 기뻤다. ‘페미니즘에 입문한 작가’의 변화와 시도에 제도권 문학이 인정해준 것이므로. 그런데 그 인정과 호명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1년 뒤 윤이형이 ‘절필’을 선언했다.


‘이상문학상 사태’는 소설가 김금희가 이상문학상 우수상 조건으로 ‘저작권 3년 양도’ 조항이 부당하다고 문제제기하며 시작됐다. 이어 윤이형이 ‘절필’을 선언했다. 오십명이 넘는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를 선언하며 보이콧에 나섰고, 그제서야 문학사상사는 저작권 양도 조항을 삭제하고, 이상문학상 수상작 발표를 취소했다. 겉보기엔 작가들의 단체행동이 거둔 ‘승리의 서사’로 읽힌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나 소중한 작가 한 명을 잃었다. ‘윤이형’은 소설 대신 SNS를 통해 문단·출판계의 불공정한 구조를 비판하는 ‘고발자’가 됐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과 세계와의 싸움을 기록하면서도 희망과 연대를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글을 써오던 작가가 그 꿈을 접고 분노와 절망 속에 고발의 글을 쏟아내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까.


“문학계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수많은 문제와 부패와 부조리들을 한 명의 작가가 제대로 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윤이형이 말했다. 지금까지 ‘지뢰’들은 표절 논란, 성폭력 사건, 저작권 침해 등으로 다양하게 터져나왔다. 윤이형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봐야 한다. ‘지뢰밭’을 뚫고 나온 예외적 작가만이 생존하는 시스템이라면, 지뢰를 통과하기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작가, 운이 좋은 작가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지뢰’ 없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을 때 당연히도 그 결과물이 더 풍요롭지 않을까. 이상문학상 수상 조건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문단·출판계의 문화와 구조, 법과 제도에 관한 문제다. 예술인을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예술인 권리보장법’은 국회에서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대한 답을 모두가 모색해야 한다. 그때 잃어버린 작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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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진화심리학자 전중환은 혐오가 병원체 감염을 예방하는 심리적 적응이라 말한 바 있다. 낯선 병원체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혐오 정서가 발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뜻이다. 새삼스럽게 이를 입증할 실험을 찾아볼 필요도 없게 되었다. “전염병이 다시 드러낸 바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퍼지자 우리 사회에 일어난 혐오증세를 개탄한 한 칼럼의 제목이다. 그 칼럼의 내용대로 전염병을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혐오와 배척의 정서가 일어나면서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현상을 보는 것도 무서운 일이었다. 


호모사피엔스의 미덕은 스스로 진화의 압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유년시절에는 혐오감이 생존과 번식을 가능케 했다면, 문명사회에서는 환대가 종의 멸종을 막고 더불어 사는 세계공동체를 이룰 핵심가치가 될 터다. 이를 수긍할 수 있게 설명한 책이 바로 김현경이 쓴 <사람, 장소, 환대>이다. 지은이는 사람과 인간을 뚜렷하게 나눈다. 사람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이 있다는 뜻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사람, 장소, 환대는 맞물려 있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이에 비해 인간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일 뿐 사회가 인정하는 문제는 아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자리’라는 낱말에 오랫동안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이 자리는 중의성을 띠었을 터다. 하나는 자리 잡고 살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직위나 지위다. 지은이 설명에 따른다면, 우한에 고립되었던 국민이 귀국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 일부는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돌아와 진단하고 치료할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 했고, 그들도 마땅히 우리의 국민이라는 지위를 부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환대의 대척점에 낙인찍기가 있을 터다. 고프먼은 낙인의 특징으로 ① 신체의 괴물스러움 ② 정신적인 결함(의지박약, 비정상적 열정, 잘못된 신념, 부정직 등) ③ 특정한 인종, 민족,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 등을 꼽았다. 낙인찍힌 이는 오염되었다고 여겨 공공장소에 접근할 수 없고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금지되었다. 신종 코로나 공포 탓에 오로지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택시에 태우지 않거나, 식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행위가 바로 낙인찍기다. 낙인찍기가 문제되는 것은 이들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인류사를 보면 낙인찍기와 배척은 반드시 희생양을 낳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를 낙인찍어 모욕하는 일에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유다.


지은이는 데리다의 환대론(論)을 지렛대로 삼되, 그 한계를 돌파하며 절대적 환대의 가능성을 설파한다. 먼저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고대사회와 달리 현대사회 들어 모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무조건적 환대를 받아 사회 성원이 된다. 이것은 “그 생명이 살 가치가 있는지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 안에 넣은 채 그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고대 로마 시절, 내다 버린 아이를 데려다 키운 사람은 아이를 종으로 부리거나 팔았다. 지은이는 이를 환대가 아니라 증여의 논리라 비판한다. 의무와 빚을 면책하거나 그 사실을 잊게 해주는 게 진정한 환대라는 것. 끝으로 복수하지 않는 환대. 적대적인 상대방도 환대해야 하는데, 이는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은이는 타자의 영토에 유폐된 이들에게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것이 절대적 환대라 말한다. 더불어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소품을 마련해주어야 마땅하니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문화인류학적 환대는 정치경제학적 환대로 도약한다. 집 없는 이에게는 주거수당을, 일자리 잃은 사람에게는 실업수당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는 게 환대이니 말이다.


한 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환대받지 못하자 입학을 포기했단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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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아르코예술극장 무대에 오른 ‘자화상’.


20세기 초에 현대무용이 나타나기 전까지 무용작품에서 관객의 관심은 안무보다는 오로지 춤을 추는 무용수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요리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과 비슷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안무와 요리는 공통점이 많다.


요리사와 안무가가 선택한 메뉴·주제는 이전부터 가져온 그들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때로는 재료가 내용을 결정하기도 하는데 아무런 계획 없이 요리사가 시장을 한 바퀴 돌고 어떤 재료에 의해 내리는 결정처럼 안무가도 어떤 무용수나 음악, 이야기에 끌려 충동적 결정을 할 때가 있다.  


특별한 재료에 집착하는 요리사처럼 안무가는 적합한 무용수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간혹 산기슭에 난 하찮게 보이는 들풀로 멋진 요리를 하는 요리사가 있듯이 어떤 안무가는 훈련 된 무용수가 아닌 일반인과 작업을 하여 기존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작품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재료를 다 갖추고 나면 다듬는다. 자신의 작품을 위한 무용수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안무가는 곳곳에서 모인 무용수들과 함께 신체를 단련하거나 즉흥을 나누면서 전체 멤버가 공통언어를 구사하게 될 때까지 호흡을 맞추는 시간을 함께 나눈다. 이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본의 부토는 집단생활을 하기도 한다.  


다음은 재료를 삶거나 데치거나 굽거나 또는 날것의 신선도를 유지시키는 조리 과정이다. 안무가는 즉흥과 동작탐구를 통해 나온 움직임을 연결, 해체, 재배치해 무용수가 가진 개성을 더 강화시키는 동시에 무용수들의 몸에 그 새로운 움직임들의 양념이 잘 스며들도록 프랑스어로 레페티시옹이라 불리는 반복적 훈련과정을 거친다.


요리는 어울리는 그릇을 만날 때 진가를 발휘한다. 스펙터클보다 퍼포먼스의 개념을 공유하는 대다수의 현대 안무가들은 자신의 안무를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시각효과를 기피하는 현상이 있지만 피나 바우슈 같은 경우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데 압도적인 무대미술을 역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요리는 먹는 이의 입으로 들어가서 미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들과 만나 그 참맛을 느끼게 한다. 안무 또한 공연을 통해 관객의 지성과 감각으로 흡수된다. 물론 어떤 요리는 소화에 시간이 걸리듯이 안무 또한 납득이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비평에는 관심이 없다고? 요리사가 주방 뒤에서 먹는 이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듯 99.9%의 안무가도 객석 구석에 앉아 관객들의 반응에 마음을 졸인다.


<남정호 | 현대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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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솔로 ‘흉내’. 2007년 아르코 소극장. ⓒ 요이치 쓰카다(Youichi-Tsukada)


최근 몸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것 같다.


몸을 안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사람을 안다는 것이다. 사람을 아는 것을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마음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마음은 몸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되기 때문이다.


몸 중에서도 얼굴은 가장 두드러지게 그 사람을 드러낸다.


지금부터 150여년 전에 미국인 링컨은 “남자는 마흔 살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라”는 명언을 했다. 이 말은 남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적용될 수밖에 없다.


남자건 여자건 나이를 먹으면 자신의 삶의 역사를 보여주는 얼굴, 이 반갑지 않은 보고서에 당황하게 된다. 미간에 깊숙이 파인 주름은 그동안 매사에 불만스러워 늘 찌푸린 표정을 해 왔던 옹졸함의, 처진 눈꺼풀은 그동안 타인을 성의 있게 응시하지 않은 습관의 산물이다. 다행히도 화장이 일시적이나마 세월을 조금 덜어주었는데 때맞추어 나온 성형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나의 얼굴을 바꿀 수도 있게 되었다.


멋진 세상인가?


아니 무서운 세상이다!


얼굴뿐만이 아니다. 몸도 다이어트나 여러 운동을 통해 개조되고 세상의 다양한 언어들이 사라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다양한 몸들이 사라지고 있다. 자신도 현대사회의 일원임을 증명하기 위해 지구촌의 모든 이들이 서구 지향적인 획일적 신체를 가지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 


그런데 몸짓은 아직 개체적, 지역적, 민족적 다양함을 유지하고 있다.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형성되어 온 독특한 몸짓이야말로 쉽게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은 거짓을 교묘하게 구사하지만 몸짓은 거짓이 서투르다.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몸짓에 내포된 속내를 감지할 수 있다. 거만하지 않고 비굴하지도 않은 적절한 몸짓을 잘 구사하면 성형이나 다이어트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 멋진 매력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럼 그런 몸짓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몸짓이 풍요로운 무용공연을 자주 접하도록 하시지요.


대부분의 안무가는 이런 몸짓들을 기반으로 하여 움직임의 언어를 재창조한다. 따라서 무용 관객 3년이 되어 그 움직임들을 따라가다 보면 당구풍월(堂狗風月)이 되어 어느새 그 매력적인 몸짓들을 공유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은연중에 하는 사소한 몸짓의 의미도 해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남정호 현대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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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번쩍 띄었다. 제목이 심상찮았다. <중용>을 <일상사에 초점 맞추기(Focusing the familiar affairs of the day)>라 번역했다. 당연히 우리 학자는 아니다. 오랜 관행을 깨고 이미 그 뜻을 짐작하는 제목을 굳이 풀어낼 리 없다. 서구의 동양철학자라 가능한 일이다. 중용을 이처럼 번역하는 근거가 궁금해 책을 뒤적여보았다. 로저 에임스와 데이비드 홀은 먼저 중용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지 밝히고, 주요 용어를 영어로 그렇게 옮긴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나서 중용 본문을 옮기고 주석을 달고, 맨 끝에 중용 텍스트 분석을 실었다. 본디 고전은 이런 식으로 옮겨야 마땅하다. 독자는 이 과정을 따라가면서 옮긴이의 독창적 해석에 매료되고 새로운 번역을 지렛대로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게 마련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 저자는 고대동양의 사유를 과정지향적 세계관이라 분석했다. 서구는 정지와 영원을 선호한다. 동양은 연속성, 생성, 전이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 관점을 바탕으로 하나의 용어를 맥락에 따라 여러 단어로 옮기는, 일종의 언어 클러스트를 구성했다. 예를 들면 중(中)의 번역어는 초점(focus), 초점 맞추기(focusing), 균형(equilibrium), 중심(center), 불편부당(impartiality)으로 언어 클러스트를 이루었다. 파격은 성(誠)의 번역어이다. 기존의 번역어와 같이 성실(sincerity), 정직(integrity)을 쓰기도 하지만 대체로 창조성(creativity)이라 옮겼다.


저자는 성을 창조성이라 번역한 이유를 소상히 밝혔다. 동양철학을 과정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표리부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sincerity와 건강한 전체라는 의미의 integrity는 건실하게 되어가는 혹은 전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반드시 포괄해야 한다. 전체가 되어 가는 심미적 역동성이야말로 창조과정이 의미하는 것”이란다. “우주적 창조성의 지속적 과정에 인간의 참여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라는 말에 수긍이 갔다.


신정근은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에서 성을 완전한 진실이라 보고 26장을 “완전한 진실은 멈추는 적이 없다. 멈추지 않으면 오래 가게 되고, 오래 가면 효과가 나타나고, 효과가 나타나면 여유 있고 오래 가고,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면 넓고 두터워지고, 공간적으로 무한히 쌓이게 되면 고상하고 지혜롭게 된다”라고 옮겼다. 벽안의 저자는 이 대목을 “극진한 창조적 과정은 끊이지 않는다. 끊임이 없으니 지속한다. 지속하니 효과가 있다. 효과가 있으니 멀리까지 미친다.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넓고 두텁다. 넓고 두꺼워 높고 빛난다. 높고 빛남은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게 한다. 멀리까지 미치게 되니 모든 사건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라고 옮겼다. 과연 적절한지 논쟁이 일어날 법하지만, 관점이 뚜렷한 번역이 주는 신선함은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영어권에서 <중용>은 제임스 레그 이래 줄곧 <The Doctrine of the Mean>이라 옮겼다. 여기서 Mean은 평균값, 중간값을 뜻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족과 과잉이라는 두 극단 사이의 평균값에 자리한 덕성을 중용이라 하니, 예를 들자면 용기는 비겁과 만용 사이의 중용이 된다. 이에 비해 지은이는 용(庸)을 일러 정현이 말한 중도의 실천적 적용에서 ‘초점 맞추기’를, 주희가 말한 일상적이고 보통인 것에서 ‘일상사’를 착안해 <일상사에 초점 맞추기>라 제목을 옮겼다. 특히 familiar는 같은 어근의 family를 떠올리게 해 유가의 핵심인 가족의 가치를 확인해준다. 


동양고전을 영어로 옮긴 작업의 결과가 흥미로워 책을 읽다가 나중에는 오늘 우리에게 중용이 왜 중요한지 새삼 곱씹어 보게 되었다. 중용의 저자나 집필시기는 늘 논란이 되나, 대체로 전국시대의 작품으로 본다. 전쟁이 일상이 된, 극단의 시대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한 책이 바로 중용이다. 승자독식의 시대를 넘어 세대 간 불평등문제가 심각해지고 때아니게 이념으로 편을 갈라 싸우기 바쁘다. 우리가 사는 오늘이 바로 또 다른 전국시대다. 이제, 균형의 시대로 넘어가려면 중용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신정근은 모순의 공존과 현실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태도라 했다. 비록 칼날 위를 걸을 수는 있어도 중용의 길은 가기 어렵다 했으나, 우리 사회가 더 늦기 전에 이 길로 접어들기를 소망해본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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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해 싸움을 거는 일이고 작가는 세상에 어깃장을 놓고 싸움을 거는 존재다. 그 싸움은 단지 작품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작가란 작품으로도 작품 바깥으로도 늘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또 싸워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교수가 이상문학상 수상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나선 소설가 김금희를 지지하면서 말했다. 이 글을 보며 생각했다. 작가가 ‘싸우는 존재’라면 이미 한국 문학에 충분하다. 과거 독재와 국가폭력 같은 ‘대문자 권력’에 항거하는 싸움을 해왔다면, 우리 안의 차별과 배제, 권리의 억압 등 ‘소문자 권력’과의 싸움이 한국 문학 안에서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그 싸움을 주도하는 것은 여성, 신인 작가들이다. 고은 시인의 성폭력을 폭로하고 법원에서 승소한 최영미 시인이 대표적이다. 모두가 알면서 침묵한 ‘대시인’의 성폭력에 대해 그는 ‘괴물’이란 시를 통해 용기 있게 폭로했다.


새해 첫날, 새롭게 탄생한 작가들 중 일부는 기존 관행에 ‘어깃장’을 놨다. <신춘문예 당선시집>에 작품 수록을 거부했다. 이유는 2016년 터져나왔던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운동과 연관이 있다. 지난해 경향신문 당선자 성다영 시인에 이어 올해 서울신문 시 당선자 이원석씨와 한국일보 시 당선자 차도하씨가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가 문학세계사의 이사였다는 이유로 작품 게재를 거부했다. ‘문단 내 성폭력’은 기성 작가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 습작생들과 신인 작가들을 착취한 사건이었다. 가해자가 관련된 출판사에서 신인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도맡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지를 이들은 묻는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 역시 ‘이름 없는’ 습작생과 신인 작가들에 의해 이뤄졌다. 이제 그 사건을 보고 겪은 세대가 ‘작가’가 되어 기존 관행에 제동을 걸고 있다.


신춘문예가 신인들을 발굴하는 잔치라면, 이상문학상은 기성 작가들 중 최고를 겨루는 자리다. 이상문학상은 44년 ‘전통과 권위’에 기대어 대표적 문학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 문학 독자라면 빨간색 띠를 두른 수상작품집을 한 권 정도 소장하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사상사는 ‘전통과 권위’를 스스로 훼손했다. 상의 권위는 공정한 심사 과정과 수상작품의 가치, 작가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느냐에 따라 주어질 것이다. 상을 주는 대신 작품의 저작권을 출판사에 3년간 양도할 것과, 이를 작가가 작품집 표제작으로도 쓰지 못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갑질’에 해당하는 부당한 조건이다. ‘명예’를 줄 테니, ‘권리’를 포기하라는 요구다. 문학사상사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대해 “본상의 공정성과 권위를 광범위한 독자에게 널리 알리고, 수록된 작품과 그 작가들에 대한 표창과 영예의 뜻을 담고 있다”고 밝혔다. 김금희는 말한다. “예술가들을 격려하기 위한 시상을 한다면 그들의 노고와 권리를 존중하세요.” 새해 벽두, 낡은 틀이 새로운 것을 담아내지 못하면서 내는 경쾌하고 희망적인 파열음을 듣는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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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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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기억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다. 비슷한 기억을 공유해도 제각각의 해석과 이유를 내재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고래사냥’이라는 고유명사 역시 마찬가지다. 창시자는 작가 최인호였다. 대학시절 노래, 영화, 소설의 순서대로 접했던 &lt;고래사냥&gt;은 봉인된 시간을 열어주는 열쇠 같은 존재였다.

 

송창식이 부른 ‘고래사냥’은 영화 &lt;바보들의 행진&gt;의 주제가로 등장한다.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최인호의 소설을 영화화한 &lt;바보들의 행진&gt;은 1975년 국도극장에서 개봉한다. 이후 노래 ‘고래사냥’은 금지곡이라는 작은 훈장을 받는다. 고래사냥의 유효기한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1983년 최인호의 장편소설로 모습을 선보인다. 작가는 영웅서사를 제거한 병태라는 인물을 내세워 대한민국 청년문화를 그려낸다.

 

소설은 방황을 거듭하다 일상으로 회귀하는 주인공을 묘사하는 소심한 결론으로 막을 내린다. 주인공 병태는 마지막까지 겁쟁이며, 유약하고, 눈물이 많은 비겁한 젊은이로 그려진다. 작가는 날이 밝으면 사람들은 자연히 잠에서 깨고 눈을 뜬다는 문장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순환하는 역사 앞에서 인간의 개혁의지는 의미가 없다는 저자의 논리는 깊은 의문부호를 남긴다.

 

스스로를 우월감에 불타는 거짓 휴머니스트라고 자인한 병태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부활한다. 이번엔 배창호가 감독으로 나선다. 김수철, 안성기, 이미숙이 참여하는 영화 &lt;고래사냥&gt;에서는 송창식의 노래가 등장하지 못한다. 1987년까지 금지곡이라는 형틀 속에 갇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작은 거인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가 자리를 대신한다.

 

영화에서 민우(안성기역)는 변화를, 병태(김수철역)는 고립을 상징하는 인물로 나온다. 언로가 막힌 사회현실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두 인물의 종착역은 달랐다. 민우는 변화를 모색하는 회색인의 삶을 유지한다. 병태는 고립에서 현실복귀라는 수순을 택한다. 그들은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상태로 격랑의 1980년대를 살아간다. 작가는 병태의 입을 빌려 고래는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에둘러 정리한다.

 

영화 &lt;고래사냥&gt;은 1985년에 속편을 선보인다. 당시 청춘스타였던 손창민과 강수연이 &lt;고래사냥2&gt;의 주연배우로 낙점을 받는다. 배경음악은 당시 국악에 심취했던 김수철이 맡는다. 이것으로 고래사냥의 신화는 휴지기에 들어간다. 시간이 흘러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염원하는 1987년 6월항쟁이 터진다. 광장에서 목놓아 노래 ‘고래사냥’을 외치던 이들은 병태처럼 일상으로 돌아간다.

 

2018년 가을에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소설 &lt;고래사냥&gt;을 재출간한 것이다. 그러나 느낌은 예전 같지 않았다. 착착 달라붙던 인물 간의 대사는 어색했고, 방황의 이유 또한 모호해 보였다. 그렇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저자와 병태가 오매불망 움켜쥐려는 고래는 매력적인 숙제였다.

 

2020년하고도 1월이다. 1월이 주는 의미는 사뭇 비장하다. 크건 작건 간에 목표를 세우기 적당한 시기며, 털어버리고 싶은 습관과 이별하기 괜찮은 때다. 실천에 대한 부담을 핑계로 대충 살기에 만만치 않은 달이다. 생각과 실천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시간이 던져주는 숙제를 실천이라는 행위로 재단장할 기회다. 시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그렇기에 아끼고 챙겨야 할 가치재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의 어딘가에 감춰놓은 고래와 만나보면 어떨까. 노래가사처럼 동해바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딴 골목을 찾아 거닐어보자. 그곳에서 고래와 잊혀진 대화를 나눠보자. 잊고 지낸 자아와 재회하는 순간이 엄습할 것이다. 혹시 아는가. 민우가 상상하던 올곧은 고래가 마음 한 곳에 자리 잡을지. 

 

3년이라는 시간이 화살처럼 흘렀습니다. 2016년 12월, 설레는 마음으로 첫 칼럼을 준비할 때가 떠오르네요. 보람도, 고민도, 책임감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번 칼럼을 끝으로 야간비행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독서인간의 서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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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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