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함으로 음성 녹음파일 몇 개가 도착했다. 파일을 재생시키고 눈을 감았다. 시를 낭독하는 음성이 들렸다. 시라는 길을 나아가는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여유로워 마치 산책하는 듯한 목소리다. 다섯 편의 시를 다 듣고 함께 동봉된 PDF파일을 통해 시를 다시 읽었다. 그냥 시를 읽을 때와는 또 다른 감상이 느껴졌다. 이것은 차도하 시인이 제공하는 자작시 낭독 메일링 서비스 ‘목소리’이다.


성다영 시인은 2019년 등단한 직후에 성폭력 가해자가 이사였던 출판사에 자신의 작품을 싣지 않겠다면서 문학세계사가 주관한 신춘문예 당선시집에 작품을 게재하는 것을 거부했다. 올해 한국일보에서 등단을 한 차도하 시인과 서울신문에서 등단한 이원석 시인이 그 뒤를 이었다. 차도하 시인이 구독형 메일링 서비스 ‘목소리’를 기획한 것은 일련의 사태로부터 비롯되었다.


차 시인은 “청탁을 거절하며 저의 시를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에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단순한 대체 지면을 떠나 기획을 해보자는 결심을 했다. ‘차도하’라는 신인 시인을 보여주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스스로 물었고, 제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되짚어보았다”고 밝혔다.


문학이 메일링 서비스나 웹진 등을 통해 인터넷으로 먼저 선보이는 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미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일간 이슬아’와 같은 시도를 비롯해 정세랑, 김언수, 박상영, 김인숙, 김금희, 정지돈, 심채경, 김원영의 글을 함께 볼 수 있는 ‘웹진 문학동네’(weeklymunhak.com) 같은 서비스가 있는가 하면, 문예지 바깥에서 창작자와 독자가 연결되는 큐레이션 공간 SRS(s-r-s.kr)나 자유투고를 통해 젊은 작가들의 글을 볼 수 있는 공간인 던전(d5nz5n.com) 등도 생겼다. 시나 소설만 구독 모델로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서양 철학 관련 문헌을 번역 출판하는 SNS 전기가오리(@philoelectroray)의 구독 서비스나 비평가 조영일의 ‘메일링 비평구독’(sozo.tistory.com)같이 학술 영역에서 깊이 있는 글 또한 구독 서비스를 통해 제공된다.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이유에서 이루어진다. 기존의 문예지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거부하거나 해체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고, ‘문학’이나 ‘학계’라는 이름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독자적으로 선보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등단이라는 제도의 바깥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독자와 만나기 위함이기도 하고 인쇄 매체보다 디지털 매체에 익숙한 시대 변화를 따라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렇듯 조금이라도 출구를 넓혀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행위는 분명 긍정할 만하나, 거기서 ‘문학’이라는 대상이 대중친화적인가 하는 원론적인 고민도 함께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문학’에서 멀어지는 까닭이 접촉면이 적기 때문일까. 오히려 ‘문학’은 인쇄 매체의 공간, ‘문예지’라는 필드 안에서 안전하게 격리·보호받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몇몇 시도를 살펴보면 구독 서비스라는 최신식 모델 속에서 낡고 고립적인 이야기만을 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예를 들면 초기 ‘던전’은 서브컬처의 밈을 잔뜩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청탁 텍스트의 정체성을 ‘순문학 유료 웹진’으로 한정했다. 이러한 형상은 기존의 ‘문학’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지형도를 오프라인 공간에서 온라인으로 이식한 것에 불과할 뿐 변화가 아니다. 이렇게 알맹이나 형식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필드를 만들어 기존의 문단 권력을 해체하겠다는 시도는 이미 독립문예지에 의해 진행되었다가 별다른 수득을 얻지 못한 행위이기도 하다.


추이를 보면 이러한 구독 형태의 서비스는 점차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 필요한 것은 형태의 고민보다 알맹이를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고민 아닐까.


<이융희 |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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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그레이엄이 1940년 초연한 <세계에 보내는 편지>. ⓒ 마사 그레이엄 컴퍼니


‘숙녀에게 나이와 몸무게를 묻지 말라’는 말은 최근에 와서 양성 불평등의 관점을 가지고 있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고 있다. 사실 이 말은 무대 위의 숙녀인 발레리나에게 가장 많이 적용되어 왔다. 발레 명작 중에 <잠자는 미녀>의 주인공 오로라 공주의 나이는 16세. 발레리나들은 나이가 들어도 이 역을 춤추기 위하여 연령과 몸무게를 초월하려는 피나는 노력을 해왔지만 20~30대의 전성기를 거쳐 40대에 접어들면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대부분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100세시대를 이야기하는 현대에 와서 인류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무용가의 무대 위 수명도 길어졌다. 대다수의 현대무용가들은 연령과 몸무게가 제각각인 무용수들의 개별적 특성을 존중한다. 예전에 비하여 과학적으로 신체훈련을 익힌 덕분에 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출연도 한다. 게다가 기술보다 표현에 가치를 두는 성숙한 무용수를 선호하는 안무자들이 많아지고 있어 무용수의 연령은 점점 높아가고 있고 심지어 브랜드화되기도 한다.


80세 넘어서도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미국의 초기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은 ‘춤추는 것과 춤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물론 춤추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 다음 세대인 머스 커닝햄 역시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인 92세까지 플라스틱 관절을 달고 자신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들이 출연하는 공연마다 좌석이 빨리 매진됐다는 것은 무대에서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경지의 성숙한 무용가들을 관객들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대변한다. 


이 경우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일본 부토무용가 오노 가즈오이다. 71세 때 발표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무용가 반열에 올랐고 104세에 사망하기 얼마 전까지도 휠체어에 몸을 싣고 춤을 춘 전설같은 행적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는 순박한 농부의 건강한 춤으로 평가받았던 하보경 밀양북춤명인이 있다. 80대 중반에 손자의 등에 업혀 등장한 그의 무대를 본 기억이 있는데 발이 땅에 닿자마자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한발 앞으로 딛기도 힘든 상태라 한자리에 줄곧 서서 장단과 가락을 정교하게 짚으면서 관절을 섬세하게 흔드는 그의 춤에 모두가 취했다. 


춤을 사랑하는 무용가라면 나이에 관계없이 무대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춤은 젊은이들만 추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지푸라기 하나라도 들을 힘이 있으면 이 세상의 어느 무용가도 무대에서 춤출 수 있다.


<남정호 |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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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콧등이 시큰해지며 울컥해진다. 얼마 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대구 주민을 위해 써달라며 119만원을 기부했다는 보도를 접하며 감동했다. 대구지역에서 확진자 숫자가 급증하자 광주에서 감염병 전담병원의 병상 중 절반을 대구 경증환자를 치료하는 데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두 지역의 골 깊은 지역감정과 그것이 빚은 역사적 참극을 생각하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경희대 학생 세 명이 뜻을 모아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을 돕자는 취지로 학내 커뮤니티에서 모금활동을 펼쳤는데, 일주일 만에 4600만원 정도 모았다고 한다. 애초 목표는 50만원. 뜻이 갸륵한 데다 말만 앞세우는 어른보다 낫다 싶었다.


전쟁은 예상할 수 있다. 설혹 선전포고 없이 일어나더라도 조짐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이 일으키는 재난은 과학의 레이더를 벗어나기 일쑤다. 한번 일어나면 경악과 충격, 그리고 속수무책이라는 수식어로만 겨우 상황묘사가 가능하다. 놀라운 것은 이런 재난의 잿더미에서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적인 행동이 꽃핀다는 사실이다. 9·11 참사 당시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던 대략 2만5000명은 서로 도우며 질서정연하게 대피해 피해를 줄였다. 재난 현장에는 공학기술자, 건설노동자, 의료요원, 용접기술자 같은 전문가가 자진하여 모여들었다. 강가에 고립된 사람을 구하려고 너도나도 배를 몰고 와 준 덕에 어림잡아 30만명이 대피할 수 있었다. 미담은 워낙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죽음의 냄새가 자욱한 지옥에서 천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랑과 연대의 향연을 만난 셈이다.


재난 현장에 섬광처럼 나타난 놀라운 이타적 장면을 포착해 그 의미를 탐색한 책이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이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 허리케인에 이르는 다섯 건의 대재앙을 톺아보고 있다. 지은이는 대재앙의 현장에서 벌어진 이타적 행위만을 과장해 설명하지 않는다. 일단, 재난 그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재난의 현장엔 기회주의적 행동도 있고,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 빈민과 소수자와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 약탈과 경제범죄에 대한 강박관념, 치명적인 무력에 기대려는 마음, 헛소문에 기초한 행동”인 엘리트 패닉이 종종 일어난다는 점을 인정한다.


지은이는 재난을 막 겪고 난 이를 만나서 들은 회고담을 소상히 밝혔다. 우리는 흔히 그가 공황상태에 놓여 있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예상은 빗나갔다. 모든 게 엉망이 돼버린 날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웃이 모두 집 밖으로 나와 서로 대화를 나누며 도와주고, 즉석에서 급식소를 세우고 노인을 보살폈단다. 그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서로를 보며 행복감을 느꼈죠”라고 말했다. 재난 때문에 “평소의 구분과 양식이 모두 파괴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형제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의식과 유대감은 혼란과 두려움, 상실과 죽음 속에서도 기쁨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폐허의 한복판에서 “공적 삶과 시민사회에 대한 열망”이 솟아오르고, “깊은 만족감과 새로운 사회적 유대, 자유”를 누리며, “공동체적이고, 융통성 있고, 상상력이 풍부한” 삶을 보이고, “아비규환 속에서 기적을, 슬픔 속에서 기쁨을,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주는” 역설적 상황을 지은이는 재난 유토피아라 이름 짓는다. 물론 이 유토피아는 오래가지 않는다. “끔찍한 순간에 아주 짧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 엄청난 순간을 두고 우리가 고민할 바는 수두룩하다. 인간 본성론으로 좁혀 보더라도 새로운 통찰이 가능하다. 가장 최악의 순간에 설핏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본성 아니겠는가. 재난이라는 번개가 치니 잠시 드러난 인간 본성은 제임스가 말한 시민기질, 그러니까 사회참여가 의무가 아니라 하나의 취향이자 지향이라는 말이나, “한마디로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며, 인간을 사회에서 벗어나게 하기는 불가능하다”는 토머스 페인의 언명과 일치한다.


고통스럽고 답답한 재난의 시절을 보내며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재난에 빠져 있을 적에야 비로소 짧게 “상호부조와 이타주의의 천국이 나타나는지가 아니라, 왜 평소에는 그런 천국이 다른 세계의 질서에 묻혀버리는가”라고. 그 답을 찾다보면, 지은이의 말대로 지옥의 문턱에서 연대와 사랑의 공동체로 열린 뒷문을 찾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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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솔로 꿈꿀 권리, 2004년, 호암아트홀 ⓒ박상윤


미국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은 맨발로 춤춘 최초의 무용가로 알려져 있다.


돌이켜보면 태초에 원시인들은 대지를 두 발로 딛고 자신을 땅과 결합시키면서 모두 맨발로 춤을 추었다. 발은 신체 중에서 땅과 만나는 가장 가까운 부분이며 발이 온몸을 받쳐줌으로써 인간은 서고 걷고 달릴 수 있다. 


어른이 되면 두 발로 서는 것이 얼마나 치열하게 획득한 큰 사건이었는지 잊어버리지만, 갓난아이가 두 발로 서게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몇 번이나 쓰러지면서도 끝내 일어서는 순간 아이는 최초로 독립하는 인간이 된다. 바닥과 접해 있던 신체의 많은 부분이 땅과 분리되고 두 발이 다른 모양으로 땅과 재결합되는 과정은 네 발 유인원이 두 발 직립인간으로 진화한 과정의 축소판으로 볼 수도 있다. 


이후 발은 신체의 가장 밑바닥에서 묵묵히 모든 신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역할을 감당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에서 가장 낮은 위치와 평행하여 낮은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그러한 발이 주역으로 등장할 때는 발길질을 당하는 것이 최대의 모욕이 되는 것처럼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질 때이다.


성경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발을 씻기고,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 


왜 하필이면 발일까? 


신체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발을 대할 때는 자신의 몸 위치를 발에 근접하게 아주 낮추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절대적 존중과 신뢰 그리고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자세다. 


맨발은 현대무용의 상징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이사도라 덩컨이 맨발로 춤춘 지 한 세기가 흘렀다. 지금은 맨발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무용가가 점점 사라지고 양말, 운동화, 구두를 신고도 춤을 추지만 현대무용의 시작은 맨발이었다. 맨발로 춤추는 것은 전족과 같은 발레 토슈즈를 벗어 던진 기세당당한 초기 여성 무용가들의 자부심이었다. 맨발로 춤을 추게 되면서 여자는 언제나 반쪽의 도움이 필요한 여자 무용수가 아니라 혼자서도 뛰어오르고, 돌고 그리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온전한 무용수가 되었다. 이후 현대무용의 역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성 해방의 역사와 나란히 길을 가고 있다.


초기 현대무용의 본질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혁명이었다. 이 초심을 기억하고 훼손하지 않을 때 현대무용은 가치를 가장 크게 발휘한다.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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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내외에서 ‘문학’이 왜소해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문단 내부에서 문학위기론은 종종 나오던 주제였지만 이 절박함이 일상까지 만연하게 퍼진 것은 몇 년 전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이 터질 무렵부터로 기억한다. 


그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내가 의아했던 지점이 있다. 앞서 일련의 고발들은 문학 내부의 비정상을 정상화하라는 요구였고, 관습으로 눙치고 넘겼던 수많은 범죄를 직시하자는 외침이었다. 그럼 그건 ‘왜소’해지는 것이 아니라 과잉되고 비대했던 허세를 걷어내고 본질을 살펴보는 작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왜소’란 단어에 집착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두말할 것 없이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일 것이다. 왜소하다는 말에서 굳이 권력까지 끄집어 이야기하는 것이 거창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은 문단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우리 주변에 익숙하게 녹아 있다.


최근 문학이 ‘왜소’해지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바로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 사태다. 문학사상사가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수상자들에게 저작권을 3년 동안 양도받고, 향후에도 문학상 수상집에 포함된 작품은 개인 작품집을 낼 때 표제작으로 삼을 수 없다는 규정이 들어간 부당계약서를 제시했다. 이러한 계약서 내용에 반발한 김금희, 최은영, 이기호 등의 작가가 수상을 거부했고,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던 윤이형 작가는 절필을 선언했다. 다른 작가들도 연달아 보이콧 선언을 하며 문학사상사와의 모든 업무를 함께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이어졌다. 그러자 문학사상사는 사과문을 내놓았다.


일각에서는 그런 움직임을 마뜩지 않게 보는 이야기도 나온다. 앞서 말한 ‘권력’이 녹아있는 방식의 목소리들인데 예컨대 문학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이렇게 문학상 수상집이라도 들어가 있으니 팔리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다. 이상문학상이 걸어온 행보를 이야기하며 이러한 사태로 문학상이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일침 역시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권력은 생계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권력이 없는 사람은 생을 위협받는다. 지속 가능한 삶에서 멀어지고,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곳으로 내던져진다. 이것은 생계를 빌미로 작가와 작품을 착취하고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논리다. 우수한 작품이 상을 받고 그것을 엮어서 수상집을 출간하는 과정은 출판배급권의 영역이다. 작품의 아이디어와 발상, 문장과 표현의 권리인 저작권이 이 과정에서 계류될 이유는 없다. 또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은 개인 작품집에서 표제작으로 사용하면 안된다는 제한까지 감수할 이유도 없다. 그것은 시장이 자신의 출판 브랜드를 키우기 위한 착취에 불과하다. 그런 착취만으로 굴러가는 문학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영예로운 자리가 아니라 그저 상품 프로모션 한 줄을 추가하는 것과 다름없다.


최근 몇 년 동안 문학은 문제를 고발하고 승리하는 기억을 쌓아왔다. 이번 사태 역시 문제를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거기에 수많은 목소리가 모이는 연대의 과정이었다. 이러한 연대는 참가자 개인의 성공과 영리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싸우고, 앞으로의 ‘문학’을 위해서 싸운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묻혀 있던 구조가 일반인들에게까지 공개되고 비정상적인 관행으로 진행되어왔던 수많은 잘못들이 정상화될 것이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한국의 문학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니 문학이 ‘왜소’해지는 까닭을 젊은 작가들의 이기심이나, 또는 이때까지 잘 진행되어왔던 관행이나 문학의 권위를 만들고 의미를 만들었던 행사를 깨부순 탓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주목하자. 강단에서 이루어지던 범죄행위의 고발을 스승을 존경하지 못하는 몰염치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주목하자. 문학을 왜소하게 만드는 자들이 그곳에 있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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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한 영화관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부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잇따라 발생해 번화가와 관광지가 썰렁한 모습을 보였다. 연합뉴스


모든 게 취소되고 연기됐다. 한 공연 기획자는 사재를 털어넣어 통 크게 준비했던 공연을 취소했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뒤죽박죽인 그 메시지에서 그가 울분의 낮술에 취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홍보사들은 일제히 언론 시사회가 취소됐다는 메일을 발송했고 매주 듣는 수업도 긴급히 온라인으로 대체됐다. 남의 처지를 안타까워할 때가 아니다. 겨우내 준비했던 글쓰기 개강을 미루기로 했다. 여기저기 잡혀 있던 강연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감염의 두려움은 마스크와 세정제로 어떻게든 달랠 수 있지만 당장의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에는 예방책이 없다. 정부의 긴급 지원 대책도 나 같은 프리랜서에게는 남의 떡에 불과하다.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노는 일상이 위협받는다는 것처럼 두려운 상황이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일상이 위협받았던 작은 순간을 기억한다. 두렵기보다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해 여름, 태풍 볼라벤이 한국을 강타했다. 볼라벤이 직격하던 그날 밤, 나는 제주의 바닷가에 있었다. 글쓰는 사람에게는 좋은 경험이라고 허세를 떨면서 부둣가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우산이 뒤집혔고 우비도 산산조각이 났다. 조금만 더 가면 글을 쓰기 위한 경험은커녕 사망 체험을 할 것 같아 바로 들어왔다. 과연 자연의 힘은 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밤사이 숙소 지붕이 뜯겨나가고 사람 몸뚱이만 한 바위가 도로로 날아들었다. 전기는 물론 각종 시설 또한 무사할 리 없었다. 아침이 되자 통신도 끊겼다. 숙소 거실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의 눈빛은 불안했고 호흡은 무거웠다. 완전한 고립이 주는 두려움의 공기 비슷한 것이 공간을 채웠다. 


뭘 할 수 있을까 하다 전기가 끊기기 전까지 충전해뒀던 블루투스 스피커 생각이 났다. 여행 갈 때 스피커를 챙기는 게 일상적이지 않았던 때다. 마침 휴대폰 배터리도 충분했다. 전화와 스피커를 연결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쓰기 전인지라, 휴대전화에 꽤 많은 음악이 저장돼 있었다. 음악을 틀었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경쾌한 전주에 이어 김광석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타고 몸속으로 흘렀다.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 순간 누그러지던 중압감을. 생기가 돌아오던 눈빛을. 비로소 활기를 찾던 호흡을. 그 순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냉장고 속 음식을 모두 꺼내 요리를 시작했다. 그나마 잦아든 바람을 뚫고 슈퍼마켓으로 가 막걸리도 잔뜩 사 왔다.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은 그렇게 아침부터 술판을 벌였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낮 내내 취했다. 단절된 일상이 음악 한 줄기로 말미암아 다시 연결됐다. 암울할 뻔했던 여행의 하루를, 그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좀 다르게 추억하리라. 


경제적·문화적으로 일상에 빗금이 간 지금, 다시 한번 그때 그 따뜻한 선율 같은 힘을 갈구하게 된다. 넘쳐나는 증오와 혐오에 지친 멘털을 추슬러줄 무언가를 찾게 된다. 아웃브레이크를 몰고 온 사교(邪敎)집단에 대한 증오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힘은 역으로 이 상황을 이겨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나온다. 하루하루 초췌해지는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 역병의 현장에서 방역복을 입은 채 앉아 쪽잠을 자는 보건당국 실무자들, 감염의 위협을 무릅쓰고 대구로 몰려드는 의료인들 말이다. 드라마 &lt;스토브리그&gt;의 백승수 드림즈 단장처럼 “할 일을 할 뿐”인 사람들의 사투에서 나는 한 줄기의 멜로디를 느낀다. 혐오와 아사리판에서 바람처럼 솟아나는 선율을 느낀다. 그들의 고된 얼굴에, 생활인의 영역을 넘어서는 분투에 나는 지친 마음속 한 자리를 내주려 한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낙관으로 위기의 일상에 미약한 활기나마 새기려 한다.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음악을 듣지 않았다. 듣지 못했다. 이 글을 마친 후, 나는 LP를 꺼내 턴테이블에 얹을 생각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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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2019년 제 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표지


1월 초부터 불거진 ‘이상문학상 사태’는 2월4일 문학사상사가 올해 수상자 발표를 하지 않고 계약 조항을 수정하겠다는 공식입장을 낸 이후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문학사상사는 공식 입장문에서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 부족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출판사가 저작권 양도 조항에 대해 몰랐을 리 만무하지만, 만에 하나 몰랐다고 하더라도 저작권에 대한 무지는 출판사의 기본적인 자격을 위협하는 몹시 심각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구가 저작권 갈취의 고의성을 덮기 위해 공식 입장문에 쓰인다는 사실은 돈 문제에 대한 무지가 문학계에서 양해될 만한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상문학상 사태’와 관련해 발표된 일부 글에서 문제의 핵심이 굴절되고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가가 가지게 마련인 특유의 자존심” “상징권력” “창작자와 출판사는 동반자적 존재” “우정과 연대”와 같은 말들은 작가의 권익 보장과 불공정한 계약 거부라는 이번 사태와 섞일 이유가 없다.


돈 문제에 대한 무지가 용인되거나 그 심각성이 경시되는 현실의 밑바닥에는 문학의 경제적인 조건에 대해서 성찰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부정하기까지 하는 오랜 폐습이 있다. 한국 사회는 문학과 돈의 관계를 사유하는 데 있어 매우 미숙하다. 문학 작품에 그려지는 가난에 대해서는 열심히 공부하지만 현실에서 작가가 돈에 대해서 말하면 불편해한다. 한국문학의 독자가 늘어나길 바라지만 많이 팔리는 문학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저작권, 선인세 및 원고료 지급을 비롯한 공정한 계약 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무디다. 집단적인 경제불감증이다.


이는 문학에 대한 관념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것은 한국 문학이 지켜내야 할 오랜 미덕이자 자부였다. 산업사회 이후에도 문학의 존재 이유를 보증해주고 소위 대중예술과 구분되는 가치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학을 위태롭게 만드는 근본적인 위험은 자본주의에 침윤되거나 시장 논리에 좌우되는 상황이 아니라 문학이 돈과 맺고 있는 관계 자체를 사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온다.


문제는 그 사유의 부재와 미성숙의 대가를 개인이 매번 자신에게 화살을 겨누며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윤이형 소설가는 1월31일 작품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입장문에서 자신이 “용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저작권’과 ‘출판권 및 배타적 발행권’을 구별하지 못”한 채로 양도 문서에 사인했다며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최은영 소설가 역시 같은 날 발표한 입장문에서 “작년에 우수상을 받았던 저의 안일함을 지난 몇 주간 돌아보며 채찍질”했다고 적었다. 출판사의 명백한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부조리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해야 한다.


이번 사태가 문학출판계의 열악한 노동환경, 예술인권리보장법 제정안 등 새로운 논의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문학계의 이 거대한 무지와 불감증을 깨려는 움직임이다. 여러 작가들이 문학사상사 업무거부 해시태그 운동에 가담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불공정한 계약 조건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위인 동시에 문학장에 진입한 행위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발화하겠다는 의지다. 스스로를 무지한 상태에 두기를 거부하고 오랫동안 문학에 덧씌워진 순수한 이미지에 복무하지 않겠다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작가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할 때, 이것이 비단 돈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학 자체의 문제라는 당연한 말을 언제까지 해명하듯 덧붙여야 하는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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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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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형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최근 ‘절필’을 선언한 윤이형 작가.


1년 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매년 기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을 ‘깜짝’ 발표하는 그곳에 소설가 윤이형이 있었다. 반가웠다. 2016년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운동 당시, 윤이형은 문단의 남성중심성과 폭력성, 그 안에서 ‘여성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작가였다. 그는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문단의 구조와 가해자들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고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문학계 성폭력의 방관자로서 폭력의 확대 재생산에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이런 일들을 자각한 여성 창작자로서 앞으로 어떤 서사를 쓸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는 그가 내놓은 문학적 답변이었다. 함께 살던 고양이의 죽음과 함께 결혼 제도의 폐해를 그리면서도, 문제를 적당히 봉합하거나 성급하게 파국을 그리지 않았다. 끈질기게 해답을 찾고 대안을 모색했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사회 속에서 필연적인 갈등에 부대끼는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서 감동과 위안을 받았다. 그런 작품이 ‘이상문학상 대상’으로 호명됐기에 적잖게 기뻤다. ‘페미니즘에 입문한 작가’의 변화와 시도에 제도권 문학이 인정해준 것이므로. 그런데 그 인정과 호명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1년 뒤 윤이형이 ‘절필’을 선언했다.


‘이상문학상 사태’는 소설가 김금희가 이상문학상 우수상 조건으로 ‘저작권 3년 양도’ 조항이 부당하다고 문제제기하며 시작됐다. 이어 윤이형이 ‘절필’을 선언했다. 오십명이 넘는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를 선언하며 보이콧에 나섰고, 그제서야 문학사상사는 저작권 양도 조항을 삭제하고, 이상문학상 수상작 발표를 취소했다. 겉보기엔 작가들의 단체행동이 거둔 ‘승리의 서사’로 읽힌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나 소중한 작가 한 명을 잃었다. ‘윤이형’은 소설 대신 SNS를 통해 문단·출판계의 불공정한 구조를 비판하는 ‘고발자’가 됐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과 세계와의 싸움을 기록하면서도 희망과 연대를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글을 써오던 작가가 그 꿈을 접고 분노와 절망 속에 고발의 글을 쏟아내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까.


“문학계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수많은 문제와 부패와 부조리들을 한 명의 작가가 제대로 다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윤이형이 말했다. 지금까지 ‘지뢰’들은 표절 논란, 성폭력 사건, 저작권 침해 등으로 다양하게 터져나왔다. 윤이형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봐야 한다. ‘지뢰밭’을 뚫고 나온 예외적 작가만이 생존하는 시스템이라면, 지뢰를 통과하기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작가, 운이 좋은 작가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지뢰’ 없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을 때 당연히도 그 결과물이 더 풍요롭지 않을까. 이상문학상 수상 조건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문단·출판계의 문화와 구조, 법과 제도에 관한 문제다. 예술인을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예술인 권리보장법’은 국회에서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대한 답을 모두가 모색해야 한다. 그때 잃어버린 작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영경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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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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