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담당을 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취재현장에서 질문을 하기가 어렵다. 어설픈 질문으로 나의 얕은 식견이 탄로날까 두려운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내 얕은 질문으로 작가나 큐레이터가 행여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두번째다. 그래도 기사를 써야 하니, 또 취재를 하다보면 나도 궁금한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서 질문을 하기는 한다. 지금까지는 다행히 좋은 취재원들을 만나서 무식한 질문이라고 타박을 받은 적은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작품의 가격을 대놓고 묻거나 따지는 것이다. 경매 낙찰가가 화제가 됐던 제프 쿤스나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작가의 작품이 아닌 이상 “이 작품은 얼마나 하나요?” “왜 이렇게 비싼가요?” “이렇게 비싸도 사람들이 사나요?” 하고 질문하기 어렵다. 미술계 사람들이 순수한 예술혼만으로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지는 않겠지만, 또 당연히 돈을 받고 작품을 사고팔겠지만 왠지 내가 질문을 하는 순간 속물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 또 나 혼자만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실토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장 궁금한 이야기이긴 하다. 특히 그 가치는 물론이고 의미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작품은 왜 그런 가격을 받는지 알고 싶다. 물론 ‘그 작품을 원하는 사람이 많으면 가격이 올라간다’는 시장의 원리가 있지만, 모든 작품이 항상 시장에서 정확한 가격을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이런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자리가 있었다. 국내 미술품의 유통 가격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간담회를 열어 자체적인 미술품 가격 결정 모형을 처음 공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의 소장작품 가격을 재평가하기 위한 용역을 받아 연구를 진행했다. 


협회의 가격 결정 모형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학업·전시 활동·인지도 항목을 각 1∼3점으로 매긴 뒤 작업 경력을 반영해 해당 작가의 통상 가격을 산출한다. 학업 특성에서는 출신 학교는 구분하지 않되 학부 비전공 1점, 대학 졸업 2점, 대학·대학원 졸업 3점으로 차등을 뒀으며, 전시 활동은 대관전 1점, 기획전 2점, 초대전 3점으로 나눴다. 인지도 면에서는 수장 이력·소장 내역·보도 내용을 평가해 최대 3점까지 주기로 했다. 이를 바탕으로 특정 작품의 보존 상태·크기별 가격·작품성·시장성을 따져 최종 가격을 책정한다.


기준이 되는 작품 크기는 10호다. 각각 마이너스 4점부터 플러스 4점까지인 작품성 및 시장성은 협회 소속 감정위원과 전문위원이 작업 재료, 작품 주제, 제작 시기, 경매 성적 등을 반영해 평가한다.


시장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작가의 작품에 가격을 매기기 위한 기준일 뿐이라고 한다. 기존에는 관행적으로 동년배에 유사한 학력을 지닌 작가들의 작품가격을 참고해 평가했다고 하니 이런 기준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 이상하다. 무엇보다 작가의 학력과 전공을 가격산정에 반영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시대착오적이란 생각마저 든다.


‘거리의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처럼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도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이 떠오른다. 또 건축으로 일가를 이뤘으면서도 200여점의 회화를 남긴 이타미 준도 있다. 이런 작가들의 그림을 ‘비전공자의 작품’이라고 깎아내릴 수 있을까.


여전히 나를 비롯한 많은 대중은 미술품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의 학력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미술품 시장에 관심을 가지고, 그 가격 결정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일 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력 같은 구시대의 기준 말고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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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4일 새벽. 톈안먼광장에서는 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시위가 한창이었다. 군부는 총기와 전차를 앞세우고 시위군중에 접근한다. 고르바초프의 방문 시기에 유혈참극이 중국 한복판에서 벌어진다. 이어 중국 정권의 만행을 고발하는 세계 언론의 포화가 쏟아진다. 당시 동유럽발 개혁·개방정책에 영향을 받은 중국은 정치·경제의 내홍을 겪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옥도가 펼쳐지는 고국으로 복귀하는 인물이 있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중국문화 강연을 하던 류샤오보였다. 1955년생인 그는 노르웨이, 하와이, 뉴욕 등에 이르는 순방길에 있었다. 처음으로 접한 국외 문명의 파고에서 류샤오보는 전통적인 중국의 비판이론이 진부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지식체계가 보잘것없음을 토로한다. 


중국 근대사에 관한 신선하고도 도발적인 해석으로 신지식인의 대열에 합류한 젊은 비평가는 톈안먼사태를 통해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난다. 시위대 대표로 협상무대에 오른 류샤오보는 인권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류샤오보는 1988년 6월에 개최한 박사논문 발표회를 기점으로 두 가지 이미지를 장착한다. 정치적 요주의 인물이라는 족쇄와 중국의 미래를 책임질 지성이라는 표식이었다. 


그는 중국은 300년 동안 식민지가 되어야 비로소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폭탄발언을 쏟아낸다. 중국 공안은 본격적으로 류샤오보 주의령을 내린다. 감시 대상에서 제거 대상에 오른 지식청년의 일상은 순탄치 않았다. 치기어린 학자에서 냉철한 운동가의 역할을 받아들인 30대 류샤오보와 그를 추종하는 대학운동권은 연좌, 단식, 구호만으로 권력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톈안먼사태가 발발하자 류샤오보는 지지세력에게 의미심장한 예언을 한다. 72시간이 지나면 국제관례에 의거하여 정부에서 새로운 협상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발언이었다. 시위대를 향한 정권의 폭압은 류샤오보의 희망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1989년 6월6일 저녁이었다. 귀갓길에 오른 류샤오보는 공안에 의해 연행된다. 국내외 여론이 부담스러웠던 중국 정부는 6월24일에서야 그를 체포했다고 발표한다.  


경제개방과 독재정치를 동시에 이뤄야 하는 독재자는 류샤오보라는 작은 거인 앞에서 장고를 거듭한다. 대부분의 부패정권은 폭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반혁명 선동죄라는 족쇄와 함께 대학강단에서 물러난 류샤오보의 행보는 억압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감금과 억류를 반복하던 반정부인사는 2009년 국가전복선동죄라는 명목으로 징역 11년을 선고받는다. 이듬해 류샤오보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전 세계에 중국 정부를 향한 성찰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여전히 중국은 반성하지 않았다. 시상식 참석을 막기 위해 중국은 류샤오보의 가족을 가택연금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단속국가의 자화상이었다. 부패한 정부, 시민 탄압, 소득격차의 심화라는 삼중고에 빠진 마오쩌둥의 나라는 패착을 거듭한다. 


류샤오보는 2017년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2020년 출옥을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지식청년의 때 이른 죽음이었다. 만약 그가 넬슨 만델라처럼 복역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다면 민주화의 시간을 앞당겼을 것이다.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2019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중국은 177위에 머물렀다. ‘죽의 장막’의 나라는 러시아와 함께 장기집권의 길을 걷고 있다. 2019년 6월, 중국의 탄압에 항거하는 홍콩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진다.


작가 쉬즈위안은 책 <독재의 유혹>에서 버나드 쇼의 말을 빌려 류샤오보를 묘사한다. “정상인들은 세계에 적응하며 살지만 광인은 항상 세계를 자신에게 적응시킨다. 역사의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은 모두가 광인이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취향의 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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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에로스의 짝패로 타나토스를 꼽았다. 우리 무의식에는 삶에 대한 충동뿐만 아니라 파괴 본능도 있다는 말이다.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의 대담을 기록한 <사쿠라 진다>를 보면 오늘의 일본이 타나토스적 충동에 빠져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우치다는 흥미로운 사례를 들었다. 일본도 지방이 황폐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뜻있는 이들이 지역 활성화 사업을 펼치려 하면, 일종의 토호세력 가운데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대체로 3대째 내려오는 여관이나 요정의 주인이다. 지역경제가 무너지면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데 상식 밖의 반응을 보인다. 속사정을 살펴보면 이해 가는 면이 있다. 이들은 물려받은 업을 지켜야 한다는 책무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능력이 없지만 스스로 버릴 수는 없으니, 누군가 무너뜨려주길 바라는 숨은 열망이 있었던 셈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늘의 일본 정치인은 3대조가 설계하고 만들어낸 체제를 물려받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스템이 낡고 망가졌다. 문제는 다시 세우고 고치기엔 실력도 열정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이 체제가 해체되길 바란다. 마치 지역 활성화 사업을 반대한 여관 주인처럼 말이다. 일본을 혐오하는 외국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을 터다. 하지만 일본의 지식인이 내뱉은 말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톺아보아야 한다. 특히 왜 일본의 지배층이 이런 극단의 길을 가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우치다는 말한다. “상상을 뛰어넘는 참혹한 사태에 이르면 누구의 책임이니 누구의 잘못이니 하는 말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이 잿더미로 돌아간 다음에 망연자실하며 제행무상을 느끼는, 그러니까 파국원망이 일본의 전통 무상관(無常觀)에 뿌리내린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 이쯤에 이르면 오늘 일본의 병증이 어느 정도 악화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소장 사회학자 시라이는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을 이른바 영속패전론이라는 프리즘으로 분석한다. 이 개념은 일본 지배층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부인하고 미국에 비굴하게 종속한 점을 가리킨다. 일본 지배층은 패배라는 말보다 종전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전쟁을 일으켰던 집단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어서 그렇다. 역사의 단죄를 받았어야 할 집단이 지배층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냉전체제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미국의 처지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해줄 게 뻔한 좌파에게 권력을 내줄 리 없었다. 비굴한 대미 굴종은 여기서 비롯했다. “일본의 보수 정치세력은 미국의 허락 아래 권력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터라” 미국에 감히 맞설 수 없으니 “일본은 미국에 영원히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일본 지배층이 패전을 숨기는 또 다른 방식은 아시아에서 패배한 사실을 감추는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했던 중국과 식민지배했던 한반도에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전쟁 이후 일본 경제가 재기에 성공하면서 주변국이 타협책을 모색한 것도 이런 경향을 강화했다.


일본이 위기에 놓인 것은 바로 이 구도가 끝장나서다. 먼저 냉전이 종식되었고, 한국과 중국이 눈부실 정도로 성장했다. 이른바 영속패전 체제가 무너졌는데, 새로운 체제에 걸맞은 방책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아베의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이라는 퇴행적 정책이 여론의 힘을 얻고 있다. 이 정책을 일러 우치다는 일본의 싱가포르화, 북한화라고 지적한다. 싱가포르의 국시는 경제성장이다. 그 모든 것의 가치를 결정하는 잣대는 오로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가이다. 성장에 도움이 안되면 민주주의도 필요없다는 식이다. 더불어 북한처럼 핵무장하고 징병제 해서 무서운 국가로 동아시아에서 군림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 대목에서 다시 우치다는 말한다. “자력으로는 오늘날의 미·일 질서를 바꾸거나 수정 보완할 힘도 없고, 비전도 없기 때문에 전부 엉망진창이 돼버리는 파국이 도래하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이런 관점에서 <고질라> 시리즈는 재해석된다. 사토 겐지는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는 분열했고 파괴를 간절히 바라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그 무의식을 형상화한 게 고질라라고 보았단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의 상황은 고질라가 스크린에서 튀어나와 일본 본토를 습격한 격이었다고 분석했다고 한다. 우치다는 일본인의 죄책감과 자기처벌 욕망을 형상화한 것이 고질라라고 해석했다. 고질라가 일본을 습격한다는 내용은 근대 일본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억압한 것들의 귀환이라고 평가했다. 


두 논객의 날카롭고 거침없는 대담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드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베의 재집권 이후 동북아시아 정세가 요동치는 이유를 알 수 있고, 최근의 무역보복이 뜻하는 바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이익 때문에 역사청산이 이뤄지지 않았고, 영속패전 체제 이후를 준비 못해 위기에 빠졌다는 점은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일제 잔재 청산을 못했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다. 아직은 일본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일본 못지않게 큰 위기를 맞이할 것이 확실하다. 


또 있다. 우치다는 극우세력이 극성을 떠는 나라의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프랑스는 전쟁기간에 나치에 협력했기에 패전국가라고 주장한다. 레지스탕스와 드골의 활약을 방패 삼아 비시정권의 과오를 은폐했을 뿐이다. 그 결과 자유·평등·박애의 나라에 극우집단이 나타나 세를 얻고 있다. “어떤 나라에서나 극우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이유는 말하기 어렵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을 억압한 데에 있다는 일반논리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역사 청산의 기한이 끝난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되물어볼 일이다. 왜 우리 사회에 다시 극우집단이 준동하는가, 라고.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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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이 설명하는 세계는 냉혹하고 삭막하다. 아니, 사실은 무심할 뿐인데, 대체로 정에 주린 우리들은 그런 태도조차 차갑게 느낄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믿고 있는 설명에 따르면, 138억년 전에 생긴 우주는 언젠가는 멸망할 것이고 거기서 살아남을 생명은 아무것도 없다. 무심한 세계 위에서 물리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입자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아갈 의미를 찾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현대 과학이 설명하는 세계보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믿어 왔던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은 좀 더 인간을 중심으로 설명했었다. 인간처럼 사랑하고 미워하는 신이 인간과 어울려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도 했고 군림하기도 했다. 때론, 계속되는 생에서 굴레를 벗어나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아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했다. 거대한 세계관 위에 작은 이야기들을 지어서 살아가는 목표를 찾기도 하고 집단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할 대상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무심한 세계 위에 쌓아 올린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가 무엇이 되었든 바탕의 무심함을 이기기는 어렵다. 그래서, 기성과 권위는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고 오래된 질서는, 이 시대에 더 허약하다. 문제는, 허물어진 이야기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쌓는 것도 어려워진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친구에게 삶의 의미를 쥐여 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뿐이다. 설득력 있는, 혹은 재미있는 이야기는 세상과 개인을 잇는 유일한 끈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찾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에 가깝다. 그런데 세상은 재미없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고, 대부분은 자신과 관련이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끈이 약해진 상황에서 자신과 강한 유대를 맺을 강렬한 이야기에 대한 열망은 더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에겐 ‘재미’가 유일한 ‘의미’가 되기도 한다. 모든 자연의 과정은 균열, 파열, 붕괴, 그리고 새로운 균형을 찾는 과정을 반복하기 마련이라 질서가 지워지면 새로운 질서가 들어서야 하는데, 현재의 상황은 오랜 시간을 견딜 만큼 견고한, 큰 질서가 자리 잡긴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나름의 의미, 혹은 재미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사람들이 게임, 영화, 노래, 유튜브, 만화, 스포츠, 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즐길 거리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의 영광, 국가의 명예, 모교의 전통, 가문의 뿌리와 같은 전통적인 가치들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가 조각조각 남아서 곳곳에 진을 치고 있지만 그런 ‘개뻥’들을 넘어서면 ‘재미’를 이길 것이 별로 없다. 아직도 많은 계몽적인 이야기들은 사랑과 연대 같은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목표로 내어놓지만, 그 속의 ‘재미’를 빼면 그런 결론도 뼈대는 허술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나선 사람들의 수요 때문에 생긴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 중 하나는 콘텐츠 유통 채널이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동영상 플랫폼들의 팽창은 가히 빅뱅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고 쏠림 현상이 있지만 드라마, 만화, 영화 등의 공급 편수도 급격히 늘고 있다. 웹소설과 웹툰의 급격한 성장도 이런 대응과 무관하지 않다. 시장이 성장하면서 시장 참가자들의 수익이 늘어난 까닭에 재능 있는 작가들의 유입도 크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웹소설이나 웹툰이 드라마나 영화의 원작을 제공하는 경우도 크게 늘어났다. 대중적인 성공에 힘입어 재능 있는 작가들의 진입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고 독자도 늘어날 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너머의 세계관이 너무 무심하기에 ‘재미’ 너머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왔던 역사를 보면, 그 너머에 대한 궁리를 하지 않은 적이 없고 그 덕분에 살아남았다. ‘재미’에 대한 열광과 ‘재미’를 공급하고자 하는 열망이 넘쳐나지만 그것이 풀리지 않는 문제를 놓고 궁리하고 분투한 ‘재미없는’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다양한 콘텐츠가 넘쳐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양에 비해서 종류는 다양하다고 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찾는 그저 그런 위로들만 주고 있다.


넘쳐나는 콘텐츠들이 사람들에게 새로움을 주는 것을 소재나 방식의 기이함에서만 찾는다면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걱정이 든다. 부쩍 늘어난 독립서점들이 거의 같은 종류의 책들만 유통하고 엇비슷한 위로만 고객들에게 준다면 그 한계는 금방 드러날 것이다. 다양하고 재미난 것으로 보였던 것들이 금방 바닥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어디에 기대야 할까? 지금은 이야기에 폭 싸여서 재미난 오후를 보내고 있지만 부드러운 봄비에도 춘몽은 깨지기 마련이다. 꼰대 짓인지 알면서도 ‘재미’ 너머를 힐끗거린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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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문득 이 책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지성이 공유해야 할 ‘전환시대의 논리’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리영희가 쓴 그 책을 출판사에서 소개한 글을 찾아보았다. 그 소개글에 나온 특정한 단어를 괄호에 넣고 읽으면 두 책의 기본정신이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  “(  )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을 교정하고, (  ) 등을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함으로써 (  ) 허위의식을 타파하는 현실인식, 편협하고 왜곡된 (  ) 거부하는 넓은 세계적 관점, 냉철한 과학적 정신을 계몽하고 민주적 시민운동에 앞장서는 이론적 역할을 수행했다.” 김종철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이다.


그는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지구 온난화나 기후변화 같은 환경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그가 보기에 근대 자본주의 문명은 “자연을 끊임없이 수탈하고,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가공할 생태위기를 초래”한다. 이 지점에서 근대의 발전이 인류사에 불러온 놀라운 성장을 부정하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서구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의해서만 문명생활도 가능하고, 더 높은 단계로의 인간해방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관점을 ‘근대적 미신’이라 말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972년 로마클럽에서 출간한 <성장의 한계>는 제목 자체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이제 더는 성장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환경 오염 문제가 심각한 탓이다. 두 번째는 “근원적으로 타자-동시대의 사회적 약자와 자연 그리고 미래세대-에 대한 무관심 혹은 무책임한 태도”에 바탕을 둔 비윤리성 탓이다. 타자를 변경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 근대 자본주의 문명은 늘 변경을 만들어왔다. 그 변경을 지배하고 수탈한 덕으로 발전하고 성장하고 팽창했다. 하나 변경은 이제 없다. 독립하여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고 있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진보를 추구한다는 것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모순”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40여년 전 리영희는 분단상황과 군사독재의 탄압으로 이성의 눈이 가려지고, 그 결과 사로잡혔던 이데올로기적 편협성을 부숴버리라고 했다. 베트남 전쟁의 실상,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통찰, 일본의 재군사화에 대한 경고,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그 전환의 길을 김종철이 걷는다. 근대, 자본주의, 산업화, 성장이라는 우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홀로세에서 인류세로 치닫는 오늘, 우리는 어떤 전환적 사고를 해야 여섯 번째 대멸종을 피할 수 있는가, 라고.


그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대안으로 소농을 기반으로 한 생태적 순환사회를 내세운다. 석유에 기초한 문명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닥쳐올 재앙은 식량난이다. 일본의 식량자급률이 40%인데, 석유가 없으면 1%로 곤두박질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25% 수준이니 석유 수급에 이상이 생길 적에 겪을 고초를 짐작할 수 있다. 농사를 살려야 하는 이유다. 이런 사회는 궁극에는 “공동체의 호혜적 관계망을 토대로 다양한 상호부조의 경제”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이 사회가 가난하리라 짐작하면서 공빈(共貧)의 철학을 내세운다. “가난을 견딜 만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가난을 삶의 축복이 되게 하는 사회적 토대, 즉 공생공락의 네트워크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기본소득세이다. 신약성서를 보면 포도원 주인이 일꾼에게 품삯 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 점심 먹고 나서 일한 사람, 해지기 직전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 주인은 똑같이 1데나리온을 주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는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기본소득의 예고였다고 풀이한다. 무릎을 치게 하는 대목이다.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일정한 소득을 정기적으로 주는 ‘기본소득’을 그는 ‘시민배당’이라고 고쳐 말한다. 없는 이를 도와주는 복지의 개념이 아니라, 기업이 주주에게 배당하듯 한 공동체의 이익을 시민에게 나누는 뜻을 돋을새김하기 위해서다. 시민배당은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된다. 경제를 안정시키고, 노동조건이 개선되고, 교육지옥에서 빠져나오고, 관료적 정부형태에서 벗어나게 할 터다.


세 번째는 민주주의다. 인류의 미래가치에 동의하는 정치는 자본의 횡포를 막고 생태친화적 환경을 만들어 낸다. 라파엘 코레아가 에콰도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약속한 대로 외채를 청산하고, 은행세를 신설해 기본소득을 실시했고 야수니국립공원에서 발견한 새 유전의 개발을 잠정포기했다. 정치적 결단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지, 더 많은 경제성장은 아니다”.


성장과 진보의 세계관은 프로메테우스를 섬긴다. 그의 이름이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데다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어서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상식을 깨고 에피메테우스를 더 기려야 한다고 말했단다. 그의 이름은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던가. 인류가 걸어온 성장의 삶을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문명적 성찰의 상징으로 에피메테우스가 적격이라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에피메테우스의 아내인 판도라가 금기를 어기고 항아리 뚜껑을 열자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여기까지만 기억한다. 판도라가 급히 뚜껑을 닫는 바람에 항아리 맨 밑바닥에 놓여 있던 그 무엇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희망이었다.


다시 판도라의 항아리 뚜껑을 열어야 한다. 진보와 성장에 눈이 멀어 오랫동안 잊었던 그 희망을 인간세계에 퍼트려야 한다. 김종철의 사유를 20세기의 리영희를 읽는 심정으로 ‘열독’해야 할 이유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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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7월25일 국산 장편 애니메이션인 <레드슈즈>가 개봉한다. 지난 봄 <언더독>에 이어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국산 장편과의 만남이다. <레드슈즈>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핵심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던 입체적인 시나리오의 완성도, 캐릭터라이징의 글로벌화, 더빙과 음악의 전문성, 마케팅과 배급의 기획력 등이 거의 극복되었다고 평가되는 수작이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기획-제작-배급 등 단계별 제작공정 노하우를 수시로 벤치마킹하며, 실제 미국 현지 스태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성과 또한 한국 애니메이션의 진일보와 세계적 수준의 제작력을 검증해 보여주었다. 


문제는 관객들의 평가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갖는 한계와 그동안의 시행착오 탓에 예비 관객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한국 애니메이션산업의 가장 큰 오해는 산업계 구성원들 간의 시장인식이다. 여전히 국산 애니메이션시장을 제로섬(zero sum)으로 이해하며, 한정적인 투자재원과 영화계의 관심에 대해 이전투구하는 형상이다. 


1980~1990년대 한국 영화계도 그랬다. 반복적이고 정해진 제작사와 투자자본의 규모 내에서 형식적이라도 한국 영화를 몇 편 제작해야 흥행성과가 기대되는 해외 수입영화를 들여올 수 있는 권리, 즉 수입쿼터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이렇게 열악하고 한정적인 시장에서 난무하던 루머와 상호 간의 비방, 제작 과정상의 불투명성 등이 한국 영화산업을 실제 제로섬으로 내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낸 성공이 1999년 <쉬리>의 흥행이었다. 당시 600만명을 넘는 흥행성과와 삼성영상사업단의 신선한 투자모형이 도입되면서, 이후 영화산업에 관심이 없던 대기업들과 거대 양성자본이 한국 영화계에 실제 투자를 확대하게 된다. 


그러한 지속적인 투자는 이후 2000년대 초반 <실미도> <왕의 남자> <괴물> 등 천만명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는 한국 영화의 레전드들로 확인되었고, 이제는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 영화 흥행 예상작들을 피해 개봉 일정을 고려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이제 한국 영화산업은 논제로섬(non zero sum)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극장용 장편 역사는 1967년 어린이신문에 연재되었던 신동우 화백의 원작을 당시 국내 최고 제작진을 규합하여 신동헌 감독이 직접 만든 <홍길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의 성공 이후, 1976년 <로보트태권V>, 1996년 <아기공룡둘리-얼음별 대모험>, 2011년 <마당을 나온 암탉> 등이 그래도 작품성과 흥행성과에서 역사적인 기록으로 평가된다. 100억원 이상의 투자 및 제작비를 최초로 기록했던 <원더풀데이즈>와 좋은 원작의 수작으로 평가되는 <오세암>, 해외 공동제작으로 손익분기점 이상의 성과를 거둔 <넛잡> 등 우리에게도 자랑할 만한 장편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존재한다. 


그러나 여전히 국내 애니메이션시장은 제로섬이다. 산업 구성원들과 관객들이 모두 인정하는 성과가 아직 검증되지 않았고, 이러한 시행착오의 연속이 국산 애니메이션의 투자장벽으로 작용한다. 


역설적이지만, 국산 애니메이션산업에 종사하는 실무자들의 열패감과 비관적인 전망이 외부 양성자본의 투자를 직간접적으로 막는 내부자 역할로 작동하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상황은 항상 제로섬의 악순환 구조를 더 심화시키고, 구성원 모두를 더욱 힘들게 할 수 있다. 


이번 <레드슈즈>가 그러한 굴레를 신선하게 극복해내는 퀀텀점프의 골든크로스가 되기를 기대한다. 오랜 고민과 검증 단계를 거쳐 수작으로 내놓은 국산 장편 애니메이션의 흥행성과가 논제로섬으로의 체질개선을 선도하고, 추가적인 거대 양성자본의 유입을 통해 세계적인 한국 애니메이션의 해외 진출로 연계되길 기원한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한창완 세종대 융합예술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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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끊임없이 미래가 도래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과학기술이나 문명의 진보에 따라 차츰 가까운 미래가 되었다가 현실로 출현해왔다. 각종 질병은 극복되거나 되고 있고, 이동 수단, 커뮤니케이션 수단 등이 생겨나 과거엔 불가능한 것들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다. 상상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미래는 현실의 적이다. 현실을 지배하는 기득권은 미래의 새로운 권력에게 결국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온갖 미디어들이 복합성을 갖춘 멀티미디어로 진화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올드 미디어의 대표선수라 할 수 있는 책도 절치부심하며 그 대열에 동참해왔다. 사람들은 책의 미래를 불안해했고 종이책은 미래가 어둡다는 말들을 해왔다. 그래서 e북이 나왔고 오디오북이 나왔다. 터치하는 책, 속삭여주는 책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읽는 책, 보는 책, 듣는 책의 삼박자를 갖췄지만 책의 미디어 경쟁력은 여전히 약하다. 주택으로 비유해보자면 월세를 내며 대형 미디어에 기생하는 것과 같다. 유튜브나 텔레비전에 노출될 때만 책은 확장성을 갖고 미디어로서의 존재를 확인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책이 세상과의 접촉점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이제 책은 리좀 형태로 존재한다.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흩어지고 점점이 흩뿌려져서 소수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1인 출판사, 1인 책방이 리좀으로서의 책의 존재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리좀은 들뢰즈가 식물학에서 차용한 용어로 줄기식물을 말한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거나, 땅속 깊이 파고드는 등 높이와 깊이의 강박에서 벗어나, 중심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비록 연약하지만 땅 위를 기어다니며 불규칙하게 그 생명력을 이어간다는 개념이다. 수억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이 운석의 충돌로 멸종한 뒤 손바닥만 한 수많은 새로 진화한 것처럼, 근대 이후 우람한 수목이 되어 그 위용을 자랑했던 책은 이제 지배 미디어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 전혀 다른 생존의 법칙에 따라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질문을 좀 바꿔볼 필요가 있다. 책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책의 장래는 무엇인가, 책의 운명의 향방은 어떻게 갈릴 것인가. 이런 식의 질문과 걱정은 책이 우람한 수목이었을 때나 어울리는 것이지, 이미 책이 공룡을 버리고 새의 존재 방식을 택한 마당에 적합한 답을 끌어낼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러니 일단 이 질문들을 머릿속에서 싹 비워버리자.


책의 미래는 이미 도래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건 ‘미래에서 온 책’들이다. 미래의 책이라고 별스러운 모습을 한 건 아니다. 그냥 책이다. 


하지만 뭔가 바뀌었다. 예전과는 다른 저자들이 책을 쓰기 시작했고, 책을 읽는 목적도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에 따라 책의 모양도 좀 물렁물렁해졌고 경계가 흐려졌다. 책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많이 달라졌고 책이 놓이는 공간도 다양해졌다. 


다른 한편에선 ‘괴물’과도 같은 책들이 등장했다. 이른바 가격으로 후려치는 책들이다. 안 팔릴 게 뻔하니 적게 찍고 비싼 가격을 붙여 도서관이나 마니아들에게 모셔지기 위한 책들이다. 그런데 그 사용가치에 비해 교환가치가 월등하게 높다. 나름의 현실에 맞춰 진화한 것이니까 타박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중고차 한 대 값을 호가하는 이런 책들은 공적 자본에 기댈 수밖에 없고, 공적 자본의 지출이 과다해지면 아마 책으로서의 생명을 다할 날이 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에서 반짝이는 ‘미래의 책’들이다. 


여기엔 많은 가능성이 있다. 생각을 주장하고, 가치를 토론하고, 위안을 얻고, 삶을 바꾸는 역할은 미래의 책에 달려 있다. ‘책의 미래’라고 질문하면 우리는 암울한 도식에 맞춰 미궁에 빠져들 수밖에 없지만, ‘미래의 책’이라고 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나의 ‘미래의 책’은 무엇일까 궁리하게 된다. ‘책의 미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공동체의 미래를 묻는 일이지만, ‘미래의 책’은 나의 취향과 관심,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그만 좀 하고 책의 주변으로 상상력이 흘러넘치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책이 개인을 신나게 할 때 결국 책이 그들을 공동체로 묶을 것이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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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모레면 서울국제도서전의 문이 열린다. 400개가 넘는 출판사들이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1년간 준비한 비장의 카드들을 일제히 꺼내 놓을 것이다. 주최하는 입장에서도 공들여 준비한 것들을 내놓아야 한다. 


이즈음엔 모든 준비를 끝내고 느긋해야 하는데, ‘볼테르상’ 시상식 준비는 끝까지 마음을 졸이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이 상은 출판의 자유를 위해서 희생하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출판인들에게 전 세계 출판인들이 뜻을 모아 주는 것이다. 


18세기를 대표하는 계몽 사상가이자 작가인 볼테르의 이름이 붙은 까닭은 그가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할 수 없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권리를 지키는 데는 목숨을 걸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 볼테르가 직접 한 말은 아니다. <볼테르와 친구들>(1906)이라는 책을 쓴 이블린 홀이 볼테르의 사상을 요약해서 표현한 말이다. 물론 볼테르가 비슷한 말을 남기기는 했다. “나는 그가 쓴 글이 싫다. 하지만 그가 계속 쓸 수 있도록 하는 데는 목숨을 걸 수 있다.” 1770년에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후배 철학자 엘베시우스가 <마음에 대하여>(1758)에서 보인 무신론, 실용주의, 평등주의에 대한 생각을 밝히면서 한 이야기다. 널리 알려진 문구는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이미 볼테르 관용 정신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21세기의 볼테르상도 그 정신을 기린다.


작년에 나는 이 상의 시상식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뉴델리에서 열린 국제출판협회 총회 자리에서 있었던 시상식에서 수상자의 부인과 딸들의 연설을 들으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종교적으로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방글라데시 출판인의 부인은 남편이 입던 옷을 두르고 무대에 섰다. 그는 의사였는데, 병원에서 계속 일하면서 한편으로 남편이 하던 출판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부인은 남편의 시계를 찬 손을 든 채 남편의 뜻을 기리고 어떤 어려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태국에서 체포되어 중국의 감옥에 수감된 홍콩의 출판인은 중국 정부의 뜻을 거스르는 책들을 출판한 까닭에 고초를 겪고 있었다. 아직도 그의 석방 소식은 없다. 그의 딸은 시상식에서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아버지가 보여준 용기의 가치를 존경하는 마음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홍콩은 우산혁명 이후 5년 만에 다시 시작된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범죄인 송환법’ 때문에 시작된 시위 인파가 100만명을 넘어섰다. 홍콩 사람들은 이 법이 발효되면 중국체제에 비판적이거나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는 인권 운동가들이 중국으로 소환될 것이라는 걱정을 하고 있다. 이미 2015년에 중국의 비리나 스캔들을 다룬 책을 낸 출판인 다섯 명이 실종되었다. 16일로 예고되었던 대규모 집회를 앞두고 법의 추진이 연기되었지만 언제 다시 추진될지 모른다. 이 과정에 용기 있는 출판인들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올해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후보자를 고르고 6개월이 넘는 토론을 통해 수상자가 선정되었다. 수상자는 이집트의 출판인, 칼리드 루트피. 그는 출판을 통해 군사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있다. 창덕궁 규장각 옆 춘당대에서 열릴 시상식에 그는 직접 올 수가 없다. 생각해보니, 볼테르상은 늘 수상자가 시상식에 오지 못하는 상이다. 어찌 보면 수상자에게 축하를 건네기보다 위로와 지지를 보내야 하는 행사다. 이런 상황인데, 시상식에 와서 수상자의 정확한 사정을 알리기로 했던 수상자의 동생이 비자 문제로 입국이 불투명하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나름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최선을 다해서 서류를 준비해 보냈는데도 라마단과 휴일이 겹쳐서 비자 발급이 늦어지고 있다는 답변만 듣고 있다. 수상자가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외교 경로로도 도움을 주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행사 전체를 총괄하고 있는 입장에서 개막을 이틀 앞두고 수상자 동생의 참석이 불투명한 것은 비상 상황이다. 백방으로 노력 중이고, 이 글이 신문에 실릴 무렵엔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났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가 오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수상자의 육성, 동생의 영상, 그리고 현지의 반응 등을 준비하고 있다. 


볼테르상 시상식이 창덕궁 후원에서 열리는 것은 단순히 어려움을 겪는 다른 나라 출판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블랙리스트 사태를 거치면서 우리는 출판과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자본과 대중의 이중 구속 속에서 어떻게 볼테르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기회로 삼고자 한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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