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눈먼자들

언택트 시대를 겪으며 무용 공연도 많은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다. 무용 공연은 타 공연에 비해 대중적 지지율이 취약하고, 마니아층 위주로 관객층이 형성되고 있어 언택트 공연에 대한 중요성과 사명감이 더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상반기부터 공연을 할 때 객석 점유율을 반으로 줄여 거리 두기를 하며 코로나19 감염 방지에 만전을 기해왔다. 그러나 객석의 간격이 좁아 공연장 관람객의 밀도가 상당히 높은 편인 소극장의 경우는 한 자리씩 거리를 두다 보니 관람객 수가 확연히 감소되어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있다.


원시시대부터 기원과 치유의 역할을 하면서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무용은 여러 형태로 발전되면서 예술적, 대중적으로 서로 접촉하고 대면하면서 완성되는 예술이다. 이토록 소통의 역할이 춤의 진정한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언택트 시대에는 춤의 기본적인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곤란하다.


공연예술의 3요소인 무대, 퍼포머(공연자), 관객 중에서 보는 사람 즉, 관객의 자리를 언택트 기술들이 대신하게 되면서 무용수들은 무대에서 관객의 시선과 에너지를 느끼지 못한 채 여러 대의 카메라 앞에서 춤을 추는 일이 많아졌다.


공연은 막이 한번 올라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중단 없이(인터미션 제외) 이어져야 하는데, 비대면 온라인 공연은 카메라를 통해 관중을 만나다 보니 사뭇 다른 현장감에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촬영 콘셉트에 따라 영화를 촬영하듯이 장면을 끊어가며 촬영하는 경우도 있기에, 무용을 공연하는 것인지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사실 언택트 시대에 따라 각 예술단체가 무료로 공개하는 양질의 공연을 온라인 영상으로 감상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무료공연에 대한 인식이 굳어질까 우려되기도 한다. 물론 현장성은 다르지만. 때와 장소 그리고 관람 에티켓에 제한이 없는 온라인 공연의 편리함 때문에 이전의 공연장 풍경을 되찾으려면 공연예술계가 앞으로 얼마나 힘들어야 할지 벌써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얼마 전 대규모 온라인 콘서트에 성공한 BTS, 추석특집 나훈아 콘서트 등 멀티미디어 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객석을 가득 메운 동시간 스트리밍 관객 스크린과 함께하는 방식은 새로운 공연의 지형도를 제시하고 있다.


이제 방구석에서 세계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공연이든 접속이 가능한 시대가 열렸다. 현장성 없이는 관객의 표정과 에너지를 읽을 수는 없지만, 당분간은 각자의 공간 1열에서 랜선을 타고 경험하는 공연에 적응할 때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의 역할은 변함이 없고 춤의 역할도 변한 적은 없다.


<김성한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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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과 인공지능 기술을 처음 접목한 196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 선구자 머스 커닝햄(오른쪽).

뉴럴링크 공동창업자이자 테슬라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가 컴퓨터 칩을 이식한 돼지의 행동을 두 달째 관찰 중이라고 한다. 가로 23㎜, 세로 8㎜ 동전 모양의 초소형 칩은 블루투스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연결이 가능하다. 알츠하이머병이나 척추손상 등의 치료 기술을 개발하려는 목적이긴 하지만, 급속도로 미래를 향해 치닫는 현대 과학기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나뿐인가.

 

인공지능(AI)이나 사물인터넷 같은 현대 과학이 일상생활에 적용되어 편리함을 제공하는 인공지능 시대의 법칙은 시공간 예술이자 현장성을 강조하는 공연예술에도 적용되고 있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음악을 분석하고 이에 어울리는 안무도 척척 해주는 시대에 돌입했다. 한 동작, 한 장면을 구성하기 위해 며칠 동안 고심하는 인간의 절실함과 창작력은 이제 구시대적 유물이 될 수도 있겠다.

 

무용과 인공지능 기술의 접목은 196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선구자 머스 커닝햄이 시작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댄스 테크놀로지를 통해 새로운 창작의 길을 열었다. 커닝햄은 백남준, 존 케이지와의 협업을 통해 현대예술의 진일보를 이뤘다. 이런 실험적인 시도들은 요즘 공연장에서 모션캡처, 가상현실, 비디오 댄스, 증강현실을 활용한 이머시브(immersive) 공연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 중이다. 특히 춤과 영상의 결합은 다양한 표현력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비디오 댄스나 댄스 필름 같은 새로운 장르로도 주목받고 있다.

 

4년 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뜨거웠다. 모차르트와 인공지능의 작곡 맞대결도 눈길을 끈 적 있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오류를 줄이고 완벽에 가깝게 무장해 인간 고유 영역인 예술에까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무용에서도 새로운 안무 도구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안무가가 늘고 있다. 많은 시간을 쏟아 땀으로 만들어낸 몸의 예술 ‘무용’도 인공지능에 자리를 내줄 것인가. 과연 인공지능이 공연 도중 발생하는 돌발상황에 즉흥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대본에 없는 동작이나 표정으로 멋진 애드리브를 보여줄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는 마지막 영역은 예술이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부인해도 무용가의 찰나적 영감과 무한의 창작력이 인공지능과 조우하면서 탄생한 조금은 낯선 춤, 대단한 혼합이 이 시대의 관객에게 새로운 상상력으로 다가갈 것이다.

 

<김성한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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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결성된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틀스의 팬덤(fandom)은 당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콘서트 시작 전부터 몰려든 팬들로 공연장과 주변 도로는 아수라장이 됐고, 사상 초유의 이런 풍경을 기록하기 위해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비틀스의 열광 팬들에게 ‘비틀마니아(Beatlemania)’라는 이름을 붙였다. 1964년 미국에 진출한 비틀스는 영국 출신 뮤지션들의 미국 공략,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선도했으며, 전 세계에 록밴드 열풍과 청년 문화의 폭발을 불러일으켰다.

 

외신들은 K팝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인기를 비틀스 팬덤에 자주 비유한다. 세계 주요 도시 순회공연에는 수만명의 팬들이 몰려와 한국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출시되는 뮤직비디오마다 억대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이 중 ‘DNA’는 10억 조회수를 넘겼다. BTS 팬덤을 주도하는 팬을 가리키는 말은 ‘아미(ARMY)’이다. 청춘을 위한 대표자라는 뜻이지만 BTS를 지키는 군대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BTS는 아미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 팝 공연의 성지로 불리는 영국 웸블리스타디움에 입성했고, 미국 4대 음악시상식에도 모두 참석했다.

 

BTS가 ‘다이너마이트(Dynamite)’라는 디지털 싱글로 한국 가수로는 처음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핫 100은 인터넷 음원 다운로드 및 스트리밍 횟수, 미국 내 라디오 방송 횟수, 유튜브 조회수 등을 합산해 순위를 매긴다. BTS의 이 노래가 현재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인기곡이란 의미다. 2012년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핫 100 2위에 7주 연속 오른 게 종전 K팝의 최고 기록이었다. BTS는 이미 앨범 판매량을 척도로 하는 ‘빌보드 200’ 차트에서는 4개 앨범이 1위를 기록했다.

 

BTS는 K팝 역사에 남을 이정표를 세웠다. 영어권 가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빌보드 차트의 맨 윗자리에 K팝 그룹이 이름을 올린 것이다. “비서구권 아티스트를 대하는 서구권 대중의 패러다임 전환”이란 평가도 나온다. ‘국뽕’이라고 할 것 없이 뿌듯해해도 될 성과다. BTS의 디스코풍 노래 한 곡이 만들어낸 반가운 소식이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박영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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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인간단테 커튼콜.

부드러운 ‘카페라떼’는 나른한 오후에 위안을 준다. 가끔 느긋한 주말 아침에는 큼지막한 잔에 양껏 담아 마시기도 한다. 제조법에 차이는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카페오레라고도 불린다. 하트 모양, 나뭇잎 모양의 하얀 거품을 음미하며 마시는 카페라떼가 요즘은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로 더 유행이다. 올 초에는 ‘라떼는 말이야’라는 제목의 노래도 발표됐다.

 

누구나 ‘라떼(나 때)는 말이야’ 하고 회상하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무용수 시절 ‘나 때’는 마냥 용감했다. 무지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지금처럼 지구 반대편의 오디션 정보까지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초고속 인터넷 시대가 아니어서 더욱 그랬다. 나도 프랑스 유학 시절, 직접 발품을 팔며 벽에 붙은 오디션 홍보지를 베껴 적고, 우표를 붙인 신청서를 보내고 회신이 오면 참가했던 오디션들…. 이런 기다림을 이야기하면 ‘나 때는 말이야~ 라떼 꼰대 시작이군’ 하며 웃을 수도 있겠다. 기다림의 미학이 무색한 시대이고, 6개월 이상 비대면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다 보니 직접 얼굴을 보며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들이 ‘나 때는 말이야’의 시간이 되고 있다.

 

요즘 창작 작업을 하다 보면 같이 작업하는 무용수 부모님의 나이가 나보다 적을 경우도 있다. 당황스럽다. 세대는 다르지만 함께하고 싶어 뽑은 젊은 무용수들이 나의 작업방식이나 철학을 공유할 수 있을까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Y세대, Z세대 무용수들과 안무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혹시 나도 모르게 ‘나 때는 말이야’처럼 나의 기준에 맞춰 강요한 것은 아닐까. ‘라떼 꼰대’ 짓을 한 건 아닌지 뒤돌아보게 된다. ‘라떼 꼰대’ 증상은 그저 춤이 좋아 무대에 오르던 ‘나 때’의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울 때 심해진다.

 

‘나 때’는 국가 창작지원금을 받지 못해도 창작 작업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창작 작업은 운명이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은 빚까지 져가며 공연하는 후배들이 많지 않다. 스마트한 세대다. 예술인들을 위한 국가보조금이 다양한 형태로 지원되지만 근성 있게 꾸준히 작업하는 후배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이런, 또 ‘나 때’가 되고 말았다.

 

‘나 때’는 진부한 것일까. ‘나 때’라 할 수 있었던 것들과 ‘나 때’라 못했던 것들을 허심탄회하게 후배 세대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 때’의 경험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유산이다. 최근 혼성 댄스그룹 싹쓰리가 1990년대 ‘나 때’ 감성의 뉴트로 노래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들이 ‘나 때’의 값진 경험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김성한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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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lt;일곱 해의 마지막&gt;을 읽었다. 이 장편소설은 한국전쟁 이후 러시아문학을 주로 번역하던 백석이 1956년 동시를 발표하며 다시 시작활동을 하다가 1962년 역시 동시를 발표하고 절필한 시기까지를 서정적 문체로 복원했다. 작품을 읽으며 백석이 자문했던 세 가지 질문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 “나는 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은 백석이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의 선전선동에 동원되고 수령의 우상화에 이바지하는 시를 쓸 수는 없었다. 사람살이의 정겨움과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깃든 “음식 이름들, 옛 지명들, 사투리들”의 시어는 박살나고 “미리 제작한 벽체를 올려 아파트를 건설하듯이 한정된 단어와 판에 박힌 표현만으로 쓰인”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만 넘쳐났다.

 

그 새로운 시의 건설현장에 동원된다는 말은 한설야의 길을 걷는다는 뜻이다. 문학은 오로지 수령의 후광을 빛내는 데 필요할 뿐이다. 권력의 시녀로 언어가 타락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얻은 권력으로 빼어난 문인을 숙청했다. 문학의 영토에 꽂혔던 자유와 상상의 깃발은 꺾였다. 종파주의와 소부르주아적 근성을 박멸하자는 깃발이 세워졌다.

 

본디 시는 한낱 촛불일 뿐이다. 당과 수령의 말은 “준엄하고 매섭고 치밀하다”. 촛불이 어찌 권력의 눈보라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 시인이 피워 올린 불꽃 덕에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 붙는” 법이다. 아마도 그래서 백석은 시를 다시 썼을 테다.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고 북한에도 해빙의 조짐이 보여서가 아니고.

 

두 번째 질문. “왜 그때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나?” 백석은 월북도 아니요 납북도 아니다. 흔히 재북(在北) 작가라 말한다. 일제강점기 끝무렵에 만주에 있다가 해방되자 고향 정주로 내려왔다. 오산고등학교 교장 출신인 조만식의 통역비서를 맡은 데서 볼 수 있듯, 그리고 그의 시세계가 펼쳐 보이듯 북한체제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 서울에서도 오랫동안 생활한지라 적절할 때 남하했다면, 전쟁 후 빈약한 남한 문단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왜 내려오지 않았을까? 거느린 식솔 때문에? 고향의 맛과 멋, 그리고 말 때문에? 시인다운 순진함 탓에 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안타까워할 도리밖에 없다.

 

세 번째 질문.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이 질문은 앞의 두 질문을 포함한다. 시는 생리적으로 평등보다 자유를, 이념보다 사랑을 더 중시하는 체제와 어울릴지 모른다. 그런데 백석은 다른 선택을 했다. 자고로 백석 같은 선택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는지는 20세기 세계문학사가 증명한다. 바스타치야. 전염병이 돌자 북한 당국은 이 예방법을 택했다. 소극적인 예방을 넘어 병인이 되는 외부환경 전체를 바꾼다는 뜻이다. 이 예방법은 하나의 은유였다. 잠깐의 해빙기가 지나자 당의 역공세가 펼쳐졌다. “사상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바꿔 궁극적으로 환경 전체를 개조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백석은 시를 다시 썼고, 시정신을 훼손하는 권력에 맞서 “현실의 벅찬 한 면만을 구호로 외치며 흥분하여 낯을 붉히는 사람들의 시 이전의 상식을” 배격하고, “시는 깊어야 하며, 특이하여야 하며, 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백석은 이태준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고백은 용납되지 않고 자백만 강요됐다. 쓰면 “낡은 미학적 잔재에 빠져 부르주아적 개인 취미로 흐른다”고 공격받고, 쓰지 않으면 수령을 싫어하는 감정을 품은 탓이라 매도당했다. 이태준이 함흥으로 쫓겨났듯 백석은 삼수갑산의 그 삼수로 가야 했다.

 

김연수는 백석이 삼수에서 시를 썼고, 시 쓴 종이를 찢어 난로에 집어던져 넣고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으리라 상상했다. 활자로 찍혀 영원히 남는 시가 아니라, 불꽃이 되어 찰나 황홀경을 보이다 사그라드는 시. 소설 말미에 저절로 난 산불을 뜻하는 천불을 보고 백석이 화전민이 느꼈을 삶을 향한 뜨거움과 느꺼움에 공감하는 장면이 나온다. 불타버렸기에 다시 열리는 새로운 삶의 길. 더는 쓰지 않기에 영원히 읽힐 시. 백석이 꿈꾼 불의 시학을 상징하는 대목으로 읽었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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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일단, 오늘을 지배하는 세력과 연배는 비슷하지만 그 어떤 권력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누리지도 않았다는 다소 낭만적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한다. 그다음에는 좀 더 이타적이고 더욱 정의로워지려고 나름대로 애써왔다는 알량한 자존심 덕이다. 물론 어찌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정의의 표본에 이른 분들과 비교하겠느냐만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생각이 바뀌었다. 어느덧 나를 포함해 우리 세대가 ‘척결’의 대상이 되고 있구나 싶었다. 좋은 말로 하면 세대교체가 되겠지만, 나는 이 말로는 지금의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본다. 거칠게 파고들어온 칼날은 페미니즘이었다. 권력의 상층부를 이루는 대다수가 남성이었으니, 권력에 대한 도전은 남성에 대한 단죄와 동의어였다. 다음에 몰아친 바람은 공정성이었다. 민주와 정의를 외친 세대가 과연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공정했느냐고 매섭게 질타했다.

 

이 거친 공세를 지켜보면서 나 정도면 괜찮다는 말을 더는 할 수 없겠구나 자인하는데, 권석천이 &lt;사람에 대한 예의&gt;에서 쐐기를 박았다. “돈 몇 푼에 치사해지고, 팔은 안으로 굽고, 힘 있는 자에게 비굴한 얼굴이 되기 일쑤다.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선 욕망의 관성에 따라,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려 한다. 소심할 뿐인 성격을 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무책임함을 너그러움으로 포장하며, 무관심을 배려로, 간섭을 친절로 기만”하지 않았느냐 묻는다. 젊은 날 품었던 패기와 이상대로 살아온 듯이 너스레를 떠는 기성세대의 민낯을 까발렸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 저널리스트는 동년배에게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의 자리에 가 있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동의한다.

 

불편할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이뤄냈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는. 하지만 과거의 화려한 이력이 오늘의 빛나는 삶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영화 &lt;시크릿 세탁소&gt;의 대사대로 분명히 처음에는 세상을 구원하려 했으나, 나중에는 그냥 나를 구원하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지은이가 너무 결벽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고 시비 걸지 말자. 그 자신이 기자로서 살아오면서 겪었던 부끄러운 일도 솔직히 고백하고 반성하고 있으니까.

 

권석천은 다음세대가 겪는 고민과 이율배반적 사고를 잘 이해한다. 사회는 벽을 높이 쌓아놓고 이를 넘어서는 사람만 ‘간택’한다.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왜 그 자리에 벽이 서 있는지 문제 삼지 않는다. 벽을 넘어선 이는 넘지 못한 이를 타박한다. 게을러서, 신념이 약해서, 능력이 없어서 못 넘은 것 아니냐고. 벽을 에둘러 새로운 길을 뚫으려면 공정성을 내세워 막는다. 여러 잣대를 내세워 구별하고 차별한다. 혐오가 넘쳐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권석천의 말대로 “개인적 자아는 과잉발달하지만 사회적 자아는 증발”했다. 이 놀라운 이중성은 “울타리 안 평등에는 민감하지만 울타리 밖 비참에는 무관심”하다는 박권일의 통렬한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권석천이 다음세대에 전하는 메시지는 절절하다. “너 자신을 착취하라고 요구하는 시대에 함께 연대해 맞서”라는 것이다. 모름지기 이 정신이 없다면 오늘 벌어지고 있는 세대착취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사회에 합류한 다음세대의 고민도 만만찮다. 이제 안온한 삶이 가능한 터전을 확보했는데, 구조악과 마주칠 때 과연 싸우겠다고 결단 내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들이 들을 가장 강력한 유혹의 말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일 터다. 기득권의 펜타곤을 지켜주는 힘은 작은 악이다. 일상에서 이것들과 맞서 싸울 때 그 견고한 성채에 금이 가는 법이다. 권석천은 패배하지 않을 거라 말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이 싸움에 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패배와 실패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단다. 패배가 상대에게 진 것이라면, 실패는 나한테 진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졌다면 실패한 게 아니다. 패배한 것”일 뿐이다. 다음세대가 동의해주길 바랄 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굳이 황금률을 정하자면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면 될 성싶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태도만으로 이 천박한 각자도생의 무간지옥에서 우리는 구원될지도 모른다. 권석천의 말대로 늘 불완전하고 삐걱거리겠지만 말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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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글을 쓰고 독자는 그의 글이 책으로 묶여 나오기를 기다린다.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데 있어 작가의 역할은 적극적, 독자의 역할은 수동적이다. 출판사와 인쇄소와 도매상과 서점과 물류사의 손길이 더해져 한 권의 책이 전해지면, 독자는 그때부터 리뷰를 쓴다든가 작가를 만나 독서모임을 한다든가 하고, 그 이전까지는 그저 ‘이 작가의 다음 책은 어떤 것이고 언제쯤 나올까’ 궁금해할 뿐이다.


몇 개월 전 모 작가에게 “저, 우리가 독자들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보면 어떨까요. 메일링 서비스 같은 것을요” 하는 제안을 받았다. 구독자를 모으고 그들에게 직접 글을 보내주는 구독서비스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어, 음,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하고는 왠지 둘이서만 하기엔 민망해서 주변 몇몇 작가들에게 “저…” 하고 연락을 했다. 그렇게 김혼비, 남궁인, 문보영, 오은, 이은정, 정지우, 그리고 나까지 일곱 명의 작가가 모였고, 3개월간 매일 한 편씩 매주의 주제에 따라 쓴 에세이를 구독자들에게 보냈다. 


나의 글을 기다리는 수백명의 구독자에게 글을 보내는 건 정말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고백하자면 그동안 내가 했던 글쓰기 중 가장 즐겁고, 편안하고, 설레는 것이었다. 구독자들은 메일을 열어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감상을 답신으로 다시 보내왔다. 3개월 동안 모은 구독자 반응만 원고지로 1600장이었으니까, 작가들에게도 독자들에게도 이것은 전에 없던 소통인 셈이다. 모 작가는 “저는 이 연재를 한 번 뇌의 주름이 시키는 대로 써보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는 정말로 그렇게 써나갔고, 자신이 주제를 정할 차례가 오자 “저는 뿌빳뽕커리로 하겠습니다. 이런 걸 해야 다들 새로운 글도 나오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진지하고 아름다운 에세이를 잘 쓰기로 평판이 나 있는 작가였는데, 그가 보여준 세계는 그 뿌빳뽕커리만큼이나 ‘작가님, 맛은 있는데 이게 뭡니까’ 싶은 것이었다. 나는 그도, 그의 독자들도, 3개월 동안 정말로 즐거웠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구독경제 안에 자연스럽게 편입된 듯하다. 매달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고 영화와 드라마를, 음악을, 책을, 그리고 샐러드와 사람까지 구독하는 시대가 됐다. 사실 구독이라는 형태는 이전부터 있어온 것이지만 최근의 여러 플랫폼을 타고 조금 더 우리의 삶에 가까워졌다. 작가들이 출간 전 연재를 하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다. ‘일간 이슬아’라는 이미 자리를 잡은 개인의 구독서비스도 존재하고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미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책의 목차를 정해두고 이미 다 쓴 원고를 편집자가 교정해서 선별적으로 공개하는 형태였다. 이 역시 전통적인 작가와 독자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잠시 참여해본 것으로 쉽게 말하기는 이르지만, 작가들이 구독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글쓰기를, 특히 한 권의 책이 탄생하는 과정을 공유해 나간다는 건 책의 생태계를 확장시키는 멋진 시도가 될 것 같다. 독자들은 수동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출간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책 한 권의 분량이 자신의 e메일함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동안 그것은 개인의 자산이 되는 동시에 경험이 되고, 무엇보다도 작가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또한 남는다. 그가 지불한 구독료 역시 작가에게는 미리 받은 얼마간의 계약금보다도 글을 쓰는 데 훨씬 더 큰 응원이 된다. 


일곱 명의 작가와 책장 위 고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이 글들은 6월 말 책으로 출간된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한, 그런 외롭지 않은 책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xmasnig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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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비트사피엔스>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은 저마다 묵직한 매력을 품고 있다. 쉽게 안을 보여주지 않고 방문객의 애를 태우기도 한다.


가끔은 외부와 내부 공간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겉은 돌로 지어져 고풍스럽고 비라도 촉촉이 내리면 감성을 한껏 돋워주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월의 흔적을 감춘 채 현대식으로 개조한 건물들이 적지 않다. 역사와 전통을 내세운 고색창연한 공연장도 예외는 아니다. 개·보수된 현대감각의 조우는 관객들을 공연장으로 불러들이는 데 손색이 없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국내 200여개의 국공립 공연장이 관객들과 만나지 못하고 있는 언택트 사회를 살다보니, 유학 시절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공간들과 그 공간이 주는 느낌이 요즘들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1994년 당시 파리11구 골목길에 위치한 검은 철문 안으로 예술가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간판을 보니 알쏭달쏭하다. ‘메나지르 드 베르’, 윌리엄 테네시의 희곡 <유리동물원>의 모습을 닮아 있기도 하지만 무엇을 하는 곳인지 여하튼 궁금했다. 궁금하면 두드리라 했던가.


조용히 아침을 맞는 그곳은 낮엔 워크숍, 저녁엔 창작공연이 열리는 장소로,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멀티 예술공간이다. 파리시에서 후원하고 무용 창작이 중심이 되는 공간이지만 다양한 예술가들의 만남과 경험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안무가, 무용수, 배우, 행위예술가 등 파리를 찾는 예술가들이라면 꼭 한번은 들러봐야 할 곳이다. 상업적 스튜디오와는 차별화된 무용인들을 위한 전문무용센터라 할 수 있겠다. 


워크숍 외에 오디션이 진행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유명 안무가의 워크숍은 오디션으로 이어지며, 마지막 날 선별된 무용수들이 신작 작업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다. 오디션에 참가한 댄서들이 이른바 오디션 투어를 하는데, 마치 <미스터 트롯> 참가자들 같다고 해야 할까. 자주 마주치다보면 친분도 쌓이고 정보도 교환하고 국제적 인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도 이곳에서 치열한 오디션을 통과해 프랑스 무용단에서 작업을 함께했다. 한입에 털어넣어도 모자랄 것 같은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덧 공간과 하나가 된다.


요즘은 온라인 상영회로 대체되는 공연이라도 감사할 따름이지만, 코로나19로 희생된 많은 예술가에게 관객 없는 공연장은 쓸쓸함 그 자체이다. “경험 많은 몸이 무대 위에서도 진실할 수 있다”고 영국의 DV8 예술감독 로이드 뉴슨은 말했다. 공간을 공유하고 땀으로 연습실을 채우고 무대가 열리고 공연장이 관객으로 채워지는 진실된 시간을 기다려 본다.


<김성한 세컨드네이처 댄스컴퍼니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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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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