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가까이 음악인들을 지켜봐왔다. 대부분 스스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부르는 친구들이었다. 모두 시작은 미약했다. 끝은 각기 달랐다. 입소문을 타고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친구들이 있었다. 어쩌다 출연하게 된 방송을 통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친구들이 있었다. 차곡차곡 한 단계씩 스스로를 알리며 대기만성을 이룬 친구들이 있었다. 재능이 있다 하여 모두 성공한 건 아니다. 나는 안타깝고 괴로웠다. 운이 따르지 않아 결정적 고비에 기회를 놓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잠시 반짝했던 영광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세월과 정비례로 증가하는 현실의 무게에 눌려 빛나던 총기를 잃은 친구들을 볼 때마다. 


불운의 소산일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예술가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한 탓이 컸다. 무대의 조명 아래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 일상의 형광등 아래서 간혹 드러나는 그림자를 친구들은 화려한 조명의 기억으로 덮으려고 했다. 음악인들이니 자신이 만든 곡과 무대 위에서의 연주를 통해 자신을 드러냈겠지만 예술인으로서 모두 보여줄 수 없는, 현실인으로서의 자신은 생활의 현장에서 계속 닳아가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글로 먹고살았다. 주로 남의 이야기를 썼다. 음악에 대해 썼다. 이렇게 저렇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썼다. 내 이야기를 쓴 적은 없다. 처음 글로 온전히 밥을 책임질 수 있었을 때는 맹렬히 내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그 글을 묶어 책을 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책은 망했다. 홍보 한번 제대로 못하고 묻어야 했다. 그 후로 나에 대해 써본 적이 거의 없다. 어차피 책 한 권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나는 계속 썼다. 남에 대해 썼다. 글은 때로 다른 부가가치의 시작점이어서 강연과 방송 같은 다른 활동도 따랐기에 혼자 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먹을 만큼 먹고 마실 만큼 마시고 놀 만큼 놀 수 있었다. 오늘 일하고 오늘 놀았다. 사는 게 마냥 재미있었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평범한 친구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이는 계속 쌓였고 세상도 그만큼 변해갔다. 글을 쓸 수 있는 잡지는 매년 사라졌다. 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매년 줄어갔다. 물론 지금도 사라지고 지금도 줄어간다. 글로 전달되던 내용들은 영상으로 전달된다. 그 와중에도 마감 때마다 머리를 싸매고 자판을 두드리는 내가 마치 타이태닉호에서 연주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럼에도 스스로 위안하곤 했다. 오만가지 핑계를 대가며 현실을 외면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반성보다는 도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남아 있는 게 없었다. 현실이 바짝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현실이 자객처럼 다가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보병부대였다. 뚜벅뚜벅 진군해왔다. 사주경계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음악 하는 친구들처럼 ‘예술가의 자존심’ 따위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 내가 예술가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얼마전에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었다. 글쓰는 사람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일을 해보고 싶었다. 간단한 이력서를 제출했다. 나이 지긋한 점장은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가지신 분이…. 하실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화려하다니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미안합니다. 다음 기회에 뵙겠습니다.” 그가 나한테 미안해야 할 까닭은 없다. 문자를 들여다보며 많은 것들에 대해 미안해졌다. 과거의 나에게, 나의 현실 도피로 속 끓인 사람들에게. 친구들을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었다. 일로 인해 생긴 약간의 조명으로 창백한 형광등 불빛을 덮으려 한 건 오히려 나였다. 친구들이 힘들다고 했다면, 그 속내를 좀 더 자주 주고받았다면, 힘든 속마음을 나도 좀 더 쉽게 털어 놓을 수 있었을까. 반성한다.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의 일부만이라도 나 자신에 대해 온전히 썼다면, 이야기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유서 같은 글 한 편이라도 썼다면 어땠을까 하고.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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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밭둑 뽕나무 _ 450×470㎜ _ 초배지에 먹 _ 2015


강촌의 늙은 내외


가랑비 좀 뿌린다고 고추밭 고랑에서 나오지 않는다


장대비 좀 쏟아져라 푹푹 찌는 마른장마



원주 남한강변의 펜션은 그 마을의 수익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졌는데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그래서 내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장기 임대. 난 저렴한 작업 공간(사실은 스스로의 유배 공간?)을 얻었고 마을은 건물 관리자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봄여름 건물 주위의 무성한 풀들을 감당하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예초기를 마련해서 직접 풀을 베고 치우기도 하지만 자주 가 있지 못할 때에는 감당키 어려울 만큼 자라 있어서 돈을 내고 마을에 부탁해야 했다. 그러면 이장이 직접 오거나 마을 노인회장님과 총무님이 오기도 했다. 이장은 좀 젊은 분이지만 회장님과 총무님은 나보다 훨씬 더 연세가 많은 분들이다. 돈 때문이 아니고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참 마음 편치 않은 것은 푹푹 찌는 더위에 그분들이 힘들여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남의 노동을 산다는 일이었다. 이것이 윤리적인가…. 


노인회장님 내외분은 펜션 옆 그분들의 고추밭에서 자주 마주쳤었다.


<정태춘 싱어송라이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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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게는 여름의 음악이다. 그리고 자메이카와 밥 말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밥 말리의 대표곡 ‘안돼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No Woman, No Cry)’는 마음이 답답할 때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노래다.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가 살던 트렌치타운의 공동마당에서/ 위선에 찬 인간들을 관찰하던 때를/ 우리가 만난 좋은 친구들과 어우러지던 순간을/ 우리와 함께했던 좋은 친구들 그리고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좋은 친구들/ 밝은 미래 앞에서 결코 과거를 잊어서는 안된다오/ 자 이제 눈물을 닦아요.”


레게음악의 전도사로 불렸던 밥 말리는 이 노래 속에서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절대로 울지 말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노래한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에게 바치는 곡 같지만 사실은 그의 조국 자메이카를 위한 노래다. 1962년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자메이카, 나아가서는 백인들에게 탄압받아온 흑인들을 절규하듯이 위로하고 있다.


밥 말리는 언젠가 모든 흑인이 그들의 고향인 아프리카에 모여서 이상향을 건설할 것이라는 라스파타리아니즘의 추종자였다. 1세기 전 흑인 인권운동가 마르쿠스 가비는 에티오피아가 흑인들을 구원할 약속의 땅이 될 것이라면서 라스파타리아니즘을 주도했다. 그러나 메시아로 추종했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에티오피아 황제가 쿠데타로 물러나면서 시들해졌다. 그러나 카리브해의 레게 뮤지션들은 라스파타리아니즘을 종교로 신봉했으며 레게머리를 고수하면서 명상을 위해 마리화나를 피웠다.  


밥 말리는 이 노래의 작사, 작곡자로 그의 친구 빈센트 포드의 이름을 올렸다. 포드는 밥 말리와 1950년대 트렌치타운의 빈민가에 살던 시절의 친구였다. 당뇨로 두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었지만 의협심이 강했고, 무료급식소를 운영하여 빈민구제에도 앞장섰다. 암울하고 힘들었던 시절에 함께 정을 나눴던 친구에게 재정적 보탬을 주기 위해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 노래는 1981년 5월 밥 말리가 뇌종양으로 사망한 뒤 발매된 베스트앨범에 수록된 라이브 버전이 더욱 큰 인기를 누렸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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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담당을 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취재현장에서 질문을 하기가 어렵다. 어설픈 질문으로 나의 얕은 식견이 탄로날까 두려운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내 얕은 질문으로 작가나 큐레이터가 행여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두번째다. 그래도 기사를 써야 하니, 또 취재를 하다보면 나도 궁금한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서 질문을 하기는 한다. 지금까지는 다행히 좋은 취재원들을 만나서 무식한 질문이라고 타박을 받은 적은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작품의 가격을 대놓고 묻거나 따지는 것이다. 경매 낙찰가가 화제가 됐던 제프 쿤스나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작가의 작품이 아닌 이상 “이 작품은 얼마나 하나요?” “왜 이렇게 비싼가요?” “이렇게 비싸도 사람들이 사나요?” 하고 질문하기 어렵다. 미술계 사람들이 순수한 예술혼만으로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지는 않겠지만, 또 당연히 돈을 받고 작품을 사고팔겠지만 왠지 내가 질문을 하는 순간 속물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 또 나 혼자만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공개적으로 실토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장 궁금한 이야기이긴 하다. 특히 그 가치는 물론이고 의미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작품은 왜 그런 가격을 받는지 알고 싶다. 물론 ‘그 작품을 원하는 사람이 많으면 가격이 올라간다’는 시장의 원리가 있지만, 모든 작품이 항상 시장에서 정확한 가격을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이런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자리가 있었다. 국내 미술품의 유통 가격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는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간담회를 열어 자체적인 미술품 가격 결정 모형을 처음 공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의 소장작품 가격을 재평가하기 위한 용역을 받아 연구를 진행했다. 


협회의 가격 결정 모형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학업·전시 활동·인지도 항목을 각 1∼3점으로 매긴 뒤 작업 경력을 반영해 해당 작가의 통상 가격을 산출한다. 학업 특성에서는 출신 학교는 구분하지 않되 학부 비전공 1점, 대학 졸업 2점, 대학·대학원 졸업 3점으로 차등을 뒀으며, 전시 활동은 대관전 1점, 기획전 2점, 초대전 3점으로 나눴다. 인지도 면에서는 수장 이력·소장 내역·보도 내용을 평가해 최대 3점까지 주기로 했다. 이를 바탕으로 특정 작품의 보존 상태·크기별 가격·작품성·시장성을 따져 최종 가격을 책정한다.


기준이 되는 작품 크기는 10호다. 각각 마이너스 4점부터 플러스 4점까지인 작품성 및 시장성은 협회 소속 감정위원과 전문위원이 작업 재료, 작품 주제, 제작 시기, 경매 성적 등을 반영해 평가한다.


시장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작가의 작품에 가격을 매기기 위한 기준일 뿐이라고 한다. 기존에는 관행적으로 동년배에 유사한 학력을 지닌 작가들의 작품가격을 참고해 평가했다고 하니 이런 기준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 이상하다. 무엇보다 작가의 학력과 전공을 가격산정에 반영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시대착오적이란 생각마저 든다.


‘거리의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처럼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도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이 떠오른다. 또 건축으로 일가를 이뤘으면서도 200여점의 회화를 남긴 이타미 준도 있다. 이런 작가들의 그림을 ‘비전공자의 작품’이라고 깎아내릴 수 있을까.


여전히 나를 비롯한 많은 대중은 미술품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의 학력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미술품 시장에 관심을 가지고, 그 가격 결정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일 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력 같은 구시대의 기준 말고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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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네’ 악보.


얼마 전 장애인의 행사에 갔다. 일종의 ‘서로 친해지기’ 축제(서로 친해지기는 내가 답을 내려보고 싶었다)였다. 미술을 하는 나는 관찰력이 있다. 집안의 내력인 것 같다. 


장애인 돕기, 불우이웃 돕기 같은 행사의 제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때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장애인과 왠지 어색한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제목에 ‘돕기’ ‘위한’ 같은 표현은 안 썼으면 좋겠다. ‘돕는 거라고? 나는 그런 게 아닌데 왠지 어색해’하는 거북함을 행사 내내 느끼게 된다. 그저 어떤 친구는 귀가 안 들리고, 어떤 친구는 눈이 안 보이고, 또 어떤 친구는 지적장애일 뿐…. ‘서로 친해지기 장애인과 함께.’ 이 정도의 제목이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명칭을 써야 한다며 인권을 이야기하셨다. 나는 그 연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리허설을 기다리며 대기실에 있을 때 우리 밴드의 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지적장애 친구들이 직접 만들어 왔다면서 기분 좋은 얼굴로 원두커피를 돌렸다.


10대 후반~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도 잘생긴 청년이 재미있어서 나는 말을 걸었다. 일부러 약간 화가 난 말투로 “어이 학생, 내가 몇살인데 이런 쓴 커피를 주는 거야?”라고 했다. 그러자 청년은 아주 빠르게 대처했다.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어요”라고 답했다. 우리 밴드와 청년의 담당 선생 모두 웃었다. 짧지만 정확한 답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웃지 않고 나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나는 또 장난치고 싶어서 “어이 친구, 나, 이거 써서 못 마셔!” 하자, 또 한번 “어쩔 수 없어요” 하며 울 것만 같았다. 나는 웃으면서 “아 참, 나는 이거 못 마시는데” 하며 뜨거운 커피를 훌쩍 마시다가 “앗, 뜨거. 뜨겁잖아!” 하고 엄살을 부렸다. 순간 청년이 씩 웃었다. 그러더니 “그거 안 마셔도 돼요. 어쩔 수 없어요”라고 했다. 그러고는 웃으면서 대기실에서 나갔다. 나는 “잘 가”라고 했고, 청년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야 해요” 하고 갔다.


그날의 행사는 대단했다. 비장애인인 우리가 부끄러웠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피아노 비트는 열정으로 변했다. 들리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언젠가 내가 병원에서 퇴원한 후 제주도에서 밴드 ‘들국화’ 연습을 할 때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핵의학 교수로 일하던 친구에게 “동정표도 표야”라고 얘기하며 같이 공감의 웃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았다. 대다수가 나를 우려하는 듯한 시선이어서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대에 어떻게 올라가지?’ 싶었다.


산과 바다, 나무와 꽃 외엔 사람이 싫었다. 참 부끄러웠던 날들…. 나를 이해해주는 것도 싫었다.


나는 교수 친구와 통화하며 이렇게 말했다. “ ‘와, 전인권씨죠? 좋아했어요’ 하고 꼭 뒷말이 ‘힘내세요, 힘내세요’더라. 그 말이 들리면 마치 날 위하는 게 아니라 표적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좌우간 기분이 안 좋아지고 내가 아주 작아지는 기분이지. 마치 믿는 사람에게 동정을 받는 듯한….” 그러자 친구는 “야 그게 뭐…” 하면서도 공감이 간다는 듯한 말을 했고, 순간 문득 지난날 힘겨웠던 날들이 생각나서 “야 동정표도 표야”라고 말하며 둘이 웃었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저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죽는다는 건?’ 하고.


그런 생각들을 떨쳐낼 수 있을까? 서로 똑같은 시간을 살아가며 ‘떳떳하자. 이왕이면 내가 고개 숙일 필요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내 앞날은 희망밖에 없지’ 하며 스스로 이겨냈다. ‘내가 답이지, 내가 왜 사람들의 답이 돼야 하나’라고도 생각했다. 


다시 또 뭉친 ‘들국화’ 기자회견 때도 취재진이 묻기 전에 내가 먼저 얘기했다. “여러분을 황당하게 했죠? 미안해요.”


그날 장애인의 사운드가 바로 우리들이 원하는 비트(몰입, 강한 박자)였다. 우리는 목표가 같은 거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장애인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 또한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건 이미 자신을 이겨낸 뭔가 또 다른 것이지 않을까.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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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들을 때마다 부채 의식이 느껴지는 가수가 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가수 심수봉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1979년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당시 현장에 있었다. 노래를 잘한 죄로 불려갔다가 역사의 격랑에 휩쓸렸다.


‘이 몸이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어도/ 하늘이여 보살펴 주소서 내 아이를 지켜 주소서/ 세월은 흐르고 아이가 자라서 조국을 물어 오거든/ 강인한 꽃 밝고 맑은 무궁화를 보여 주렴.’


심수봉은 이 노래를 가장 아끼는 곡으로 꼽는다. ‘그때 그 사람’이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보다 먼저 꼽는 이유는 뭘까? 사건 직후 그는 한 달간 서울 한남동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방송 출연금지와 출국금지를 당했다. 이 노래는 해금을 기다리던 시절에 우연히 국립묘지에 갔다가 무명용사의 비문을 보고 쓴 곡이다. 아들한테 우리꽃 무궁화를 위한 노래 한 곡 정도는 남겨주고 싶었다. 


드디어 해금이 돼서 1985년 MBC TV <쇼 2000>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 어떤 방송에서도 출연 제의가 없었고 노래를 틀어주지도 않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저런 노래가 어떻게 TV에 나오냐?”고 했다는 것이다. 노래보다는 심수봉의 등장이 불편했을 수도 있다. 


심수봉은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여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나’라든가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고 썼지만 전체적으로는 뜨거운 조국애를 담은 노래였다. 말로만 해금됐을 뿐 여전히 그는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북녘땅을 고향으로 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심수봉은 “그냥 당하면 당해야 하는 건 줄 알았다”고 말한 바 있다. 


1976년 남산 도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하던 심수봉을 발굴한 건 손님으로 왔던 나훈아였다. 그날 저녁의 만남이 ‘파란만장 심수봉’을 만들었으니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덕분에 우리는 심수봉의 절창을 듣고 살았으니 고맙고, 고맙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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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4일 새벽. 톈안먼광장에서는 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시위가 한창이었다. 군부는 총기와 전차를 앞세우고 시위군중에 접근한다. 고르바초프의 방문 시기에 유혈참극이 중국 한복판에서 벌어진다. 이어 중국 정권의 만행을 고발하는 세계 언론의 포화가 쏟아진다. 당시 동유럽발 개혁·개방정책에 영향을 받은 중국은 정치·경제의 내홍을 겪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옥도가 펼쳐지는 고국으로 복귀하는 인물이 있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중국문화 강연을 하던 류샤오보였다. 1955년생인 그는 노르웨이, 하와이, 뉴욕 등에 이르는 순방길에 있었다. 처음으로 접한 국외 문명의 파고에서 류샤오보는 전통적인 중국의 비판이론이 진부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지식체계가 보잘것없음을 토로한다. 


중국 근대사에 관한 신선하고도 도발적인 해석으로 신지식인의 대열에 합류한 젊은 비평가는 톈안먼사태를 통해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난다. 시위대 대표로 협상무대에 오른 류샤오보는 인권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류샤오보는 1988년 6월에 개최한 박사논문 발표회를 기점으로 두 가지 이미지를 장착한다. 정치적 요주의 인물이라는 족쇄와 중국의 미래를 책임질 지성이라는 표식이었다. 


그는 중국은 300년 동안 식민지가 되어야 비로소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폭탄발언을 쏟아낸다. 중국 공안은 본격적으로 류샤오보 주의령을 내린다. 감시 대상에서 제거 대상에 오른 지식청년의 일상은 순탄치 않았다. 치기어린 학자에서 냉철한 운동가의 역할을 받아들인 30대 류샤오보와 그를 추종하는 대학운동권은 연좌, 단식, 구호만으로 권력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톈안먼사태가 발발하자 류샤오보는 지지세력에게 의미심장한 예언을 한다. 72시간이 지나면 국제관례에 의거하여 정부에서 새로운 협상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발언이었다. 시위대를 향한 정권의 폭압은 류샤오보의 희망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1989년 6월6일 저녁이었다. 귀갓길에 오른 류샤오보는 공안에 의해 연행된다. 국내외 여론이 부담스러웠던 중국 정부는 6월24일에서야 그를 체포했다고 발표한다.  


경제개방과 독재정치를 동시에 이뤄야 하는 독재자는 류샤오보라는 작은 거인 앞에서 장고를 거듭한다. 대부분의 부패정권은 폭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반혁명 선동죄라는 족쇄와 함께 대학강단에서 물러난 류샤오보의 행보는 억압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감금과 억류를 반복하던 반정부인사는 2009년 국가전복선동죄라는 명목으로 징역 11년을 선고받는다. 이듬해 류샤오보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전 세계에 중국 정부를 향한 성찰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여전히 중국은 반성하지 않았다. 시상식 참석을 막기 위해 중국은 류샤오보의 가족을 가택연금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단속국가의 자화상이었다. 부패한 정부, 시민 탄압, 소득격차의 심화라는 삼중고에 빠진 마오쩌둥의 나라는 패착을 거듭한다. 


류샤오보는 2017년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2020년 출옥을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지식청년의 때 이른 죽음이었다. 만약 그가 넬슨 만델라처럼 복역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다면 민주화의 시간을 앞당겼을 것이다.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2019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중국은 177위에 머물렀다. ‘죽의 장막’의 나라는 러시아와 함께 장기집권의 길을 걷고 있다. 2019년 6월, 중국의 탄압에 항거하는 홍콩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진다.


작가 쉬즈위안은 책 <독재의 유혹>에서 버나드 쇼의 말을 빌려 류샤오보를 묘사한다. “정상인들은 세계에 적응하며 살지만 광인은 항상 세계를 자신에게 적응시킨다. 역사의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은 모두가 광인이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취향의 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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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촉즉발 산업전쟁 _ 600×610㎜ _ 화선지에 먹 _ 2019


세기말의 세계화, 관세 철폐, 자유무역…, 그리고 지금 저 사나운 얼굴들.


탐욕과 오만의 무례한 언사들. 소위 21세기 신문명을 이끌고 가는 이들의 대화….


자국의 이익과 패권을 추구한다. 이웃과의 호혜와 선린은 구 문명의 낙후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자국 국민의 삶이 기아선상에 놓이기라도 했다는 듯이 비장하다. 이익이 침해당하면 언제든, 얼마든 보복하겠다고 공언을 한다. 군함과 전투기로 시위를 한다.


차별과 좌절이 분노를 만들고 그 분노가 자기 내부의 성찰로 가지 않고 이웃과 경쟁자들을 향한다.


트럼프, 아베, 푸틴, 시진핑의 얘기가 아니다. 거기 공동체 시민들 얘기다. 그런 야만에까지 왔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얼마나 더 성장을 해야 하는 걸까. 왜 선한 분배와 공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걸까. 언제 우발적으로 꽝! 터지지 않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지금 전쟁 중이다. 새로운 세기의 절대적인 화두는 돈이며 산업문명은 불안 그 자체다.


지성과 이성은 어디로 갔을까.


<정태춘 싱어송라이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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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