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스럽지도 않은데 중독성이 강한 노래가 있다. 한 번 들으면 좀처럼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이럽션의 ‘원웨이 티켓(Oneway ticket)’이 그런 노래다. 1970년대 말 이 노래가 히트하던 시절에는 소위 고고장으로 불렀던 디스코텍이 대세였다. 그곳을 지배하던 음악은 단연 디스코였다.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에서 존 트래볼타가 나팔바지를 입고 하늘을 찔러대던 그 춤과 노래 말이다. 디스코텍의 단골 레퍼토리였던 ‘원웨이 티켓’은 공부밖에 모르던 샌님을 빼고는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었다.

 

원래 이 곡은 닐 세다카가 처음 불렀다. 잭 켈러와 행크 헌터가 쓴 원곡은 닐 세다카의 1959년 싱글 ‘오 캐럴’에 수록돼 있다. 이럽션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정서적이고 감미롭다.

 

‘Choo choo train Chuggin’ down the track/ Gotta travel on Never comin’ back/ Got a one way ticket to the blues.’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뒤 편도 티켓으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슬픔을 노래했다. 이별노래에 맞춰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면서 하늘을 찔러대던 디스코텍의 청춘들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럽션은 1974년 ‘사일런트 이럽션’(Silent Eruption)이란 이름으로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남성 5인조였다. 한 명이 탈퇴한 뒤에 자메이카 출신의 여성보컬 프레셔스 윌슨을 영입하고 ‘이럽션(폭발)’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 노래를 발표했다. 그룹 이름처럼 유럽과 미국을 강타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국내 인기를 등에 업고 1980년 코미디언 출신 가수 방미가 ‘날 보러와요’로 리메이크하여 부르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모두 철거됐지만 DMZ의 대북확성기에서 한때 가장 많이 나왔던 노래가 ‘날 보러와요’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본인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송대관의 ‘차표 한 장’ 역시 이 노래의 영향 아래 있다.

 

그런데 마치 이 노래가 편도 티켓밖에 허용되지 않는 우리네 인생 얘기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인가?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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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술에 대해 물으면 넌 온갖 정보를 다 갖다 댈걸? 미켈란젤로를 예로 들어볼까? 너는 그에 대해 잘 알 거야. 그의 걸작품이나 정치적 야심, 교황과의 관계와 성적 취향까지도 말이야. 하지만 시스티나 성당의 냄새가 어떤지는 모를걸? 한 번도 그 성당의 아름다운 천장화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남자. 숀 맥과이어는 윌 헌팅과 대화를 시도한다. 


윌 헌팅. 수학, 역사, 법학에 이르기까지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청년의 이름이다. 성장기의 상처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윌을 치료하려는 숀 맥과이어 교수. 그는 윌 헌팅이 가진 방대한 지식의 한계를 꼬집는다. 이탈리아 미술가를 예로 들면서 경험과 감정과 지식의 차이를 설명하는 숀 맥과이어. 순간 방어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윌 헌팅의 표정이 달라진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굿 윌 헌팅>은 소통의 의미를 암시하는 영화다.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자신을 방어하려 드는 윌 헌팅. 숀 맥과이어는 주기적으로 윌 헌팅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네가 뭘 느끼고 어떤 사람인지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만 읽어보면 다 알 수 있을까? 그게 너를 전부 설명할 수 있을까?” 숀 맥과이어의 발언에서 어떤 이론이 떠올랐다. 


이름하여 머레이비언의 법칙이다. 심리학자 앨버트 머레이비언 교수는 인간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할 때 말의 의미보다 목소리, 음색, 얼굴표정과 같은 비언어적인 요소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지금처럼 문자 위주의 소통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1971년에 등장한 이론이었다. 머레이비언에 따르면 윌 헌팅이 드러내는 문자정보가 의사소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에 불과하다. 반면 음색과 목소리에 해당하는 청각정보는 38%를 차지하며 눈빛, 몸짓, 표정에 속하는 시각정보의 비중은 무려 55%에 달한다. 문자정보의 8배에 달하는 소통이 시각정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흔히 말하는 첫인상이 과소평가할 부분이 아니라는 이론이다. 


개인적으로 1년6개월간 카톡으로만 소통했던 인물이 있다. 2017년에 출간한 책의 교열교정을 담당했던 출판사 직원이었다. 정확하고 빠른 일처리 덕분에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취향에 관한 신간을 준비하면서 그와 대면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다. 예상대로 카톡으로만 주고받던 느낌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았다. 비언어적 요소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숀 맥과이어는 이미 머레이비언의 법칙을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윌 헌팅과의 첫 만남에서 내면의 공허함을 메우려고 피상적인 지식에 집착하는 타인의 자아를 발견한다. 만일 두 남자가 비대면 방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치료는커녕 오해의 골만 깊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숀은 마지막 상담에서 청년을 끌어안는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위로를 건네는 비언어적 표현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백인이라는 인종자본과 천재라는 지적자본의 소유자다. 여기에 미국인이라는 국적자본까지 장착한 선택받은 인물이라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주인공은 소통의 비교 우위를 점한 자에 해당한다. 결국 윌은 자신이 포기했던 인연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엘리엇 스미스의 주제곡 ‘Between the bars’가 인상적인 영화 <굿 윌 헌팅>. 머레이비언의 연구결과가 나온 후 약 50년이 흘렀다. 과연 무엇이 변했을까.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SNS를 활용한 실시간 소통이 일반화되었다. 대면보다 비대면 소통에 익숙한 Z세대가 등장했다. 깊이가 사라진 인간관계가 자리를 잡았다.  


비대면 소통에서 발생하는 오해나 착각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그렇다고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서 대면 소통만을 반복하기도 쉽지 않다. 머레이비언의 법칙이 여전히 유효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는 편리한 단절보다 불편한 소통을 고려하는 현대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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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생 시절 내내 성적이 30등 이하였다. 성적이 30등 이상인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 친구들은 나와는 다른 아이들. 얼굴이 왠지 하얗고 도시락 반찬도 달랐다. 도시락에 반찬통도 따로 있고, 같은 계란말이도 왠지 하얘 보였다. 그 아이들은 우리가 노는 곳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우리와 서로 따로 놀았다. 그냥 우리와 서로 다른 애들. 가끔 “야, 걔가 또 일등했대”로 시작하는 야유 정도. 나는 그런 속에서 간혹 우울감을 느꼈다. 


5학년 때 내 짝이던 여자애는 이뻤다. 공부를 잘했고 역시 나와 모든 게 달랐다. 나는 그림을 잘 그렸지만 그 애와 가까워질 수 없었다. 외로웠다. 공부 잘하고 집도 부자인 아이들과 공부 못하고 가난했던 우리는 이 다음에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다른 공간에 서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씩씩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초등학생 때부터 30등 이하였던 친구들 중 상당수는 육체노동자가 되어 먹고산다. 그중 한 선배는 열심히 일해서 서울 종로에 김치찌개집을 냈고, 돈을 벌어 작은 빌딩까지 샀다.


‘재채기’ 악보.


나는 주로 혼자 놀거나 나의 작은형님과 함께 산에 다녔다. 산속 깨끗한 개천의 구석 즈음에 다다르면 물속의 돌들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 순간 크고 작은 거무튀튀한 가재 여러 마리가 마구 달아나는데 정말 신기했다. 


나는 북악산의 열매나무 있는 곳을 진짜로 모두 안다. 주로 많은 게 버찌(벚나무 열매). 우리는 버찌나 아카시아꽃을 따 먹었다. 11월이 되면 서리가 내리는 속에 ‘파페’라는 열매가 나온다. 잎사귀는 없고 앵두보다는 조금 작고 통통하고 빨갛게 익는데 맛이 일품이다. 날이 저물어서까지 혹시 뭔가 먹을 게 있을까 찾아헤매던 내가 우연히 발견한 나무가 파페나무다. 그 열매를 딸 때는 추워서 손도 곱는다. 나무는 크지 않은 게 주로 많지만 열매는 다닥다닥 기분좋게 풍성하다. 그렇게 열매를 따 먹으러 산을 오르내릴 때는 산의 모양새를 관찰했다. 여기는 밟아도 안 넘어질 것 같고 저기는 ‘부웅~’ 하고 뛰어넘어도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감잡기가 어려웠지만 계속 시도하면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지혜가 생겼다. 내 삶의 지혜는 어릴 때 내 집 바로 뒤 북악산에서 놀며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 것 같다.



나는 내 노래 ‘재채기’ 중 ‘옛날이여 지금 어디 살기 바빠~’ 부분이 슬프다. 그래서 노래 스타일에 약간 기분을 가미했다. 문학·미술·음악의 서론의 느낌들은 우리나 서방이나 같다고 생각한다. 미국 LA에 멜로즈라는 거리가 있는데 인도나 다른 나라의 골동품도 사고판다. 여기는 말의 스타일로 친구들 ‘끼리끼리’가 형성되는데, 전혀 편파적이지 않고 선진국다운 면이 있다. 말의 느낌이 통하면 친구가 된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돈이나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며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많다. 못된 범죄행위나 다름없다. 


‘재채기’의 마지막 가사는 ‘어제의 다툼은 깊은 곳의 내 마음 아니지. 너와 내가 만들어낸 유령이 분명한데’이다. 이 노래 역시 만든 사람과 돈 버는 사람이 다르다.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음악이 발전하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로 큰 힘이 된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범죄자로 폄하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세계를 한손에 쥔 거인이시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5가지 이유를 보면 얼마나 범상치 않은 분인지 알 수 있다.


요즘 이상한 거짓뉴스들이 쏟아지고 있다. 유령이 분명하다.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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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날 때 서른 한 살이던 아버지는 자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화가 나 있었다. 그렇다고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농사꾼답지 않게 늘 뉴스를 듣고 신문을 정독했으며 틈나는 대로 붓글씨를 썼다.” 우일문의 <시시한 역사, 아버지>를 읽고 인상 깊은 대목을 다시 읽다 이 구절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에게 아버지는 어떤 이미지였을까? 무능하건만 자존심만 센 이기적 폭군. 어쩌면 나의 일생은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나는 아버지 삶의 패러독스를 이해하려고 애써본 적이 있는가 되돌아보았다.

 

담낭암 판정을 받은 그의 아버지는 예상과 달리 1년3개월을 건강하게 지냈다. 그러다 쓰러지셨다. 마약성 진통제로 견디면서 삶의 주변을 정리하셨다. 저자는 그때 문득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그러했듯, 그도 몰랐다. 아버지의 지난 삶을. 더욱이 중학생 시절, 그가 시인이 되고 싶다고 하자 호통을 치며 반대한 다음부터는 아예 아버지와 불화하는 삶이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후예였던 셈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실마리는 있었다. 궁벽한 집안 출신이 경기상고를 나왔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당시 학교명은 경기공립상업중학교로, 6년제였다. 그의 아버지는 1947년에 입학했으나, 졸업은 1956년에 했다. 3년이 비었다. 도대체 그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큰형님을 본받아 은행원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는 농사꾼이 되었을까?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6·25전쟁이 나자 서울로 나갔던 집안청년들이 고향인 파주로 돌아왔다. 어르신들을 남겨두고 피란을 갈 수는 없었다. 그러다 의용군을 모집했고, 문중에서 한 사람을 내보내라는 압력을 받았다. 집안에서 권위가 있던 큰아버지가 아버지를 지목했다. 똑똑하니 잘 적응하고 살아돌아오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이후는 어처구니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의용군에 끌려가 훈련받다 미군의 폭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6개월 동안 난민처럼 떠돌아다니다 포로가 되었다. 당연히 선처될 줄 알았다. 총 한번 잡아보지 못한 주제이지 않던가. 그러나 역사는 잔인했다. 민간인 억류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풀어주지 않았다. 그가 나중에 조사해보니, 휴전협상에 필요한 인질이었다고 한다.

 

살아돌아온 그의 아버지는 복학해 졸업했으나 은행에 취직할 수 없었다. 끝까지 민간인 억류자로 인정하지 않고 한낱 부역자로 취급했다. 낙향한 아버지에게 군청 직원이 국군에 자원입대해 보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아버지는 덜컥 믿어버렸다. 군대 다녀오면 그 지긋지긋한 부역자 꼬리표가 떨어지리라고, 결혼한 몸으로 36개월을 채우고 제대했지만, 사회는 아버지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제, 아들은 분노를 터트린다. “이 국가는 억울하게 끌려간 ‘민간인’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면서도 부역자 꼬리를 떼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국가를 위해 성실하게 복무했음에도 몰라라 했다. 원칙도 상식도 없는 국가의 개·돼지에 불과한 아버지는 다시 절망했고 좌절했다. 말수가 줄었고 조금 우울해졌으며 술이 늘었다.”

 

김호정의 <발부리 아래의 돌>은 1977년 3월 발표된 이른바 ‘재일교포 실업인 간첩단 조작 사건’의 진실을 찾는 지난한 과정의 기록이자, 역사의 덫에 걸려 희생된 아버지를 위한 신원의 글이기도 하다. 지금은 교사가 된 김호정이 아홉 살 되던 해 2월, 아버지는 낯선 사람들이 몰고온 검은 차를 타고 집을 떠났다. 그러다 3년 뒤인 1979년 5월 한 대학병원에 온가족이 모여 눈물바다를 이루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김호정은 긴 세월 고통과 회한의 삶을 살다가 2006년 3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아버지가 연루된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16년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간첩단 조작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재일교포 실업인이 민단 소속 재일교포의 방한이 이뤄지고, 이들 자금으로 경제활성화를 꾀하려는 정책에 따라 고국에 회사를 차렸다. 회장과 감사가 제주 출신인지라 구성원이 대부분 제주도 사람이었다. 이들의 반공의식은 투철했다. 공화당 의원 비서관 출신도, 정훈장교 출신도, 심지어 중앙정보부 출신도 있었다. 화근은 감사를 지낸 강우규씨의 입이었다. 그는 분명히 ‘막걸리 보안법’의 실상을 몰랐을 터이다. 일본에서처럼 자유롭게 남북한을 비교하고, 때로는 북한의 우월성을 말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긴장하고 경계했다. 험난한 시절, 잘못 엮이면 경을 친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이 워낙 진솔하고 소탈하고 정감 있는지라 문화차이라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배신이 있었다. 강우규씨하고 가깝던 동향인이 그의 말을 확대, 과장해 간첩으로 신고해 포상을 받으려고 했다. 마침 중앙정보부장이 바뀌었고 유신반대의 기운이 거셌다. 그들이 보기에 때가 좋았다. 그 다음부터는 잔혹한 일이 벌어졌다. 김호정의 아버지 김추백은 총무부장으로 일하다 두 번이나 고혈압으로 쓰러져 퇴사한 상태였지만, 어떤 이유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바라는 대로 진술서를 쓰지 않으면 고문했다. 몸과 영혼이 파괴되었다.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김추백처럼 그렇게 그 시대 우리의 아버지 11명은 간첩이 되었다.

 

누구는 아버지의 행장을 쓰고, 누구는 아버지의 해원굿을 했다. 나는 어떤 상황인가? <마크 트웨인 자서전>을 보면 열세살 적에 딸이 쓴 자신에 대한 전기를 인용한 대목이 있다. 이 전기에 대해 그는 “합당한 판단력과 전기작가의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칭찬과 비판을 공정하고 균등하게 분배한 점이 돋보인다”고 평했다. 나는 지금 딸이 그런 정신으로 나의 삶을 기록할까보아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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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힙합은 더 이상 생소한 장르가 아니다. 힙합을 하는 래퍼들이 겨루는 TV 쇼프로그램은 이미 일상이 됐다. 쿨리오의 ‘갱스터스 파라다이스’는 힙합의 클래식 반열에 오른 노래다.

 

 

이 노래가 발표된 건 1995년이다. 당시 신인 래퍼 쿨리오는 영화 <위험한 아이들>의 OST의 삽입곡을 의뢰 받았다. 미셸 파이퍼 주연의 이 영화는 흑인빈민가의 한 고등학교에 부임한 여선생이 엉망진창인 학교를 참 교육현장으로 만들어 간다는 내용이다. 원래 1960년대 흥행했던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원제:투서, 위드 러브)>(시드니 포이티어 주연)을 리메이크한 1990년대 버전 영화였다.

 

캘리포니아의 흑인빈민가 콤튼 출신인 쿨리오는 약물과 범죄로 얼룩진 이곳에서 갱스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흑인 소년들의 절망을 노래에 담았다. 역시 흑인폭동 때 총격에서 살아남은 동료가수 LV와 함께였다. 쿨리오는 “빈민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꿈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위한 우울한 송가”라고 밝힌 바 있다.

 

쿨리오가 랩을, LV가 코러스를 맡아서 녹음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코러스 부분은 스티비 원더의 노래 ‘패스트타임 파라다이스’를 샘플링했는데 그가 욕설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사용을 불허했다. 결국 쿨리오는 욕설을 뺀 새로운 가사로 스티비 원더의 허락을 받아냈다.

 

결과적으로 이 노래는 영화보다도 크게 히트했다. 쿨리오와 LV는 1995년 빌보드뮤직어워드에서 대선배인 스티비 원더와 함께 무대에 섰다. 영화 OST에 앞서 발매된 싱글앨범은 미국과 영국에서만 5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대성공을 거뒀다.

 

‘나는 미친 갱스터, 확실한 범죄자/ 날 화나게 하지 마, 내 부하들이 가만 안 둘 거야/ 죽음은 순간이야/ 죽을 각오로 산다는 거 말고 뭐가 더 있겠어/ 나는 지금 스물세 살, 스물네 살까지 살 수 있을까.’

 

노래 전체에서 묻어나는 슬픔이 묘한 힘을 갖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파라다이스라는 단어가 주는 역설도 이 노래를 떠받치는 힘이다.

 

<오광수 경향플러스 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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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수염(脊髓炎·myelitis)은 척수의 염증을 동반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뇌와 사지를 잇는 중추신경계 기능이 망가진다.

 

발가락을 꿈틀거리고, 새벽녘 잠결에 이불을 슬쩍 걷어차고, 엉덩이를 옆으로 빼고 방귀를 뀌고, 다시 두 다리를 쭉 펴서 기지개를 켜는 정도의 동작들은 많은 생각과 계산 없이 이루어지는 당연한 몸의 움직임들이다. 오줌이 마려우면 누고, 배에 가스가 차면 방귀로 배출하면 된다. 특히 방귀를 뀌는 경우,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자유의 희열을 느끼면서 큰 소리와 메아리를 즐기며 그 공간을 지배할 때엔 정말 시원하다.

 

때로는 격식과 예의, 혹은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을 피해 항문근육을 조절하는 온몸의 세포와 조직들을 조정해 익명의 악플러들처럼 몰래 ‘쉬쉬’ 하면서 가스를 내보내는 방법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연기 그리고 혹시 억울하게 방귀 누명을 쓰는 제3자가 생겼을 때 모르는 척하는 뻔뻔함이다.

 

타이거JK

 

친한 친구들과 가족들 앞에서 방귀는 웃음가스로도 유용하게 쓰인다. 큰 방귀는 소리, 길이, 템포에 따라 각각 다른 웃음을 자아내며, 때로는 소리 없이 퍼지는 냄새 지독한 방귀로도 주위 사람들에게 ‘얼굴을 찡그리며 짓는 미소’라는 굉장히 모순적인 상황을 선물하기도 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런 동물적인 인간들의 당연한 행위들이 불가능해지는 병이 척수염이다. 정확한 이유 없이 뇌에서 보내는 신호들이 멈춰버리는 척추 안에서, 이 신호들의 고속도로인 척수가 염증을 동반해, 꽉 막힌 도로에 신호를 운반하는 차들이 멈춰 서 있거나, 잘못된 신호와 엉킨 방향판들로 충돌하기 시작한다. 의도적인 것인지, 얼굴이 험하게 생겨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타이거JK가 강하고 거침의 상징으로 거듭나기 시작할 무렵, 나의 몸에는 잔근육과 빨래판을 연상시키는 복근이 있었다. 나는 얼굴에 꽃이 피는 미남 미녀들이 장악하는 시장 밖에서, 힙합이라는 비주류 음악 대표로, 가수 비 다음으로 청바지 브랜드의 대표모델로, 패션계에서도 모델로 불려 다니면서 복근 노출을 부탁받던 섹스심벌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복근이 멋진 상남자로 이미지화되어 있던 나에게 척수염은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안겨준 가장 원수 같은 희귀병이었다. 가장 큰 고통은 뇌에서 보내는 당연한 신호들의 장애였다. 방귀를 뀌고자 하는 욕구가 온몸을 떨게 해도, 한두 시간을 집중적으로 배를 누르고 때리고 방구석을 뒹굴뒹굴 굴러봐도, 배출되지 않는 가스. 이렇게 2년을 고생했다. 척수염 투병일기는 아마도 두꺼운 책 10권 정도 나올 분량의 더럽고 추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섭고 고통스러운 경험들이다.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나는 방귀가 주는 행복감을 깨달았다. 희귀병에 걸려 투병을 시작할 때 의사 선생님들이 처방한, 치료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사항들이 있었다. “음식을 꼭꼭 씹어 천천히 드세요. 물을 마시세요, 물이 좋습니다. 술과 담배를 줄이시고, 조금이라도 걸으세요. 좌욕을 하세요. 그 어떤 약보다도 지금 제가 말씀드린 주의사항들을 우선 지키셔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똥, 오줌입니다. 절대로 참지 마세요. 먹으면 제때제때 싸야 합니다. 프로바이오틱스 섭취와 장운동, 이런 간단한 것들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찡그린 미소를 유발하는 방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리고 방귀가 주는 행복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싶다. 만약 방귀를 자유롭게 뀔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명심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까지도 척수염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내게 척수염은 ‘방귀의 행복’이라는 소중한 깨달음을 줬다. 이뿐만 아니라 척수염과 턱수염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을 때 리듬감이 비슷하다. 타이거JK만 쓸 수 있는 단어의 발견이다.

 

2019년 기해년을 맞이하며 모두가 뿡뿡대는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타이거JK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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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於富村豪奢街(귀어부촌호사가)

尋非常口於陋巷(심비상구어루항)

 

“부자 동네 호사한 거리에서 돌아와

누추한 뒷골목에서 비상구를 찾네”

 

정태춘, 귀어부촌, 550×435㎝, 디지털 프린트에 먹, 스티커, 2018

 

아파트 후미진 담벼락 아래에 누가 버렸을까, 약간은 때가 낀 흰 페인트 판자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걸 사진 찍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다시 만난 사진을 보며 짧은 한시 짓는다. 그리고 큼지마악하게 출력해서

 

그 뒷골목 풍경에 어울릴 글씨를 쓴다. 그리고, 반(反)과 산(産)을 새긴 스탬프와 내 이름을 새긴 낙관을 찍는다.

“반산업”의 내 붓글 시리즈라는 뜻이다. 거기다 사채 업체 명함을 한 장 붙여 내 얘기를 끝낸다.

(난 저런 명함을 수십 장이나 가지고 있다. 대개, 요즈음 우리집 현관 앞이나 동네 길거리에서 주운 것들이다. 흔하다.)

 

몇 년 전에 ‘비상구’라는 사진전을 한 일이 있다.

문명 부적응자는 끝없이 비상구를 찾아 헤매고 결국은, 없다.

이 산업 문명은 열외도, 기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가혹하다.

 

어쨌든, 나는 저 찾을 심(尋)자를 좋아한다.

참 좋아한다.

 

<정태춘 싱어송라이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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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어부촌  (0) 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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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클래식 기타로 만들어진 성가곡인 이 노래를 나름 대중화시킨 앨 스튜어트는 1970년대 중반쯤 ‘Year of the cat’이라는 노래로 유명해진 포크록(folk rock) 가수다. 포크록은 대중들이 어떤 시대의 불만이나 아픔들을 흥얼대며 노래하는 것으로 입소문으로 번지게 될 때 큰 힘이 된다. 록 음악의 정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백구’ ‘작은 연못’ ‘친구’ 등 천재 김민기의 모든 노래가 포크 음악이다.

 

‘사랑한 후에’ 악보.

 

김광희의 ‘세노야’ 같은 곡들은 1970년대 초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우리 국민들에게 ‘민초끼리’라는 힘을 갖게 했다(서방, 특히 미국은 ‘House of the rising Sun’ 같은 곡이 원래 흑인들이 자주 불렀지만 백인들, 가령 밥 딜런 등이 불러 크게 알려졌다. 그후 애니멀스가 록 블루스로 노래해 세계적인 명곡이 됐다. 이 노래를 밥 딜런이나 애니멀스가 만든 곡으로 아는 사람이 꽤 있지만 그렇지 않다. 원래 포크뮤직이다.

 

우리나라의 포크 음악들은 포크의 정신이라고 할 ‘풍자성’으로 볼 때 그 수준이 서구의 그것과 비교해도 훨씬 높다고 자부할 수 있다. 기막힌 ‘정선아리랑’ 등도 포크 음악이다. 지금 불러도 대중음악으로서 손색이 없다. 세계가 모를 뿐이다. 만약 세계인들이 우리나라 포크 음악의 풍자 수준을 안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 확신한다.

 

나는 어느 날 내 삶에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죽음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꼈다.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현실과의 타협을 싫어하는 한학자의 아내였다. 아버지는 평생 공부하며 잘 쓴 서예, 잘 그린 그림을 병풍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셨다.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서예·문학 등의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판단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께서 판단한 것에 대해선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해 궁금했다. 분명히 강한 분임에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드러운 분을 나는 아직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도 포크적 예술가였다. 북청사자놀음의 꼭쇠를 자처하며 즐기셨다. 그러니 생활고는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형님들이 돈을 번 것은 나중의 일이다.

 

어릴 때 나와 나의 작은형님은 공부하는 것보다 어머니와 놀고 싶었다. 어머니와 같이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 보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했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해 매일 새벽 6시경이면 남대문시장으로 장사를 나가셨다. 그때는 자정이면 사이렌 소리가 들렸는데 어머니는 매일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에야 돌아오셨다. 그래서 나와 작은형님은 우리 친척 중에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아주머니 손에 의해 키워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의 힘이 필요했다.

“에구 요것들아. 너희는 내가 없으면 고생문이 훤하다.”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그 말씀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함경도 사람들은 “사랑한다”라는 말을 잘 안 한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셋째주 일요일에 딱 한 번 쉬셨다. 그러나 그것도 두세 달 만에 한 번이었다. 약속은 깨지기 일쑤. 집에 돈이 없었다. 구청은 툭하면 무허가로 지어진 우리집 지붕을 헐어버렸다. 나와 작은형님은 엄마 빽밖에 없었다. 지붕이 헐린 것을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 확인한 어머니는 우셨다. 우리도 따라 울었다.

 

우리 삼형제 중 나를 어머니는 유독 이뻐하셨다.

“학교 다녀오는 길에 시장으로 와라. 냉면 사줄게.”

어머니도 우리가 보고 싶으신 거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원래 그러면 안되지만 병원에서 ‘야매로’ 집으로 모신 어머니 앞에는 하얗게 촛불이 밝혀졌다. 나는 그때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을 목격했다. 갑자기 아버지께서 하얀 방의 어머니 시신 앞에 털썩 주저앉아 “내가 미안하다. 잘 가거라. 내가 잘못했다”며 커다란 소리로 엉엉 우시는 거였다. 나도 울었다. 작은형님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늘 들어오시던 뒷문 앞에서 울었다. 동시에 큰형님은 갑자기 “어머니!” 하고 밖에서 어머니를 목놓아 부르셨다.

 

나는 그후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졌다.

이 노래의 사연은 ‘사랑한 후에’ 가사 안에 모두 있다. 그로부터 1~2년 후, 들국화는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긴 하루 지나고~

 

<전인권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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