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벼루를 얻었네 _ 690×350㎜ _ 화선지에 먹 _ 2019


廣硯滿充磨墨水(광연만충마묵수) 

小舟解繩出何海(소주해승출하해)

幼年野端其淺海(유년야단기천해) 

乘舟仰天托風乎(승주앙천탁풍호)


넓은 벼루에 먹물 갈아 가득 채우고

작은 배 줄 풀어 어느 바다로 나갈거나

어린 시절 들판 끝 그 얕은 바다

배에 올라 하늘 바라보며 바람에 의탁할거나


산업문명은 인간을 집단화하고 조직화한다. 공장, 공단과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 그리고 사무실들, 문화시설들…. 그게 도시다. 거기서 벗어난 인간은 산업 인력이 아니거나 부수적인 존재일 뿐이다. 문명은 개인이 혼자 있을 때에도 모바일이든 컴퓨터든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으라고 한다. 무선 통신의 첨단 미디어와 플랫폼들을 통해 대량 소비를 위한 집단 취향을 만들어내고 끝없이 소비하고 생산하게 한다. 


산업문명에서 독립적인 개인과 자유인은 없다. 집단화된 문명에 성찰과 지성은 없고 트렌드와 팬덤만 있다. 


거기에 수시로, 문명이 백신도 치료제도 준비하지 못한 신종 전염병의 재앙이 덮친다.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먼저, 크게 타격당한다. 생계를 위협당한다. 코로나19로 작금, 그 문명의 일부가 멈춰섰다. 잠시.


이제 그만 재앙이 잦아들기를…. 속히 모든 사람들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정태춘 | 싱어송라이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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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함으로 음성 녹음파일 몇 개가 도착했다. 파일을 재생시키고 눈을 감았다. 시를 낭독하는 음성이 들렸다. 시라는 길을 나아가는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여유로워 마치 산책하는 듯한 목소리다. 다섯 편의 시를 다 듣고 함께 동봉된 PDF파일을 통해 시를 다시 읽었다. 그냥 시를 읽을 때와는 또 다른 감상이 느껴졌다. 이것은 차도하 시인이 제공하는 자작시 낭독 메일링 서비스 ‘목소리’이다.


성다영 시인은 2019년 등단한 직후에 성폭력 가해자가 이사였던 출판사에 자신의 작품을 싣지 않겠다면서 문학세계사가 주관한 신춘문예 당선시집에 작품을 게재하는 것을 거부했다. 올해 한국일보에서 등단을 한 차도하 시인과 서울신문에서 등단한 이원석 시인이 그 뒤를 이었다. 차도하 시인이 구독형 메일링 서비스 ‘목소리’를 기획한 것은 일련의 사태로부터 비롯되었다.


차 시인은 “청탁을 거절하며 저의 시를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에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단순한 대체 지면을 떠나 기획을 해보자는 결심을 했다. ‘차도하’라는 신인 시인을 보여주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스스로 물었고, 제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되짚어보았다”고 밝혔다.


문학이 메일링 서비스나 웹진 등을 통해 인터넷으로 먼저 선보이는 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미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일간 이슬아’와 같은 시도를 비롯해 정세랑, 김언수, 박상영, 김인숙, 김금희, 정지돈, 심채경, 김원영의 글을 함께 볼 수 있는 ‘웹진 문학동네’(weeklymunhak.com) 같은 서비스가 있는가 하면, 문예지 바깥에서 창작자와 독자가 연결되는 큐레이션 공간 SRS(s-r-s.kr)나 자유투고를 통해 젊은 작가들의 글을 볼 수 있는 공간인 던전(d5nz5n.com) 등도 생겼다. 시나 소설만 구독 모델로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서양 철학 관련 문헌을 번역 출판하는 SNS 전기가오리(@philoelectroray)의 구독 서비스나 비평가 조영일의 ‘메일링 비평구독’(sozo.tistory.com)같이 학술 영역에서 깊이 있는 글 또한 구독 서비스를 통해 제공된다.


이러한 시도는 다양한 이유에서 이루어진다. 기존의 문예지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거부하거나 해체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고, ‘문학’이나 ‘학계’라는 이름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독자적으로 선보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등단이라는 제도의 바깥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독자와 만나기 위함이기도 하고 인쇄 매체보다 디지털 매체에 익숙한 시대 변화를 따라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렇듯 조금이라도 출구를 넓혀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행위는 분명 긍정할 만하나, 거기서 ‘문학’이라는 대상이 대중친화적인가 하는 원론적인 고민도 함께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문학’에서 멀어지는 까닭이 접촉면이 적기 때문일까. 오히려 ‘문학’은 인쇄 매체의 공간, ‘문예지’라는 필드 안에서 안전하게 격리·보호받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몇몇 시도를 살펴보면 구독 서비스라는 최신식 모델 속에서 낡고 고립적인 이야기만을 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예를 들면 초기 ‘던전’은 서브컬처의 밈을 잔뜩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청탁 텍스트의 정체성을 ‘순문학 유료 웹진’으로 한정했다. 이러한 형상은 기존의 ‘문학’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지형도를 오프라인 공간에서 온라인으로 이식한 것에 불과할 뿐 변화가 아니다. 이렇게 알맹이나 형식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필드를 만들어 기존의 문단 권력을 해체하겠다는 시도는 이미 독립문예지에 의해 진행되었다가 별다른 수득을 얻지 못한 행위이기도 하다.


추이를 보면 이러한 구독 형태의 서비스는 점차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 필요한 것은 형태의 고민보다 알맹이를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고민 아닐까.


<이융희 |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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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에서 꽃소식이 상경할 때면 화개장터부터 떠오른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접경에 있는 이 장터는 지금쯤 꽃이 지천일 게다. 이곳부터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벚꽃길에서 열리는 봄축제가 코로나19 때문에 취소됐다는 우울한 소식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 한 번 와 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1980년대 후반쯤이다. 조영남은 윤여정과 이혼하고 서울 흑석동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때 김한길이 미국에서 왔다. 장래가 촉망되는 소설가였던 그는 이어령 선생의 사위였지만 이혼과 함께 귀국했다. 마땅한 거처가 없던 그는 잠시 조영남의 아파트에 얹혀살았다. 두 중년의 백수는 어느 날 신문기사를 놓고 마주 앉았다. 경향신문 1987년 10월27일자에 실린 화개장터가 지역갈등의 해방구임을 보여주는 르포기사였다. 기사 속에서 한 구례 주민은 “먹고살아가는디 전라도와 경상도가 무신 상관 있당가요? 괜시리 우리랑 관계없는 사람들이 지방색을 들먹거려 화가 치민당께요”라고 반문한다. 


소설가인 김한길은 기사에서 힌트를 얻어 노랫말을 썼고, 조영남은 흥겨운 리듬과 멜로디를 붙여 완성했다. 아직도 여전히 지역갈등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 노래로 인해 화개장터는 유명해졌다. 조영남은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 이 노래를 발표하면서 조영남 작사·작곡으로 저작권 등록을 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바로잡아 김한길도 저작권료를 받는다. 재미있는 건 조영남은 노래를 발표할 때까지 화개장터에 가본 일이 없었다. 지금은 화개장터에 조영남갤러리도 있지만 말이다.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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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그레이엄이 1940년 초연한 <세계에 보내는 편지>. ⓒ 마사 그레이엄 컴퍼니


‘숙녀에게 나이와 몸무게를 묻지 말라’는 말은 최근에 와서 양성 불평등의 관점을 가지고 있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고 있다. 사실 이 말은 무대 위의 숙녀인 발레리나에게 가장 많이 적용되어 왔다. 발레 명작 중에 <잠자는 미녀>의 주인공 오로라 공주의 나이는 16세. 발레리나들은 나이가 들어도 이 역을 춤추기 위하여 연령과 몸무게를 초월하려는 피나는 노력을 해왔지만 20~30대의 전성기를 거쳐 40대에 접어들면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대부분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100세시대를 이야기하는 현대에 와서 인류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무용가의 무대 위 수명도 길어졌다. 대다수의 현대무용가들은 연령과 몸무게가 제각각인 무용수들의 개별적 특성을 존중한다. 예전에 비하여 과학적으로 신체훈련을 익힌 덕분에 이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출연도 한다. 게다가 기술보다 표현에 가치를 두는 성숙한 무용수를 선호하는 안무자들이 많아지고 있어 무용수의 연령은 점점 높아가고 있고 심지어 브랜드화되기도 한다.


80세 넘어서도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미국의 초기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은 ‘춤추는 것과 춤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물론 춤추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 다음 세대인 머스 커닝햄 역시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인 92세까지 플라스틱 관절을 달고 자신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들이 출연하는 공연마다 좌석이 빨리 매진됐다는 것은 무대에서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경지의 성숙한 무용가들을 관객들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대변한다. 


이 경우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일본 부토무용가 오노 가즈오이다. 71세 때 발표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무용가 반열에 올랐고 104세에 사망하기 얼마 전까지도 휠체어에 몸을 싣고 춤을 춘 전설같은 행적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는 순박한 농부의 건강한 춤으로 평가받았던 하보경 밀양북춤명인이 있다. 80대 중반에 손자의 등에 업혀 등장한 그의 무대를 본 기억이 있는데 발이 땅에 닿자마자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한발 앞으로 딛기도 힘든 상태라 한자리에 줄곧 서서 장단과 가락을 정교하게 짚으면서 관절을 섬세하게 흔드는 그의 춤에 모두가 취했다. 


춤을 사랑하는 무용가라면 나이에 관계없이 무대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춤은 젊은이들만 추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지푸라기 하나라도 들을 힘이 있으면 이 세상의 어느 무용가도 무대에서 춤출 수 있다.


<남정호 |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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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2>의 장면. 지난해 1월 공개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킹덤>이 배고픔에 내몰린 백성과 역병의 실체를 다뤘다면, 지난 13일 공개된 <킹덤2>는 역병의 근본적 원인인 피를 둘러싼 이들의 욕망과 사투를 그렸다. 넷플릭스 제공


역병이 퍼졌다. 병에 걸린 자는 이성을 잃고 사람의 피와 인육을 탐하게 된다. 전염성이 높고, 잠복기는 매우 짧으며, 결과는 치명적이다. 그렇게 조선의 왕자 이창(주지훈)에게 미션이 주어진다. 그는 지지자들을 모아 ‘어린 중전’과 부패한 외척을 물리치고, 역병으로부터 백성을 구해야 한다. 드라마 <킹덤>(2019~2020)의 줄거리다.


영화 <창궐>(2018)에 이어 <킹덤>까지 보고나니 궁금하다. 지극히 서구적인 괴물인 좀비는 어떻게 조선 땅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좀비는 가장 현대적인 괴물로 평가받는다. 뱀파이어 등과 달리 20세기 인간의 창작물인 데다, 21세기에 들어 그에 대한 소구력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좀비는 세뇌당한 노예일 수도 있고(<화이트 좀비>), 소비자본주의에 포획된 소비자일 수도 있으며(<시체들의 새벽>), 생존주의로 내몰린 신자유주의적 주체일 수도 있다(<워킹데드>). 무엇이 되었건, 그것은 당대 대중에 대한 은유로서 그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이라 할 만하다.


연상호의 <부산행>(2016) 역시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현실을 밑절미로 삼은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마찬가지로 연상호가 연출한) 프리퀄 애니메이션 <서울역>(2016)에서 남성 포주들에게 착취당하다 좀비가 된 청년 여성(심은경)이 부산행 기차에 뛰어들어 KTX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를 물면서 시작된다. 결국 펀드매니저 석우(공유)가 주가조작으로 살려낸 바이오 벤처기업에서 유출된 바이러스가 재난의 원인임이 밝혀진다. 그 덕분에 연상호의 좀비 연작은 신자유주의적 불안정 노동에 기생하는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평가됐다.


2년 후, <창궐>(2018)이 개봉했다. “내가 이러려고 왕이 되었나”라고 중얼거리는 왕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려는 적폐가 좀비로 그려졌고, 그 좀비 떼를 물리친 왕자 이청(현빈)은 영화의 끝에 횃불(=촛불)을 든 백성들 앞에 우뚝 선다. 무능한 왕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자살하는 소원세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고 왕이 되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선군이 되는 이청이 문재인 대통령을 상징한다는 건 너무 명백해 지루할 정도다. 여기서 배경이 되는 ‘조선’이란 그야말로 ‘헬조선’, 그러니까 2018년의 대한민국이었던 셈이다.


2019년 시작된 또 하나의 조선 좀비물 <킹덤> 시리즈는 현실정치와 신자유주의적 삶의 조건 둘 다에 대한 비평을 시도한다.


이 드라마에서 역병의 병근(病根)을 제공한 건 부패한 권력이지만, 전염은 각자도생으로 내몰린 백성들의 고육지책 때문에 시작된다. 굶주린 이들이 이 병으로 사망한 이웃의 인육을 나눠 먹으면서 병원체가 변형되고 전염성을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킹덤>은 ‘선군 만들기’에 몰두하는 <창궐>보다 그 의미망이 좀 더 복잡한 작품이 되었다.


무엇보다 <킹덤>이 낡은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창궐>은 이청의 진보적인 남성연대가 김자준(장동건)의 보수적인 남성연대를 물리치면서 새로운 세계를 이끌 선군이 도래한다고 말한다. 반면 <킹덤>에서 낡은 세계를 끝장내는 건 “계집이라 무시당해 온” 중전(김혜준)이다.


여기서 중전을 움직이는 동력은 오직 분노뿐이라는 점이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그는 권력을 잡아 낡은 세계에 군림하고자 할 뿐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이 없다. 그가 ‘혁명을 조직’하기보다는 그저 다른 여자들을 죽여 아이를 빼앗고, 아버지 조학주(류승룡)가 만든 인간병기=좀비를 이용하려 하는 건, 아마도 이 탓이다. 결과는 자명하다. 구세대의 침몰과 함께 그 역시 가라앉는 것.


물론 드라마 내내 대체로 무능한 왕자에게도 별다른 비전은 없어 뵌다. 그러므로 여전히 신분제 사회인 (헬)조선이 시즌3로 이어진다. “정치 지도자들의 비전 없음.” 그것이야말로 <킹덤>이 그려내는 2020년 대한민국의 현실 아닌가 싶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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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의 지침서’쯤 되는 노랫말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노래가 있다. 스티비 원더의 ‘파트타임 러버’가 그것이다. 


‘전화할 때 한 번 울리면 끊어/ 당신이 집에 잘 도착한 걸 알 수 있게/ 내 파트타임 애인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아/ 그녀가 없으면 라이트를 깜박일게/ 오늘 밤이 파트타임 애인인 너와 나의 밤이란 걸 알릴 수 있게.’


획기적인 사운드에 실린 경쾌한 리듬과 달리 노래는 불온하다. 


바람둥이가 자신의 정부에게 두 사람만의 비밀연애를 위한 지침을 가르쳐준다. 친구들과 마주칠 때면 절대 아는 체하지 말고, 다급한 전화라면 남자친구에게 부탁하라고 말한다. 물론 휴대폰이 없던 1985년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대로 끝나면 재미없는 노래다. 바람둥이는 파트너를 속이면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믿지만 그녀도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빌보드 역사상 처음으로 팝과 R&B 싱글, 댄스, 어덜트 컨템포러리 등 4개 차트를 동시에 석권했다. 백 보컬리스트로 참여한 시리타 라이트는 1970년 원더와 결혼했다가 2년 만에 이혼하고도 음악동료로서 교류해온 사이였다. 그러나 라이트는 유방암 후유증으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미숙아로 태어난 스티비 원더는 인큐베이터에서 간호사의 잘못된 처치로 실명을 한다. 그러나 탁월한 음악적 재능으로 피아노, 하모니카, 드럼 등의 연주에 능했고 천재적인 음악 프로듀서로 인정받았다. 국내에서도 지금까지 많은 가수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뮤지션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온통 우울한 봄이지만 이런 노래 한 곡쯤 듣다 보면 기분전환이 되지 않을까?


<오광수 부국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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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강변에 나가지 마세요 _ 650×350 _ 화선지에 먹 _ 2018


勿出夕江邊(물출석강변) 

傷心月與風(상심월여풍)

저녁 강변에 나가지 마세요

달빛 바람에 마음 다쳐요


코로나19 사태가 한참인데 너무 한가한 얘기일까, 언젠가 광나루 건너편 물가에서 달 떠오는 강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녁 강변은 더없이 한적하고 스산한 바람이 키 큰 갈대 숲을 흔들고 있었다. 


그 너머 멀리로 인간의 거처 시멘트 건축물들이 공제선을 형성하고 있고. 내가 여기에 왜 나와 있을까, 나는 정말 현실에 존재하는 사유체일까, 그 존재감은 왜 이리 쓸쓸할까…. 그 뒤, 다시는 저녁 강변에 나가지 않았다.


요즘 거리에 사람이 줄고 특히 노인들 만나기 쉽지 않다. 젊은 사람들도 가능하면 집 안에 머물고 가까운 지인들과의 만남도 미룬다. 하여, 처음 등장한 용어 ‘사회적 거리 두기’.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근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이야 실감이 덜하겠지만, 모두 고립감 같은 것들을 느낀다고 한다. 답답함과 함께.


그러나 행여 저녁 강변에 나가지 마시라. 거기 더 사람 없고, 문명의 우울까지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정태춘 싱어송라이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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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콧등이 시큰해지며 울컥해진다. 얼마 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대구 주민을 위해 써달라며 119만원을 기부했다는 보도를 접하며 감동했다. 대구지역에서 확진자 숫자가 급증하자 광주에서 감염병 전담병원의 병상 중 절반을 대구 경증환자를 치료하는 데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두 지역의 골 깊은 지역감정과 그것이 빚은 역사적 참극을 생각하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경희대 학생 세 명이 뜻을 모아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을 돕자는 취지로 학내 커뮤니티에서 모금활동을 펼쳤는데, 일주일 만에 4600만원 정도 모았다고 한다. 애초 목표는 50만원. 뜻이 갸륵한 데다 말만 앞세우는 어른보다 낫다 싶었다.


전쟁은 예상할 수 있다. 설혹 선전포고 없이 일어나더라도 조짐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이 일으키는 재난은 과학의 레이더를 벗어나기 일쑤다. 한번 일어나면 경악과 충격, 그리고 속수무책이라는 수식어로만 겨우 상황묘사가 가능하다. 놀라운 것은 이런 재난의 잿더미에서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적인 행동이 꽃핀다는 사실이다. 9·11 참사 당시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던 대략 2만5000명은 서로 도우며 질서정연하게 대피해 피해를 줄였다. 재난 현장에는 공학기술자, 건설노동자, 의료요원, 용접기술자 같은 전문가가 자진하여 모여들었다. 강가에 고립된 사람을 구하려고 너도나도 배를 몰고 와 준 덕에 어림잡아 30만명이 대피할 수 있었다. 미담은 워낙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죽음의 냄새가 자욱한 지옥에서 천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사랑과 연대의 향연을 만난 셈이다.


재난 현장에 섬광처럼 나타난 놀라운 이타적 장면을 포착해 그 의미를 탐색한 책이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이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 허리케인에 이르는 다섯 건의 대재앙을 톺아보고 있다. 지은이는 대재앙의 현장에서 벌어진 이타적 행위만을 과장해 설명하지 않는다. 일단, 재난 그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재난의 현장엔 기회주의적 행동도 있고,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 빈민과 소수자와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 약탈과 경제범죄에 대한 강박관념, 치명적인 무력에 기대려는 마음, 헛소문에 기초한 행동”인 엘리트 패닉이 종종 일어난다는 점을 인정한다.


지은이는 재난을 막 겪고 난 이를 만나서 들은 회고담을 소상히 밝혔다. 우리는 흔히 그가 공황상태에 놓여 있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예상은 빗나갔다. 모든 게 엉망이 돼버린 날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웃이 모두 집 밖으로 나와 서로 대화를 나누며 도와주고, 즉석에서 급식소를 세우고 노인을 보살폈단다. 그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서로를 보며 행복감을 느꼈죠”라고 말했다. 재난 때문에 “평소의 구분과 양식이 모두 파괴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형제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의식과 유대감은 혼란과 두려움, 상실과 죽음 속에서도 기쁨을 가져”왔다는 뜻이다.


폐허의 한복판에서 “공적 삶과 시민사회에 대한 열망”이 솟아오르고, “깊은 만족감과 새로운 사회적 유대, 자유”를 누리며, “공동체적이고, 융통성 있고, 상상력이 풍부한” 삶을 보이고, “아비규환 속에서 기적을, 슬픔 속에서 기쁨을,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주는” 역설적 상황을 지은이는 재난 유토피아라 이름 짓는다. 물론 이 유토피아는 오래가지 않는다. “끔찍한 순간에 아주 짧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 엄청난 순간을 두고 우리가 고민할 바는 수두룩하다. 인간 본성론으로 좁혀 보더라도 새로운 통찰이 가능하다. 가장 최악의 순간에 설핏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본성 아니겠는가. 재난이라는 번개가 치니 잠시 드러난 인간 본성은 제임스가 말한 시민기질, 그러니까 사회참여가 의무가 아니라 하나의 취향이자 지향이라는 말이나, “한마디로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며, 인간을 사회에서 벗어나게 하기는 불가능하다”는 토머스 페인의 언명과 일치한다.


고통스럽고 답답한 재난의 시절을 보내며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재난에 빠져 있을 적에야 비로소 짧게 “상호부조와 이타주의의 천국이 나타나는지가 아니라, 왜 평소에는 그런 천국이 다른 세계의 질서에 묻혀버리는가”라고. 그 답을 찾다보면, 지은이의 말대로 지옥의 문턱에서 연대와 사랑의 공동체로 열린 뒷문을 찾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경희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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