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미국 현지시간 9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수상자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하 호칭 생략)·한진원 작가가 호명된 순간, 한 아시아계 여배우가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조여정도, 박소담도, 이정은도, 장혜진도 아니었다. 한국계 캐나다 배우 샌드라 오(49·한국명 오미주)였다. 


봉준호 감독이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환호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_ AP연합뉴스


1960년대 캐나다로 이민 간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샌드라 오는 미국 의학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다. 지난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킬링 이브>로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한국어로 소감을 전해 화제가 됐다. 샌드라 오는 아카데미 시상식 후에도 “기생충의 수상을 축하한다. 한국계여서 너무너무 자랑스럽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여배우’라는 비주류로 버텨온 그의 진심 어린 축하에 가슴이 뭉클해졌다는 이들이 많다. 


샌드라 오의 기쁨이 그만의 것이랴. <기생충>이 아카데미 최고상인 작품상을 포함해 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까지 4관왕에 오르자 온 나라가 환호하고 있다. “마침내 ‘기생충’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겼다”는 우스개까지 돌 정도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소환되고, ‘전설’ 김연아와 박태환까지 다시 호명된다. 어제 오늘, 아니 앞으로 며칠쯤이야 신화와 전설에 취해도 나쁘지 않을 터다.


영화 <기생충>이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직후 봉준호 감독과 제작자, 출연진들이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FP연합뉴스


<기생충>이 거둔 놀라운 성취는 근본적으로 봉준호라는 희귀한 재능에서 비롯한 것이다.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유머감각, ‘봉테일’(봉준호+디테일)로 불릴 만큼의 치밀함까지 겸비한 영화감독은 흔하지 않다. 특히 영화계에서는 봉준호가 권위적이지 않고 배우·스태프의 가치를 존중하며 최고의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한다. 봉준호의 전작 <설국열차> 제작자인 박찬욱 감독은 이런 평을 했다. “봉준호 같은 재능의 소유자와 동시대 동종 업계에 종사하고, 친구로 지내는 일은 크나큰 축복이지만 사실 적잖이 귀찮다. ‘기생충’이 공개된 후 외국 영화인들이 자꾸 전화해서 ‘한국 영화인들이 먹는 무슨 약 같은 게 있으면 같이 좀 먹자’고 하더라.”(문화일보) 


하지만 희귀한 재능이라고 모두 꽃을 피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봉준호에겐 천시(天時)도 따랐다. 


2015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평화대행진을 다룬 영화 <셀마>가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 후보에서 누락되자 ‘#OscarsSoWhite(오스카는 너무 하얗다)’는 해시태그가 소셜미디어를 뒤덮었다. 그러나 2016년에도 흑인은 남녀 주·조연상 후보에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유명 흑인 배우와 감독들은 분노해 시상식 보이콧을 선언했다. ‘화이트 오스카’ 논란이 이어지자 오스카상 투표권을 갖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신규 회원을 증원하며 유색인과 여성 비중을 단계적으로 높였다. 그 결과 지난해 아카데미에선 흑인 개인상 수상자가 6개 부문 7명으로 늘어났다.


지난해 10월 봉준호는 미국 매체 ‘벌처’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별로 큰일은 아니다. 오스카상은 국제영화제가 아니지 않나. 굉장히 지역적(very local)이니까”라고 살짝 ‘디스’를 한 적이 있다.


AMPAS 회원들은 이에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과감하고 담대한 선택으로 답했다. ‘가장 아카데미스러운’ 전쟁영화 <1917>을 제치고 외국어영화 <기생충>에 작품상과 감독상 등 주요 부문 상을 안겨줬다. 비영어권 영화를 향해 쌓아올렸던 담장을 무너뜨리고,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이라는 ‘글로벌’ 이슈에 주목했다. ‘로컬’의 한계를 스스로 깨부순 것이다. 봉준호의 승리이자, 아카데미의 승리다. 


봉준호는 아카데미 시상식 후 기자들과 만나 “골든글로브 (시상식) 때 자막을 ‘1인치의 장벽’이라고 했는데, 사실 그때도 때늦은 소감이었다. 이미 장벽들은 부서지고 있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봉준호가 옳다. 전 세계 곳곳에서 장벽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당장은 배제와 차별과 혐오의 힘이 세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편과 개방, 포용과 환대가 조용히 공간을 넓혀가고 있다. <기생충>과 봉준호에 대한 열광이 이른바 ‘국뽕’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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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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