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Mirror지에 실린 에디 코크란의 사망 소식


50년대 말엽, 로큰롤은 본래의 생동감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로큰롤의 창시자들이 계속하여 음악 활동에 종지부를 찍기 시작하면서 로큰롤은 위기를 맞았다.


아마 가장 황당한 것은 리틀 리처드일 것이다. 한창 활동 잘 하고 있던 1957년, 호주 투어 중에 갑자기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목사가 되기로 하면서, 1962년 다시 복귀할 때까지 복음 가수의 삶을 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복음 가수로 살면서도 그의 무대 매너나 복장은 여전히 단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리틀 리처드는 원래부터 성실한 청년의 인상도 아니었고 - 사실 좀 지저분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 오히려 인생이 파격으로 점철된 사람이었으니, 이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사건이었다.

1958년에는 ‘제왕’ 엘비스가 군에 입대하면서 활동을 중단했고, 제리 리 루이스가 영국 투어 중 57년에 했던 혼인이 알려지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물론 혼인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지만(거기다 루이스는 이미 두 번의 혼인 경력이 있었다) 그 상대가 문제였다.
그의 사촌 형제이자 밴드의 베이시스트였던 J.W.브라운의 딸이었던 마이라가 상대였고, 그녀는 혼인했던 57년 말 당시, 13살의 소녀였다. 그리고 문제는, 루이스가 전처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비난의 목소리가 영국과 미국에서 물밀 듯이 몰려왔다. ‘검둥이 음악이나 하는 놈들’ 에 대한 백인 사회의 반감이 이 사건을 계기로 불이 당겨진 것이었다. 60년대에는 활동 무대를 유럽으로 옮기는 및 컨트리 음악으로 진출해 활동하기도 했으나, 로큰롤 스타로서의 생활은 그렇게 단숨에 끝나버린 것이었다.


1959년은 더 심각했다. 버디 홀리와 리치 발렌스가 모두 비행기 사고로(그리고 같은 사고로) 사망했고, 척 베리가 ‘청교도 백인’ 들의 손에 사실상 활동이 끝장나고 만다.

사건의 골자는 척 베리가 백인 미성년자 소녀를 데리고 자신의 투어에 동행시켜 연방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척 베리를 주시하고 있던(‘요새 것들이 좋아하는 검둥이 음악의 마왕’ 이 아니겠는가) 차에 이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척은 아무 일도 없었으며, 여자가 나이를 속였고, (가장 중요하게는) 재판이 인종주의적 이유로 날조되고 있음을 주장했으나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만다. 뒤에 3년으로 감형되기는 하나 록의 고전들을 계속 쏟아내고 있던 척 베리는 그렇게 ‘콩밥 먹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60년에는 정말 로큰롤 반항아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던 에디 코크란과 진 빈센트가 타고 있던 택시가 화물 트럭과 충돌하면서 코크란은 즉사하고, 진 빈센트는 여생을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뮤지션은 아니었지만, 로큰롤의 보급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로큰롤의 아버지’(그래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린) DJ 앨런 프리드(Alan Freed)는 페이올라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끝장나 버렸다.
페이올라(payola)는 무명가수라도 방송국에 돈을 건네면 노래가 전파를 탈 수 있다는 세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레코드 판매를 위해 레코드사는 사운드를 대중이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했고, DJ가 당시 가장 중요한 록 ‘게이트키퍼’ 라는 것은 분명한 상황에서, 페이올라는 홍보의 가장 효과적이면서 저렴한 형태로서 성행하고 있었다.

팝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꼽히는 이 사건(페이올라가 옹호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페이올라에 대한 수사는 로큰롤이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는 문제가 있다)으로 페이올라가 불법화되면서 프리드의 커리어는 끝장나 버렸다.


그나마 엘비스나 제리 리 루이스, 로이 오비슨 정도가 60년대에도 살아 남아 활동할 수 있었지만, 이미 로큰롤의 ‘왕’ 이 된 엘비스에게서 예전과 같은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엘비스가 입대하기 전이었지만, 1956년에 발표한 ‘Love Me Tender' 같은 곡이 얼마나 기존에 로큰롤이 거부했던 모습들(데이비드 피처스키(David Pichaske)에 따르면 말쑥함, 세련됨 및 아카데믹한 악기 편성, 서정적인 부드러움, 신비로움 등)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보면 이는 이미 예고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중산층은 ‘예전의 가치’ 를 내세우면서 로큰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 있던 로큰롤 가수들도 이제는 방송국에 발붙이기가 어려워졌다. 물론 그래도 사람들은 음악은 필요했다. 다만, 로큰롤은 이제 아니었을 뿐이다. 50년대에는 로큰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나 빙 크로스비, 패티 페이지, 냇 킹 콜 등은 로큰롤의 시대에 스탠더드 팝의 사운드로 인기를 끌고 있었고, ‘Smoke Gets in Your Eyes’ 등의 곡을 남긴 플래터스(Platters)나 문글로우즈(Moonglows) 등의 흑인 그룹들의 발라드가 역시 인기를 끌고 있었다.

Platters - Smoke Gets in Your Eyes
 
그렇지만 로큰롤의 빈 자리를 채울 필요는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50년대의 세대들은 로큰롤의 활력을 맛본 상황이니 이전의 음악들만으로는 어려웠다.
곧 거친 활력은 유지하되, 제도권의 ‘입맛’ 에 맞추어 소독되고 제어된 스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큰롤 스타들의 부재는 이를 부채질했고, 페이올라 스캔들 이후 라디오의 엄격화와 음악 형태의 표준화가 시도되면서, 아마도 (프랭크 시나트라나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를 제외한다면) 오늘날 아이돌 스타의 단초가 되었을 틴 아이돌 스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프랭키 아발론(Frankie Avalon)이나 바비 라이들(Bobby Rydell), 처비 체커(Chubby Checker) 등이 앨런 프리드와는 달리 페이올라 스캔들에서 살아남은 딕 클락(Dick Clack)과 아메리칸 밴드스탠드(American Bandstand)를 통해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이 로큰롤의 외피를 뒤집어 쓴 예쁘장한 백인 아이돌 스타들에게서 이전의 생기를 찾아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비틀즈가 등장하기 이전에 모타운/스택스 등에서 나오는 리듬 앤 블루스나,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로 대표되는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좀 더 혁신적이었던 새로운 팝 음악 정도가 60년대 초반의 미국의 대중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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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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