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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5.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훗날 영국의 펑크 밴드들의 길을 미리 제시했던 밴드였다

시작하기에 앞서, 물론, 펑크의 폭발을 얘기하기 전에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던 70년대의 많은 록 음악들이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적어도 70년대 후반의 시점에서 펑크만큼이나 선 굵은 움직임을 보여 준 조류는 거의 없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거기다, 글램 록을 반문화로서의 록 음악의 모습에 반발하는 움직임이었다고 한다면, 펑크는 그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펑크 또한 록의 그런 '반문화' 와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음은 분명하니, 이 시점에서 얘기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뭐, 그래서 그냥 합니다. 다른 얘기도 나중에 할 거니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물론 펑크의 폭발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는 아마도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이겠지만, 아무래도 펑크의 먼 기원은 60년대, 히피 반문화의 슬로건과는 별 상관없이, 비틀즈 등의 영향을 받아 창고에서 조악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던 거라지 밴드들이 될 것이다.
(물론 말이 이렇다는 것이지, 이 시대는 아직 펑크라는 용어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시대이기는 하다)

이 시절의 밴드는 사실 오늘날 크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너바나(Nirvana) 등의 등장 이후 다시 조명받은 킹스멘(Kingsmen)이나 소닉스(Sonics) 같은 밴드들이 있을 것이고, 그 외에도 폴 리비어 앤 더 레이더스(Paul Revere & the Raiders)가 있었으며, 60년대 후반 이후에는 곧 샌프란시스코의 블루 치어(Blue Cheer) 같은 밴드들이 등장한다. 사실 블루 치어는 사이키델릭 록 밴드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듯싶고 - 물론 샌프란시스코의 밴드들과는 사운드가 많이 틀리다 - ,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던 고출력의 퍼즈톤 사운드를 이용하여 원조 헤비메틀 밴드의 칭호를 얻기도 했으나, 그 스타일에 있어 당시의 이상주의적이었던 사이키델릭 사운드나, 쾌락주의적이었던 하드 록 사운드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고, 덕분에 이런 스타일은 사후 프로토-펑크(proto-punk)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사진 : 블루 치어)


에디 코크란의 커버곡. Blue Cheer - Summertime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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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듬어지지 않은, 좀 더 어두웠던 스타일을 대표했던 것은 그래도 디트로이트의 엠시 파이브(MC5)와 스투지스(Stooges), 그리고 이기 팝(Iggy Pop)이었을 것이다. 'Motor City 5' 의 약자였던, 밴드 이름부터 디트로이트를 상징하는 밴드였던 MC5는 1967년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을 위시한 저항적 분위기에서 등장한 밴드였고, 시위 군중들 앞에서 혁명을 외쳤던 밴드였다. 데뷔작인 "Kick Out the James" 부터가 전곡이 라이브로 수록되어 있고, 바로 저 타이틀 곡의 제목 뒤에 따라오는 단어는 'motherfucker' 였다.

블루 치어가 그렇듯, 이들의 사운드도 오늘날 '흔히' 생각되는 펑크 사운드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는, 블루스와 초기의 헤비메틀이 결합된 성향의 것이지만, 적어도 그 애티튜드에 있어서는 이들은 분명한 펑크 밴드였다.



확인해 봅시다. Kick Out the Jams Motherfucker! MC5 - Kick Out the Jams


이기 팝(Iggy Pop), 그리고 스투지스(Stooges)는 그 독특한 음악 스타일 덕에 무대에서는 물론이고 - 잠깐 그의 무대에서 죽어갔던 닭들에게 묵념을... - , 무대 밖에서 보여주었던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오늘날 '펑크의 대부' 식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기 팝은 1969년 "Stooges", 70년 "Fun House" 로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1973년에(재결성 뒤 - 앞의 두 장을 내고 한번 해체했었다) 발표했던 "Raw Power" 는 대중과 매체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으며 밴드의 인지도를 격상시켰다. 특히나 'Search and Destroy' 는 펑크의 허무주의적 성향을 대표하는 곡으로 손꼽힌다(특히나 이기 팝의 자학적인 면모가 압권이다).


1974년 스투지스의 해체 뒤에도 이기 팝은 꾸준히 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특히 77년의 "Lust for Life"(이기 팝은 77년에만 앨범을 세 장을 내기는 했는데)나 1986년의 "Blah Blah Blah" 는, 레이블들이 참 골치 아파했던 뮤지션인 - 그는 기행이 심하다고 얘기했다 - 이기 팝을 오늘날까지 꾸준히 회자되는 이름으로 만들어 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물론 영화배우로도 활동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곡의 리프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Iggy and the Stooges - Search and Destroy

그렇지만 이러한 디트로이트에 비해, 뉴욕은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디트로이트보다도, 펑크가 어떤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나타났던 곳은 뉴욕이었다. 앞에서 사이키델릭 밴드로 얘기했지만,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 또한 샌프란시스코 등의 밴드들과는 달리 소외나 좌절 등의 정서를 포함했다는 것은 이런 펑크 밴드들의 모습을 공유하고 있었다(실제로도 루 리드(Lou Reed)가 히피의 이상주의를 반대했던 사실은 유명하다. 글램 록을 얘기하면서, 루 리드가 데이빗 보위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는 것이 기억나는가?).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최초의 프로토-펑크 밴드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었고, 앞의 개러지 밴드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모습을 가진, 진정한 최초의 '뉴욕 펑크' 밴드였다. 도시의 중심에서 어둠과 마약, 거지 등의 어두운 모습들을 냉정하게 읊조리던 예술가풍 펑크가 그들의 모습이었다. (물론, 여기서 예술가풍이라는 말을 연주력이 좋았다...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일례로, 모린 터커(Moureen Tucker)의 드럼 연주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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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