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후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평가받은 일본만화에는 몇 가지 성공사례가 있다. 전문가집단의 스토리 참여와 집단창작이라는 동료의식이 그것이다. 체조 스포츠만화 <플라이하이>는 1984년 LA올림픽에서 철봉 금메달과 도마 은메달의 선수 출신 만화스토리작가 모리스에 신지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이 작품을 완독하면 올림픽 체조경기의 해설도 할 수 있다.

 

<성전> <도쿄바빌론> <X> 등의 히트작을 선보인 ‘클램프(CLAMP)’는 4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창작그룹이다. 원작과 각본, 제작진행, 디자인 및 원고의 어시스턴트, 작화디렉터 및 작화담당 등 각자의 특기와 장점을 살려 작품을 완성한다. 대학시절 7명의 동호회가 시작이었는데, 창작동인지를 시작으로 다양한 실험적 시도로 팬덤을 형성한다. 이후 그들의 만화원작은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등 모든 세대의 팬덤으로 확대된다. 작품마다 다양한 변신이 가능하고 그림체와 스토리가 달라질 수 있는 혁신은 집단창작이 갖는 역할분담과 적절한 배치에서 온다.

 

흥미 있는 스토리였으나 방향이 모호했고, 그림과 연출은 미흡했다. 웹툰 에이전트는 그의 잠재력에 투자했고, 함께 작품을 만들어갔다. 점차 스토리는 명확해졌고, 그림과 연출은 보완되어 네이버웹툰에 연재된다. 조회수가 증가하고 드라마판권 계약이 제안된다. 신인작가여서 저렴한 원작료가 제안되었으나 그저 고맙고 반가운 작가는 계약을 원했다. 그러나 에이전트는 기다리라고 조언한다. 결국 수개월의 협상 속에 중견작가의 원작료로 계약되었고, 드라마는 좋은 배우를 만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 이어, 드라마 시즌2의 원작계약까지 더 나은 조건으로 마무리했으며, 웹툰 또한 시즌2까지 성공적으로 연재되었다. 작가 해츨링과 재담미디어가 함께 만든 웹툰 <동네변호사 조들호>의 이야기다.

 

나는 최근 1996년에 처음 만났던 만화 <용비불패>를 다시 읽고 있다. 문정후라는 괴물 같은 작가의 그림과 연출, 강렬한 주제의식을 추억과 함께 만나고 있다. 서른즈음의 막막함에서 스스로 만들 세상의 틈을 보여준 만화였고, 당시 동갑내기로 만난 적은 없지만 항상 응원하는 팬이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박봉성화실’에서 만화를 배워 10년 만에 데뷔에 성공한 문정후는 대학졸업과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을 시작하며 동일한 10년을 다르게 보낸 나에게 분발과 목표의식을 준 작가였다. 그 이후로도 20년이 흘러 언제든 친하게 만날 수 있는 관계가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그의 평론을 쓰게 되었다. &lt;용비불패>로부터 최근 네이버웹툰에 유일한 50대 작가로 연재분투하고 있는 &lt;고수>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난다.

 

그런데 그는 그의 작품들이 자신만의 성과라고 말하지 않는다. 20년지기 파트너인 스토리작가 류기운이 작품을 만든 시작이며, 자신은 그의 이야기와 콘티에 그림을 그린 작가라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박봉성화실’에서 만난 인연으로 모든 작품의 성공과 실패를 함께한 동반자이기 때문에 ‘류기운&문정후’의 평론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그들의 관계는 우정과 의리를 넘어서 창작의 고통을 공유하고,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걷는 크리에이티브의 완성체였다. 다시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팀워크의 완성됨을 느껴본다. 좋은 이야기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더 나은 방향을 서로 양보하고 협의하며 독자들에게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왔던 그 시간들이 다시 읽힌다.

 

혼자만의 크리에이티브를 넘어서, 이제는 팀워크도 전략이다. 장르 맞춤형 스토리와 가장 적절한 작화스타일이 만나는 지점, 그 지점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절실함이 프로젝트로 뭉치게 만들고 있다. 스토리그룹과 작화그룹이 기획과 경영 및 마케팅그룹과 만나서 함께 만화원작을 만드는 ‘만화프로덕션’ 형태의 회사도 설립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스토리와 작화를 모두 창작한 만화가가 원천저작권을 갖는 한국식 모델에는 불편하고 어색한 지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성장 모멘텀이 지체된 채 박스권에 갇혀 있는 한국웹툰산업의 비상구로는 그 존재감이 조금씩 보인다. 체계적인 창작시스템관리 및 다양한 방식의 원작지분 이니셔티브 비율,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성공 이후 연동되는 이익분배율 등 상호신뢰할 수 있는 장치들이 제도화된다면 충분히 가능한 비즈니스모델이다. 한국형 ‘마블(Marvel)’을 기대해본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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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