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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영화 <버닝>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이전 영화들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채롭고, 재미있었다. 미스터리 장르에 힘입은 바 있겠으나 인물들의 팽팽한 심리 대결과 풍부한 색채, 강렬한 사운드가 현실을 단숨에 기이한 환상의 세계로 바꿔놓으며 집요하게 ‘어떤 것’을 물고 늘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은 영화에서 종수(유아인)가 끈질기게 묻는 ‘우물이 있었는가’, 그리고 ‘비닐하우스’가 타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 조바심과 같은 것이다.

 

이야기의 대강은 이러하다. 작가 지망생 종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행사 판촉일을 하는 고향 친구 해미를 만나게 된다. 해미는 자취방의 고양이를 종수에게 맡기고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다. 그러는 동안 종수는 해미를 그리워하게 되지만, 공항 마중을 갔을 때 해미 옆에는 부자 청년 벤이 서 있다. 해미는 이 젊은 재력가에게 빠져들고, 종수는 그들과 어울리며 질투심, 박탈감, 울분 등 복잡한 정념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종수는 벤으로부터 이상한 취미를 듣게 된다. 두 달 간격으로 비닐하우스를 방화한다는 것이다. 이번 파주행은 현장답사이고 이미 태울 비닐하우스는 정해졌노라고. 다음날부터 종수는 근처 비닐하우스를 날마다 둘러보며 노심초사하게 되는데, 한편 해미와도 연락이 두절된다.

 

배우 유아인, 스티븐 연이 출연한 영화 '버닝'의 한 장면.

 

‘해미 찾기’와 ‘비닐하우스 지키기’라는 이 표면적인 스토리의 심층에는 한국 현실에 대한 묵직한 비판이 도사리고 있다. 벤과 종수의 대립은 고착화된 양극화의 재현으로 일종의 금수저와 흙수저의 대결이다. 종수는 무력한 청년의 방황과 좌절감의 한 표상인데, 이는 이창동 감독이 언급했듯 “과거에는 뭔가 잘못됐으니 그것만 바로잡히면 바로 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게 문제다’라는 것 자체가 모호해졌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분노를 가지고 있다”와 같은 근원적 무력감과 맞닿아 있다. 이 대목은 ‘이상을 잃고 자살하는 청년을 그린’ 장강명의 소설 <표백>을 생각나게 한다. 뚜렷한 적을 상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져버린 사회 메커니즘, 그리고 혁명이나 민주화 같은 거창한 목표조차 상실한, 그저 날마다의 생존만을 이어가는 왜소해져버린 청년들.

 

이들의 ‘별일 없이 사는 생’은 해미의 ‘귤 까먹기 팬터마임’처럼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연기이다. 무엇이 결핍되어 있거나 ‘문제가 없다’고 가정해야 하는 팬터마임. 속임수와 자기기만은 까닭 모를 분노를 쌓이게 한다. 이는 해미에게도 해당된다. 해미는 물리적인 배고픔인 리틀 헝거의 작은 몸짓과 삶의 의미에 대한 결핍을 뜻하는 그레이트 헝거의 큰 몸짓을 구분하며, 줄곧 그레이트 헝거를 언급한다. 그러나 사실 해미는 보잘것없는 리틀 헝거일 따름이다.

 

벤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미는 그저 여기저기 널린 ‘비닐하우스’와 같은 것이다. 하나쯤 불타도 경찰조차 출동하지 않는 별거 아닌 것. 그러나 어쩌면 ‘그레이트 헝거’에 시달리는 벤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이채로운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줄곧 강조되는 메타포는 벤의 ‘비닐하우스’를 겨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벤이 해미가 사라진 뒤에 백화점 매장 여직원을 만나는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종수가 그토록 비닐하우스를 지키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종수는 무력하다. 종수는 해미, 벤과 함께 주어진 수수께끼 같은 세상의 퍼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 이는 재차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종수의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다 종수는 마침내 해미의 빈집에서 소설을 쓰게 되고, 이는 종수의 결단으로 이어진다. 이는 영화 내내 탐문되었던 ‘우물이 있었는가’라는 진실찾기와 관련된다.

 

해미는 종수에게 어린 시절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고, 종수가 나타나 구해주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뒤 이장에게, 해미의 가족과 엄마에게 ‘우물’에 대해 묻는다. 이장과 해미의 가족은 없다고 하고, 엄마는 있었다고 말한다. 종수에게 ‘우물이 있었는가’는 해미를 믿을 것인가, 혹은 그가 상상하고 있는 극한 상황을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마침내 종수는 그 수수께끼를 나름의 서사로 완성하고 행동에 옮긴다. 그것이 이 영화의 결말이다. ‘버닝’은 종수와 해미와 같은 ‘비닐하우스’들이 불타고 있는 우리 현실을 가리키는 처절한 메타포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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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