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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작가의 소설집 <회색인간>이 ‘잘’되면서 그 책을 기획한 나도 기쁘고 뿌듯하다. 얼마 전에는 대형서점의 한국소설 베스트셀러 매대에 책이 진열된 것을 보고 괜히 눈물이 나려 했다.

 

김동식은 ‘복날은 간다’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게시판에 300편이 넘는 소설을 쓴 작가이고 나는 그의 독자였다. 가볍게 읽히면서도 자기 자신과 우리 사회를 향한 무거운 물음표를 던지는 그의 글에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빠져들었다.

 

어느 날 아는 출판사 대표에게 단편 몇 개를 보낸 것은, 그의 글을 책꽂이에 둘 수 있으면 참 행복하겠다, 하는 단순한 마음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날 밤에 “아니, 이런 소설가가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습니까?” 하는 전화를 받았다. 세 권의 소설집으로 출간하고 김민섭씨가 그 기획을 맡아 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나는 받아들였다. 그렇게 <회색인간>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13일의 김남우>가, 무엇보다도 김동식 작가가 세상으로 나왔다. 무명작가의 글을 소설집 세 권으로 출간한다는 것은 모험이었고 업계에서도 무리수가 아닌가, 하는 걱정과 호기심을 보냈다. 그러나 출판사 대표는 “글이 좋으니까 걱정 안 합니다”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가 옳았다.

 

<회색인간>은 ‘소설’로 분류되어 있지만,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르다. 우선은 단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그 분량이 짧다. 문학상이 요구하는 단편 기준의 절반이 안되니까 어디에 응모하기도 힘들다.

 

글의 시작과 함께 독자는 ‘인류A’가 되어 작가가 만들어 둔 세계로 초대받는다. 인물이나 공간에 대한 치밀한 묘사보다는 플롯에 공을 들였다. 기존의 소설 문법과 작법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게 소설이야?”라고 묻게 된다. 김동식 작가는 독자와의 만남에서 “저는 그냥, 재미있게 쓰려고 했습니다” 하고 쑥스럽게 답했다. 그에 더해, 이 글의 기획자인 나에게도 답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실 “소설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연구하는 동안에도 계속 고민했던 것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소설 연구자들이 그랬다. “적당한 분량을 가진 허구적 이야기”라고 담백하면서도 모호하게 사전적으로 정의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함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문학이 ‘literature’로 소설이 ‘novel’로 번역되고 하나의 자율성을 가진 장르로 인정받은 지는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감각하는 소설과 그 작법은 계속해서 변화해 온 것이다. 1920년대 연희전문학교 문학 강의의 주교재로는 <명심보감>이 사용되었다. 교수는 연세대학교 국학의 모태인 위당 정인보 선생이었다.

 

나는 그 커리큘럼을 보면서 ‘명심보감이 왜 문학이야’ 하고 생각했고 그 시기의 청년(소설 <무정>으로 한국 현대소설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광수도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광수는 어느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정인보의 실명을 거론하며 대학에서 문학 교육을 하는 이들이 문학 개념을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근대 고등교육을 받으며 분과된 학에 대한 이해를 키운 젊은 지식인들에게 소설은 예술 장르이고 문학 역시 하나의 학이었다. 그러나 한학 교육을 받은 정인보와 같은 국학자들에게 소설은 ‘한가한 이야기’ 같은 것이었고 문학은 쪼갤 수 없는 학의 덩어리였다. 지금의 소설을 내밀면 이광수는 “오, 요즘은 이렇게 소설을 쓰는군요, 그래도 나보다는 못 쓰네요”라고 할 것이고, 정인보는 “이런 한가한 이야기를 어디 문학이라고 가져옵니까?”라고 할 것이다.

 

소설뿐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그 무엇도 시대에 따라 그 개념이 해체되고 변한다. 고은이나 이윤택 같은 ‘괴물’들이 무너지며 새로운 작가와 작법들이 그 자리를 채우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독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요구를 해 온다.

 

나는 대학에서 연구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소설이 무엇일지를 계속 고민했지만 그 실체를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은 물론 평범한 연구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던 게으름과 한계를 고백하는 일이다. 대학 바깥에서 김동식이라는 장르를 읽으며, 비로소 나는 그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소설을 알고 있다고 하는 시대적 오만은 버려야 한다. 그것이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그 시대적 징후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 소설에 요구되는, 변하지 않는 본령이 있다. 김동식 작가가 말했듯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있어서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눈을 뗄 수 없게,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다시 읽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김동식의 소설에는 그러한 힘이 있다. 그와, 그를 불러낸 독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우리가 아는 소설과 문단 제도에 작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음을 본다.

 

우리는 지금 문학장의 시대적 변동을 목도하고 있다. 물론 김동식이 아니더라도 다른 김동식이, 앞으로도 또 다른 김동식들이 끊임없이 해 나갈 일이다. 당신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고민을 잠시 해 보면 어떨까, 하고 제안한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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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