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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변화는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찾아온다. 어제와 오늘은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어제가 천 번 쌓이면 오늘과는 다른 모습이 된다. 하지만 모든 변화가 다 같은 속도로 오지는 않는다. 한쪽 주머니의 스마트폰은 2년마다 바뀌지만 다른 쪽 주머니의 지갑 모양은 20년이 지나도 변화랄 게 없다. 넥타이 모양처럼 바뀌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오랜 기간 잠잠하다가 불쑥 보이는 변화도 있다. 섭씨 99도까지는 여전히 물이지만 100도가 되는 순간 기화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양적으로 변화하다보면 순간적으로 질적 변화를 이룬다고 해서 양질전화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모순과 불만이 쌓이고 쌓이다가 일순간에 터져 변화하는 것 또한 양질전화의 법칙이다.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전이되거나 미국의 노예제가 사라진 역사가 그 예다. 그 시대 현장에 있었던 이들에게는 영겁이었을지 모르나 지금 되돌아보는 우리의 눈에는 순식간의 변화로 보인다. 슬그머니 다가오지만 그 질적 변화는 매우 강력해서 저항하기 어렵다. 거스르는 행동은 ‘시대착오적’이라 불리고, 익숙한 과거에 젖어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은 ‘낙오자’가 된다. 학생은 맞아가며 공부해야 한다고 믿는 정신 나간 교사나 군인은 “까라면 까야 하는” 기계라 믿는 못난 장교가 있다면, 그들이 바로 시대착오적이다. 여자는 가사와 육아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성희롱을 농담이라며 껄껄거리는 중년 남성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낙오자이다.

 

1972년 만들어진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과거 인터뷰 영상이 최근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어 논란이 되었다. 인터뷰에서 베르톨루치 감독은 촬영 당시 주연 여배우였던 마리아 슈나이더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강간 장면을 찍었다고 밝혔다. 나중에 자신의 발언을 일부 번복하기는 했으나 정확한 촬영계획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했고, “죄책감을 느끼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고도 말했다. 당시 불과 19살이던 마리아 슈나이더도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그 장면에서 나는 (실제로) 강간을 당했다고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한 장면

 

45년이 지난 지금 그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배우는 연기자 이전에 인간이고, 폭력을 거부하거나 부당함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 자연스러운 연기랍시고 약속되지 않은 폭력 장면을 연출하는 감독이나 그 지시에 순응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남배우가 존재해선 안되는 시대이다. 이런 일을 용인하거나 부추기는 이들이 있어서도 안된다. 그런데 얼마 전 실제로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법원은 남배우의 강제추행치상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연기에 몰입하다보면 상대방을 다치게 할 수도 있지, 혹은 연기에 임하는 배우가 그 정도 고통이나 수모는 감내해야지, 하는 생각은 도대체 언제 적 발상이란 말인가?

 

여배우와는 사전협의하지 않은 채 남배우에게만 ‘난폭한’ 강간 연기를 지시한 감독의 젠더와 폭력 감수성은 20세기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태의 빠른 무마와 촬영 마무리에만 신경을 쓴 제작진도 산업시대적 마인드였다. 무엇보다도, 불필요하고 과도한 폭력을 ‘업무로 인한 행위’라 판단한 재판부의 기준은 사뭇 퇴행적이었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가 1970년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폭압적 권력 행사, 비선정치와 비밀주의, 뇌물과 부패, 일방적 지시와 불통 등은 분명 이 시대에 나타나서는 안될 과거의 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행은 정치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변화의 앞에 서야 마땅할 학계, 문화계, 언론계의 시계도 거꾸로 가는 경우가 많다. 여성과 성소수자, 외국인, 청소년, 장애인에 대한 감수성 결여에 깜짝 놀라곤 한다. 세상은 천천히, 하지만 강고하게 변하고 있는데, 마치 거기에 저항이라도 하듯 수구적인 행태들이 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저자인 마텔라르와 도르프만은 디즈니 만화가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를 전 세계에 전파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40년 전 일이다. 그러나 인종차별과 성차별적 함의로 가득 찼던 디즈니 만화는 언젠가부터 동양인이나 흑인 주인공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겨울왕국>에서 보듯 주체적 여성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계시장을 겨냥한 마케팅 전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올바름’에 대한 자각이기도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화적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낙오될 수밖에 없음을 눈치챈 결과였다. 문화적 올바름은 이제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요건이다. 문화의 생산 현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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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