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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lash - London Calling 앨범의 커버. 펑크 록에서 가장 유명한 앨범 중 하나이지만,
과연 이 앨범을 일반적인 펑크 록의 이미지와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생각에는 힘들 듯하다.

그럼 생기게 되는 의문점은 바로 이것이다. 이 말썽꾼 딜레탕트들이 연주하는, 기존의 음악과는 판이한 모양새의 음악이 어쩌다 이렇게 큰 인기를 얻게 되었는가?

일반적인 얘기는, 이들의 음악은 기존의 대중 음악의 시각에서 볼때, 거의 반-음악에 가까운 가장 파괴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피스톨스의 앨범은 당시의 스튜디오에서 만들 수 있었던 가장 원초적인 사운드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는, 어떻게 보면 당시의 록 음악이 잊고 있었던 ‘로큰롤의 원초성’ 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었다. 다만 이들이 이전의 로큰롤 하위문화와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들은 자신이 속하고 있었던 청년 문화에도 불만을 표출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스타일의 배격이었던 셈이다. 사실 흔히 얘기되는, Do-It-Yourself라는 모토 자체가 대형 음반사들에 의해 주도되는 뮤직 비즈니스에 대한 거부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이들의 음악이 거의 반-음악이었다고 한다면, 이는 의도되었든 아니든, 최적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펑크 록이 모두에게 그런 저항적인 ‘음악적 표현’ 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는 당시의 불경기에 의해 침체된 음반 시장을 극복하려는 자본주의의 계략, 정도로 이해되었다. 말콤 맥러렌 자체가 섹스 피스톨스를 기획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보기에 충분한 근거일 수도 있을 것이다(맥러렌이 피스톨스는 물론,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의 매니저이기도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물론 맥러렌이 간과한 것은, 피스톨스가 그의 기획을 떼어 놓고 보더라도 충분히 충격적인 밴드였다는 사실이겠지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기획자들의 의도야 어떤 것이었든 간에, 이 펑크 록의 파괴적이고 무정부주의적 개념은 결과적으로 극도로 독점적인 록 음악의 제작 조건들에 저항하는 음악 및, 그에 관련된 하위 문화들의 촉발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피스톨스의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음악이든 스타일이든,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펑크 록’ 에 대한 이미지는 이 시절 이후 거의 변해 오지 않았다. 
 
(사진은 말콤 맥러렌. 고인이 된 지 아주 오래 되진 않았다. 매우 늦었지만 명복을 빈다)

피스톨스가 거리의 딜레탕트들일 뿐이었다면, 좀 더 정치적인 의식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는 클래쉬(The Clash)가 나타난 것은 1976년이었다. 말하자면 피스톨스의 펑크는 로큰롤 자체에 대한 파괴였다면, 클래쉬는 로큰롤의 변형을 의도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피스톨스와는 달리 흑인 음악의 요소를 가져온 바 있었다. 사실 이들의 앨범 중 가장 펑크의 전형에 가까운 데뷔작 “The Clash” 도, 기존의 로커빌리 등의 전통은 물론, ‘White Riot’ 같이 레게를 받아들인 곡도 있었다. 이를 더욱 명백히 보여주는 밴드의 최대 히트작 “London Calling” 에서는 스카까지 등장하고, 좀 더 사회적 메시지와 노골적인 ‘좌파적’ 색채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Sandinista!” 앨범에서는 무려 ‘전자음악’ 까지 등장한다!(‘Ivan Meets G.I. Joe’)


The Clash - White Riot(Live)


The Clash - Wrong'em Boyo. 위의 White Riot을 연주하던 밴드의, 바로 다음 앨범의 수록곡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클래쉬 같은 밴드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펑크 록이 곧 ‘정치적 음악’ 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건 일반적인 선입견과는 조금 다를 얘기일 것 같은데) 이 시절의 불경기, 살기 힘들었던 젊은 실직자들이 즐겼던 음악이었던 펑크 록은 그렇지만 그들의 생활을 형상화한 것도, 대부분의 경우 정치적 형식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도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음악이 이 음악을 만들고 즐겼던 이들의 경험의 직접적 표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이먼 프리스는 그래서 펑크 음악의 구조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 음악은 부당한 상황을 최고의 상황으로 만드는 것이요,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지만, 피스톨스만큼이나 위대한 펑크 밴드로 추앙되는 클래쉬인 만큼, 정치적 메시지를 의도하는 이들도 분명한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펑크가 어쨌든 청년들의 원초적 반항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때, 이를 더욱 발전시켜 관습적이지 않은, 새로운 펑크를 만들어내려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즉, 펑크 인민주의자(populist/proletariat)와 전위주의자, 즉 펑크 뱅가드(punk vanguard)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앞서 얘기한 뉴욕 펑크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펑크의 일반적인 모습과 많이 달랐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먼저 펑크 뱅가드부터 얘기해 보자. 사실 피스톨스 이후 펑크는 일종의 반항의 신화가 되었다. 피스톨스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친 밴드였는지 생각한다면 이는 생각보다는 명확한 것인데, 기존의 아트스쿨 뮤지션들의 이러한 신화성을 깨뜨리려는 시도를 펑크 뱅가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일률적으로 이야기한다고 이 부류에 속하는 밴드들의 스타일이 어느 정도 명확했다는 것은 아니다. ‘펑크 뱅가드’ 는 사이먼 프리스의 용어인데, 사이먼 레이놀스는 이를 ‘포스트펑크 아방가르드’, 척 에디는 ‘아방가르드 (훵크)’(이는 암만 생각해도 갱 오브 포(Gang of Four) 때문이긴 한다) 라고 다른 용어를 사용하였다. 말 나온 김에 갱 오브 포를 먼저 얘기한다면, 클래쉬와 함께 대표적인 좌익 펑크 밴드로 꼽히기도 했던 이들은 펑크와 파워 팝 모두를 얘기할 만한 사운드를 들려주었지만, 훵크에 가까운 리듬의 운용이나 관습적인 록의 형식을 따르기도 하고, ‘Anthrax’ 같은 곡에서는 거의 사이키델릭에 가까운 노이즈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Gang of Four - Not Great Men. (잘 안 들리긴 하지만)가사에 유념하여 들어보시라. 어린 시절 읽어 온 전기문들을 뒤트는 듯한 내용이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그 영향을 술회하여 뒤늦게나마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레인코츠(Raincoats)도 주목할 만하다. 멤버 전원이 아트스쿨 출신의 여성이라는 점부터 비범했던 이들은 주제부터 ‘여성의 영역’ 을 다루고 있었고(일반적인 여성성의 양태를 거부하는 건 아니었다), 갱 오브 포나 팝 그룹(The Pop Group) 등과 같이 일반적인 록 음악의 리듬이 아닌 훵크나 레게, 흑인 음악 등의 요소를 도입하여 독자적인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었다.

(물론 이들 외에, 잠깐 이름만 나온 팝 그룹과 스크리티 폴리티(Scritti Politti)의 얘기도 하는 게 합당하겠지만, 그런 부분은 뒤에 천천히 하도록 하자)


Raincoats - Family 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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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