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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번 클럽(Cavern Club). 비틀즈가 주로 공연하던 클럽이었던 곳으로 로큰롤의 '성지' 중 하나일 것이다


로니 도네건의 추종자였던 존 레넌(John Lennon)이 처음 밴드를 결성했던 것은 1957년이었다.

도네건이 스키플 사운드를 알린 이후(물론 스키플이 처음 나타났던 것은 미 대공황기라고 해야겠지만 - 즉, 영국에서의 스키플 열풍은 그러므로 ‘리바이벌’ 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영국에는 엄청난 수의 스키플 밴드가 존재했다. 56년과 57년 사이, 영국에는 거의 5천 개 가량의 스키플 밴드가 존재했다고 하니 매우 열광적이었던 셈이다. 
하긴 스키플은 거의 ‘Do It Yourself(DIY)’ 의 전형에 가까웠다. 기타 코드 세 개 정도와 리듬 섹션만 어떻게 한다면(즉, 꼭 드럼을 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빨래판을 긁더라도 리듬만 만든다면) 되는 것이었으니 아무나 밴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밴드 이름은 처음에는 블랙 잭스(Black Jacks)였으나, 곧 쿼리멘(Qurreymen)으로 바뀌었고, 동네 밴드가 보통 그렇듯 멤버의 변동이 심하다가 - 꼭 금방 싫증내는 친구들이 있는 법이다 -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를 영입한다. 
무려 ‘기타 조율’ 을 할 줄 알았던 폴의 기타에 놀란 레넌이 - 즉, 이 당시 레넌은 기타 조율도 할 줄 모를 정도의 ‘허접한’ 수준이었던 셈이다. 전설적인 밴드도 처음엔 다를 게 없다 - 쿼리멘의 가입을 제안했다고 한다. 58년에는 멤버들이 상급 학교에 진학하거나 직장을 구하게 되면서 생긴 공석에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들어오게 된다.

비틀즈라는 이름은 60년 8월부터 사용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도 쓰던 이름이 있었다. 쿼리멘은 베이스에 스튜어트 서트클리프(Stuart Sutcliffe)와 드러머에 피트 베스트(Pete Best)가 들어오면서 조니 앤 문독스(Johnny & Moondogs), 다시 조니 앤 실버 비틀즈(Johnny & Silver Beatles) 등으로 바뀌었고, 다시 비틀즈(Beatles)가 되었다. 이전의 긴 이름들은 확실히 버디 홀리를 기념하는 작명이었고, 비트(beat)의 말장난이었던 비틀즈 또한 일종의 버디 홀리에 대한 찬사였다.

(우측 사진 : 피트 - 조지 - 존 - 폴 - 스튜어트의 순서, 함부르크에서)

주로 리버풀의 클럽들(특히, 음주가 금지되어 사고가 적었던 캐번 클럽)과 함부르크에서 공연했던 비틀즈도 무명 시절은 배고팠다. 60년 겨울의 함부르크 투어는 아직 18세가 되지 않았던 조지가 클럽에서 일하는 것이 독일에서는 불법이었던 덕에, 멤버 세 명이 강제 추방당하면서 끝나버린다. 하지만 이 시절의 활동은 비틀즈에게 점차 명성을 가져다 주기 시작했다. 
오늘날 기억되는 비틀즈의 모습에 비해서는 좀 더 거칠고 다른 모습(밴드는 기타리스트가 세 명이었고 - 클리프 리처드 앤 더 섀도스를 연상시키는 - , 가죽옷을 입고 다니는 ‘로커’ 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위 사진 참고)이었지만, 스튜어트의 애인이었던 아스트리드 키르허의 제안으로 길고 빗어내린 ‘비틀커트’ 의 모습을 취하게 된다.

리버풀 다운타운의 음반점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bstein)이 61년 말에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고, 다음 해 스튜어트의 사망 및 드러머 피트가 밴드에서 퇴출되면서 새로 리처드 스타키, 즉 링고 스타(Ringo Starr)가 드러머가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사실 당시 밴드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멤버가 피트였다는 것인데, 꽤 잘 알려진 조지 해리슨과의 불화 및, 다른 멤버와는 달리 내성적이었던 피트의 성격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너무나 유명한 4인조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Beatles - Love Me Do



EMI의 조지 마틴(George Martin)은 비틀즈를 대번에 마음에 들어했고, 곧 첫 싱글 ‘Love Me Do’ 가 발매되었다.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사실, 이 곡 자체가 그렇게까지 훌륭하다거나, 독창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오래 된 칼 퍼킨스(Carl Perkins)의 컨트리 히트곡 ‘Sure to Fall’ 이 이 곡의 자양분이 되었고, 패턴은 단조로운 편이며, 이들과 유사한 수많은 밴드들이 리버풀의 클럽들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비틀즈도 'Sure to Fall' 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Beatles - Sure to Fall(In Love with You)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비틀즈가 음악 제작에서 유지되고 있던 전문가적 전형을 분명히 파괴했다는 것이었다. 


조율도 할 줄 모르던 젊은이들이 투어를 돌면서 실력이 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전문 연주자들의 수준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책상에서 작곡가들에 의해 빈틈없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처음의 원형은 있었겠지만, 이들의 곡은 클럽들에서 공연하면서 청중들의 반응을 통해 조금씩 변해 나가 왔던 것이었다. 
연습량의 부족과 신선함을 오히려 강조해서 강렬함을 이끌어낸 연주 방식도 기존의 개념과는 매우 틀린 것이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기민함은 이와 같은 음악을 처음으로 시장의 주도적 회사와 계약하도록 한 것이다. 
조지 마틴은 비틀즈를 마음에 들어했지만, 이전에 브라이언이 찾아갔던 데카(Decca) 레코드는 퇴짜를 놓았음 - 뭐 역사에 남을 ‘삽질’ 이었던 셈이다 - 을 생각해 보자.

또한 그들의 음악은, 밴드는 스키플에서 시작했지만 분명히 미국식 로큰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보통의 스키플 밴드와는 달리 다양하면서도 텐션이 강하게 걸린 코드들을 사용했고, 거친 로큰롤의 면모 외에도 티니밥의 면모도 동시에 가짐으로써 (노홍철식 표현으로는)‘소녀떼’를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물론 밴드는 ‘미국식 로큰롤’ 은 물론 가스펠 등의 흑인 음악에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가스펠/두왑 그룹들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 밴드의 풍요로운 코러스는 당대의 많은 밴드들과는 분명히 차별되는 것이었다.

‘Love Me Do’ 에 이어 63년 1월에 나온 ‘Please Please Me’ 는 밴드를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2월 22일에는 드디어 곡은 차트 1위에 올랐고, 이후의 싱글들도 마찬가지였다. 새 싱글이 나올 때가 됐지만 이전 싱글들의 판매가 전혀 떨어지지 않아 발매를 미룰 정도였다. 
비틀즈만이 아니라 리버풀의 다른 밴드들도 차트의 톱 텐을 휩쓸어 버리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잘 팔리는 가게이긴 했지만 어쨌든 ‘음반점 매니저’(그러니까 그냥 '아저씨') 정도였던 엡스타인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계 인사의 하나가 되었다. 지배적인 보수주의적 여론은 당연히 이런 모습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비틀즈의 폭발력을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었다. 




Beatles - Please Pleas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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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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