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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1000만 영화’가 된 <택시운전사>의 마지막 장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관객이 많을 것 같다. 택시운전사 만섭은 독일기자 힌츠페터를 손님으로 태우고 1980년 광주의 참상을 목격했다. 세월이 흘러 머리가 조금 희끗해진 만섭은 여전히 사람 좋은 표정으로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다. 손님이 두고 내린 신문에서 힌츠페터가 제2회 송건호언론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본 만섭은 “자네도 많이 늙었네”라고 혼잣말한다. 그때 한 손님이 택시에 오른다. 만섭이 목적지를 묻자 손님은 답한다. “광화문으로 갑시다.”

 

서울의 그 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광화문인가. 지난겨울의 탄핵 정국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광화문이라는 장소의 상징성을 충분히 의식할 만하다. 1980년 광주와 2016년 광화문의 연관성을 해석하는 평론도 나올 수 있다.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킨 주권자의 의지, 직접민주주의의 힘은 1980년 광주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은 그럴듯하다.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 이미지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시절이던 지난해 초 나온 <택시운전사> 최종 시나리오에서도 손님의 목적지는 광화문이었다. 촬영 역시 여름에 시작됐다. 장훈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에게 초능력이 있지 않는 한, 수십만 인파가 부패한 정치지도자의 사퇴를 요구하며 매주말 광화문을 채우는 풍경을 상상했을 리 없다.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장면은 이번 여름의 또 다른 대작 <군함도>에도 나왔다. 영화 종반부, 하시마섬에 징용된 조선인들은 탈출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인다. 다리를 잃은 장애인, 여성, 청소년들이 먼저 탈출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광복군 박무영을 중심에 두고 하나둘씩 촛불을 든다. ‘민중의 힘에 대한 메타포’로 해석될 만한 장면이다.

 

김새는 말이지만, 이 장면 역시 우연이다. 영화 전개상 군함도의 전기 시설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된 상태였다. 손전등을 가졌을 리 만무한 조선인들이 불을 밝힐 수단은 촛불밖에 없었다. 일찌감치 나온 <군함도> 시나리오에도 이 장면에선 촛불이 사용됐다. 다만 촛불 장면은 지난겨울 탄핵 정국 당시 촬영됐다. 류승완 감독은 “촬영이 끝나고 숙소로 가면 뉴스에서 광화문 촛불집회 소식이 나왔다. 나중에 연관성 얘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고 말했다. 

 

23일 개봉하는 <브이아이피> 속 등장인물들의 역학구도를 보면 현재 한반도와 주변국의 정세가 연상된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연쇄살인범을 둘러싼 스릴러, 누아르 장르에 속한다. 연쇄살인범이 기획탈북한 북한 고위층 자제 김광일이라는 점이 독특할 뿐이다. 김광일은 북한 고위층의 비밀계좌를 알고 있는 귀빈인 동시, 연쇄살인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다. 경찰은 그를 잡으려 하지만, 고급 정보를 알고 있는 북한 고위급 인사를 살인범으로 만들 수 없는 국정원 직원은 난처해하면서도 수사를 방해한다. 이 역학관계를 파악한 김광일의 범죄 행각은 갈수록 극악해진다. 김광일을 국제사회의 외교적 빈틈을 노려 제멋대로 행동하는 김정은, 국정원 직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국 정부로 이해하면 영화가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물론 이번에도 우연이다. 국정원 직원 역의 배우 장동건은 “공교롭게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이 영화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작품이 창작자를 떠나 수용자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은 빈번하다. 국어교사로 일한 어느 시인이 인근 학교의 수업을 참관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마침 그 시간엔 해당 시인의 시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시인은 속으로 당황하면서도 감탄했다. ‘내 시가 저런 뜻이었나?’

 

시인은 기분이 나빴을까. 그랬을 리 없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고집하는 예술가는 ‘상급’이라 하기 어렵다. 창작자는 해석 과정에서 발생한 ‘오해’를 견뎌낼 줄 알아야 한다. 오해는 때로 작품을 풍요롭게 한다. 예술은 숨은그림찾기나 스도쿠 퍼즐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다른 해석이 나오듯이, 하나의 작품에는 수많은 인상이 따른다.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 다수의 대중과 접속하는 영화 같은 매체는 말할 것도 없다. 1000만명의 관객은 1000만개의 인상을 가진다. <군함도>를 두고 한쪽에선 ‘친일 영화’라고, 다른 쪽에선 ‘국뽕 영화’라고 받아들인 현상도 드물지만 가능한 사례다.

 

이 모든 현상을 ‘창조적 오해’라고 명명하면 어떨까. 견강부회하거나 억지를 쓰자는 말이 아니다. 남들의 생각을 의식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지식과 감정과 삶을 걸고 작품을 대하자는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 부박한 해석은 바람결에 날아가고, 몸으로 체득해낸 감상만이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그때 창조적 오해는 창조가 된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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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