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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언론사의 문학담당 기자들에게 4분기는 바쁜 시기다. 노벨문학상과 신춘문예 때문이다. 수상자를 예측할 수 없는 데다 오후 8시쯤 발표돼 마감이 쉽지 않은 노벨문학상이 단 하루의 급박함을 요구한다면, 신춘문예에는 두세 달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신춘문예는 일단 심사위원 선정이 중요하다. 신춘문예 응모작은 수가 많고 수준이 천차만별이기에, 예심 심사위원에겐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작품을 읽고 판별할 능력이 필요하다.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본심 심사위원에게 건네진다. 본심 심사위원은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 신인의 등용문이라는 신춘문예 특성상 향후의 발전 가능성까지 가늠할 안목을 가져야 한다. 게다가 심사위원 역시 꾸준히 좋은 글을 발표해 동시대 문학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하며, 문단 안팎에서 도덕적 권위까지 인정받아야 한다. 심사위원 선정에 주최 측의 정무적 감각과 정치적 의지가 은연중 포함된다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다. 올해 경향신문은 심사위원의 성별, 세대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심사위원 선정이 끝나면 밀려드는 응모작을 정리하고, 문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 매년 주최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안도 응모자들에겐 궁금한 대목이 많은 모양이다. 예를 들어 올해 단편소설 부문 분량은 ‘원고지 70장 안팎’이다. 이에 대해 “80장 넘으면 탈락이냐” “100장을 썼는데 도무지 줄일 수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문의 전화가 잇달아 온다. 그럴 때는 “심사위원에게 건네지는 단계에서 분량에 맞지 않는 작품을 거르진 않지만, 공모전 특성상 가급적 분량을 맞추는 것이 좋다”고 원론적으로 응답한다. 가끔 “원고지에 써야 하느냐”는 질문이 있고, 실제 응모작을 개봉해 보면 A4지에 원고지 형식으로 인쇄해 보낸 작품도 있다. 원고지는 분량을 지칭하기 위한 말일 뿐, 실제 원고지에 써야 하는 건 아니다.

 

지난해엔 한 응모자와 ‘뫼비우스의 띠’ 같은 통화를 했다. “같은 작품을 다른 신춘문예 공모에 중복 응모했을 경우에는 낙선 처리된다”는 조항의 해석 때문이었다. 응모자가 “다른 신춘문예에 중복 응모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나” 묻기에, 나는 “예심에선 알 수 없지만 당선작이 타사와 중복될 경우 낙선”이라고 답했다. 응모자는 “그렇다면 당선만 안되면 보내도 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고, 나는 “응모의 목적은 당선이 아닌가”라고 되받았다. 이런 문답을 10분 정도 지속했다.

 

경향신문 신춘문예의 역사는 70년에 이른다. 오래된 것은 낡고 영원한 것은 없다. 처음엔 신선하고 공정했던 제도도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 흠결을 드러낸다. 지금 신춘문예도 그럴지 모른다. 날로 줄어드는 문학의 위상과 맞물려, 신춘문예라는 등단 제도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옛 법학과에 사법고시반이 있었고, 신문방송학과에 언론사 입사준비반이 있듯이, ‘신춘문예 특별반’을 마련한 학교도 있다. 현역 문인들이 지망생들을 상대로 온·오프라인에서 ‘신춘문예 수업’을 하기도 한다. ‘신춘문예용’ 작품이 따로 있다는 뜻일 것이다. 신선함과 창의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워야 하는 문학이 규격화된 ‘스터디’를 통해 성취되는 현상은 낯설게 느껴진다. 오래된 등단 제도의 허술함 때문인지, 요즘엔 공모전을 통한 기존 문단 권위에 기대지 않고 곧바로 인터넷이나 출판을 통해 이름을 얻는 문인들도 나오고 있다.

 

신춘문예는 여전히 필요할까. 모든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독창적인 문인으로 성장하는 건 아니고, ‘신춘문예용’ 작품이 양산되는 현상을 보면 불필요할 것도 같다. 하지만 많은 좋은 문인들이 여전히 신춘문예를 통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향신문 신춘문예만 해도 최근 10여년 사이 강화길, 이제니, 강유정, 황정은 등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문인들을 배출했다.

 

신춘문예는 낡긴 했지만 사라져야 할 폐단은 아니다. 예전만큼의 권위를 누리진 못하지만, 좋은 문인들을 세상에 알리는 유력한 통로 중 하나다. 무엇보다 해마다 12월 초 신문사 문화부로 쏟아지는 원고 더미를 보며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여전히 문학을 경외한다는 점이다. 즉각적인 영상이나 인터액티브한 게임이 동시대 사람들의 감각을 사로잡고 있지만, 세상엔 여전히 오래된 문자와 문장을 붙들고 씨름하는 이들이 남아 있다.

 

세잔과 피카소가 혁신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물감이 아니라 관점이 혁신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문자로 사고하고, 소통한다. 문학은 문자로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세밀한 구조체다. 오래된 도구로 새로운 예술을 시도하는 모든 이들의 분전을 기다린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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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