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트 포크는 당시의 미국이 주목한 대중 음악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사진은 미국의 포크 싱어 줄리 펠릭스(Julie Felix)



당시의 영국의 로큰롤 밴드들 사이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미국 밴드라면 비치 보이스(Beach Boys)를 들 수 있을 것이다.


Beach Boys - Surfing U.S.A.


 
흔히 ‘브리티쉬 인베이전에 대한 미국의 대응’ 식으로 얘기되지만, 사실 비치 보이스의 결성은 1961년이었다.
윌슨 가의 형제들인 브라이언, 칼, 데니스와 그들의 사촌이었던 마이클 러브(Michael Love), 마이크의 친구였던 앨런 자딘(Alan Jardine)이 결성했던 이 밴드는 이른바 ‘서프 뮤직’ 을 통해서 미국의 스타로 떠오른다.

재미있게도 이들 중 실제로 서핑을 할 수 있는 것은 데니스뿐이었지만(뭐 사진에서 보이는 모습도 그리 잘 노시게 생기지는 않았다) 뛰어난 작사가이자 송라이터였던 브라이언은 해변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음악으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L.A 출신이었던 비치 보이스는 주변에 캘리포니아의 해변을 보고 살았을 것이니, 그런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서프 뮤직은 60년대 초반의 틴 팬 앨리 등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고, 즉, 주류 쇼 비즈니스가 좋아하던 그것은 아니었지만, 웨스트코스트의 10대들을 중심으로 반향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비치 보이스는 로큰롤의 활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표절이 인정되기는 했으나, ‘Surfin' U.S.A.’ 같은 곡이 얼마나 척 베리 등 로큰롤의 선구자들에게 많이 빚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물론 비치 보이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벤처스(The Ventures)나 ‘서프 기타의 왕’ 이라고 불리던 딕 데일(Dick Dale) 등도 서프 뮤직으로 인기를 얻었다. 서프 뮤직은 영국식 로큰롤이 가졌던 정도의 폭발력을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 부유해졌지만 건조한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 미국인들이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보여준 또 다른 록 음악의 단초는 포크 음악에서 나오고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60년대 초반 흑인 음악의 발전은 가스펠 등에도 공통되는 것이었고, 그런 음악들이 가져오는 낙관주의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과 같은 종교적 경향은, 역시 60년대 초반에 저항 가요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미 1930~40년대, 공산주의자 등의 미국의 급진적인 인사들의 저항의 과정에서 포크 음악은 민중의 삶을 반영하는 것으로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는 기본적으로 컨트리 음악과 뿌리를 같이 하는 것이었기에, 블루스에 컨트리 대신 포크가 결합되는 것도 사실 그렇게 이질적인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를테면 다음의 곡을 한번 생각해 보자.



우디 거스리의 원곡인 'Pretty Boy Floyd'.
이 곡은 오클라호마의 무법자 플로이드의 이야기를 다룬 곡이다



‘프로테스트 포크’ 의 원조격이었던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피트 시거(Pete Seeger)가 중심이 되었던, 포크 음악의 제도적 불합리에 대한 고발이 1941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에 많은 포크 뮤지션들이 활동을 접어야 했으나(대표적으로, 피트 시거가 결성했던 위버스The Weavers), 50년대 말부터는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 Mary), 밥 딜런의 ‘동지’ 이기도 했던 존 바에즈(Joan Baez) 등이 중심이 된 포크 리바이벌이 시작되었다.


(좌측 사진, 피트 시거와 우디 거스리. 역시 저항하던 분이시라.... 사진에서는 사실 좀 배고프게 생기셨다)


아무래도 주된 조류는 ‘프로테스트 포크’. 즉, 정치적 의식을 가지고 일련의 운동에 결합했던 포크 뮤지션들이었을 것이다. 포크가 전통적인 저항 가요의 형태를 띠어 오기도 했고, 당시는 베트남 전 반대나 흑인의 인권과 같은 많은 이슈들이 만개하던 시대였다.


그 전위에는 물론 (얼마 전에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던) 밥 딜런이 있었다.

딜런은 오늘날 ‘포크의 제왕’ 식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딜런이 포크의 원형을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우디 거스리의 음악을 원형으로 삼아 다양한 영향들을 받아들여 포크를 발전시켜 나간 것 또한 밥 딜런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리틀 리처드와 행크 윌리엄스의 팬이었다고도 한다)



최고의 프로테스트 포크 송의 하나로 꼽히는, Bob Dylan - Masters of War. 1990년


 
더욱이 그는 스스로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다. 우디 거스리는 그 본인이 잭 케루악(Jack Kerouac, 비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적 작가)의 징후를 보여 주는 경우이기도 했고, 앨런 긴즈버그와의 친분 등은 딜런의 그런 이미지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딜런의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짐머맨’ 이었지만, 미국 각지를 돌며 작품을 남기다 1953년, 39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인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에서 밥 딜런이라는 이름을 따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이미지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논의의 여지는 있겠지만) 딜런은 음악에 메시지를 부여할 줄 알았고, 록 음악이 기존의 로큰롤에서 벗어나는 모습의 단초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풍자적이면서도 시적이었고, 운율과 의미를 동시에 잡았던 그의 가사는 그의 음악의 매우 큰 부분의 하나
이기도 했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 ‘밥 딜런 시분석’ 강좌가 개설될 정도로 딜런의 가사는 뛰어났다)

물론, 비영어권에 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밥 딜런의 가사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니, 가사의 탁월함의 의미가 반감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딜런이 들려주는 사운드도 (후술하다시피)혁신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딜런의 ‘프로테스트 포크’ 또는 ‘토피컬 송(topical song)’ 은 앞서 말한 시적인 가사, 밥 딜런 특유의 보컬 톤과, 곡조 및 박자와는 사뭇 엇나가는 창법 등도 기존의 포크 음악과는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적어도 록 음악에 있어서 밥 딜런이 가져온 혁신은, 1965년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을 얘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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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