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접속>을 다시 보았다. 개봉 당시 <접속>은 등장인물 간의 비대면 소통이라는 소재로 주목을 받는다. 작품에는 다양한 상징이 등장한다.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낡은 LP, 지금도 존재하는 명동의 음반점, 종로 피카디리극장 등이 그것이다. 영화의 배경인 1997년은 젊은 세대의 소통방식이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이동하는 접속의 시대였다.      

 

주인공 동현(한석규)의 직업은 음악방송국 PD이다. 연락이 끊어진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동현. 폐쇄적인 삶에 익숙한 그의 소통창구는 바로 PC통신이다. 동현은 사이버공간에서 ‘여인2’라는 아이디를 가진 수현(전도연)과 접속한다. 그들은 극장, 음반점,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치지만 서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PC통신이라는 공간만이 남녀의 유일한 소통수단이다.

 

영화 <접속>

 

동현과 수현은 자신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실시간 접속방식을 수용한 세대이다. 수현이 전화안내원으로 일하는 홈쇼핑 회사 역시 비슷한 공간이다. 수현은 동현과 달리 인연을 쉬이 포기하지 않는 성향을 보인다. 반대로 세상과 거리를 두는 동현은 즉흥적으로 방송국일을 그만둔다. 그는 계획 없이 호주로 떠나기로 결정한다. 동현의 심적 변화는 인위적 관계에 지친 현대인의 또 다른 모습이다. 

 

목적 없는 동현과 목적 있는 수현은 비대면 접속을 탈피하고자 노력한다. 수현이 짝사랑하던 남자(김태우)가 건네는 무선호출기(삐삐)는 사라진 접속수단이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극장 앞 공중전화기도 비슷한 존재이다. 수현이 품에 안고 있는 LP 역시 예외가 아니다. 대면 접속에서 비대면 접속의 시대로 넘어가는 20세기 말에 등장한 영화 <접속>은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어쩌면 1990년대는 접속과잉에 시달리지 않았던 괜찮은 세월이었다. 휴대폰이 없다 보니 외부약속은 최선을 다해 지켜야 했다. 문자가 아닌 음성 위주로 소통이 이루어졌다. 사고의 폭도 상대적으로 넓고 깊었다. 결정적으로 대면 위주의 만남이다 보니 소통의 문제나 부작용이 적었던 솔직한 시대였다. 하지만 편리를 추구하려는 문명의 속성은 인간관계 자체를 변질시킨다.

 

신속함에 집착하는 욕망이 이어지면서 수많은 접속도구가 자취를 감춘다. SNS라는 수단이 등장하자 인류는 접속의 홍수에 직면한다. 너무나 많은 인연들이 사이버공간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반가움보다는 섬뜩함이 앞서는 이유는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체의 특성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이어지는 접속의 향연 속에서 제한적이고 감각적인 신조어가 득세한다.

 

동현은 마지막 순간까지 수현과의 만남을 꺼린다. 비대면 소통에 익숙해져버린 동현의 행동은 20년이 흐른 지금에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영화주제곡 ‘러버스 콘체르토’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동현과 수현은 극적인 만남을 가진다. 접속에서 접촉으로 화하는 순간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뒤섞여버리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SNS의 전성시대를 예감한 이는 많지 않았다.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자는 잡초로 가득한 정원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이제는 수정이 필요한 문장이다. 말과 행동보다 중요한 소통수단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SNS는 인간에게 필요한 사유의 무게를 경감시켰다. 비대면 소통이 지배하는 세상. SNS발 가짜뉴스와 정보과잉에 시달리는 세상. 동현의 우울한 표정은 소통단절의 시대를 보여주는 작은 암시였다.

 

최근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의존도가 심각하다고 인정하는 국민이 83%에 달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접속의 시대는 인류에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선사했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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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