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정치권력과 복잡한 상관관계를 이룬다. 그중에서 클래식음악은 특정계급만을 위한 향유물로 공헌했던 역사가 존재한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권력자를 위한 선율을 제공했다면 베토벤과 말러는 본격적으로 음악에 인간의 현실을 투영했다. 20세기 초반 라디오와 SP레코드가 등장하면서 클래식음악의 문턱은 조금씩 낮아진다. 당시 독일에는 또 다른 변수가 존재했다.

 

마르크시즘, 공산주의, 볼셰비즘을 거부. 민족, 보수, 기독교 가치를 수용. 기업가를 위해 노동조합 해체를 주장. 여기까지만 보면 맹목적인 수구주의자의 이미지가 떠오를 수도 있다. 칼럼의 주인공 아돌프 히틀러는 여기에 일당 독재체제와 반유대주의를 추가한다. 그가 1933년 독일 총리 자리에 오르자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마침내 예술을 사랑하는 제국의 총리가 나타났다’고 환호한다.

 

같은 해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국립오페라단이 히틀러 전당대회 행사장에 등장한다. 연주곡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바그너는 오페라를 즐기던 부르주아를 악의 근원이라 여겼으며, 민중에게 권력을 내줄 수 있는 지도자를 원했다. 히틀러에게 바그너는 예술정치를 위한 훌륭한 도구였다. 하지만 뉘른베르크 오페라하우스에는 텅 빈 관람석만 보일 뿐이었다. 공연초대장을 보낸 1000여명의 주요 인사들은 음악이 아닌 권력에만 관심이 있었다.

 

1934년부터 히틀러는 나치당원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음악공연에 참석하라고 지시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일반시민도 공연장에 오도록 유도한다. 나치즘의 거두는 공연장이 떠나갈 정도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절실했다. 이른바 예술정치의 현장이었다. 독재자의 비뚤어진 권력욕으로 독일시민의 클래식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히틀러의 바그너 사랑은 집착에 가까웠다. 바그너는 음악을 통한 이데아의 실현을 갈망했던 무정부주의자였다.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을 활용해서 아리안족의 위대성을 알리는 데 주력한다. 독일에서는 예술과 삶은 아무 연관이 없다고 했던 쇼펜하우어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대중연설만으로 나치즘을 전파하기에 부족하다고 느낀 철권정치인의 악수였다.

 

음악가들은 독재자의 운영철학에 철저히 이용되거나 자진해서 권력의 품 안으로 들어간다. 히틀러가 등장하는 곳에서는 베토벤, 브루크너, 바그너의 음악이 빠지지 않았다.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히틀러로부터 독일 최고의 음악가라는 칭송을 듣는다. 반대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히틀러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 카라얀은 자진해서 나치당에 입당하여 음악과 권력 간의 조합을 꾀한다.

 

독일 출신 음악가라고 나치정권으로부터 모두 환영받지는 못했다. 히틀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체제의 적으로 몰아붙인다. 슈트라우스의 자필편지에서 나치정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글이 비밀경찰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히틀러를 독일의 위대한 설계자라고 찬양하는 글을 나치당에 전달한다. 슈트라우스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회식 행사의 지휘자로 선정된다.

 

예술의 비현실성과 무구성을 정치에 악용했던 전쟁광은 고전음악사의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독일 항복선언 이후 일부 클래식음악은 독재자용 선동도구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유명을 달리한다. 유럽 곳곳의 연주회장은 독일군의 폭격으로 무너진다. 히틀러가 사랑했던 바그너의 선율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배경음악으로 재등장한다.

 

1945년 4월20일이었다. ‘인류의 위대한 해방자’를 자처했던 히틀러는 56세의 나이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예술을 방패 삼아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 했던 몽상가의 덧없는 퇴장이었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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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