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경쟁으로 점철된 시대다. 신자유주의 시대 전 세계가 그러하지만, 유독 우리 사회가 심한 듯하다. 뭐든 이겨먹어야 직성이 풀리고 어디서든 ‘최고’라는 수식어가 난무하는 걸 보면 말이다. 조선족으로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비교문화를 전공한 한 연구자는 한·중·일 세 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로 한국 ‘최고’, 중국 ‘중심’, 일본 ‘최신’을 꼽지 않았던가.

 

클래식 음악계라고 예외일 리 없다. 음악가 프로필에 등장하는 ‘수석 졸업’ 같은 문구는 참으로 한국적인 발상이고, 콩쿠르에 대한 집념은 어려서부터 직업 음악인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최고 수준이다. 한국 젊은이들의 국제콩쿠르 우승이 더 이상 화제가 되지 않을 만큼 흔한 일이 되었음에도 콩쿠르에 대한 과도한 열기가 줄어들지 않는 건, 취약한 국내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콩쿠르 입상만큼 자신을 손쉽게 드러내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콩쿠르 입상이 곧 좋은 음악가임을 보증하는 건 아니다. 실력과 개성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해나간 사람만이 직업 음악가로 살아남는다는 당연한 사실이 콩쿠르에 열광하는 사회에서는 쉽게 간과된다.

 

전공자들에게 콩쿠르는 실력을 향상시키는 확실한 동기부여라는 점에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역량을 가늠하는 기회이고, 동료의 연주에서 음악적 자극을 얻기도 한다. 청중에게도 다양한 성격의 연주자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물론 일반 관객이 거의 없는 국내 콩쿠르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지만. 객관적인 수치화가 불가능한 음악 콩쿠르에서 공정성 시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세계적인 콩쿠르에서조차 심사위원들의 담합이나 정치적 고려가 없지 않다. 콩쿠르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전문 음악가로 성장하는 데에 필요한 하나의 과정쯤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아쉽다.

 

20년 전쯤 <더 위너스>(1996)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1960~1970년대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촉망받던 우승자들 가운데 여러 이유로 무대에 서지 못한 채 잊혀간 음악가들의 모습을 추적한 영화였다. 탁월한 역량을 지닌 음악가조차 콩쿠르 우승 후 연주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화려한 콩쿠르의 이면에 놓인 녹록지 않은 현실을 목도했다. 국제콩쿠르 입상이 직업 음악가의 등용문이었던 반세기 전에도 그랬을진대, 전 세계 수많은 콩쿠르가 넘쳐나는 지금은 오죽하랴. 수십년간 모두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콩쿠르의 존재 의미를 되짚어볼 때다.

 

지난해 출간된 온다 리쿠의 장편 소설 <꿀벌과 천둥>은 콩쿠르의 가치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한다. 실제 모델이 된 하마마쓰 국제 피아노콩쿠르를 12년간 참관하고 취재해 썼다는데, 2주 동안 진행되는 콩쿠르의 전 과정이 소설적 상상력으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뚜렷한 개성을 지닌 네 명의 참가자들이 고민을 나누고 다른 이의 음악에 심취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은, 콩쿠르가 경쟁과 평가의 자리만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통해 함께 성장하는 배움의 현장일 수 있음을 일깨운다.

 

지난 11월 초 통영에서 열린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결선을 지켜보며 콩쿠르의 역할을 생각했다. 소설에서도 그렇듯이 세계 유수 콩쿠르들은 지역사회의 축제처럼 진행된다. 2003년 시작해 16회를 치른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역시 전 세계 젊은이들의 경연장이자 통영과 경남의 예술축제로 자리 잡아야 할 터. 주말 오후 통영국제음악당을 가득 메운 관객의 열기, 올해 처음 신설된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 특별상(관객이 직접 뽑는 청중상이다), 결선 다음날 다른 지역으로 옮겨 열리는 입상자 콘서트(올해는 창원이었다) 등에서 이 콩쿠르가 지역민들과 함께 나누는 축제의 장이 될 가능성을 엿보았다. 긴장 가득한 콩쿠르 무대에서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주자들을 발굴하며 그 특별한 순간을 함께하는 건 큰 즐거움이다.

 

이제 우리 콩쿠르도 젊은 음악가들이 공정한 경쟁을 펼치는 지역의 축제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을까.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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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