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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필립스(Sam Phillips)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발견한 것은 1954년 7월이었다.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레코드를 녹음하려는 트럭 운전사 청년은, 가스펠은 물론 힐빌리 스타일의 다양한 컨트리 음악이 공존하는 동네였고, 하울린 울프(Howlin' Wolf)와 같은 유명 블루스 뮤지션이 자신들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던 동네였던 멤피스 출신이었으니, 로큰롤 스타로서는 딱 들어맞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의 데뷔작은 이런 멤피스의 전통 하에서 선정된 곡들로 구성된 앨범이었다. 다만 원곡의 스타일과는 맞지도 않는 엘비스의 목소리(어머니 생일 선물로 앨범 녹음하는 청년이 프로일 리는 없다), 컨트리풍의 리듬 기타 등 많은 부분은 원곡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자유로운 느낌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리듬 앤 블루스의 반항성을 알아 버린 컨트리 음악은 통상 로커빌리(rockabilly)라고 불리게 된다.


성공은 순식간이었다. 앞서 말한 반항아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지금에야 보면 느끼하게도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그것도 그윽하게 보였을 것이다.

엘비스는 곧 대형 레이블인 RCA와 계약하고, 별명이 ‘대령’ 이었던 톰 파커를 매니저로 받아들이면서 ‘Heartbreak Hotel’, ‘Hound Dog’, ‘I Forgot to Remember to Forget’ 같은 히트곡을 쏟아 내면서 당대의 최고(이자 현재까지도 ‘이 동방의 나라’ 에도 기념관이 있을 정도로 기억되는) 스타가 되었다.
또한 엘비스는 배우로서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물론 흥행을 위해 졸속으로 기획된 영화에도 얼 빠진 모습으로 다수 출연했지만,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그의 인기몰이에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Elvis Presley - Hound Dog

그러나 로큰롤의 광기는 엘비스에서 끝이 아니었다.

샘 필립스의 선(Sun) 레코드는 곧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를 발굴했다. 억지로 검은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을 하던 엘비스와는 달리 곱슬거리는 금발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루이스는, 특유의 자유분방한 보컬과 부기우기 스타일의 연주는 엘비스의 그것과도 구분되는 다른 매력의 로큰롤을 들려주었다.
또한, 엘비스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다니는 청년이었지만 그는 엘비스와는 달리 방탕을 즐기기로 유명했다. 아마 당대 로큰롤의 난봉꾼 중에서도 최고였을 것이다.
공연 중에 자신의 악기에 불을 지른 최초의 아티스트였을 것인 루이스는 ‘Whole Lotta Shakin' Goin' On’ 등의 히트곡을 계속해서 발표, 뒤에 소개할 희대의 결혼 사건으로 끝장나기 전까지 엘비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며, 엘비스를 RCA에 뺏긴 이후 스타를 찾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선 레코드를 반석에 세우는 역할을 한다.


루이스만 난폭한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는 충분히 난폭하긴 했지만, 엘비스는 반항아 이미지만 있었지 그렇게 난폭한 스타는 아니었다. 유명한 마마보이였고, 1957년에는 게다가 군대에 가야 했다.

로큰롤의 ‘제왕’ 이 군대에 간 이상 새로운 스타가 끼어들 빈틈은 충분했다. 뒤에 더 후(The Who)도 커버하게 되는 ‘Summertime Blues’ 로 유명한 에디 코크란(Eddie Cochran)과, 역시 ‘Be-Bop-a-Lula’ 로 유명한 진 빈센트(Gene Vincent) 등은 반항아를 넘어서 말론 브란도의 폭주족의 이미지를 이어받아 로큰롤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문제였다면 표리부동하지 않게, 이미지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와 비슷한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겠지만.


물론 세상이 반항아들로 가득 찼다면 그건 너무 피곤할 것이다. 코크란이나 빈센트와는 달리 확실히 ‘착해 보이는’ 로큰롤 스타들이 있었다.

엘비스의 팬이었던 버디 홀리(Buddy Holly)는 그런 경우였다. 포마드를 발라 넘긴 머리에 반항아처럼 차려 입고 다니던 다른 로큰롤 스타와는 달리, 버디 홀리는 로큰롤을 연주하기는 했지만 뿔테 안경에 프레피 룩,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불러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반항아들 사이에 모범생 한 명이 끼어 든 모양새였던 것이다.

하지만 버디 홀리가 로큰롤에 남긴 업적은 지대한 것이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한 최초의 록 보컬리스트였고, 더블 트랙킹(Double-Tracking)과 같은 발전된 방식의 스튜디오 레코딩 기술을 개발하는 한편, 오늘날 일반적인 두 명의 기타리스트, 한 명의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라는 밴드 편성을 확립시키기도 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로커빌리의 상투형을 벗어나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입하기도 하며, 로큰롤에 녹아든 백인 음악과 흑인 음악의 요소들을 단순한 악곡 구성 속에서 일신시켰다.

 

Buddy Holly & The Crickets - That'll be the Day

이 모든 것은 버디 홀리가 단 16개월의 활동만으로 이뤄낸 성과이다. 안타깝게도 겨우 22세의 나이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버디 홀리는 비틀즈를 위시한 일련의 영국 밴드는 물론,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와 같은 뮤지션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착해 보이기로는 버디 홀리에 못지 않았던(물론, 듬직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 정도의 이미지이지만) 10대 아이돌 스타의 원조격인 폴 앵카(Paul Anka)나, 역시 10대들의 우상이었던 리키 넬슨(Ricky Nelson), 뒤에 비틀즈나 홀리즈, 사이먼 앤 가펑클에게도 영향을 미친 풍부한 하모니를 들려준 에벌리 브라더스(The Everly Brothers) 등도 50년대 말에 엘비스, 루이스 등을 이어서 나타난 새 시대의 로큰롤 스타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문제는 이 ‘악마 같은 검둥이 음악들’ 을 듣는 10대들을 바라보는 청교도적인 미국인의 시선들은
그리 곱지 않았던 것이다.

요란한 비트에 낯뜨거운 가사, 엉덩이를 살랑거리는 백인(엘비스 프레슬리)에 오리걸음을 걸으며 기타를 치는 흑인(척 베리)까지 다양한 ‘악의 무리’ 들이 있었다. ‘엉클 샘’ 은 이 악의 무리를 응징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로큰롤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10대들이 ‘자신들의 음악’ 으로 삼을 만했던 그 개성도, 적어도 50년대 말, 로큰롤이 대중음악으로 성장한 이상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 로큰롤은 새로운 음악이었지만, 그렇다고 대중 음악의 관습적 견해가 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비스 등과 마찬가지로 10대들의 스타였지만 상대적으로 몰개성적이었던 앵카나 리키 넬슨 등은 로큰롤의 몰락을 예기하는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곧 로큰롤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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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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